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162화
유현은 한적한 카페에 앉아 강유라를 기다렸다.
최근 들어 누군가를 개인적으로 만날 수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는 유현이, 고작 학생 하나를 만난다고 카페에 죽치고 앉아 있다는 말을 들으면 누구라도 웃을 것이다.
그게 말이 되냐고?
‘말이 되니까, 문제지.’
유현은 지난번 강유라와 나눈 통화를 상기했다.
-저 컬렉터로 각성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유현은 머리가 하얗게 물드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꼈다.
‘대체, 왜?’
강유라는 또 다른 강유현이다. 유현은 전생에서 종말이 터지기 전까지 컬렉터로 각성을 하지 못하고 일반인으로만 지냈다.
정말로 되고 싶어서 여러모로 많이 자료도 찾고 노력을 했지만, 세상은 가혹했다.
‘그래서 유라도 나랑 똑같을 거라고 생각했었지.’
유현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미래의 지식을 알더라도 세상은 지식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삶이란 단순히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무수한 변수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에 모비딕 사상세계만 봐도 그렇다.
이미 알고 있는 미래 지식이 아닌 경험과 가능성을 탐구했기에 클리어 할 수 있었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이점은 그 순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내 행동으로 세계는 변해. 미래도 변할 수 있지. 애초에 내 목적은 그런 미래를 바꾸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변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해. 그거에 놀랄 필요도 없고, 놀랄 필요가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든 일이었다.
컬렉터로 각성을 할 수 없던 사람이, 원래 그랬어야 할 운명을 지닌 사람이 컬렉터로 각성을 하다니?
강유라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을 떠올렸지만, 그건 아니라 생각했다.
통화할 때 유라가 낸 목소리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가득했다. 그걸 연기했다고 생각하면, 유현은 그녀에게 배우의 길을 가라고 진지하게 조언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각성했다는 것은, 모종의 변화가 있었다는 건데.’
유현은 강유라와 전생의 자신을 비교해 봤다.
대충 그녀에게 이야기를 듣기로는 강유라는 컬렉터를 희망하고 거기에 꿈을 품은, 딱 전생에 꿈이 가득했던 소년 강유현을 그대로 닮았다. 성별이 다른 것만 빼고.
‘성별이 영향을 준 걸까?’
유현은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가장 큰 변화란 무엇일까?
‘나의 존재.’
인간 강유현이 아닌, 텔러 강유현의 존재.
강유라의 삶에서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어느 정도 크나큰 족적을 남긴 그의 행동.
유현은 그것이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에게 너도 컬렉터가 될 수 있다고 말했지. 그냥 친구가 한 말이 아니야. 나는 컬렉터를 키우는 텔러였고, 검후라는 걸출한 인재를 배출했지. 유라의 입장에서 나는 말 그대로 이쪽 분야의 프로나 다름없어.’
엉켜 있던 실타래가 하나씩 풀리듯 복잡한 머리가 정리됐다.
‘그런 내가 너 또한 컬렉터가 될 수 있다고 말했어. 포기하지 말라고. 자신감이 서서히 떨어지고 불안해하던 차에 그런 말을 듣게 되면 어떨까? 만약에 전생의 내가, 그런 말을 들었다면 나라면 어땠을까?’
유현의 머릿속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유현은 한 남자를 떠올렸다.
‘한용운.’
스캐빈저와 어쩔 수 없이 함께 움직였지만, 도덕심 때문에 유현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던 남자.
유현은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 자신의 앞에서 오열하던 남자가, 마지막의 마지막에 책의 빛이 바뀌던 걸.
‘사람의 가능성은 바뀐다.’
물론, 모두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바뀔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바뀔 ‘준비’가 된 사람들뿐이다.
모든 것을 준비했지만, 가장 중요한 첫발을 내딛지 못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가볍게 등을 떠밀어 주거나, 혹은 손을 잡아 한 번만 이끌어도 충분히 변한다.
유현은 강유라도 그와 같은 케이스라고 판단했다.
‘자세한 건 직접 만나서 물어봐야 알겠지만.’
휴우.
유현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유라가 각성하게 된 것은 분명 축하해 줘야 할 일이었다. 워낙 예상 밖의 일이라 놀라기는 했지만, 자신의 꿈을 좇는 소녀에게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분명, 기뻐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유현은 마음속 어딘가 찜찜함을 느끼고 있었다.
유현은 왜 그런지 깨달았다.
‘나, 질투하는 거구나.’
유현은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이 질투라는 감정은 전생에서 누구보다도 그가 강렬하게 느꼈던 거였으니까.
유현은 강유라의 변화를 보며 새삼 한 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만약에 그 때의 나에게, 지금의 나처럼 누군가가 진심으로 조언을 해 줬다면 나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강유라의 모습을 보면, 분명 그 또한 꿈을 이뤘을지도 모른다.
할 수 없다고 절망하지 않고, 혹시 될지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품으며 아득바득 붙잡을 필요도 없었을 거다.
무의미하게 5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하지도.
종말 이후에 살겠다고, 그 개고생을 하지 않아도.
‘아니. 결국, 이 모든 것은 가설일 뿐이야.’
유현은 스멀스멀 올라오려는 생각을 쳐 냈다.
모든 것은 가설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전부 지나간 과거였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뭐, 어쩌자는 거냐?’
분명,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현은 이미 앞만 보고 달리기로 마음먹었다.
‘유라가 각성한 것은 축하할 일이다. 내가 만약 저랬다면 하는 생각은 실패자의 한탄이나 다름없어. 지금의 나는 강유현 텔러다. 내 직위를 올리고, 삶의 가치를 높이며, 지구를 종말로부터 막는 게 내 목표이자 일이야.’
과거를 돌아보며, 손가락을 빠는 것은 배부른 자들이나 하는 일이다.
정말로 그때를 후회한다면, 지금 만큼은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야 했다.
유현은 과거를 괴로워했을지언정 그것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때의 절망, 괴로움, 실패야말로 지금의 유현을 만들었으니까.
‘최도윤. 그 녀석도 도움을 준 건 마찬가지지.’
그 역겨운 낯짝을 떠올리면 저절로 이가 갈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건 일종의 반사 작용이었다.
다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유현은 최도윤과 지내면서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이 지면을 다지는 기본적인 토양이 되어 줬고, 지금 텔러 강유현이라는 싹을 틔울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옛날을 돌아보며 이땐 이랬다면, 저땐 저랬다면 구구절절 따지지 말자. 중요한 건 지금과 앞으로의 미래야.’
유현은 자신이 아직 부족하다 생각했다.
그는 이제 막 새싹이 자라난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앞으로 더 성장하고, 더 강해져야만 했다.
가야 할 길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딸랑!
때마침 카페의 문이 열리며 교복을 입은 유라가 들어왔다.
유라는 유현을 곧바로 발견하고는 해맑게 웃으며 곧장 유현의 앞에 앉았다.
“많이 기다렸어요? 오빠 많이 바쁘실 텐데. 제가 괜히 부른 거 아니죠?”
“아니, 지금은 한가해. 사상세계 갔다 온 뒤라서 쉬는 기간이거든.”
“아. 그러고 보니, 이번 탐사 완전 성공했다면서요? 듣자 하니, 오빠네 매니지먼트가 완전 잘했다고 하던데.”
“내 매니지먼트라니.”
서련 씨가 들으면 한탄하겠군.
유현은 멋쩍게 웃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수긍했다.
유라의 눈이 빛났다.
“그리고, 새로운 두 번째 컬렉터도 정하셨다면서요?! 저 봤어요! 광랑 권지아! 와, 세상에. 어쩜 딱 보기만 해도 대박이던데. 오빠는 어떻게 그런 사람만 찾아서 골랐어요?”
“그냥 운이 좋았어.”
“헤헤. 이러다 오빠 매니지먼트, 나중에 클랜으로 격상하는 거 아니에요?”
“클랜은 사람이 많잖아. 나는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해.”
“아, 글쿠나. 그런데, 오빠는 이제 뭐 해요? 혹시, 세 번째 컬렉터를 찾거나 하는 건 아니죠? 그러면 저 어때요?”
어깨를 쭈욱 피며 자신만만하게 웃는 그녀는 청소년 특유의 활발함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마치, 초여름 찬란한 햇빛 아래에서 피어나는 꽃같이 말이다.
여동생이 있었다면, 딱 이런 느낌일까?
“아서라. 너 이제 각성했으면 아카데미로 들어가야 하잖아. 미성년자는 컬렉터 활동 못 하는 거 알지?”
“그건, 그렇죠. 근데, 특이 케이스도 있긴 하잖아요.”
“그건 논외지. 아무튼, 각성한 건 축하하고. 능력은 어때? 알아봤어?”
“아뇨, 그건 아직. 각성하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제 특성을 정확하게 모르겠더라고요.”
“뭐, 보통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
“그래서 솔직히 불안하기도 해요.”
활짝 웃던 강유라의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만개한 꽃이 순식간에 시든 느낌이다.
“막상 각성했는데, 별 볼 일 없는 특성이면 어쩌지. 사실, 엄청 약하면 어쩌지. 컬렉터들이 각성해도 그 이후도 문제잖아요.”
“뭐, 그런 걱정도 이해 못 할 것은 아닌데. 너무 그렇게 침울해하지 않아도 될 거야. 내가 보기엔 너는 충분히 성공할 수 있거든.”
“네?”
유라가 놀라서 되물었지만, 유현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유라의 책을 보고 있었다. 유라의 책은 찬란한 은빛을 내고 있었다.
아직 책의 표지는 짙은 갈색이었지만, 그녀가 노력한다면 책의 색이 빛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찬란한 은빛 사이에 조금씩이지만, 보이는 금빛이라.’
그것만으로도 강유라가 지닌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봐도 좋았다.
“고마워요, 오빠!”
강유라도 이런 말이 필요했다.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녀가 제일 걱정한 것은 유현을 만나 너는 재능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어쩌나 하는 거였다.
아직 어린 강유라는 자신의 가능성에 관해서 잘 모른다.
그녀가 무언가를 확신하고 싶다면, 그것은 유현의 입을 통해 직접 들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마음이 진심을 다해 움직일 테니까.
왜 그런지는 모른다. 분명 유현과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그는 인간이 아닌 텔러인데도.
‘묘하게 익숙함이 들어.’
이성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강유라에게 있어서 유현의 존재는 상당히 컸다.
마치, 친오빠가 있으면 이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래. 내가 보기엔 넌 성공할 자질이 있으니까, 열심히 노력하면 될 거다. 그러니 걱정 같은 건 하지 말고, 앞으로 네가 뭘 해야 할지 거기에만 집중해.”
“네. 알았어요.”
“부모님은 잘 계시고?”
“네. 엄마는 아직도 잔소리 심해요. 그래도 최근에 저 각성했는데, 반대하는 것과 다르게 축하해 줘서 좀 감동이긴 했어요.”
“어머니가…… 그런가?”
유현은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유라는 컬렉터로서의 마음가짐이나 뭘 해야 하는지에 관해 마구잡이로 물어봤다. 유현은 자신이 아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대답했다.
유현은 유라와 대화를 나누면서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그녀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자기도 모르게 질투심이 들었지만, 지금 얼굴을 맞대며 대화를 나누니 전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응원해 주고 싶었다.
“앗. 시간 좀 봐. 저 안 그래도 친구들이랑 약속했거든요.”
“친구들?”
“네. 각성했으니, 이제 정든 학교 떠나야 하잖아요. 그래서 친구들이랑 만나서 송별회 하기로 했어요. 막상 각성한 건 좋은데, 친구들과 헤어지는 건 섭섭해서 좀 그러네요.”
“너무 아쉬워하지는 마. 아카데미 다닌다고, 친구들 다시 못 만나는 것도 아니고.”
“히히. 그렇죠? 아, 그런데 은근 긴장된다. 아카데미 가면 막 엄청 잘나가는 얘들도 많을 거 아니에요.”
“뭐, 그렇긴 하지.”
아카데미에 일찍 들어오는 학생들의 수준을 떠올리면 긴장할 법도 했다.
무엇보다 소위 명문가라고 해서 들어오는 급이 다른 학생들까지 있다 보니, 일반적인 사람인 강유라로서는 부담되는 것도 당연하다.
“무슨 다 드라마에서 볼 법한 얘들이 가득하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쫄지마. 그래 봤자, 너랑 같은 또래야. 네가 걔들한테 꿀릴 이유가 없어.”
“그렇죠? 맞죠?”
“그런데, 친구들이랑 약속했다면서. 여기서 이렇게 죽치고 있어도 괜찮겠어?”
“아.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친구 한 명이 이쪽으로 저 데리러 온다고 했거든요.”
“그래?”
강유라의 친구라고 했으니, 평범한 학생일 것이다. 이 자리에 1명 정도 더 추가된다고 해서 유현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오히려 유라가 아카데미로 입학하게 되면, 그녀의 인맥을 역으로 빌려서 가능성이 있는 생도를 찾아볼까 하는 생각을 품는 도중이었다.
딸랑!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유라와 유현의 시선이 동시에 입구를 향했다.
“아! 수민아!”
유라는 친구의 반가운 얼굴을 보며 손을 번쩍 들며 외쳤고.
“어?”
유현은 새로 들어온 사람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