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130화
유현이 본 것은, 권지아가 지닌 수많은 책 중 일부의 변화였다.
‘책의 일부의 잠금이…… 해제됐어?’
유현에게는 상대방의 정보를 책으로 보는 특수한 능력이 있다.
상대방의 태생, 성별, 나이를 기본적으로 알려 주며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겪어 온 과거의 일들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오직 유현의 눈에만 보이며, 상대방은 유현이 자신의 책을 들여다본 다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능력이었다.
‘그래. 분명, 그런 능력이지.’
어떻게 보면 사기라도 불러도 무방한 능력이지만, 만능은 아니었다. 우선 책을 보고 싶으면 상대방이 시야 안에 들어와야 한다. 그래야 책을 챙겨서 보거나 할 수 있다.
그 이상으로 가장 큰 문제는, 모든 책을 다 펼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최소 황금빛 책, 지금의 유현보다 격이 훨씬 더 높은 ‘이야기’가 담긴 책은 읽을 수 없었다.
‘지아 씨의 책도 내가 수십 권을 빌렸지만, 그중 읽을 수 있는 것들은 정해져 있었어.’
그리고 그러한 책들에 담긴 정보는 별거 없었다.
정말로 중요한 책들은 잠금(lock)이 걸려 있다. 읽으려 해도 책이 펼쳐지지 않으니, 읽을 수도 없었다.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잠금이지만, 지금은 책 바깥에 희미하게나마 쇠사슬이 싸여있는 것이 보였다.
대리로 승진하고 겪은 작은 변화였다.
‘그런 사슬의 일부가 사라졌다?’
권지아의 책은 수백 권이 넘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책이 떠다니는데, 권지아만 책장이었다.
순서대로 꽂힌 책들.
첫 권부터 거의 600권 가까이 되는 서책. 그중에서 유현이 읽을 수 있는 건 뒤에서부터 약 40권 정도.
그 외 나머지는 전부 잠금이 걸려 있었을 텐데, 그 일부가 해금됐다.
유현은 그 이유를 고민했다.
‘이유 없이 사슬이 해금됐을 리가 없어. 분명, 모종의 계기가 있다. 내가 대리로 승진한 영향이 이제야 발동한 건가?’
유현은 고개를 저었다. 대리로 올라가며 존재의 격이 증가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권지아의 책을 읽을 수 없었다. 마치 책 자체가 유현에게 보여 주는 것을 거부하는 강한 의지를 지닌 것처럼 말이다.
‘다른 변화라고 한다면, 지아 씨의 마음가짐인가?’
유현이 가장 유력하게 생각하는 근거였다. 유현은 저 책이 권지아의 마음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유현에게 보여 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책도 똑같다고 판단했다.
그러다 오늘 서로 밥을 같이 먹고, 영화도 보고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권지아는 유현에게 마음을 열었다. 전부가 아닌 그저 일부였지만, 그것만으로 그녀가 지닌 책의 일부의 사슬이 해제된 것이다.
‘잠금된 책은 단순히 격만 올린다고 해서 무조건 읽을 수 있는 게 아니었어.’
유현은 자신의 능력의 새로운 사용법을 깨달았다.
단순히 힘을 키우고 격을 올린다고 해서 모든 책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누군가가 거부를 해서 읽을 수 없는 것도 있었다.
그럴 때일수록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서로 공감을 해야만 표지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런 거였나?’
의도치 않은 상황에서 드러난 새로운 깨달음에 유현은 이걸 기뻐해야 하나, 당황해야 하나 살짝 고민했다. 그러나 뒤늦게 지금은 권지아와 휴가를 즐기는 중인 걸 깨닫고 책에 관한 것은 잠시 뒤로 미루기로 했다.
“무슨 일 있나?”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아 씨. 영화도 다 봤겠다, 이제 다른 걸 하러 가죠.”
“뭘 할 거지?”
“혹시, 게임 좋아하십니까?”
유현의 물음에 권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을 잊었어도 이것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권지아의 삶은 게임과 그 어떠한 접점도 연관도 없었다.
“게임은 아시죠?”
“그것까지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라. 대충은 안다. 다만, 할 줄은 모르지.”
“그럼, 잘됐네요.”
“……?”
“오늘 한번, 배워 보죠.”
유현이 권지아를 끌고 간 곳은 게임 센터였다.
곳곳에서 시끌벅적한 전자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반짝이는 불빛이 축제 속 불꽃놀이처럼 화려하게 확산했다. 멍하니 보면 눈이 아플 정도였다.
게임 센터를 처음으로 가 본 권지아의 첫 평가는, 상당히 어수선하고 난잡한 곳이었다.
“이런 곳이 무슨 재미가 있지?”
“해 보면 알 겁니다.”
게임 센터를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보통 이 화려하고, 시끄러운 분위기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한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러하듯, 이런 분위기에 적응하고 그 안쪽에 숨겨져 있는 즐거움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때는 또 반응이 달라진다.
“어때요? 한번 해 보실래요?”
세상이 변해도, 이런 게임들은 여전히 일반 사람들이 즐기기에 적당한 것들이었다. 오히려 [이야기의 힘]을 받은 몇몇 게임기는 더욱 발전해서 이전과 다른 상당한 현실감을 더욱 올려 주기도 했다.
유현은 권지아에게 모형 총을 건넸다. 2명이 함께 할 수 있는 액션 게임으로, 모형 총으로 좀비들을 다 쏴 죽이는 간단명료한 게임이었다.
“흥.”
권지아는 코웃음을 치며 총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도전장을 내민 유현에게 회귀자 선배로서 그 건방진 콧대를 한바탕 꺾어 줄 생각이었다.
“시작하지.”
“그러죠.”
미리 환전해 온 동전을 넣고 게임을 시작했다.
그렇게 5분 뒤.
“오.”
“…….”
스테이지1 보스를 쓰러뜨리고 얻은 스코어가 갱신됐다.
1P 강유현은 252,000점으로 1위.
그리고 2P 권지아는.
[2P: 0점]
“음. 어. 음…… 뭐, 처음엔 다 그러죠.”
유현은 어색한 위로를 건넸다. 사실, 처음이라 하더라도 권지아의 상태는 조금 심각했다. 어지간히 못 하지 않는 이상 대충 쏴도 점수 몇백은 우습게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권지아는 한 발도 맞추지 못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유현이 한 번도 죽지 않았을 때, 그녀만 무려 코인을 7개나 먹었다.
유현은 자신이 그렇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권지아의 처참한 상태를 보니 사실 자신이 게임의 고수가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원래 또 이런 게임이 초보자한테는 어렵거든요. 좀 더 쉬운 거로 할 까요?”
스테이지2는 스테이지1보다 더 어렵다. 권지아가 과연 더 난이도 높은 다음 단계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유현은 그녀를 배려해서 다른 쉬운 게임을 하자고 말했지만, 권지아의 시선은 자신의 처참한 점수에 못 박힌 듯 떠나지 않았다.
“지아 씨?”
“동전 넣어라.”
“네?”
“동전, 넣으라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권지아의 눈빛은 인생의 숙적을 만난 것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이런.’
설마하니, 이런 곳에서 그녀가 불이 붙을 줄 몰랐다. 회귀자라면 오히려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대처할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안 된다는 건 그만큼 권지아가 화가 났다는 소리였다.
“……그러죠.”
이렇게 되면 말려도 도통 듣지 않겠군.
유현은 그녀를 설득하는 걸 포기하고 동전을 넣었다. 그렇게 2번째 스테이지가 시작됐다.
[1P: 345,000점]
[2P: 0점]
그 최후는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커진 격차였다.
그나마 위안을 삼으라고 한다면, 스테이지1에서 7코인을 소모한 권지아가 이번엔 6코인을 소모한 정도?
하지만, 그녀는 정말 못해도 너무 못했다. 검을 쓰는 사람이라 총이 익숙지 않다고 하더라도 1발도 맞추지 못하는 것은 재능이 없는 걸 넘어서 무슨 저주라도 받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한 번 더?”
“더. 이번엔 진짜 안 봐준다.”
안 봐준다는 게 자신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게임을 말하는 건지.
유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권지아는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3번째 스테이지가 시작됐다.
[1P: 432,000점]
[2P: 35,000점]
이번엔 변화가 생겼다. 권지아의 점수가 오른 것이다. 심지어 스테이지2에서 6코인을 썼는데, 이번에는 4코인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다음.”
[1P: 521,000점]
[2P: 148,000점]
난이도가 높아진 스테이지4. 권지아는 3코인만 쓰고 점수가 더 높아졌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한지, 계속 최선을 다해 게임에 집중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유현은 권지아가 어째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아주 약간이지만 알 것 같았다.
‘이건 재능 따위가 아니야.’
권지아는 회귀자지만, 그녀가 지닌 본연의 재능은 범재의 것보다도 훨씬 더 뒤떨어졌다.
굳이 말한다면, 권지아는 재능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러니 회귀라는 그런 사기적인 특성을 지니고도, 이렇게 무수한 삶을 반복한 것이겠지.
하지만, 유현은 그녀의 모습에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등골을 타고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부족한 재능을 어떻게든 꾸역꾸역 따라잡는 행동. 노력과는 달라.’
단순히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 아니었다. 그녀가 보여 주는 모습은 노력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더 무겁고, 더 집요하고, 더 처절한.
‘광기.’
노력과 집착을 넘어서, 자신의 모든 혼과 몸을 불사르는 광기.
그것이 재능이 없는 권지아가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런 사소한 게임에서조차 그녀의 면모는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렇게 마지막 8스테이지가 끝나고.
[1P: 1,324,000점]
[2P: 1,352,000점]
마지막 스코어는 권지아의 승리였다.
“흠. 별거 아니군.”
“…….”
“처음에는 손이 익지 않아서 그랬는데, 꽤 쉬웠다.”
권지아는 마지막에 새겨진 스코어를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 스스로 뿌듯한 것 같은 태도였다.
“지아 씨. 그거 아십니까?”
“뭐지?”
“저 이거 하는 동안 원 코인이었는데, 지아 씨는 24코인이었다는 걸요.”
“…….”
권지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모형 총을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놓고, 등을 돌려 자리를 떴다.
“지아 씨? 저기요 지아 씨?”
“시끄럽다! 다른 게임이나 적당한 거 추천이나 해 봐라.”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한 그녀의 얼굴은 게임 센터의 불빛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부끄러워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꽤나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 * *
게임 센터에서 충분히 즐긴 두 사람은 볼링장에서 내기 볼링까지 쳤다. 물론 내기가 걸린 이상 유현도 봐줄 생각이 없었고, 재능이 바닥을 기는 권지아를 상대로 멋들어진 승리를 따냈다.
내기는 저녁값을 대신 내는 것.
분식집에서 돈가스를 써는 권지아는 어딘가 상당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이기지 못한 게 그렇게 마음에 걸리십니까?”
“뭐가.”
“뚱하시기는. 솔직히 빈말로라도 지아 씨 잘했다고 못 하겠던데요.”
“뭐라?”
그녀의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그러나 유현의 말은 사실이었다. 볼링을 할 때 권지아의 실력은 바닥의 바닥이었다. 그나마 계속하니 좀 나아졌지만, 그래도 처참한 건 그대로였다.
그래서 그녀는 졌고, 이렇게 분식집에서 저녁 비용을 대신 내게 된 것이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짜증이 났는데, 유현까지 저렇게 말하니 이쯤 되면 화가 난다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말 잘했다. 내가 못해서 졌다고 치지. 그런데 왜 저녁은 분식집인가?”
“왜요?”
“왜라니…….”
“분식집이 뭐 어때서요.”
유현이 뻔뻔하게 묻자 권지아는 말문이 턱 막혔다. 아니 그걸 말해 줘야 아나? 점심에는 국밥, 저녁에는 분식집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남녀가 같이 식사를 하는데, 너무 저렴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맛은 있다만. 권지아는 썰어 놓은 치즈 돈가스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혹시, 분위기 좋은 곳이라도 생각했어요?”
유현이 가볍게 꺼낸 말은 권지아의 속마음을 날카롭게 푹 찔러 왔다.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살짝 떨었다.
“그게 무슨…….”
“아뇨. 왠지 와인 잔 부딪치는 걸 원하시는 눈빛 같아서.”
“그런 거 아니다.”
“그러면 뭐, 어쩔 수 없고요.”
“그래도…….”
권지아는 슬쩍 유현의 눈치를 보더니, 살짝 줄어든 목소리로 말했다.
“술 한잔은……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부끄러움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말하는 권지아의 모습에 유현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샐쭉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권지아가 먼저 저런 걸 권할 줄이야.
분명, 처음 봤을 때와 다르게 권지아는 변했다.
그리고 지금도 변해 가고 있었다.
“뭐, 뭐가 그렇게 웃긴 거냐.”
“아뇨. 웃긴 게 아니라, 안 그래도 술이라도 한잔하려고 했습니다. 좋습니다. 2차 가죠.”
“기다려라, 아직 다 안 먹었다.”
권지아는 황급히 몇 조각 남지 않은 치즈 돈가스를 해치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