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163화
“수민아 여기야! 여기 앉아.”
서수민이라 불린 소녀는 유라의 또래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의젓했다.
겉모습도 유라와는 확연히 달랐다. 유라도 딱 그녀의 또래보다 살짝 컸다는 느낌인데, 서수민은 그보다 훨씬 더 성숙해 보였다.
서수민은 곧바로 유라의 옆에 앉더니, 맞은편의 유현을 곁눈질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유라야. 이분은……?”
“아, 여긴 강유현 오빠라고 해. 저번에 내가 말 했었지? 아는 오빠 한 분 있다고.”
“아. 그분이시구나. 안녕하세요. 유라 친구 서수민이라고 해요.”
“어, 어. 그래. 강유현이야. 만나서 반갑다.”
유현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서수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녀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영롱한 책에 매료되고 말았다.
‘저런 게……가능한가?’
서수민이 지닌 책. 그것은 무려 2권이었다. 그중 하나는 서수민이라는 평범한 학생이 지닐 법한 갈색 표지의 책이었다.
유현의 시선을 끄는 것은 그게 아닌, 또 다른 한 권의 책이었다.
여타 책들과 크기도 모양도 비슷하지만, 그 무엇과도 견주기 힘든 빛을 내는 것.
영롱하고 찬란한 무지갯빛.
서수민이라는 소녀가 지닌 또 하나의 책은 유현이 여태껏 제대로 본 적이 없는 부류의 책이었다.
‘무지갯빛이라니…….’
저 빛을 보는 것은 이번이 2번째였다. 첫 번째로 본 것은 권지아가 지닌 수백 권의 책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유현은 단언컨대, 서수민이 지닌 책을 높게 칠 수밖에 없었다.
권지아가 지닌 책은 600권이 넘었고, 그 모든 것이 하나로 뭉쳐서 만들어진 빛이었다.
반면, 서수민은 한 권이다.
단 한 권, 그것이 무한 회귀자의 600번이 넘는 회귀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는 것이다.
‘이 무슨…….’
유현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저 책은 읽을 수 없다고.
손을 댈 수조차 없었다. 적당한 금색이었으면 욕심이라도 냈겠지만, 저것은 아무리 봐도 지금 그의 격으로는 손대기 힘들어 보였다.
‘저 사람도 회귀자? 아니면 귀환자인가? 책이 2개라는 것은, 이번이 2번째 삶일 텐데.’
유현은 자신이 애타게 찾던 3번째가 눈앞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유현은 서수민이라는 소녀의 전생이 궁금했다. 하지만 그것을 대놓고 물어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그녀의 정체는 그럼, 어떻게 알아내야 하는가?
‘2번째 책. 그나마 저기에 단서가 있기를 빌어야 하는 건가?’
유현은 그리 생각하며 슬쩍 서수민의 2번째 책을 가져왔다.
“음?”
“어? 수민아. 왜 그래?”
“아니, 갑자기 묘한 느낌이 들어서.”
‘설마?’
유현은 재차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서수민은 자신이 책을 가져가는 것에 반응한 것이었다.
본인도 왜 그러는지 모르는 것 같지만, 유현은 분명 자신의 행동 때문에 저런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을 감각이나 본능으로 감지했다고? 대체 어떻게 돼먹은 거야?’
서수민은 의아해하면서도 유현을 자꾸 곁눈질했다. 유현은 그녀의 행동에 속으로 침음 성을 흘렸다. 1세대 성령인 사탄도 인지하지 못한 능력이었는데, 그걸 저 아이가 미약해도 알아차린 것이다.
감각이 좋아도 너무 좋다. 단순히 인간의 감이 아니라, 초월자나 벽을 넘은 자만이 지닐 수 있는 또 다른 무언가였다.
‘전생의 무지갯빛 책을 보면 보통 존재가 아니었겠지? 그런데 왜 2번째 삶은 저렇게 책이 칙칙하고, 아무런 빛이 안 나는 거지?’
유현은 그것이 궁금했다.
저 정도의 존재라면, 단순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위에 엄청난 아우라를 끼치게 된다. 존재가 지닌 격이란 그런 것이다.
유현이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서 서수민이 지닌 책만큼 격이 높은 자는 단언컨대 한 명도 없었다.
‘아니. 그나마 최도윤 그 녀석인가? 하지만 녀석이 종말에서 10년간 갈고 닦은 정도가 돼야 비벼 볼 정도야. 그걸 감안하면 저 서수민이라는 소녀는, 터무니없이 강하면서도 너무 이질적이다.’
전생의 삶으로 추측되는, 첫 번째 책이 천상의 존재 성령들과 맞먹는 수준인데.
정작 새로운 삶을 나타내는 책은 너무나도 볼품없었다.
태양과 반딧불이 수준의 비교도 아니었다. 전생에 지닌 책과 비교하면 지금의 삶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게 가능한가?’
이러한 불균등한 삶에는 분명히 어떠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유현은 확신했다.
“아, 오빠. 아까부터 자꾸 우리 수민이 빤히 바라보는 거 같은데.”
그때 가만히 상황을 주시하던 유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간 것이 딱 장난을 걸기 적합한 타이밍을 잡은 고양이 같았다.
유라는 조금 전부터 대화를 나누며, 편하게 대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숫제 장난도 걸게 됐다.
유현은 곧바로 손을 저으며 아니라고 잡아뗐다.
“무슨. 그냥, 유라 네 친구라고 해서 신기해서 그랬지.”
“내 친구가 뭐가 신기해?”
“너와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 뭐야. 그러면 내가 이상하다는 소리잖아!”
“엇. 들켰다.”
유현은 장난스럽게 킥킥거리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흘려냈다. 유라는 씩씩거리면서 옆에 앉은 서수민을 콱 껴안았다.
“우리 수민이가 좀 많이 예쁘긴 하지. 얼굴도 예뻐. 성격도 좋아. 공부도 운동도 다 잘해. 오빠가 눈독 들이는 것도 이해해.”
“아니라니까.”
“하지만, 우리 수민이가 워낙 쑥스러움이 많거든? 그리고 아무리 오빠라도 수민이는 줄 수 없어. 수민이를 데려가고 싶다면, 내 시체를 넘어가라!”
“아니라 했지?”
유현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서수민을 살폈다. 그녀는 유라가 껴안고 뭐라 하는 것을 듣고, 어색하게 미소만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에는 힘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저 모든 것을 보고 듣고 하는 행동 자체가 어딘가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래서, 둘은 어쩌다 만나게 됐어?”
유현은 그렇게 대화의 물꼬를 트면서, 몰래 서수민의 책을 펼쳤다.
혹시라도 그녀가 또 반응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이번에는 대화에 집중하느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수민이랑은 중학교 막 들어가서 만났지. 자리 정하다가 짝꿍으로 만났는데, 처음에는 되게 쌀쌀맞고 무서운 애인 줄 알았다? 그런데 계속 지내다 보니까, 되게 여리고 착하다는 걸 깨달았지. 그러다 여차여차 친해졌고.”
“그랬구나.”
유현은 그게 정말이냐는 시선을 보냈고, 서수민은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답했다.
유현은 알겠다고 대답을 하면서 슬쩍 펼친 책을 살폈다.
이름: 서수민
종족: 인간
설명: 평범한 중학생 소녀로, 무뚝뚝하고 힘없는 행동 때문에 교우 관계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그래도 예전보다는 상당히 밝은 모습을 보여 주는 중.
(역사)
유현은 속으로 역시나 하고 넘겼다.
서수민이 지금 지니고 있는 책에는 그녀의 전생에 관한 단서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녀의 전생을 알아보려면, 저 꿈쩍도 하지 않는 책을 들여다보는 것 말고는 방도가 없었다.
‘이거, 난이도가 엄청 올라간 느낌인데?’
* * *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어, 그래. 잘 가고.”
유현은 떠나는 서수민과 강유라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둘의 모습이 사라지고도, 유현은 자리에 가만히 서서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전생에 관해 적혀 있지 않았지. 그렇다는 것은 내가 직접 알아봐야 한다는 소리인가?’
유현은 서수민의 정체에 관해서 하나씩 추리해 나갔다.
우선, 첫 번째로 그녀의 과거.
자세한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유현은 서수민이 전생에 엄청난 힘을 지닌 초월자라라고 판단했다.
‘베니싱으로 사라졌다 돌아오는 이계 귀환자도 있고, 죽었다가 과거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무한 회귀자도 있지. 거기에 다른 차원에서 죽었다가 이곳에서 환생해 새로운 삶을 사는 초월자라고 없을 것도 없지.’
유현은 천천히 길을 걸으며, 그녀에 관해서 곰곰이 떠올렸다.
모습, 성격, 행동, 눈빛. 그가 봐 왔던 것을 세세하게 떠올리며 분석했다.
‘행동, 말투나 눈빛만 보면 딱히 무언가에 흥미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어. 컬렉터들에 관한 말이 나왔을 때도 심드렁했지. 관심이 없는 건가? 아니면, 자신의 입장에서 보기엔 너무 우스워서?’
뭐가 어찌 됐든 서수민은 힘을 지녔음에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지금 지닌 책이 모든 것을 말해 줬다. 누구보다도 찬란한 삶을 살았던 전생과 비교하면, 그녀의 현생은 너무나도 보잘것없었으니까.
‘지금의 책이 갈색인 것도 모자라 책에서 흘러나오는 빛 자체도 칙칙했어.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지. 본인 자체가 이번 삶에서 성공하거나 높이 올라가겠다는 의욕 자체가 없다는 거야.’
모든 것을 다 이루고 끝낸 삶 이후에 지쳐서 일상을 갈구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유현의 정신을 가장 크게 자극하는 것은, 그녀의 존재가 미래에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미래에서도 서수민이라는 존재는 없었어. 종말 이후에도 그렇고. 그렇다는 것은 끝까지 힘을 얻지 않고, 평범하게 살다 죽은 건가?’
유현은 그것이 못내 궁금했다.
지금이야 어떻게든 평범하게 산다고 치더라도, 종말에서도 그것이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사람에게는 결국, 타고난 재능이라는 게 있다. 그것은 본인이 이성적으로 거부한다고 해서 절대 숨길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특히 죽음의 위기에 직면하는 순간, 억눌러 왔던 본능은 더욱 강하게 살아나기 마련.
그럼에도 기억에조차 없다는 것은.
‘서수민. 그녀는 종말이 왔을 때, 혹은 종말 이후에 누구도 알아주는 이 없이 죽었다.’
유현은 그런 가설을 떠올리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저 정도의 강자가 그럴 수가 있나?’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책의 빛을 보며 최소 초월자의 자리에 올라섰다고 봐도 무방했다.
초월자가 누구인가? 하계의 존재로서 스스로 벽을 깨부수고, 상계에 존재하는 성령의 자리에 반쯤 발을 걸친 자들이 아닌가.
지금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전생이 있다면 그것을 완전히 떨쳐 낼 수 없다. 그게 인간이다.
실제로 서수민은 유현이 책을 살펴보는 순간, 반응했다. 사탄도 인지하지 못한 것을 그녀가 느낀 것이다.
주머니를 아무리 두껍게 몇 겹이나 감더라도 송곳은 돌출되는 법.
애써 힘을 감추며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결국 그녀는 그런 존재다.
그런데, 죽었다는 것에 유현은 또 다른 가설을 떠올렸다.
‘자살. 저 모든 것에 초탈한 태도를 보면 은근히 가능성이 있어.’
그렇다면,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무지갯빛 책을 지닌 자가, 고작 지쳤다거나 회의감 때문에 스스로 삶을 끝낼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멋대로 단정 짓기엔 좀 그렇겠군. 사람마다 성격은 다르니까.’
전생에서 초월자였던 그녀가 지금은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며 친구들을 사귀고 지낸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었다.
‘기익족으로 태어났으면서, 텔러가 되려는 셀린도 여기에는 못 비비겠군.’
그렇다면 서수민의 목적은 무엇일까. 전생과는 다른 평화로운 삶을 사는 것?
유현은 서수민이 묘하게 드러나지 않으려는 삶을 사는 것이 집중했다.
좀 더 일반적인 삶을 살려면, 그에 걸맞게 적당한 노력도 필요할 텐데 그마저도 안 한 것으로 보인다.
제2의 인생을 이번에는 적당히 살겠다는 포부가 아니었다.
‘회의감. 혹은 허탈감.’
유현은 고민과 생각을 거듭할수록, 퍼즐 조각을 하나둘 맞춰 가며 해답을 찾아갔다.
‘그녀의 행동은 딱 그런 느낌이었어. 의욕이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살아가려는 느낌이야. 그렇다는 것은 전생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트라우마? 혹은 PTSD. 아마, 그런 것과 비슷한 부류겠지.’
초월자라고 해도 그것은 지니고 있는 물리적인 힘이지, 정신력까지 정말 대단한 존재라고 볼 수만은 없었다.
유현은 서수민이라는 사람에 관해서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전생에 엄청난 위업을 이룬 초월자지만, 모종의 일 때문에 지금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 그럼에도 돌출된 재능은 어찌할 수 없어서 본인이 억지로 억누를 정도. 지금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중.’
하지만, 재능만 놓고 보면 세 번째 컬렉터에 가장 부합하는 존재.
‘이거 골치 아프네.’
회귀에 지쳐 인간불신에 걸린 권지아 다음으로.
이번에는 트라우마에 빠져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환생한 초월자가 목표라니.
유현은 자신의 기구한 인연에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 정도의 재능을 지닌 사람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앞으로 그가 직면해야 할 사건들을 생각하면, 서수민 정도 되는 사람의 영입은 필수였다.
‘우선, 방법을 차근차근 떠올려 봐야겠군.’
거기까지 판단을 내린 유현은 잘 걷다가 자리에서 멈칫했다.
그것은 아주 순간이었다. 유현은 곧바로 움직이며, 자연스럽게 행동을 이어 나갔다.
‘누군가 따라온다.’
유현은 길을 걷다가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좁은 골목길로 꺾듯이 들어갔다.
그리고, 직후.
“움직이지 마.”
유현의 등 뒤에 무언가가 툭 닿았다.
“오셨군요.”
유현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찬란한 무지개의 기운은, 등 뒤에서도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서수민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