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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128화 (128/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128화

유현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표정이 지워지기라도 한 사람처럼 무감정한 눈빛으로 백서련을 지그시 볼 뿐이었다.

장난을 걸었으면 뭐라도 반응이 나와야 할 텐데, 저렇게 진지하게 돌아오니 백서련이 오히려 민망해질 정도였다.

그녀가 농담이었다고 발을 빼려는 순간이었다.

꽈악.

유현이 오히려 발목을 쥔 손을 놓지 않았다.

“유, 유현 씨?”

“제가 좋다면요?”

“네, 네?”

“만약 이런 걸 좋아한다면, 그러면 어쩔 건데요?”

어? 어?

백서련은 머리가 하얗게 물드는 걸 느꼈다. 농담으로 꺼낸 말이었는데 설마 강유현이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스타킹을 신은 발이 취향이었나? 그런데 텔러한테 그런 취향이 있나? 아니면 단순히 이런 페티쉬가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이라서 좋은 게 아닐까?

“아, 아 그, 그게…….”

머리가 어지러워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백서련은 문득, 발목에 닿은 유현의 손길이 상당히 억세면서도 따뜻하다고 느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쿵쾅 뛰었고, 얼굴이 지나칠 정도로 빨갛게 물들었다. 백서련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거세게 지진을 일으켰다.

‘뭐, 뭐지? 이 느낌은?’

그 순간 백서련은 고개를 들어 올린 유현과 눈을 마주쳤다. 유현의 얼굴이 가까워지는 착각이 들었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실제로 유현은 점점 백서련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 어어? 뭐야뭐야뭐야뭐야.’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 백서련은 그 모습을 보고 숨을 집어삼키더니,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뒤이어질 과정(?)을 생각하며 잔뜩 어깨에 힘을 주고 긴장하는 순간.

따악!

그녀의 이마를 타고 흐르는 강렬한 통증이 백서련을 현실로 이끌었다.

“아얏!”

이마를 움켜쥔 백서련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동자로 유현을 노려봤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는 무언의 항의에 유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킥킥거렸다.

“서련 씨가 장난치기에 저도 장난 한번 쳐 봤습니다. 왜요? 그러면 안 됩니까?”

“이, 이 씨. 진짜. 진짜 못됐어.”

이를 갈며 백서련은 앙증맞은 손으로 유현의 팔뚝을 퍽퍽 때렸다.

“못됐어, 못됐어. 진짜 못됐어.”

“아니, 서련 씨도 저한테 장난쳤잖아요. 아니면 뭐, 혹시 무슨 기대라도 하신 겁니까?”

“기, 기대요? 하! 기대는 무슨? 진짜. 착각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눈에 띄게 당황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유현은 작게 웃었다.

“알았어요. 조금 제 장난이 짓궂었겠죠.”

“조금이 아니거든요?”

“알았으니까, 어서 일어나세요.”

유현은 자연스럽게 백서련의 힐을 다시 신겨 줬다. 그 과정에 백서련이 다시 몸을 움찔거렸지만, 조금 전처럼 과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아직 부끄러움의 잔재가 남아 있는지, 여전히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는 괜히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유현을 흘겨봤다.

“유현 씨. 선수죠? 선수 맞죠?”

“무슨 선수요?”

“여자를 다루는 태도나 말투나, 완전 타고났는데요?”

“전 텔러라서 그런 거 잘 모르겠는데요.”

익살스럽게 대꾸하는 유현의 모습에 백서련은 재차 유현의 팔뚝을 툭툭 때렸다. 물론 그녀가 아무리 힘을 줘서 때린다고 한들 이미 강인한 육체를 지닌 유현에게는 가렵지도 않았다.

그래도 기분은 내주는 게 좋아서 유현은 일부러 아픈 척했다.

“아, 아아. 아파요. 때리지 좀 마세요.”

“안 아픈 거 다 알거든요? 유현 씨가 사상세계 돌아다니면서 얼마나 되는 텍스트 포인트를 얻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아. 들켰네.”

“들켰네? 들켰네에? 와. 진짜. 완전 어이없어.”

“솔직히 서련 씨가 먼저 장난 걸었잖아요. 전 받아친 죄밖에 없습니다. 정당방위에요.”

“에휴. 그래요. 제가 무슨 말을 하겠어요. 다 올이 나간 스타킹 잘못이지.”

“와. 끝까지 자기 탓 안 하는 거 봐. 스타킹에는 죄가 없어요.”

“지금 스타킹 변호하는 거예요? 진짜 스타킹 좋아하시나 보네. 하나 드릴까요?”

“됐거든요?”

백서련은 틱틱거리면서도 유현의 곁에 서서 그의 팔을 꼬옥 쥐었다.

“그래도…… 그, 사 준다는 건 거짓말 아니죠?”

“…….”

“뭐예요. 왜 대답이 없어요?”

“네? 아뇨. 물론 그건 농담이 아니죠.”

너무 갑작스럽게 훅 들어온 말에 유현은 자기도 모르게 멍때리고 말았다.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하자, 백서련은 만족스러운 듯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적당히 쇼핑을 끝내고 나자 시간이 어느덧 오후 3시를 넘어갔다.

둘은 아울렛을 나와 다시 차에 탔다.

“이제 끝인가요? 사무실로 돌아가실 거?”

“흐음. 그래도 오늘 하루는 제가 유현 씨를 대여했잖아요. 바로 돌아가기는 좀 그런데.”

조수석에 앉은 유현은 어이를 상실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무슨 노예상에게 팔려 온 노예처럼 말하지 말아 주실래요?”

“노예 맞잖아요. 일하는 노예.”

“또 그렇게 말하니, 맞는 말 같기도 하고.”

유현이 아리송해 하고 있을 때 백서련이 다음 행선지를 정했는지, 곧바로 핸들을 틀었다.

“갑자기 뭔가 떠올랐나 보네요?”

“네. 정했어요.”

“어디로 가게요?”

“비. 밀.”

장난스럽게 윙크를 하는 백서련을 보며 유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머리핀을 새로 한 그녀의 모습은 이전과 사뭇 달랐지만, 여전히 행동에는 아직 앳된 티가 많이 남아 있었다.

유현은 조수석의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직 썬 코팅이 되지 않은 유리창 너머로 여과되지 않은 서울의 풍경이 보였다.

여유를 가지고서 그 모습을 보니,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정말로, 돌아오기는 했구나.’

이미 몇 번이고 과거로 왔다는 걸 알았지만 이렇게 평화로운 장소에 서서 보는 풍경은 또 다른 느낌이 있었다.

치솟은 건물들은 한때 콘크리트와 철로 이루어진 비석이라 생각했다.

과거의 유현에게 서울은 무기질적이고 감정이 없는 강철의 숲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면 저 거대한 구조물의 안쪽은 생명력이 넘쳐 있었다.

인류의 문명이 번영했다는 것을 존재 자체만으로 보여 주는 상징.

그것을 다시 두 눈에 담게 될 거라고, 그때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평화……인가?’

지금이 평화롭냐고 물으면 분명 그렇진 않을 것이다. 분명, 지금의 세상 어딘가에는 여전히 분쟁과 싸움이 남아 있다.

사람들은 탐욕적이고 가식적이며, 제 욕망과 이익을 위해서만 활동한다.

종말로부터 돌아온 이 세계는, 그때 그리워했던 것처럼 이상적인 곳이 아니었다.

‘그때는 정말 이때가 평화롭고, 살기 좋다고 생각했었지. 사실, 보고 싶은 것만 봤던 것이었을 뿐이었는데도 말이야.’

그러나 지금 이렇게 드라이브를 하는 조수석에 앉아 바라보는 세계는 또 달랐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도시의 풍경은 분명, 유현이 가장 이상적으로 바라던 세계의 모습이기도 했다.

“도착했어요.”

얼마나 달렸을까?

백서련이 유현을 이끌고 도달한 곳은 바로 인천 앞바다였다.

유현은 조수석에서 내렸다. 백서련은 이미 먼저 내려서 바다가 보이는 부두 앞까지 뛰어가고 있었다.

유현은 하는 수 없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어느덧 해가 저물기 시작하고 있었다.

“유현 씨도 와서 저거 봐 봐요.”

“갑자기 바다는 어쩐 일이에요.”

“왜요? 싫어요?”

“그냥 궁금해서요.”

“한 번쯤은, 이렇게 모든 게 확 트이는 모습을 보고 싶었거든요.”

백서련의 말대로 인천 앞바다는 확실히 꽉 막힌 도시의 풍경과 대척점에 서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는 아니었다. 섬이 있었고 바다 위에 떠다니는 어선들이 있었다.

그래도 소금 짠 내를 담은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다 보면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됐다.

“…….”

“…….”

둘은 그렇게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봤다.

바람에 밀려 세월처럼 다가오는 파도가 방파제와 부딪쳤다. 새하얀 포말이 일어나며 내는 소리가 함성처럼 들려왔고 또 함성처럼 멀어졌다. 눈 부신 빛이 바다 위에 하얀 거울처럼 바스러지듯 깨지며 지평선 너머로 함몰됐다.

어느덧 해가 기울고 하늘이 붉게 타올랐다. 노을이었다.

반대쪽 하늘에서 남청색 빛이 몰려왔고 저무는 태양은 최후에 연홍색 빛을 토하며 구름을 물들였다.

얼마나 이렇게 서 있었을까?

1시간? 2시간?

대자연을 목도하는 것은 그런 시간마저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덧 노을마저 사라져 가자 유현은 백서련의 어깨를 툭 쳤다.

“끝났네요. 움직이죠.”

“네? 아, 네. 그래요. 내 정신 좀 봐.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

“저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네요.”

“히힛. 바닷바람을 처음 맞을 때는 상쾌한 줄 알았는데, 지금은 묘하게 찝찝하네요. 소금 때문인가? 돌아가서 바로 씻어야겠어요.”

그래도 막상 이대로 떠나기는 아쉬워서, 둘은 바다가 보이는 식당에서 저녁 끼니를 때웠다.

백서련은 술을 마시고 싶어 했지만, 운전을 해야 해서 결국 입맛만 다시며 다음 기회를 노렸다.

“칫. 아쉽다. 원래 이런 곳에 왔으면 소주를 마셔야 하는데.”

“꽤나 주당이셨나 봅니다?”

“아뇨. 사실 못 마셔요. 그래도 그런 게 있잖아요. 묘하게 술이 당기는 날. 저는 그게 딱 지금이라 생각하거든요. 유현 씨는요?”

“전 텔러인데요. 소주는 마셔 본 적이 없습니다. 그때 주경서 씨가 찾아왔을 때, 와인 조금 먹은 것 빼면요.”

“아, 맞다. 내 정신 좀 봐.”

백서련은 텔러인 유현에게 소주 이야기를 한 게 웃긴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상하게 유현 씨 보면 전혀 텔러 같지 않아서 자꾸 착각한다니까요. 저도 이런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어요?”

“흐음. 뭐, 저도 가끔 제가 본고장 토박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는 합니다.”

유현의 입장에서는 자조적인 말이었지만, 진실을 모르는 백서련은 실실거리며 웃었다.

“그보다 유현 씨는 텔러로서 목표가 뭐에요?”

“목적이요?”

“네. 목표, 혹은 꿈. 아니면 신념. 뭐 이런 거요.”

설마, 백서련에게 이런 질문을 받을 줄 몰랐는지라 유현은 꽤나 의외였다.

“목적이라, 흠. 뭐, 여러 가지가 있겠죠?”

“에이.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말하면 누가 대답을 못 해요?”

“세계 멸망을 막는다거나, 혹은 승진을 한다거나, 아니면 대단한 컬렉터를 키운다거나.”

“그중에서 가장 하고 싶은 게 있을 거 아니에요. 가장 근본적인 거.”

“근본적인 거라.”

유현은 그때를 떠올렸다. 인간으로서 죽기 전, 마지막에 떠올렸던 감정을.

끝없이 올라가고, 성공하고, 쟁취하고.

“그냥, 뭐…….”

한계를 넘어서.

“성공한 삶을 살고 싶네요.”

“에이. 지금도 성공하셨는데요?”

“아니요. 아직 부족합니다.”

어떤 일면에서 보면 유현은 성공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최단기간에 대리로 승진했고, 서재는 연일 성령들로 문전성시를 이뤘으니까.

검후와 회귀자를 컬렉터로 삼아 계약까지 했고, 특별한 능력도 지녔다.

그래도 부족했다.

그의 이 끝없는 갈증을 채우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더. 더. 더 성공해야죠.”

“어디까지요?”

“명확히 어디까지는 정하지 않았습니다만.”

유현은 식당 바깥에 펼쳐진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느덧 밤하늘에는 총천연색 별빛이 가득 담겨있었다.

“적어도, 저 별 너머까지라고 보면 되겠네요.”

“별 너머요? 우주 진출이라도 꿈꾸시는 거예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백서련의 입장에서 유현의 말은 꽤나 우회적이고, 뜬구름 잡는 말처럼 들렸다.

유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해하지 못했다면 어쩔 수 없다. 이건 그저, 스스로 다짐한 중얼거림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서련 씨도, 나중에는 알게 될 겁니다.”

“칫. 치사해. 지금 알려 주면 안 되나요?”

“지금은 좀 이르거든요. 자, 밥이나 마저 먹죠.”

둘은 그렇게 밤바다를 술안주로 삼아 식사를 마쳤다.

* * *

연일 이틀을 쉰 유현은 이제는 정말 끝이라는 생각으로 다음 날 기분 좋게 출근했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의 앞에서 삐죽거리며 서 있는 권지아를 보는 순간, 유현은 오늘 세워 둔 모든 계획을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갑시다. 데이트.”

유현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 목소리는 모든 걸 포기한 사람의 모습과 흡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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