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164화
등 뒤에 무언가가 닿은 감촉에 유현은 그게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중요한 것은 헤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서수민이 자신을 따라왔다는 거다.
그리고 그녀가 인기척이 없는 이곳에서 본색을 드러냈다.
유현은 두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자신에게는 그쪽을 해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 줬다.
“기세는 조금 가라앉혀 주시고. 차분히 이야기를 해 보죠.”
“이야기? 웃기는 소리로군. 남을 멋대로 살펴보려고 했던 주제에 이야기를 입에 담는단 말이냐?”
말투가 달라졌다. 무엇보다 서수민은 유현이 책을 봤던 것을 알고 있었다.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싶었는데 알고 있었다니. 너무 예상 밖의 일인걸.’
유현은 어떻게든 이쪽을 적대하는 서수민의 마음을 되돌려야 했다.
“유라도 알고 있는 일입니까?”
“유라 이름을 입에 담지 마.”
반응이 살짝 격한 걸 보면, 단순히 구색 맞추기로 유라와 친하게 지내는 것은 아니라는 소리.
의외로 이런 쪽으로는 진심이라면, 이야기하기 쉬워진다.
“그쪽이 친구라서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저도 유라와 친한 사이입니다. 보통 돈독한 사이가 아니죠.”
유현은 유라의 이름이 나오자 조금 감정적으로 반응한 서수민의 태도에, 그녀가 적어도 유라를 진심으로 친구라 생각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유현은 자신도 유라와 친하다는 것을 주장하며, 서수민의 환심을 사려 했다.
“흥. 보아하니, 유라의 재능을 탐내고 접근했겠지.”
“너무하시네요. 저는 유라가 각성하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여러 가지로 조언을 해 줬고요. 그런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닙니다.”
유현은 겉으로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서수민의 태도를 분석했다.
‘말투가 달라졌다. 꽤나 위압적으로 변했어. 전생, 그것도 초월자 시절의 버릇인가? 어딘가 옛날 느낌 나는 딱딱한 말투를 생각하면 높은 지위에 올랐던 사람인가 보군. 그렇다면 더더욱 이해가 안 가. 누구보다도 많은 권력을 누렸을 텐데, 이런 삶을 산다고?’
단서가 더 필요했다.
유현은 일부러 서수민을 자극했다.
“오히려 저야말로, 수민이의 친구면서 힘을 숨긴 그쪽이 훨씬 더 의심스러운데요?”
“그 입 닥쳐라.”
등 뒤에서 기세가 폭발했다. 살기가 유현의 어깨를 강하게 짓눌렀다.
유현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대단하다.’
이것이 무지갯빛 책을 지닌 자의 힘.
괜히 초월자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환생 이후로 제대로 힘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기세만으로 유현에게 물리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마치, 태산이 등 뒤에서 찍어 누르는 것 같았다.
정작 전력을 다해 기세를 내뿜던 서수민도 살짝 놀랐다.
‘버텨?’
유라가 아는 오빠이며 컬렉터와 관련된 업계에서 일한다고 했지만, 설마 이런 기운을 견뎌 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어딘가 첫인상부터 범상치는 않다고 생각은 했거늘.
‘그래. 평범한 인간은 아니라 이거지?’
무언가를 들여다본 것 같은 껄끄러운 느낌을 아직도 기억한다. 분명, 남들이 모르는 숨겨진 한 가닥은 있다는 소리.
서수민은 유현의 등을 겨누는 상어 모양 필통에 힘을 줘 유현의 등을 더욱 강하게 찔렀다.
“……여기서 소란이라도 일으키실 생각입니까?”
“그전에 끝낼 수도 있지.”
“제가 가만히 있어서 그렇지, 저도 마음만 먹으면 시간 정도는 끌 수 있습니다.”
유현은 서수민의 실력을 가늠했다.
전생에 초월자였지만, 지금의 그녀는 전생의 힘이 많이 부족했다.
그녀가 완전한 초월자라면 반항도 하지 못했겠지만, 지금의 서수민은 아니었다.
“……됐고, 아까 내게 뭘 했던 거지?”
서수민도 유현이 날뛰면 좋지 않게 될 걸 알았는지 화제를 바꿨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꼿꼿이 날 서 있었다.
“당신의 재능을 엿봤습니다.”
유현은 적당히 둘러댔다. 정확히는 과거의 행적을 보려 했던 거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상대방은 감이 아주 좋으니, 뻔한 거짓말은 바로 눈치챌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일부 진실만 말했다.
“재능을?”
“저는 특이한 능력이 있거든요. 그 사람의 재능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믿게 될 겁니다. 당신에게 ‘전생’이 있다면 말이죠.”
“……!”
유현이 전생을 입에 담자, 서수민의 기운이 엄청나게 강해졌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세에 피부가 저릿해졌다. 조금 전까지는 순수하게 유현을 경계하기 위해 기세를 일으켰다면, 이번 것은 조금 느낌이 달랐다.
기세와 함께 실려 오는 것은 강렬한 감정이었다.
‘벌집을 건드린 건가?’
유현은 겨우 그녀를 납득시키나 했는데, 더욱 나빠진 상황에 주먹을 꽉 쥐었다.
‘어쩔 수 없군.’
유현은 곧바로 기운을 일으켰다. 이야기의 힘이 그의 몸을 타고 흐르며 바깥에 강고한 갑옷을 둘렀다.
이야기 [무훈기사]가 발동했다.
유현은 백련을 두고 온 것에 아쉬움을 토할 틈도 없이 곧바로 몸을 회전시키며 팔을 휘둘렀다.
서수민을 때리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저 견제를 위한 공격이었다. 조금 물러나 줬으면 좋겠다는 의도를 담은 채로 말이다.
휘익!
유현의 오른팔이 허공을 갈랐다. 유현은 서수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뒤로 물러서서?
‘아니. 아래다.’
유현은 곧바로 왼팔을 들어 올려 명치를 보호했다. 직후 강렬한 충격이 그의 팔뚝을 때렸다.
촤아악!
유현의 몸이 뒤로 주욱 밀려났다. 심지어 무훈기사의 힘을 두른 왼팔이 시큰거릴 정도로 아파 왔다.
유현의 왼팔을 때린 것은, 상어 모양의 필통이었다.
‘저걸로 때렸다고?’
저런 필통 하나가 지금 무훈기사의 갑주를 두른 자신의 팔에 충격을 줬단 말인가?
역시인가?
유현은 서수민이 초월자였다는 것을 통감했다.
자신의 공격을 놀래지 않고 피하며 순식간에 반격을 가한 것만 봐도 그렇다. 경험과 전투 센스도 압도적이었다.
‘그나마 지금 내가 그녀보다 더 대단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신체의 스펙뿐인가?’
유현은 뒤로 살짝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거기까지만 하시죠? 괜한 싸움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말해라. 어디서 보낸 녀석이냐.”
‘어디서 보냈냐고?’
유현은 서수민의 말에 무언가 이상함을 읽어 냈다.
그녀의 전생에 언급했을 때부터 태도가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서수민은 지금 유현을 다른 누군가와 착각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노리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무슨 착각을 한 거 같은데, 저는 누가 보내고 그런 사람 아닙니다.”
“지금 내 전생을 알면서 그 말을 믿으라고?”
“흠. 전생에 무슨 일이 있었군요?”
“…….”
유현의 물음에 서수민이 입을 다물었다. 그 대신 그녀의 눈빛은 더욱 표독해졌다. 유현이 정곡을 찔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유현은 곧바로 무훈기사를 해제했다.
“뭐지? 포기라도 한 건가?”
“천만에요. 싸울 필요가 없어서입니다.”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믿고 자시고, 저는 그저 진실을 말할 뿐이죠.”
유현은 의도치 않게 단서를 잡았고, 심지어 서수민의 역린을 건드리고 말았다.
이대로 상황이 악화되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유현은 자신이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드러냈다.
서수민은 유현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그럼, 어디 멋대로 해 보라는 듯 유현에게 다가와 그 얼굴을 향해 필통을 찔러 왔다.
화악!
유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서수민을 놓치지 않고 주시했다.
서수민이 내지른 필통은 유현의 바로 코앞에서 멈춰 섰다.
약간의 시간을 두고, 강렬한 바람이 유현의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했다.
‘살 떨리는군.’
보면 딱 여학생의 취향이 들어간 아기자기한 필통인지만, 닿기만 해도 뼈와 살이 분리되는 무서운 녀석이다.
물건의 문제가 아니라 휘두르는 사람의 문제였다.
아마 조금이라도 유현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면, 이 필통이 그 머리를 꿰뚫었을 것이다.
날도 없고 강도도 물렁한 이 물건으로 눈앞의 상대는 그걸 가능케 했다.
“이제 믿어 주는 겁니까?”
“말해. 넌 대체 누구지?”
“천체주식회사 텔러, 강유현 대리입니다.”
“텔러라고?”
서수민은 설마, 유현이 텔러일 줄은 전혀 몰랐다.
그럴 것이 유라와 함께 있을 때도 그냥 컬렉터 업계에서 일하는 아는 오빠라고만 들었던 탓이었다.
유현은 쓰게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얼굴을 겨눈 필통을 슬쩍 내렸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치우려고 하자, 서수민은 다시 표정을 가다듬으며 필통을 겨눴다.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얌전히 있을게요. 그래서 오해는 풀렸고요?”
“……그래. 내가 아무래도 무언가 오해했다는 건 이해한다. 내가 생각하던 녀석들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겠군.”
“전생에, 무슨 일이 있었군요?”
유현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지금 서수민은 유라가 소개해 줬을 때의 평범한 소녀가 아니었다. 초월자로서 지내던 시절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 지금 모습이 진짜 그녀였다.
서수민은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네가 알 필요는 없다.”
“알 필요가 없다뇨. 이런 꼴까지 당했는데도?”
유현은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녀와 어떻게든 인연을 이어 나갈 기회. 오해를 풀었으니, 서수민의 호감을 따내야만 했다.
무엇보다 유현은 서수민의 또 다른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조금 전 움직임. 보법이로군요. 혹시 무림 세계 출신입니까?”
“…….”
서수민은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유현은 정답이라 생각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순간이지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예상이 맞아떨어졌어.’
서수민이 마지막에 날리려고 했던 공격. 유현은 그녀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세세히 살폈었다. 그녀의 발걸음. 호흡. 그리고 팔과 다리를 뻗는 동작까지.
유현은 많은 것을 보고 들어왔다. 당연히 그의 지식은 일반인의 그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방금 서수민이 보였던 움직임은, 누가 봐도 보법이라 불릴 만한 것이었어. 무엇보다 아주 순간이지만, 보였던 그 검은 기운은…….’
그것도 지금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수준에서 최선의 것을 사용했다.
그녀의 몸에 이야기의 힘이 깃들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단 하나.
‘전생에서부터 사용해 온, 말 그대로 영혼에 익어 있는 기술이라는 거지.’
보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녀가 어떤 세계에서 살다 넘어온 건지에 관한 확실한 해답이었다.
“어디 소속입니까?”
“……마치, 잘 안다는 듯이 떠드는구나.”
“실제로 알고 있거든요. 재능을 생각하면 꽤나 고강한 무공을 배우신 거 같은데, 맞죠?”
“알 필요 없다.”
“방금 그거, 본인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한 겁니까? 음. 그거라면 좀 실망인데요. 생각했던 것보다 사용하는 기술이 좀 별 볼 일 없는…….”
“이건 내가 지닌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 흡!”
‘빙고.’
유현은 서수민의 바락 하는 태도에 눈을 빛냈다. 서수민도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는지, 입술을 깨물더니 유현을 강하게 쏘아봤다.
무림 세계에서 지내던 사람이라면, 자신의 무공에 관해서 뭐라고 하면 격렬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기본 상식이다. 유현은 보란 듯이 그녀를 자극했고, 서수민은 자기도 모르게 진실을 내뱉고 말았다.
“잊어라.”
“어떻게요?”
“잊게 해 줄까?”
“너무 인상적이어서 더 기억에 남을 거 같군요.”
유현은 능글맞게 웃으며 서수민의 말을 계속 받아쳤다. 서수민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쩜 한마디도 지지 않다니!
그녀는 유현을 말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고 힘으로 제압을 하려 하자니, 이마저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지금 수준으로는, 이 녀석을 제압할 수 없다.’
전생에서야 대단한 힘을 지녔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의 서수민은 조금이라도 무리한 움직임을 보이면, 육신에 무리가 갈 정도로 나약해진 상태였다.
유현으로서는 그게 나약해진 거라면, 강할 때는 대체 얼마 정도였냐고 따지고 싶을 정도였지만, 서수민의 입장에선 그랬다.
“그래서 어디 출신입니까?”
“어디 그 잘난 입으로 한번 맞춰 보기라도 하지 그러냐?”
서수민이 비아냥거리듯 말했지만, 유현은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뭣?”
“흠. 일단, 그 실력과 재능까지 감안하면 아마 한 조직에서도 아주 높은 자리까지 오르신 분이겠죠? 초월자이니, 정점일 테고. 그렇다면 조직의 수장이며, 수장이 있는 조직 출신이겠죠. 보통 문파라기보다는,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한 집단으로 추정되고요.”
“잠깐…….”
“그런데 조금 의심 가는 행동을 했다는 것만으로 뒤를 잡고, 몰래 따라와서 저를 제압하려고 하는 행동을 보면 의(義)와 협(俠)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단 말이죠. 오히려 행동을 보면 실리적이고, 머리도 굴릴 줄 알고. 게다가 가감 없는 말투나 행동까지. 그렇다고 사파, 흑림이라고 보기에는 그보다 훨씬 더 고강한 힘을 지녔던 거 같단 말이죠.”
특히 순수한 어둠 같은 그 기운이 결정적인 단서가 됐다.
유현은 곧바로 한 가지 답을 내놨다.
정파도 사파도 아닌, 또 하나의 존재.
그리고 꼭 이런 상황일 때마다, 한 번씩은 이름을 들어본 것 같은 그 집단을.
“마교.”
“…….”
“그것도, 아주 대단히 높은 사람.”
“너…….”
자신의 정체가 순식간에 탄로 나자, 서수민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기를 반복했다. 방황하는 눈빛이 그녀의 심경을 고스란히 대변해 주고 있었다.
정답이군.
유현은 혈교까지 생각했지만, 그들은 주로 사술을 많이 부린다는 걸 감안해서 과감하게 쳐 냈다.
결국, 서수민은 유현의 얼굴을 겨누었던 필통을 거두었다.
무엇을 숨기겠는가?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유현의 말에 수긍했다.
“네 말대로, 나는 마교의 사람이었다.”
모든 걸 포기한 서수민은 유현에게 정체를 밝혔다.
“정확히는, 천마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