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129화
“가,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딱 봐도 오늘은 지아 씨 차례라 온 건데, 뭘 모릅니까?”
이미 모든 걸 눈치챈 유현이 먼저 말을 꺼내자, 권지아는 꽤나 당황스러운지 말을 더듬었다.
“아니, 나는 그게…….”
“그럼, 가지 말까요?”
“…….”
권지아는 그것만큼은 아니라고 말 못 했다.
그 모습에 유현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권지아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그녀는 저항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저 자신은 그래도 자존심상, 말은 안 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위안으로 삼았는지 유현을 따라왔다.
“자, 안경 쓰시고요.”
유현은 각인을 새긴 안경을 권지아에게 내밀었다. 일전에 강혜림과 함께 나갈 때 착용한 물건이었다. 권지아 또한 최근에 너무 이목을 받은 탓에 이걸 쓸 필요가 있었다.
권지아는 순순히 안경을 썼다.
‘음. 별로 이미지가 안 변하네?’
강혜림은 안경을 쓰면 어딘가 차분한 문학소녀다운 느낌이 있었지만, 권지아는 그 반대였다. 안경을 써도 이미지의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카리스마가 넘쳤다. 외적인 변화로는 절대로 숨길 수 없는 아우라 때문이었다.
‘그래도 예쁜 사람은 뭘 해도 예쁘긴 하구나.’
권지아의 외모는 여전히 사기적인 거라서 안경을 쓴 그녀의 모습은 마치 성공한 여성 CEO 같았다. 하지만 정작 밖으로 끌려 나온 권지아의 행동은 평소와 달랐다.
“어디 가고 싶은 곳 없으세요?”
“음? 아니, 그게…….”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망설였다. 강혜림이나 백서련은 그래도 본인이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의지를 비쳤는데, 권지아는 그러지 않았다.
분명 자신의 차례라 유현과 나온 건 맞았지만, 그 이상까지 생각하지 않은 것이었다.
정확히는 하지 못한 것에 가까웠다.
“뭘 하면 되는지, 나는 모르겠다.”
평소와 다르게 권지아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그녀는 너무 오랫동안 이런 걸 잊고 지냈다. 갑자기 휴식을 취하고 어딜 놀러가자고 해도, 어디를 가서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그마한 목표조차 세우지 못했다.
유현은 그런 권지아를 탓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움직이던 그녀에게 이런 선택지를 주는 것부터가 가혹한 처사였다.
“그러면 지아 씨는 제가 리드하면 되겠네요.”
그러니, 자신이 그 길을 알려 주면 됐다.
“지아 씨는 저를 잘 따라와 주시면 되고요.”
“그래도 괜찮겠나?”
“절 신경 써 주시는 건 고마운데, 솔직히 지아 씨의 상황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거든요?”
그녀는 유현보다 더 많은 세월을 겪어 왔다. 그녀의 책들은 대부분이 잠금이 걸려 있어서 읽을 수 없었지만,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는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감정이 마모될 대로 마모된 무한 회귀자. 최근에는 그나마 상태가 나아졌지만, 유현이 보는 권지아의 평가는 아직 이랬다.
겉으로는 강함을 포장하지만, 언제 어디서 무너질지 모르는 유리성. 그게 권지아였다.
“자. 갑시다.”
그러니 이번에는 유현이 권지아에게 선행을 베풀 차례였다.
평소라면 고집을 부리거나 틱틱 거렸을 권지아도 순순히 유현의 말을 들었다.
“어디로 갈 거지?”
“흐음. 일단, 밥부터 먹어야겠죠?”
“밥?”
그 순간이었다.
꼬르륵!
“……!”
권지아의 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녀는 황급히 유현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빨갛게 달아오른 귓불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유현은 배려 차원으로 굳이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았다.
“제가 맛있는 가게 하나 압니다.”
“……그러지.”
권지아는 유현의 배려를 거절하지 않았다.
* * *
유현이 이번에 권지아를 데리고 온 곳은 국밥집이었다.
좁은 가게였지만, 식사 시간이 아니라서 두 사람이 앉을 자리는 충분히 있었다. 권지아는 어딘가 정겨움마저 느껴지는 국밥집 내부의 풍경을 보더니,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왜 그러십니까?”
“……보통 남녀가 식사하는데, 국밥집을 가나?”
아무리 회귀자라 하더라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미쳤다.
그녀가 뭘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지식은 있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어디 근사한 레스토랑 같은 데서 스테이크를 썰지 않던가?
유현은 정작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국밥이 뭐 어때서요. 든든해서 먹기 좋은데. 가성비도 좋고요.”
“…….”
분명, 유현의 말이 맞다. 국밥도 딱히 나쁜 음식이 아니다. 오히려 가격 대비 효율로 따지면 가성비가 아주 좋았다.
하지만, 기분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권지아의 머리 안쪽에서 회귀자로서의 차가운 이성과 여성으로서의 감정이 치열하게 싸웠다. 그 때문인지, 그녀는 지금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
그 틈에 유현은 식탁의 세팅을 빠르게 끝내고, 주문까지 끝마쳤다.
“아.”
권지아가 뒤늦게 탄식의 소리를 내뱉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이미 늦었다.
그녀는 포기하고 잠자코 유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참 이상하군.”
“뭐가요?”
“너는 나와 같은 부류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끔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너는 뭐라고 해야 할까,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지.”
“가령, 어떤 부분이요?”
“흠. 뭐라고 말하기 애매하군. 그냥, 평소의 행동이…….”
“요령이 좋다?”
“……요령인가?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권지아가 본 강유현은 어딘가 신기한 사람이었다.
분명, 저 남자는 뒤틀렸다. 그런 세상을 보고 겪어 왔는데, 그러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수백 번의 회귀를 겪은 권지아라서 알아볼 수 있는 동류로서의 감이었다.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유현은 아주 멀쩡했다.
그의 행동, 사람을 대하는 태도, 세상을 보는 시선. 그 모든 것이 아주 올바르고 이상적인 롤 모델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게 연기냐고 묻는다면 또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그렇게 소소한 것에 즐거워하는 모습도 진짜지만, 내면에 숨겨진 모습도 진짜지. 너는 대체 뭐지?”
“그게 그렇게 신기한가요?”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흐음. 그런가요.”
유현은 딱히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어떤 게 진짜 자신이냐는 물음은 꽤나 애매모호하고 철학적인 것이었으니까.
“저는 그래도 전부 다 저라고 생각하는데요.”
적들을 상대할 계획을 꾸밀 때도, 사무실의 동료들에게 장난을 칠 때도, 비정하게 누군가를 버릴 때도,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할 때도.
전부 자기 자신이었다.
“사람에겐 한 가지 면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악인이라고 항상 악행만 벌이는 건 아니다.
그것은 선인이라고 해서 항상 착한 일만 하는 건 아닌 것과 일맥상통했다.
“지아 씨는 무슨 착각에 빠져 지내시는 거 같아요. 제가 지아 씨처럼 끔찍한 미래를 겪은 사람인 건 맞는데, 그렇다고 마땅히 ‘그랬으면 이래야 한다’라는 건, 너무 일방적인 선입견에 지나지 않거든요.”
“…….”
유현의 말에 권지아는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아무래도 나도 모르게 너에게 내 잣대를 들이민 것 같다. 미안하군.”
“아뇨.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태도야말로, 지아 씨에게 나름 필요한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나한테?”
“지아 씨는 항상 철저하고, 확실하게 살려고 하시죠. 분명 그것은 이제는 잊은 목적을 위해서인 것도 있지만, 특성의 영향도 적지 않게 있을 겁니다. 지아 씨에게는 여유가 없어요.”
“여유라…….”
“그렇게 남을 멋대로 평가하는, 흔히들 보통 사람 같은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지 마세요. 지아 씨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아직 지아 씨가 망가지지 않은 사람으로서의 면모가 남아 있다는 소리니까요.”
어느덧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국밥이 나왔다.
유현은 수저를 들며 말을 이었다.
“그것에 부끄럽다거나 동요하지 마세요.”
“하지만, 나는…….”
“지금은 분명, 혼란스러운 거 이해합니다. 저와 지내면서 지아 씨도 나름 느꼈을 테니까요. 이전 회차와는 지금이 확실히 뭔가 다르다고.”
유현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그것은 마치 아직 들여다보지 못한 그녀의 속마음을 낱낱이 파헤치는 것 같았다.
“지아 씨는 아직 변화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해서 약간 혼동이 생긴 겁니다. 그러지 말라고 쉽게 그만둘 수는 없는 거라, 자연히 시간이 해결해 주길 빌어야죠.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명심하세요.”
“뭐지?”
“자신의 신념을 잊지 말 것.”
“…….”
신념인가?
권지아는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항상 생소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과 더불어서, 마치 꼭 자신이 지켜야 할 것 같은 그런 모순적인 감정이었다.
그녀는 아직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달성해야 할지에 대한 확고한 목적이 없었다. 그것을 위하고자 하는 신념도 없었다.
과거에는 가지고 있었겠지만, 오랜 세월을 거쳐 오며 그것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퇴색되어 버렸다.
“나는, 잘…… 모르겠다.”
그것을 아주 잘 인지하고 있기에 권지아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드물게 회귀자의 특성을 밀쳐 내고, 그녀의 ‘본심’이 흘러나온 것이었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지금부터 찾으면 그만입니다.”
“내가 과연, 그래도 될까?”
“안될 건 뭐 어디 있습니까? 모르면 찾고, 없으면 만들면 됩니다. 세상에는 자기 신념도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런 놈들에 비하면 지아 씨는 선녀죠.”
유현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권지아에게 와닿는 충격은 그 반대였다.
말에 무게와 가치가 있다면, 유현이 방금 한 말은 권지아에게 눈부신 황금이었다.
그녀는 메마르고 상처만 가득해진 자신의 마음 어딘가에 유현의 목소리가 단비처럼 스며드는 걸 느꼈다.
잊어버렸다면 찾으면 된다.
못 찾겠다면 새로 만들면 된다.
분명, 그 과정은 순탄치 않을 것이다.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어질 정도로 힘들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누군가가 자신을 응원하고 길을 정해 준다는 것은.
꼭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렇군.”
권지아도 그걸 알기에 수저를 들어 올렸다.
“일단, 밥부터 먹지.”
“좋죠.”
둘은 그렇게 국밥 두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 * *
국밥집 다음으로 들린 곳은 영화관이었다.
“보고 싶은 영화는 없어요?”
“아는 게 없다.”
권지아의 지식은 대부분 사상세계와 컬렉터에 치중되어 있었다. 이렇게 일상적인 부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지식은 사실상 전무했다.
“그럴 줄 알고 미리 표를 끊어 놨죠.”
권지아는 그걸 왜 네가 멋대로 결정하냐는 항의의 시선을 보냈지만, 유현은 그것을 가볍게 무시했다. 어차피 저렇게 해도 그녀는 이미 유현이 멋대로 결정한 영화를 볼 것이다.
영화의 장르는 액션, SF였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영화의 주인공이 권지아와 상당히 흡사했다.
외계인이 들이닥친 지구. 그들에게 맞서려던 군인인 주인공은 의도치 않게 죽으면 회귀하는 능력을 얻게 된다.
처음에는 당황하면서도 주인공은 이 회귀 능력을 이용해 죽고, 죽고 또 죽어가며 적들과 싸운다.
그렇게 자신을 이해해 주는 여주인공을 만나고, 그녀를 살리기 위해 최후의 결전을 벌이고.
마지막 싸움에서 동귀어진의 공격으로 최후의 적을 쓰러뜨린다.
결말은 해피 엔딩이었다. 마지막에 외계인의 침공이 실패한 과거로 회귀하고, 주인공은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여성을 다시 만나며 웃는 거로 끝났다.
“…….”
처음에는 탐탁지 않았던 권지아도 중간부터는 영화에 몰입했다.
주인공의 처지가 자신과 비슷했기 때문일까?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 바깥으로 나오면서도 그녀는 살짝이나마 여운에 잠겨 있었다.
“으음. 결말이 나쁘지 않네요. 뭔가 딱 좋을 때 끝낸 느낌?”
“그런가.”
“그래도 좀 아쉽지 않을까요? 여주인공이랑 진짜 오랫동안 함께 싸워 왔는데, 여주인공은 그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잖아요. 뭔가 지금까지 이룩한 모든 것이 사라…… 아.”
유현은 그제야 자신이 영화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대상이 회귀자인 걸 떠올렸다.
“어, 음. 영화를 딱히 노린 건 아니었어요. 그저 이때 개봉한 것 중에서 블록버스터가 저거 하나뿐이라…….”
“나도 안다. 딱히 기분 나쁜 건 아니니, 걱정마라. 영화는 나도 재미있게 봤으니까.”
“지아 씨는 어땠는데요?”
“그냥, 공감도 가고…… 마지막이 상당히 여운이 있게 끝났지.”
그렇게 중얼거리던 권지아는 유현에게 불쑥 물었다.
“나도 그 주인공처럼, 언젠가 후련하게 웃는 날이 올까?”
“…….”
그 목소리는 어딘가 아연하고 애틋하게 느껴져서 유현은 순간이지만, 그녀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유현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녀의 안도시키려는 선의의 거짓말이 아닌, 진심을 다해서 말했다.
“분명, 그런 날이 올 겁니다.”
“그렇군.”
권지아에게는 그 대답만으로 충분했다.
“고맙다.”
“뭘요.”
여전히 딱딱한 말투의 감사였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마저 무겁게 포장할 수는 없었다. 유현도 그걸 알기에 별말을 하지 않았다.
‘어?’
그때 유현은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지아 씨의 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