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126화
“뭐, 이제는 지나간 옛날의 일이기도 하고, 그때의 정보는 정부에서도 쉬쉬해서 별로 남아 있지 않을 겁니다. 다만, 그때 사태를 들은 사람은 쉽게 잊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죠.”
“와. 진짜 몰랐네요. 원래 처음부터 잘 못 싸우나?”
“……그건 혜림 씨가 특별해서 그런 거고요.”
유현이 본 강혜림은 뼛속까지 싸움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 특성의 힘 때문인지, 아니면 본래의 성정이 그러한 특성의 힘을 끌어 낸 것인지에 대한 전후 관계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강혜림은 타고난 컬렉터였다. 처음 싸울 때부터 환상체에게 지체 없이 검을 휘두르는 건 아무나 할 수 없으니까.
“보통 사람은 레고만 밟아도 예수님 부처님을 찾거든요.”
“푸흡. 큭큭. 레고래. 무슨 표현이 그래요?”
“사실이니까요.”
문제는 미성년자 컬렉터들은 자신의 그런 처지를 망각하고, 무작정 할 수 있다는 헛된 자신감만 가득 차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희생의 결과가 결국 아카데미 설립을 이룩했으니, 유현의 입장에서는 이게 잘된 일인지, 나쁜 일인지 참으로 애매모호했다.
“그래도 아카데미가 설립된 지금은 미성년자들의 사망 사고가 거의 사라졌죠. 뿐만 아니라 사상세계를 클리어하려 하지 않으니, 컬렉터라는 직업 자체의 위험도도 대폭 낮아졌고.”
물론 대폭 낮아졌을 뿐이지, 여전히 컬렉터들의 사망률은 매우 높았다.
사상세계에서 의도치 않은 사고에 휩쓸려 죽거나 행방불명되는 경우도 있었다. 무엇보다 컬렉터의 적은 단순히 환상체에 그치지 않았다.
테러리스트, 종교조직, 스캐빈저 등등. 위혐 요소는 어딜 가도 넘쳤다.
“와. 그랬구나.”
“그래도 한국 상황은 진짜 좋은 편입니다. 다른 나라는 아직 미성년자 컬렉터에 대한 대책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거든요. 끽해야 유럽 연합이나 미국 정도려나요. 그래서 한국의 컬렉터 아카데미에는 세계 각국의 시선이 많이 모이죠. 유학생들도 많고요.”
사실상 한국은 컬렉터 아카데미를 최초로 설립한 국가였다.
변혁이 오기 전부터 미성년자에 대한 교육열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것이 돌고 돌아 이렇게 돌아온 것이었다.
뒤늦게 유럽 연합에서 스위스에 하나, 미국에서도 뉴욕에 하나를 지었지만. 한국 아카데미의 위상을 따라올 정도는 아니었다.
“돈 많은 자제들이 이쪽으로 많이 몰렸죠. 특히 서구권 학생들. 명문가니, 귀족의 핏줄이니, 뭐니 하는 얘들은 전부 한국 아카데미로 왔고요.”
“유현 씨는 되게 세세하게 알고 있으시네요?”
“흥미가 있었거든요.”
유현은 쓰게 웃었다. 그가 이런 정보에 대해서 세세하게 알고 있는 것은 그 또한 이런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었던 혈기 넘치는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종말이 터지기 전 유현은 아직 미성년자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때 유현은 컬렉터가 되고 싶었다. 당연히 각성하게 된다면 아카데미로 가게 될 테고, 유현은 혹시라도 자신이 컬렉터가 될지 모른다는 시뮬레이션을 세워서 아카데미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찾고 또 찾았었다.
‘전부 다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그나마 이렇게 강혜림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용도를 고려하면, 그래도 이런 정보를 알고 있다는 건 썩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보다 아카데미라…….’
지금까지 신경 쓰지 못했던 요소에 문득 생각이 미치니, 유현은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생각해 보면, 인재를 찾는 건 아카데미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해.’
아카데미는 각성한 아이들을 데리고, 철저하게 교육을 가르친다. 당연히 아카데미를 졸업한, 소위 생도 출신이라 불리는 컬렉터들은 일반 컬렉터와 비교하면 훨씬 더 높은 수준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어지간히 재능이 있는 녀석들은 다 저기로 몰렸을 테고.’
실제로 아카데미 졸업생 중에서 순식간에 고랭크 컬렉터에 도달한 사람들이 많았다.
유럽에서도 이름을 날리는 컬렉터 중에서 한국의 컬렉터 아카데미 출신이 무려 30% 이상을 차지했을 정도.
언제까지 양성소에서 수료를 끝낸 사람들만 찾으러 다닐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니. 그래도 안 돼.’
유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카데미는 확실히 유현이 보기에는 꽤나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저 안쪽에 얼마나 많은 원석이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그들이 아카데미 생도라는 점이었다.
‘아카데미 생도는 성인이 될 나이가 돼서야 졸업을 하지. 그전까지는 아카데미에 소속되어야 하고 사상세계에 들어가려면 온갖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해.’
보통 성인 컬렉터들은 사상세계에 들어가는 것이 자유다. 협회에 나름 신고를 하거나 언질을 줘야 하지만, 그것도 그냥 ‘하면 좋다’ 수준이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다.
미성년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법으로 철저하게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에 사상세계에 들어가려면 아카데미와 협회, 정부의 부처 기관의 승인이 필요했다.
승인이 떨어져도 개인이 활동하는 건 안 된다. 최소 동행자 숫자가 4명은 필요하며 거기에 1명은 국가에서도 검증된 사람이 있어야만 했다.
‘디메리트가 너무 커. 아카데미 생도 중에서 괜찮은 아이를 발견해도, 녀석이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그렇다고 아카데미를 졸업할 생도를 찾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아카데미 졸업식은 양성소의 수료식과 다르게 1년에 딱 1번만 있다.
지금 계절은 초여름을 지나 여름을 향해 다가가는 도중이다.
아카데미 졸업은 이미 초봄에 끝났고, 다음 졸업식은 내년 3월에나 있을 거다.
반년 이상이나 되는 시간을 잡고서 세 번째를 찾기에는 유현이 너무 바빴다.
‘그래도 일단 아카데미 생도를 생각해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어. 당장에는 보류지만, 혹시 알아? 정말 내 눈이 뒤집힐 정도의 인재가 또 있을지.’
물론, 유현은 그런 낙관적인 관측을 진심으로 믿지는 않았다. 어지간히 중요한 것들은 이미 머릿속에 다 들어 있었으니까. ‘예상 밖’이라는 요소는 권지아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 유현의 시선이 생도에게 너무 오래 머물러서일까?
“흐응. 유현 씨는 그런 취향이었구나.”
유현을 향하는 강혜림의 눈빛이 어쩐지 이전과 다르게 매우 짜게 식었다.
유현은 뒤늦게 자신이 너무 저들을 빤히 주시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네? 아, 아니요. 아닙니다. 무슨 오해를 하신 거 같은데, 절대 그런 거 아닙니다.”
“네네. 미안하네요. 저는 늙어서 유현 씨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겠네요.”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요?”
유현은 한동안 강혜림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서 진땀을 빼야만 했다.
* * *
유현은 ‘이렇게 하루를 쉬었으니, 이제는 일해도 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품었다.
하지만, 백화 매니지먼트에서 자체적으로 진행되는 강유현 휴식 프로젝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현 씨. 오늘 저랑 같이 나가요.”
백서련이 갑자기 다가와서 그렇게 말하자 유현이 의아해했다.
“뭐, 안 되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 오늘은 제 차례거든요.”
“서련 씨 차례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하는 표정으로 유현이 사무실 내부를 쓰윽 훑었다. 유현의 시선을 받은 권지아와 강혜림은 자연스럽게 모르쇠로 일관하며 각자 자신의 무기를 손질하기 바빴다.
흐음. 유현은 속으로 의심을 하면서도 명확한 증거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가실 거죠?”
“아니요? 저 여기서 쉴 건데요?”
뭐가 어떻게 됐든, 이대로 끌려가는 건 질색이다. 유현은 그 의미를 담아서 백서련에게 전했다. 하지만 백서련은 웃는 얼굴로 곧바로 유현의 약점을 찔러 왔다.
“사실 말이죠. 제가 이번에 새로 부산물을 납품할 업체를 찾았는데, 그쪽 사장님이 자꾸 저를 잘 안 만나 주려고 하시더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역시 혼자서는 좀 힘든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유현 씨의 도움이 필요해서요.”
“제가요?”
“네. 업무 차원에서 유현 씨의 도움이 필요해요.”
업무 차원.
그 단어가 유현의 머릿속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서로 놀러 나가자는 말이었다면 칼같이 거절했을 유현이었지만, ‘일’이 끼어들었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크흠. 일 때문이라면 뭐, 어쩔 수 없죠. 같이 갑시다. 거기가 어디죠?”
유현은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 방금은 쉰다고 하셨잖아요.”
“어허. 매니지먼트 대표가 힘들다고 하는데, 어찌 제가 쉬고만 있겠습니까?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안 그러셔도 되는데.”
“아니요. 괜찮습니다. 제가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생각해 보니,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혼자서 하는 일이 둘이라면 더 빨리 끝날 겁니다.”
“으음. 어떨까요?”
망설이는 백서련을 보니, 유현은 침이 바싹 마르는 느낌이었다. 괜히 처음부터 거절했나 싶어서 이대로는 안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드는 것도 잠시.
백서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쩔 수 없네요.”
“하하. 역시 서련 씨. 대표다운 화끈한 선택이네요. 자, 어서 가죠.”
“그러죠.”
유현은 백서련을 처음으로 상사 대하듯이 행동했다. 즉시 백서련의 외투를 챙겨 든 유현은 그녀를 깍듯이 모시며 사무실을 나섰다.
그 모습을 곁눈질로 슬쩍 살피던 두 컬렉터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평소엔 완벽한데, 설마 일과 관련된 사안에서 저렇게 엉성하셨을 줄이야.”
“정말 중증의 워커홀릭이구나.”
그렇게 중얼거린 두 사람은 이내 서로 시선을 마주하더니, 동시에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처음으로 두 사람의 마음이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 * *
“자, 가요.”
“걸어가는 겁니까? 아무래도 거래처가 가까운 곳에 있나 봅니다?”
“아뇨. 거래처보다는, 그래도 차 한 대는 필요할 거 같아서요. 매장부터 들리려고요.”
“아. 드디어 차 한 대 뽑으시는 겁니까?”
확실히, 백화 매니지먼트는 아직 차량이 없었다. 유현이 보통 사상세계로 가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했던 걸 생각하면, 확실히 자가용이 필요하기는 했다.
“그런데, 지금요?”
“유현 씨. 지금이 아니면 안 되죠. 돈이 생겼는데. 다른 컬렉터들 보세요. 다 개인 매니저가 차량 이끌고 막 여기저기 데려다 주는데, 저희 매니지먼트 컬렉터들은 그러지 못하잖아요. 평소에 그 모습 보면서 제가 얼마나 불편했는데요.”
“운전할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제가 하면 되니까 괜찮아요.”
“서련 씨 일은요?”
“요즘 많이 처리해서, 최근에는 좀 여유가 생겼거든요. 게다가 저도 슬슬 면허증 지니고도 운전 안 하면 실력이 녹스니까, 가끔 기름칠을 해 줄 필요는 있어요.”
그 기름칠을 위해 차 한 대를 새로 산다는 것은 꽤나 헤픈 발상이었지만, 유현도 차량의 필요성은 인지하고 있었기에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개인의 욕망만이 아닌, 회사 차원에서 필요한 거다. 투자를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둘은 그렇게 가까운 자동차 매장으로 향했다.
“차량은 어떤 거로 고르시겠습니까?”
“으음. 역시 사람을 더 태울 걸 생각하면 소형 SUV가 좋겠죠?”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가격을 생각하면 중고차가 더 싸지만, 중고차의 경우에는 어떤 결함이 있을 줄 모르니 둘은 신차를 살피기로 했다.
돈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가지고 있는 현찰만 55억이다. 거기에 곧 들어올 정산금을 생각하면, 일반 차량이 아니라 최신형 스포츠카를 사고도 돈이 남을 정도였다.
“이걸로 할게요.”
그렇게 백서련은 붉은 광택이 도는 SUV 한 대의 구매 절차를 끝마쳤다.
옵션도 정하고 보험 처리까지 끝냈으며 그렇게 출고의 과정은 척척 진행됐다.
“자. 그러면 가 볼까요?”
차 키를 받아든 백서련은 키를 흔들며 씨익 웃었다. 저렇게 자신 있게 웃는 모습을 보니, 자그마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사회인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막 출고된 차량의 조수석에 탑승한 유현은 백서련의 운전 실력이 꽤나 부드럽다는 것에 상당히 놀랐다.
“운전 잘하시네요?”
“중장비 자격증도 있는데, 그거에 비하면 자동차는 껌이죠. 제가 돈이 없어서 차를 못 산 거지, 능력이 없는 게 아니랍니다.”
둘은 곧바로 사상세계 부산물 매입처에 도착했다. 커다란 아울렛과 함께 운영되는 이곳은 국내에서 가장 손에 꼽을 정도로 규모가 큰 부산물 매입처였다.
단순히 사상세계의 부산물을 처리하는 것 말고도 일반인들 또한 찾아올 수 있게끔 다양한 물건들이 있어서, 평일 낮인데도 불구하고 안쪽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래서, 곧바로 거래처로 가는 겁니까?”
“아. 그거 있잖아요…….”
갑자기 말끝을 흐리는 백서련의 행동에 유현은 불안감이 들었다.
“사실, 이미 끝냈답니다.”
“……저한테 도움이 필요하다는 건?”
“그건 유현 씨를 꾀어내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었죠.”
“…….”
“히힛.”
“…….”
따악.
유현은 백서련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아얏!”
백서련이 머리를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