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152화
‘말로만 들었지만,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네.’
유현은 노틸러스함 내부를 둘러보며, 신기함을 감추지 못했다.
잠수함이다 보니, 좁아터질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노틸러스호 내부는 매우 아늑했다. 실제 21세기 잠수함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편의 시설까지 있는 것을 본 유현은 혀를 내둘렀다.
“와! 정말로 대단해요!”
그런 유현의 곁에서 눈을 반짝이며 빛내는 꿈 많은 청년이 있었으니, 바로 이스마엘이었다.
자기야 초대를 받았으니 그렇다 쳐도, 어쩌다 이스마엘까지 함께 오게 된 걸까?
유현은 네모 함장에게 초대받던 일을 떠올렸다.
‘나를 초대한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네모 함장님은 때마침 지나가던 이스마엘까지 초대했었지.’
본인 말로는 에이허브의 배에 어울리지 않은 순박한 청년이라 호기심 차에 불렀다고 했지만, 유현이 보기에는 전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회의 때 네모 함장님이 이스마엘을 보며 순간이지만 묘한 반응을 보였었지. 이스마엘에 관해서 뭘 알고 있는 건가? 아니야. 그에게서 자신이 알던 다른 누군가의 모습을 비춰 본 거지.’
과연, 그게 누구일까? 유현이 아무리 고민을 해도 마땅히 떠오르는 정보가 없었다.
네모 함장의 과거도 모르며, 그의 진짜 이름도 모른다. 정체를 감춘 네모 함장에게 알 수 있는 거라곤 모비딕에게 복수심을 품고 있는 것과 이스마엘 같은 청년에게 모종의 그리움을 품고 있다는 것이 전부.
‘지금은 그게 전부인가?’
잠시 자리를 비운 네모 함장을 기다리길 몇 분이 지났을까? 복도 너머에서 제복을 걸친 함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늦어서 미안하군. 잠시 급하게 지시를 내려야 할 사항이 있다 보니, 시간이 지체됐네.”
“아뇨. 괜찮습니다.”
“맞아요. 함장님은 바쁘시니까, 그러실 수도 있죠.”
“이해해 줘서 고맙군.”
네모 함장은 부드럽게 웃으며 빈 좌석에 앉았다. 유현은 네모 함장이 항상 에이허브와 싸우는 모습만 봐서 그런지, 웃는 모습이 꽤나 색다르게 느껴졌다.
그들이 머문 곳은 잠수함 내부에 선원들의 휴식을 위해 지어진 휴게실이었다. 평소라면 북적거려야 할 공간이었지만, 선원들은 곧 있을 작전 때문에 개인 시간을 갖는 중이었다.
이곳에 있는 것은 오직 이들 셋뿐이었다.
“내가 이렇게 자네들을 부른 것은 사실, 그렇게 큰 이유는 없네. 다만 마지막이 될지 모르니,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야.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이 늙은이의 몇 없는 취미지.”
“그런가요.”
이스마엘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아주 좋아했으니까.
네모 함장이 유현을 부른 것도, 그가 전혀 다른 곳에서 온 손님이기에 호기심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이스마엘이라고 했나. 자네는 어쩌다 이 배에 올라탔나?”
“아, 저는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원래는 상선을 타려고 했는데, 상선보다는 그래도 조금 더 모험을 떠날 것 같은 포경선이 좋다고 생각했거든요.”
설마, 그 배가 이런 괴물과 싸우기 위해 출정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은 이스마엘에게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침울하게 중얼거리면서도 마지막에는 ‘그래도 잘 될 거예요!’라고 희망 넘치게 말하는 이스마엘을 보며, 네모 함장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문득, 그의 시선에 옛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할아버지! 나 언젠가 더 넓은 세상을 보러 갈 거야!’
네모 함장은 이스마엘에게서 옛 기억을 겹쳐 봤다.
순수함을 품었던, 하지만 이제는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자신의 혈육.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던 그 얼굴을.
“닮았구나.”
“네? 제가요? 뭐가요?”
“아니. 혼잣말이네.”
네모 함장은 화제를 전환할 겸 유현에게 물었다.
“자네는 강유현이라고 했지? 보아하니, 꽤나 머리가 똑똑한 사람 같던데. 어디의 귀족이라도 되는 건가?”
“그렇게 보이십니까?”
“복장도 그렇고, 뱃사람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 조금 신기해서 말일세.”
“귀족은 아닙니다. 그냥 탐험가죠. 이 배에 탄 이유는 모두와 같습니다. 모비딕이죠. 사실 실존하는지 몰랐고, 그냥 있는지만 확인할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오고 말았지만요.”
“운이 없었군.”
“바꿔 말하면 지금이 아니면 녀석을 잡을 기회가 없으니, 운이 좋다고도 볼 수 있죠.”
“모비딕을 노리는 이유가 있는가?”
“이유라…….”
유현은 네모 함장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거창한 건 없습니다. 처음에는 돈과 명성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살아남기 위해서 싸웁니다. 녀석의 진짜 모습을 본 이상, 어중간하게 대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저,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세상에 그렇게 큰 고래가 존재하다니!”
“그렇군.”
“함장님도 보시면 모비딕에게 무언가 복수심을 품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네모 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숨길 것도 없지. 맞네, 나도 복수 때문에 놈을 쫓고 있었지.”
“보, 복수라니.”
이스마엘은 복수라는 말에 에이허브의 모습을 떠올렸는지, 몸을 잘게 떨었다. 이 순진한 청년에게 있어서 복수란 가슴에 지닌 자마저 광기의 불길로 태워 버리는 무서운 감정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이스마엘은 스스로 자책했다. 바다의 사나이가 되고 싶다면서 고작, 이런 것에 겁을 집어먹으면 어쩌자는 거야?
괜히 퀴케그가 자신에게 뱃사람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던 일이 떠올라, 이스마엘은 침울해졌다.
“흠. 함장님도 복수 셨군요.”
유현은 살짝 가늘어진 시선으로 네모 함장을 살폈다. 네모 함장의 얼굴은 이전과 다를 것 없이 평소와 같았다.
유현은 그의 표정에서 감정을 읽어 내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네모 함장의 제복 목깃 사이로 슬쩍 보이는 은색의 목걸이, 유현은 그것을 살폈다.
‘펜던트 목걸이로군. 검소한 거로 추정되는 네모 함장의 성격상 귀걸이나 그런 장신구를 낄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데.’
네모 함장은 매우 깔끔하고 절제된 사람이다. 그를 처음 보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검소함과 닿으면 베일 것만 같은 칼날 같은 날카로움이었다.
그런 그가 목걸이를 멋을 위해 착용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장 유력한 것은 사진이 담긴 유품. 모비딕에게 복수하기 위한 대상과 관련이 있는 건가?’
어떻게 보면 네모 함장의 상처라, 유현은 거기까지만 추측하고 그 이상 캐물으려 들지 않았다.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까? 61%에서 멈춰 있던 정보 취합률이 펜던트를 확인하는 순간, 70%까지 올라갔다.
‘저게 나머지 이야기와 연관된 단서긴 하겠군.’
네모 함장은 이곳 사상세계를 클리어 할 가장 큰 열쇠를 지녔다.
그 이후로 셋은 시답잖은 대화를 나눴다. 전부 다 꿈이나 목적, 혹은 앞으로 뭘 할지에 관한 것이었다.
주로 떠드는 것은 이스마엘이고 네모 함장은 가끔 호응만 했다.
유현은 네모 함장이 처음부터 부르고 싶었던 것이 이스마엘임을 깨달았다.
‘나를 부른 것은 이 아이를 부를 핑곗거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군.’
갑자기 들러리 신세가 된 기분.
이용당하는 것은 썩 좋지 않은 기분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넘어가 주기로 했다.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야기니까.’
유현은 즐겁게 수다를 떠는 이스마엘과 그 모습을 가만히 들어주는 네모 함장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둘은 마치 할아버지와 손주의 화목한 모습처럼 훈훈했다.
* * *
“형. 고마웠어요. 덕분에 멋진 구경을 했고, 네모 함장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어요. 저 혼자였으면 분명 어버버해서 아무 말도 못 했을 거예요.”
“아니. 내가 아니었어도 너라면 가능했을 거야.”
“헤헤. 형은 참 좋은 사람이네요.”
“진짠데.”
다시 배로 돌아온 유현과 이스마엘은 곧 있을 작전을 준비해야 했다.
사실, 준비랄 것도 없었다. 그저 미련이 남지 않게 마음을 정리하는 것뿐이니까.
“형. 전 이만 가 볼게요. 퀴케그가 또 자리를 비운다고, 걱정할 거 같아요.”
“잔소리꾼 친구를 둬서 피곤하겠구나.”
“에이. 그래도 절 걱정해 주는 제 친구인걸요?”
“그래. 몸조심하고.”
“아.”
떠나기 전 이스마엘은 방금 막 떠올랐는지, 발걸음을 멈춘 채 유현에게 물었다.
“형. 우리는 살 수 있겠죠?”
“인제 와서 갑자기 묻는 거야?”
“하, 하하. 그치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거 같아서요. 저는 솔직히 죽고 싶지 않거든요.”
이스마엘의 시선이 먼바다를 향했다.
“저는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요. 제가 모르는 미지의 세계. 가슴 뛰는 모험. 더 많은 것들을 보고 확인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 보고 싶어요.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알려 줄 거예요. 제가 어떤 모험을 떠났는지.”
“그리고?”
“그리고 또, 다른 세상을 찾으러 가겠죠.”
이스마엘의 눈은 꿈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그것은 자신의 목적을 확고히 품고 있는 순수한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광채였다.
모험과 탐험, 낭만이 가득한 꿈을 꾸는 청년.
이스마엘은 이 시대에서는 절대로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하하. 하지만 아직 저는 애송이에 불과하고, 한참 부족하니까 안 될 수도 있겠네요.”
“아니. 분명, 너는 그렇게 될 거야.”
“정말요? 정말로 제가 그럴 수 있을까요?”
“그래. 이번 작전에서 우리는 죽지 않고, 그 괴물을 사냥할 테니까. 그러니 그 이후에 정해도 좋아.”
“형이 그렇게 말해 줘서 마음이 놓이는 거 같아요. 고마워요.”
이스마엘은 그렇게 웃고는 유현에게 손을 흔들며 선내로 사라져 버렸다.
홀로 갑판에 남은 유현은 이스마엘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난간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도 죽지 않고 모비딕을 사냥한다.’
이는 유현의 바람일 뿐이었다. 이번 작전은 말 그대로 목숨을 내놓고 하는 짓이었다.
당장 누가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에서, 누구는 반드시 산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살 수 있다고 말해 주는 것은 단순히 자기만족일 뿐이다. 이스마엘도 그걸 알면서도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니 잘 돼야 할 텐데.”
“아까부터 뭘 멍하니 중얼중얼 대? 당연히 잘 돼야지.”
“어?”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마스트 위였다. 유현이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올려다보는 순간, 햇빛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점점 커지며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유현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착지했다.
탁!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가벼움.
포악해 보이는 바다의 사자, 에이허브 선장은 10m가 넘는 마스트 꼭대기에서 뛰어내렸음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굽혔던 무릎을 폈다. 심지어, 한쪽 다리는 의족인데도 말이다.
“선장님이 여긴 어쩐 일입니까? 안쪽에 계신 거 아니었어요?”
“여기가 내 배인데, 내가 아무 데나 있으면 안 되냐?”
“평소에는 선장실에만 틀어박혀 있었잖아요.”
“그거야, 그때는 모비딕이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그랬지. 하지만 녀석이 근처를 배회하는 지금은 다르지 않겠냐? 계속 선내에만 틀어박힐 수는 없지.”
에이허브 선장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긴장감 자체가 없어 보였다.
그는 오히려 곧 있을 녀석과 싸움을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선장님은 두렵지 않습니까? 죽을지도 모르는데?”
“두려움? 당연한 걸 묻는군. 세상에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
“의외로 당연한 소리를 하시네요.”
“네가 지금까지 날 어떻게 봤는지는 잘 알 거 같군. 나는 자살 희망자 따위가 아니야. 나도 그래도 사람이라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에이허브 선장은 저 먼바다를 어딘가 그립다는 듯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 이상으로 가슴이 뛰잖냐?”
“낭만주의자였습니까?”
“그 빌어먹을 녀석에게 이 다리를 잃기 전까지는 그랬지.”
에이허브는 자신의 의족을 손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에이허브 선장은 유명한 작살잡이이며 고래 사냥꾼, 그리고 훌륭한 선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순간의 실패로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배와 선원, 그리고 다리를.
한때 꿈과 로망을 좇던 남자는, 이제 복수를 위해 살고 있었다.
“선장님은 가족이나 뭐, 애인 없습니까?”
“없다.”
에이허브는 단호하게 말했다. 너무 당당해서 유현마저 당황할 정도였다.
“바다에 몸을 묻기로 작정한 이상, 그런 거추장스러운 걸 만들 시간도 없었지.”
“그러십니까.”
“그래. 결국, 이곳이 나의 고향이고, 내 무덤인 거야. 물론, 가는 길에 내 발을 씹어 간 그 빌어먹을 고래 녀석을 없애는 것이 최종 목표고.”
“만약에 말입니다.”
유현은 자신도 참 바보 같은 질문이라 생각하며 운을 뗐다.
“혹시 모비딕을 사냥하고, 그래도 살아남으시면 뭘 하고 싶을지 생각한 거 있습니까?”
“뭘 하고 싶냐고? 하하하. 이거, 참. 예상 밖의 질문을 해 주는군.”
“그런가요?”
“그래. 하지만 제대로 된 지적이기도 해. 암. 복수를 반드시 실패하는 것도 아니지. 성공할 수도 있잖아? 그다음, 그다음의 일도 있는 법이지.”
에이허브는 복수 이후의 일을 한 번도 고려하지 않았다.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기보다는, 그는 자기도 모르게 모비딕과의 싸움에서 죽음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아주 천운이 따라 줘서 살아남게 된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할까?
“그냥, 술을 한번 진탕 마셔서 취해 보고 싶군.”
“그리고요?”
“그리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야겠지. 모험과 낭만을 좇던, 그때의 나로.”
그렇게 말하는 에이허브의 목소리는 유현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언제나 가시가 돋친 듯 으르렁거리는 상처 입은 맹수였지만, 지금의 그는 오래되어 탈색된 꿈을 다시 되새기는 어른이었다.
네모 함장도, 에이허브 선장도, 이스마엘 선원도.
모두가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고, 저마다의 목적이 있었다.
“잘 되겠죠?”
“사실, 나도 잘 몰라. 그래도 하는 거지. 예전에 항해를 떠났을 때, 다른 대륙에서 만난 노인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거든.”
“노인이요?”
“그래. 노련한 어부였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어. 힘이 강한 건 아니야. 오히려 늙어서 옛날의 강건함은 없었지. 하지만, 그 노인의 대단한 건 바로 눈빛. 마음의 강함이었어. 다 늙어 가던 노인이 어찌나 그렇게 정정하던지.”
“한번 만나 뵙고 싶네요.”
“그 노인이 내게 말했었지. 자신도 살면서 많은 실패도 겪고, 좌절하는 순간도 느끼고. 또, 죽음의 공포도 느꼈었다고. 그래서 나는 물었지. ‘영감. 그렇게나 고생했으면서 왜 아직도 어부 일을 하면서 바다에 나가는 거요?’ 그랬더니, 그 노인이 뭐라 했는지 알아?”
“뭐라 했는데요?”
“왜냐하면, 그래도 사람은 패배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니까.”
“…….”
“그렇게 말하더군.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어. 이미 오래전의 일이고, 그 영감의 나이를 생각하면 이미 죽어 나자빠졌겠지만, 그래도 그때의 기억은 내게 생생하게 남아있거든.”
그래서였다.
이 순간을 앞두고도, 에이허브가 이렇게나 당당하고 여유로울 수 있는 것은.
인간은, 파멸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유현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에이허브도 마찬가지였다.
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사람들과 다르게 태양은 언제나처럼 찬란함으로 빛났다.
어느덧 그림자가 가장 짧아지는 정오가 다가왔다.
“준비는 됐나?”
“물론입니다.”
“좋아. 그러면 시작하지.”
그 말과 동시에.
땡땡땡땡!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망망대해에 울려 퍼졌다. 종소리는 세상에 섞이지 못한 채 사람들의 귓가에만 뚜렷하게 들렸다.
드디어 시작이다.
선원들과 컬렉터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혜림과 권지아도 나왔고, 박철오를 위시한 컬렉터들도 마찬가지였다. 괴선 방상씨도 나와서 유현의 말을 기다렸다. 그녀의 손에는 백효가 안겨 있었다.
노틸러스호도 마찬가지였다.
[무운을 빌지.]
네모 함장은 그 말을 끝으로 곧바로 잠수에 들어갔다.
노틸러스호는 중요한 역할이 하나 있어서 함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들은 먼저 자리를 떠야만 했다.
“선장님. 녀석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움직인 걸 눈치챘어.”
에이허브는 코를 킁킁거리며 답했다.
거리를 유지하던 모비딕이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것인지, 반응이 왔다. 녀석은 거리를 살짝 좁히며 이쪽이 뭘 하려는지, 살펴보고 있었다.
“하지만, 저 노땅을 쫓아가려 하지는 않는군. 우선 최우선 목표는 나인가. 이거 영광인데? 이러면 이야기는 쉬워지지.”
“그러면 갑시다.”
유현의 말에 에이허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배를 우현으로 틀어라! 전속 전진───!!!”
선원들이 밧줄을 묶고, 돛을 펼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조타수가 키를 꺾고, 항해사들이 긴장감 어린 표정으로 바람을 읽었다.
촤아악!
3척의 배가 바다를 가르며 난파선 무덤을 향해 전속으로 나아갔다. 멀리서 주시하던 모비딕은 이쪽이 도망침을 깨닫고 황급히 뒤를 쫓았다.
작전명
모두의 운명을 결정지을 작전이 시작됐다.
“가자! 이 녀석들아! 배들의 무덤으로!”
그리고 가자.
이 복수의 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