# 나만 아는 주인공들 165화
“나는 천마였었다.”
서수민은 자신의 정체를 담담하게 밝혔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 이상 숨길 수도 없었다. 그녀의 성격상 다 드러난 것을 추하게 부정하는 것도 맞지 않았다.
“……그랬군요.”
천마라니.
유현은 살짝 놀라면서도, 그녀의 책을 보고 납득할 수 있었다.
천마가 어떤 존재인가?
다른 세계의 존재이지만, 유현도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 혼성계에는 다양한 세계가 존재하고, 그중에서는 기를 이용해 초월적인 무를 뽐내는 인간들이 거주하는 세계도 있었다.
혼성계에서 그런 세계를 중원무림(中原武林)이라고 불렀다.
그중에서 천마(天魔)의 존재는 단연코 무림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로 꼽힌다.
하늘의 마이며, 지고의 존재. 모든 힘을 숭상하는 자들이 도달하는 궁극의 경지이자, 그들이 칭송하는 권위의 좌.
하나의 존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닌, 일종의 수준을 넘어선 자들에게 주어지는 칭호.
천마(天魔)란 그런 것이었다.
‘처음의 그 얌전했던 소녀가?’
천마라고? 저 여중생이? 모든 무인의 정점에 선 천마?
유현은 그것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분명, 천마가 맞다. 그것도 환생한 천마다.
“그렇군요.”
“싱거울 정도로 잘 믿는군.”
“설마, 거짓말이었습니까?”
“아니. 진짜다.”
유현은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녀의 정체가 아니었다. 서수민은 모르겠지만, 유현은 그녀가 한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다양한 단서를 캐냈다.
‘서수민은 환생 천마다. 하지만 전생에서 죽고, 이렇게 서수민으로서 새 삶을 살게 됐지.’
거기까지는 괜찮다. 서수민이 힘을 숨기고, 평범하게 살려는 것까지도 어떻게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 마치 자신을 노리는 존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 순간, 유현은 자신이 하나의 사건과 마주하고 말았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이미 환생을 해서 다른 세계에 사는 그녀가 왜 나를 경계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있는 것이다.
서수민을 노리는 상대가, 지금까지.
그리고, 서수민이 경계를 할 만큼 강하기까지 하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적은 단순히 개인이 아닌 하나의 집단이었다. 어쩌면 둘일 수도 있고.
정보와 단서가 퍼즐 조각처럼 유현의 머릿속에서 딱딱 들어맞았다.
“아무튼, 내 정체를 안 너에게 나는 어쩌면 좋을까?”
“여기까지 와서 그런 같잖은 협박입니까? 본인이 천마라면 조금 더 위엄 있는…….”
“그런 건 버렸다.”
서수민은 칼같이 답했다.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어지는 그녀의 표정을 보는 순간, 유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예전에, 전부 버렸다.”
“……그렇군요.”
괴로운 듯, 이를 악물며 말하는 그녀의 태도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뿐.
평범한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서수민의 마음 어딘가에 깊게 가로 새겨진 상흔이 있었다.
아직도 아물지 못한 그 상처의 고통에 괴로워하는 서수민의 모습이, 유현의 묘한 기분을 자극했다.
“지금은 평범한 사람, 서수민이다.”
“……알겠습니다. 서수민 씨.”
유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뜻을 존중해 줬다.
그녀를 천마라 부르지 않고, 서수민이라는 이름을 부른 것 또한 그런 의도였다.
지금의 그쪽을 있는 그대로 대하겠다고.
서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으니, 유라한테는 비밀이에요. 오빠.”
거만하고 날카로웠던 방금과 다르게, 목소리가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유현은 순식간에 바뀌는 말투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무슨 이중인격자를 보는 것 같았지만, 이게 또 서수민의 외모가 워낙 화려하다 보니 어떤 행동을 해도 잘 어울렸다.
“그러죠. 저도 딱히 떠벌리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닌지라.”
“편하게 대하셔도 돼요. 그래야 덜 어색하니까요.”
“……그래. 그럴게.”
“네. 잘 알아들으신 거 같으니, 전 이만.”
서수민은 고개를 가볍게 꾸벅 숙이며 등을 돌렸다. 유현은 사라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상당히 골치 아픈 상황이라 한탄했다.
‘그래도 나름 정체를 아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저쪽이 전혀 의욕이 없다는 건가?’
서수민은 천마로서 살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런 과거를 버렸다고 말할 정도로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었다.
‘모든 걸 버리겠다고 했으면서도, 움직임 하나하나가 절도 있는 것을 보면 몸에 익은 것만큼은 어쩔 수 없나 보군. 재능 때문인가? 일부러 사용하지 않으려 해도, 본능적으로 따라 움직이고 마는 재능.’
유현은 턱을 쓰다듬었다.
‘진짜 탐난단 말이지.’
강혜림이 검을 쓰는 검후로서 재능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서수민은 그 이상이었다.
만약 그녀를 세 번째로 영입할 수만 있다면, 백화 매니지먼트의 전력은 엄청나게 올라갈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서수민 본인이 이런 일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거겠지.
‘여기서 컬렉터 할 거냐고 제안을 했으면, 오히려 분위기가 나빠졌을 거야. 지금은 우선 그녀의 기분에 맞춰 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서수민이 전생에 무엇이었고, 지금은 무엇을 바라는지.
‘그리고, 누군가가 그녀를 노리고 있다는 것까지.’
유현은 조금 전 끊겼던 큰 그림을 마저 그리기 시작했다.
전생에서 서수민은 그녀가 바라던 대로 평범하게 살았다. 힘을 숨기고 정체를 감추고, 일반인 서수민이라는 한 사람으로서 지냈으리라.
하지만, 세상은 그녀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앞으로 약 5년 뒤에 벌어질 종말이 그러했다.
‘그녀는 그 이후에 활동한 적이 없어. 그렇다는 것은 종말 전에 죽었거나, 혹은 종말이 시작되고 죽었거나. 그랬겠지.’
처음에 유력했던 그녀의 사인은 자살이었다. 모든 것을 잃은 그녀가 삶에 의욕을 잃고, 자신의 손으로 생을 마감했을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 생각은 서수민이 유현을 적대하던 모습을 보는 순간, 파도를 맞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자살이 아니야, 그녀의 죽음은 타살. 그녀의 죽음은 제삼자가 개입해 있다.’
그렇다면, 타살이 가능한가? 그래도 전생이 초월자인데?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해. 지금의 그녀는, 전생의 힘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약하니까. 만약, 누군가가 그녀의 정체를 알아내고 무언가 계략을 꾸민다면.’
죽이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무지갯빛 책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 유현도 자세히는 모른다. 하지만 갈리아츠가 지닌 눈부시게 찬란한 황금빛이 어중간한 성령을 뛰어넘는 걸 생각하면.
‘초월자 시절 서수민의 힘은…… 최소 2세대 성령과 맞먹었을 거다.’
그랬던 서수민이 누군가를 경계한다는 것은, 상대도 만만치 않다는 소리였다.
거기에 더해서 본인이 지니고 있는 모종의 트라우마가 정신적으로 몰아세운 것도 있었다.
‘만약에.’
유현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참 말도 안 되는 가설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초월자의 환생인 서수민을 죽일 정도의 존재가 나타났었다면?’
전생의 유현의 기억 속에 그런 ‘사람’은 없었다. 그 정도인 인간이라면 분명, 어떤 방식으로라도 세간에 드러날 테니까.
날카로운 송곳은 주머니에 넣어도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람이 아니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유현의 표정이 굳었다.
말도 안 된다.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성령뿐이다.
하지만, 어떻게?
성령은 하계의 인간에게 직접 간섭할 수 없다. 만약에 하려고 한다면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엄청난 힘과 제네시스 시스템이 가하는 페널티를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최소 대성군(大星群)은 돼야 한다.
‘대성군이? 말도 안 돼.’
유현은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건 너무 나갔다.
‘명확한 증거가 없는 이상 이것은 그저 음모론에 지나지 않아.’
그것을 입증할 근거를 찾지도 않았는데, 섣부른 생각은 금물이었다. 유현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려 했다.
하지만.
[라플라스의 악마 파편이 반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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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눈앞에 떠오른 자신의 이야기를 보는 순간.
유현의 표정은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 * *
“수민아 여기!”
“응. 유라야.”
유현과 헤어진 서수민은 곧바로 유라가 있는 곳으로 합류했다. 잠시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운다고 말하며 떠난 것이 조금 전이다. 서수민은 유라를 보내는 자리에 빠질 생각이 없었다.
해맑게 웃으며 자신을 반겨 주는 친구의 모습에 조금 전까지 날이 선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았다.
‘그 남자는 분명, 이 일을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겠지.’
그녀도 보는 눈이 있었다.
서수민이 본 유현은 말만 앞서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한 말은 반드시 지키는,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지만 확고한 신념을 품은 자다.
서수민은 문득, 유현의 모습에서 옛 과거를 겹쳐 봤다.
-허허. 이제 이 노부는 필요 없겠군요.
이제는 추억이 돼 버린 그 목소리를 떠올리는 순간, 서수민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망막 너머로 한 광경이 펼쳐졌다.
불타는 전각과 흔적을 알아보기 힘든 폐허. 사방에 널린 피와 시체들.
그 중심에서 하늘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며 오열하던 괴물을.
‘나는.’
서수민은 자신의 친구들을 보며, 이제는 소중해진 또 하나의 일상을 보며 굳게 다짐했다.
‘더 이상 천마 따위가 아니야.’
그 일이 있는 순간부터, 그리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후.
그녀는 모든 것을 버렸다.
“수민아? 괜찮아?”
“으, 응.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좀 아쉬워서.”
“에이. 아쉬울 게 뭐가 있어. 어차피 연락은 계속할 수 있잖아. 외출 나오면 만날 수도 있고.”
“응. 그렇네.”
유라의 말에 서수민은 미소를 지었다. 유라는 독특한 분위기를 뽐내는 그녀의 모습에 눈을 가늘게 떴다.
“아. 수민이 또 그런 미소 짓는다.”
“으, 응? 내가?”
“수민이 너 보다 보면, 되게 인자한 미소 많이 짓더라? 무슨 우리 엄마인 줄.”
“맞아 맞아. 나도 느꼈어.”
“나도.”
다른 친구들이 웃으며 맞장구쳐 줬다. 서수민은 ‘그런가?’ 하면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유라가 장난스럽게 외치며 서수민의 품 안에 안겼다.
“수민 마마!”
“얘, 얘는 참. 무슨 마마야.”
“나도 할래! 수민 마망!”
“나도!”
순식간에 자리가 시끌벅적하게 변했다.
* * *
강유라와의 만남을 끝내고 돌아온 유현을 반겨 준 것은 열심히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하는 강혜림이었다.
“아. 오셨어요?”
“네. 시키신 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계시네요.”
강혜림이 지금 읽고 있는 서적은 세계의 역사가 담긴 두꺼운 책이었다. 유현의 말에 강혜림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유현씨이~. 솔직히 이거 안 하면 안 돼요? 진짜 보기만 해도, 머리 아픈데.”
“그냥 보는 거로는 안 됩니다. 전부 다 기억하고, 중요한 순간에 떠올릴 정도는 돼야 해요.”
“아이. 그러니까 왜 이래야 하는 건데요.”
“사상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렇게 해야 하거든요.”
유현은 쉬는 기간에 강혜림과 권지아에게 공부를 권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은 둘은 웬 공부냐는 반응을 보였다. 유현은 그녀들에게 개인 단련보다도 공부를 더 강하게 권장했기 때문이었다.
“말했잖습니까. 사상세계란 세상의 이야기가 구현된 곳. 이야기는 역사가 될 수도 있고, 설화, 민담, 신화일 수도 있죠.”
“그건 아는데요. 그래도…….”
“뭐,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죠. 그런데 어쩔 수 없습니다. 앞으로 저희는 누구도 가 본 적이 없는 사상세계를 클리어 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기본 지식이 없으면 위험하지 않습니까?”
탐사대의 일이 딱 그랬다.
그들은 실력도 필요했지만, 그 이상으로 이야기에 관한 지식도 상당히 요구됐다.
모비딕 사상세계 때의 일을 떠올린 강혜림은 따지지 못했다. 유현의 말이 맞았으니까.
“그런데, 그럴 때일수록 이 분야의 전문가를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요? 막 나이 드신 학자나 교수님 같은 분들 모시면 더 편할 거 같은데.”
강혜림은 그래도 소심하게 대꾸했다. 그녀는 자신이 말해 놓고, 꽤나 나쁘지 않은 방법이 아닌가? 하고 납득했을 정도.
유현은 그 모습을 보며, 그녀의 자만심을 보기 좋게 깨부쉈다.
“예전에 있기는 했습니다. 그런 방법이.”
“어, 정말요?”
“네. 그런데 요즘은 달라졌죠. 왜인지 아십니까? 바로, 생존율이 극악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런 비 컬렉터가 사상세계에 들어가면, 100이면 99명이 죽었죠. 당장 저희가 갔던 테오돌란트 습지만 봐도, 답 나오지 않습니까? 평범한 인간은 포자에 질식해서 죽었을 겁니다.”
컬렉터는 사상세계의 환경에서도 버틸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자들은 다르다.
지난번 황혼의 장막과 한울 사태처럼, 평범한 사람도 사상세계에 들어갈 수는 있다.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가지 않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탐색대를 꾸릴 때 무조건 전문 학자들을 같이 딸려 보냈죠. 그런데 너무 많이 죽다 보니까, 문제가 생긴 겁니다. 그래도 지식인은 고급 인력인데, 위험한 현장을 가기엔 좀 그랬던 거죠.”
그래서 방법이 바뀌었다.
교수나 박사 같은 사람들을 위험한 곳으로 보내기보다는, 그냥 컬렉터들을 똑똑하게 키우는 쪽으로.
“요즘은 새로운 사상세계가 없어서 공부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컬렉터들에게 요구되는 공부량이 진짜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아카데미에서도 미약하게나마 유지되고 있었다.
이야기가 구현된 사상세계에서는 정보야말로 가장 큰 무기다.
유현이 강혜림에게 공부를 시키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러니, 불평하지 마시고.”
“히잉.”
“입술 넣고, 애교 부려도 안 됩니다. 때려 주고 싶으니까. 차라리 땡깡을 부리십시오.”
“진짜요? 저 땡깡 부려요?”
“네. 하세요, 꼭 하세요. 반드시 하셔야 합니다. 알았죠?”
“아,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강혜림은 결국 포기하고, 다시 독서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유현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백련을 챙겼다.
“어디 가시게요?”
“잠시 본사에 들리려고 합니다.”
서재 확장 건으로 본사에 신청서를 제출해야 했다.
‘그리고.’
서수민과 관련된, 혹시 모를 대성군에 대해서도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