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132화
유현은 빠르게 방 하나를 빌렸다.
그때까지 필사적으로 견디던 권지아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화장실을 찾아 다급하게 들어갔다.
우웨엑!
침대에 걸터앉은 유현은 반투명한 유리로만 이어진 화장실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토악질을 하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권지아도 무안해할 테고.
“아니, 그러니까 좀 적당히 마시라고 했잖아요.”
허억허억.
핀잔에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닌 거친 숨소리가 전부였다.
변기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권지아가 밖으로 나왔다. 안 그래도 취기가 남아 있는 그녀의 안색은 상당히 초췌해 보였다. 그녀는 초점이 없는 눈동자와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자연스럽게 유현에게 다가왔다.
“뭡니까?”
“…….”
“지아 씨?”
“…….”
권지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현은 빠르게 몸을 옆으로 뺐다. 권지아는 조금 전까지 유현이 앉아 있던 침대에 쓰러지듯 털썩 엎어졌다.
침대에 고개를 푹 박은 채, 추욱 늘어진 그녀는 갈라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무, 무울…….”
“정말 가지가지 하시네요.”
말은 그렇게 해도, 유현은 소형 냉장고에서 물병 하나를 꺼내 권지아에게 건네줬다.
“자, 마시세요.”
“힘……없어…….”
“아, 진짜.”
유현은 물병을 권지아의 손에 쥐여 줬지만, 그녀의 손은 맥없이 물병을 놓치길 반복했다. 이대로 놔두기도 뭣해서 유현은 우선 권지아의 몸을 천장을 향하도록 뒤집었다. 몸이 가벼워서 그런지 딱지마냥 쉽게 뒤집혔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잠에 빠져든 건 아닌데,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아니, 무슨 컬렉터가 술에 취해요. 진짜 지나가는 사람들이 웃겠네.”
술을 많이 마셨다지만, 컬렉터가 아닌가? 대체 술이 얼마나 약하면 컬렉터가 돼도 저 정도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일반 사람 중에서는 알코올의 향만 맡아도 취하는 사람이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끄응. 이대로 마시게 하면 다 흘리겠네.’
유현은 혹시나 빨대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살폈다. 다행히도 물병과 같은 장소에 빨대가 놓여 있었다. 유현은 물병의 뚜껑을 따서 반쯤 비우고, 빨대를 꽂아 그대로 권지아의 입에 물려줬다.
“마셔요.”
“우응.”
“여기 빨대 무시고.”
쪼옥. 쪼옥.
권지아는 입에 빨대가 닿자 마치 젖을 먹는 아기처럼 물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유현은 그 모습을 보니, 뭔가 묘한 기분을 느꼈다.
권지아는 미인이었고, 그런 그녀가 술에 취한 채 이렇게 자신이 주는 물을 빨대로 받아 마시고 있는 이 행위 자체가 어딘지 모르게 배덕감을 느낀 것이다.
쪼옵. 쪼옵.
“……다 마셨어요?”
“으응. 콜록! 콜록 콜록!”
마시면서 대답했기 때문일까, 그녀는 순간 사레가 들렸는지 기침과 함께 물을 뱉었다. 그 모습을 본 유현은 한숨을 내쉬며 빨대를 회수, 곧바로 수건을 가져와 그녀의 얼굴을 닦아 줬다.
“아, 진짜. 칠칠맞게 왜 그래요.”
“우응.”
“가만히 있어 봐요.”
권지아는 투정을 부리는 것 같으면서도 유현의 손길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렇게 유현은 그녀의 얼굴을 닦아 준 다음에 혹시라도 다시 사레가 들리지 않을까, 그녀의 자세를 바르게 고정해 줬다.
새액. 새액.
편한 자세가 돼서 그런지 권지아는 그대로 고른 숨을 내뱉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그 모습을 본 유현은 어이가 없었다. 취기에 이어, 이제는 잠이라. 갈수록 가관이었다.
‘아니. 그래도 주정을 부리지 않아서 다행인가?’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이게 주정이지, 뭐가 주정일까 싶었다.
유현은 이대로 놔두면 안 되겠다 싶어서 그녀를 깨우기로 했다.
“지아 씨. 지아 씨 일어나 봐요.”
권지아의 어깨를 쥐고 흔들어 봤지만, 그녀는 깨지 않았다. 아무래도 깊은 잠에 빠져든 것 같았다.
몇 번 더 흔들어 봤지만, 기미조차 보이지 않아 결국 유현은 깨우는 것을 포기했다.
이 상태로는 사무실까지 데려갈 수 없었다. 괜히 또 그녀를 등에 업었다가 겨우 피한 대참사(?)를 또 초래할까 봐 겁이 났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유현은 술을 마시자고 했던 자신을 저주하며 고요히 수면을 취하는 권지아의 얼굴을 살폈다.
“예쁘긴 진짜 예쁘네.”
이는 빈말이 아니라 진짜였다. 권지아는 사람들의 시선을 확 끌어모을 정도의 미인이었다.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든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잠자는 숲속의 공주였다.
생각해 보면 강혜림도, 백서련도 미인이었지.
유현은 자신이 어쩌다 이런 미인들 사이에 끼어서 일을 하게 됐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저 아는 사람 하나씩 잡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외모로 보고 뽑은 게 아니라 전부 능력으로 뽑은 결과가 이거였다.
이러다 세 번째 컬렉터도 이 꼴이 나지 않을까 싶었다.
“돌겠군.”
유현은 고개를 저었다.
우선은 지금 상황부터 어떻게 해야 했다.
모텔의 방에 남녀가 단 둘이 침대에 누워 있다니. 그리고 한 명은 술에 떡이 돼서 인사불성이었다.
“…….”
유현은 잠시 권지아의 모습을 말없이 보다가.
‘드디어, 조용한 시간이 됐군.’
음흉하게 웃었다.
스윽.
유현은 권지아에게 손을 뻗었다. 순간, 권지아의 몸이 움찔거린 것 같았지만. 유현은 착각으로 치부했다.
그렇게 뻗어진 유현의 손은 권지아의 몸을 스윽 지나.
이불 끄트머리를 쥐고 당겨 권지아의 몸을 덮어 줬다.
“됐다.”
권지아를 이불로 덮어 준 유현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완벽해.’
유현은 권지아의 머리 위, 새롭게 해금된 책을 바라봤다.
그녀가 잠이 들었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조용한 공간.
지금이야말로 가장 독서하기 좋을 때였다.
* * *
다음 날 아침.
권지아는 아픈 머리를 거머쥐며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끄윽. 머리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지난밤의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술을 마신 것까지 기억했고, 유현과 무슨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무언가 말을 하려는 순간, 거기서부터 필름이 끊기고 말았다.
그 이후 떠오르는 것은 파편처럼 부서진 단편적인 기억들. 술에 취해 꾼 꿈인지, 아니면 실제로 겪은 일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음?”
권지아는 뒤늦게 낯선 장소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부 인테리어나 침대, 아무리 봐도 그녀가 알던 곳이 아니었다.
“……!”
권지아는 황급히 이불을 들추며 자신의 몸을 살폈다. 혹시나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았는지, 반사적으로 행동한 것이었다.
‘멀쩡해……?’
그녀의 옷은 어제와 달라진 점이 하나도 없었다. 누군가 손을 댄 흔적도 없었다. 권지아는 당혹스러워 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일어나셨어요?”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침대의 옆, 자그마한 목제 의자였다. 유현은 그곳에 다리를 꼬고 앉은 채 권지아를 보고 있었다. 자세만 보면 조금 전까지 책을 읽고 있을 거라고 착각했을 정도였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지?”
권지아는 불안감을 느끼며 그렇게 물었다. 그녀의 질문을 받은 유현은 어젯밤을 떠올리더니, 이내 먼 곳을 보는 시선을 향했다. 그의 눈빛은 어딘가 아연했다.
“……많은 일이 있었죠.”
“……저, 정말인가?”
권지아가 드물게 당황하며 묻자, 유현은 표정을 싹 바꾸며 피식 웃었다.
“아뇨. 농담인데요.”
“……너.”
“지아 씨가 하마터면 저한테 토를 할 뻔한 거나, 목마르다고 물 달라고 보채거나, 또 마시다가 사레가 들렸다거나. 뭐, 그런 일 밖에 없었어요.”
“……!”
유현의 말에 권지아는 지난밤의 일이 조금이지만, 떠오르고 말았다.
설마, 그게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권지아는 이불을 발로 뻥 차 버리고 싶은 기분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어딘가 수치스럽다는 듯 유현을 강하게 쏘아봤다.
“그……다음은……?”
마치, 이 이상 무언가를 말하면 네놈의 목을 효수해 버리겠다는 무언의 암시.
유현은 별거 아니라며 대답했다.
“없습니다. 조용히 잘 주무시더라고요.”
“……아무 짓도 하지 않았겠지?”
“저요? 제가 왜요.”
“…….”
저 태도를 보면 유현은 권지아를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은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권지아는 그 대답에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어딘가 묘한 불만이 차올랐다. 아니, 그렇다고 진짜 안 건드려?
“정신 차리셨으면, 일어나시죠.”
“그러지. 윽!”
침대에서 일어난 권지아는 이마를 타고 두개골 안쪽을 가로지르는 강렬한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지난밤 술을 너무 마신 나머지, 숙취가 제대로 온 것이었다.
이 정도 아픔은 그녀가 겪어 온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숙취로군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자, 이거 드세요. 숙취 해소제입니다.”
유현은 권지아에게 물약이 담긴 병을 내밀었다. 시중에서 일반인이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단번에 숙취를 날리는 [이야기]가 담긴 특효약이었다.
무려, 올림포스제 약이라 숙취 하나에는 효과가 아주 좋았다. 참고로 차원 상점에서의 가격은 100TP였다.
“기분은 어떠신가요?”
“약효가 좋군. 두통이 사라졌어. 고맙다.”
“별말씀을. 자, 준비 다 되셨으면 나가죠.”
“응?”
“‘응?’이라뇨. 지금 아침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유현의 표정은 평소보다 훨씬 더 밝았다.
“일하러 갈 시간이거든요.”
지난 3일간 이어진 그의 휴식 프로젝트는 오늘부로 끝났다.
* * *
‘이상한 녀석.’
권지아는 자신보다 앞서서 걷는 유현의 뒷모습을 보며 그렇게 평가했다.
‘겁쟁이. 쫄보. 고자.’
감정이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요동쳤다. 그것은 지난밤 추태를 부린 자신을 향한 것도 있지만, 모텔까지 데려가 놓고, 정말 손도 안 댄 유현의 행동에도 있었다.
분명, 유현이 자신을 손대지 않은 것은 그가 단순히 욕망에 휘둘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권지아는 어딘가가, 그런 유현의 태도에 불만을 품은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진짜 손을 안 댔다고?
‘그보다, 어제 분명 그랬었지?’
-예쁘긴 진짜 예쁘네.
어젯밤을 상기시키자, 함께 딸려오듯 떠오른 기억.
분명 꿈이라 생각했고, 그 말을 들으면서 몸을 움찔 떨었던 기억이 났다. 설마, 그게 꿈이 아닌 현실이었을 줄이야.
아직도 그 말을 중얼거리는 유현을 떠올리면 그녀는 가슴이 조금이지만, 콩닥거리며 뛰는 걸 느꼈다.
‘예쁘다니…….’
한평생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별로 자각이 없던 그녀였다.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먼 전생에서 그녀의 외모를 추앙하던 사람들은 많았지만, 권지아는 그것을 대단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는 듯, 사람들의 경외를 등에 업고 환상체와 싸웠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유현의 그 한마디가, 수많은 사람의 칭송보다 더욱 크게 다가오는 것은.
‘정신 차리자.’
권지아는 머리를 흔들었다. 예쁘니 뭐니, 그것은 그녀와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연애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이 지구를 종말로부터 지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잊고 있었던 목적을 찾는 것.
오직, 그 둘 뿐이었다.
충분히 쉬었고, 충분히 놀았다. 이제는 쉰만큼 더더욱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렇게 다짐하는 권지아였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앞서가는 유현의 뒷모습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 * *
유현은 어젯밤 권지아의 새로운 책을 읽으며 아쉬움을 곱씹었다.
‘새로운 책이라 해서 뭔가 다양한 정보가 있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도 영 꽝이었어.’
물론, 전에 읽었던 것과 비교하면 몇 가지 사상세계에 대한 세세한 정보가 추가된 건 맞았다. 하지만 유현이 원하던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권지아의 능력과 관련된 근원에 대한 정보였다.
무엇에 의한 회귀인가? 그 회귀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 힘은 또 어디서 얻었는가?
권지아가 지닌 무한회귀라는 힘에서, 유현은 자신의 것과 비슷한 동류의 냄새를 읽어 냈다.
‘언젠가 알게 되겠지.’
유현은 조바심 내지 않았다. 언젠가는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기로 했다.
“다들 좋은 아침! 모두 오늘도 즐거운 일거리를 시작합시다!”
유현이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평소보다 확실히 텐션이 올라간 목소리에, 평소라면 백서련이 지적을 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 정겨운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다른 손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현을 알아본 상대가 화색을 띠었다.
“강유현 텔러님 되십니까?”
“손님이 있었군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는 남성은 푸근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그의 옆에는 보좌로 보이는 남성 한 명이 서 있었다.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유현에게 악수를 청했다.
얼핏 보면 평범한 손님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백서련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고, 멋대로 사무실에 들어온 것만 봐도 유현은 그가 범상치 않은 사람임을 알아차렸다.
“허허허. 이거 만나서 반갑습니다. 국회 의원 권동진이라고 합니다.”
그의 예상대로, 찾아온 손님은 상당한 거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