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100화
두 성령이 내게 개인적으로 보내 준 선물은 다름 아닌 잘 포장된 이야기였다.
큐브 형태의 상자에 담긴 이야기를 확인한 나는 눈에 이채를 띄었다.
마치, 서로 짜고 치기라도 하듯 이야기를 보내다니. 아니, 이 경우에는 서로 질 수 없다는 듯 경쟁을 벌인 것에 가깝나?
‘다행이군.’
아이템은 줘도 못 쓸지도 모를 경우를 생각하면, 이야기가 오히려 범용성 있게 잘 활용하기 적합하니, 내게는 오히려 좋은 선물이었다.
무엇보다 1세대 성령 둘이 호언장담을 하며 보낸 이야기다.
그것은 당연히 일반적인 이야기와 궤를 달리하는 수준이 분명했다.
새하얀 상자에 담긴 것은 미카엘의 것.
검은 상자에 담긴 것은 사탄의 것.
나는 우선 미카엘의 선물부터 살폈다.
새하얀 알처럼 생긴 이야기의 덩어리는 차원 상점에서 구매할 수 있는 일반적인 것들보다 훨씬 더 밀도 있는 텍스트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빽빽하게 가득 찬 그것은 내가 정사원이었다면 절대로 쉽게 소화할 수 없는 수준이었겠지만, 대리가 된 지금은 조금 무리 없이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거다. 미카엘도 그 부분을 고려해서 적당한 수준을 보내 준 거다.
[유혹과 슬픔, 시련의 인도자]
“오오.”
내용물을 확인한 나는 나지막이 감탄을 흘렸다.
“뭘 보내 줬나 했더니, 정신계 강화 이야기인가?”
참 미카엘스러운 이야기를 보내 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또 다른 선물을 보내 준 사탄과 그녀의 관계를 유추해 본다면, 분명 이것은 나를 향한 충고 또한 내포하고 있으리라.
‘사탄, 즉 루시퍼는 타락의 상징. 반면 미카엘은 그러한 영적인 갈등을 중재하며 올바른 길로 이끄는 천사.’
미카엘은 사람이 악이나 거친 유혹에 빠져들어 고민하고 있을 때, 그들에게 나타나 올바른 길을 점지해 주며 갈등을 해소시켜 주는 수호자의 역할도 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어떠한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자신의 가치관을 흔드는 시련마저 물리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정신계 방벽이다.
물론 그것도 있지만, 미카엘이 이 선물로 내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탄과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도 포함되어 있다. 까마귀와 같이 논다고 검게 물들지 말라는 소리. 참 사이가 안 좋은 둘이었다.
‘지금의 내게 반드시 필요한가는 의문이지만, 혹시 모를 미래의 사태를 대비해 미리 받아 놓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나도 간혹 내 의지가 약해진다는 것을 느끼고는 있었다. 이렇게 하면 더 편하지 않을까? 조금은 돌아가더라도 편한 길을 선택하면 되지 않을까?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 나 또한 나태와 매너리즘이라는 늪에 나도 모르게 발을 들이밀고 있었다.
스스로를 채찍질해 가며 어떻게든 버티려고 해도, 늪이라는 것은 때론 빠져나가기 전에는 그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할 때가 있는 법이다.
분명, 미카엘의 선물은 언젠가 내가 의도치 못한 상황에서 큰 도움을 주게 될 거다.
‘그렇다면 사탄의 선물은 과연 무엇이려나?’
검은 상자를 연 나는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확인하고는 표정을 굳혔다.
“이건 또…… 뭐야.”
미카엘은 사탄을 의식해서 내게 정신계 보호와 관련된 이야기를 주었다면, 사탄은 그 반대였다.
[라플라스의 악마 파편]
“……이런 걸 준다고?”
라플라스의 악마.
우주의 모든 원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아는 존재. 과거 현재를 넘어 미래까지 알 수 있다고 알려진 과학의 악마.
“대체, 무슨 생각이지?”
말만 들으면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사기적인 이야기는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것만 보고 판단을 내렸을 때다.
나는 이러한 이야기가 얼마나 구하기 힘든 것이며, 심지어 천고의 끝에 구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느냐는 별개임을 알고 있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아는 지식을 부여하는 이야기라고? 그런 것을 일개 개인이 과연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아직 대리밖에 안 된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야.’
비록 그 파편, 씨앗에 불과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설사 부장급 텔러라 하더라도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확신한다. 만약 이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라면, 그것은 분명.
“모든 것을 관장하는 전지하며 전능한 신이겠지.”
사탄도 이것을 사용할 수 없으니, 가지고만 있었을 터다. 그런데 이런 걸 내게 넘긴다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어차피 쓰지 못하는 거,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대충 처분할 생각이었던 걸까?
‘그 사탄이 그런 어중간한 마음으로 이걸 줬을 리가 없어. 내가 이것의 적합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혹시, 호기심 차에 넘겨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보고 싶어서?’
그의 속마음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내게 그냥 줬다고 보기에는 이 라플라스의 악마 파편 자체가 내포하는 의미가 컸다.
이것은 사실상 ‘전지(全知)’나 마찬가지다.
신화에서도, 최고의 한 명에게만 주어지는 지고의 칭호.
나는 분명, 이전 다양한 시화를 통해 내가 보통의 텔러보다 의외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숨기려고 해도, 사탄이나 되는 성령이라면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을 거다.
‘날 떠보려는 건가?’
사탄이 내가 미래에서 온 존재라는 걸 알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무언가가 있다고 짐작했기에 이런 이야기를 건네준 거겠지.
‘그래도 소용없어.’
라플라스의 악마는 내가 갖기에는 너무나도 규격 외의 이야기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거다. 이런 건 박물관에 전시해 놓는 용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가치를 알아도 사용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주다니. 그야말로 보석으로 만들어진 음식이로군.”
그래도 기왕 받았으니, 내 관조자의 방 어딘가에 놔둬서 장식이라도 해 둘까 하며 [라플라스의 악마 파편]에 손을 댄 순간이었다.
촤르르륵!
“……!”
라플라스의 악마 이야기는 보란 듯이 텍스트로 분할되어 내 손바닥을 타고 내게 흡수됐다.
나는 화들짝 놀라 황급히 이야기에 손을 뗐지만, 이미 라플라스의 악마 이야기는 완전히 내 몸 안으로 사라진 뒤였다.
[라플라스의 악마 파편이 당신의 몸에 깃듭니다.]
뒤늦게 떠오른 알림 창을 확인한 나는 곧바로 내 몸 상태를 확인했다. 혹시라도 자칫 잘못하면 이야기를 감당하지 못한 내 몸이 터질 수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멀쩡해?”
몇 분의 시간이 흘러도 내 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나는 내 볼을 꼬집어 봤다. 아픈 것을 보니, 꿈이 아니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분명히 거부 반응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과 다르게, 내 몸은 아주 쌩쌩했다.
‘이게 대체…….’
보유한 이야기를 확인해 보니 [라플라스의 악마 파편]은 고스란히 내 몸 안쪽에 안착해 있었다. 그 어떠한 거부 반응도 없었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 이것이 내 몸에 들어왔다는 것은 오히려 이야기가 걸맞은 주인을 찾아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용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 대체 왜 내가 이걸 받아들이고도 멀쩡한 거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의심스럽지만, 지금은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내가 회귀를 한 이유와 관련이 있는 걸지도 모르지.’
의도치 않게 이야기를 흡수했지만, 거부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좋은 일이다. 본래 이야기가 내포한 것과 비교하면 이것은 그 파편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무려 라플라스의 악마와 관련된 이야기다.
끝없는 대양(大洋)급은 아닌, 담수가 고인 저수지 정도지만, 나는 만족했다.
‘일단, 선물 확인은 여기까지만 하고.’
나는 곧바로 셀린을 호출했다.
“셀린.”
“네.”
그녀는 딱딱한 성격이지만 일 처리는 확실한지, 내가 부르니 곧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나를 지원한다는 명분이 있기에 내 개인의 관조자의 방에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은 이미 부여한 상태였다.
“이제 곧 서재를 개방할 거야. 그러니 준비해 둬. 네가 뭘 해야 할지는,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알 거라 생각해.”
“알겠습니다.”
그녀는 곧바로 대답하며 작업 준비에 들어갔다. 지원실의 그녀가 할 일은 내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수집하거나, 그밖에 시화 도중 서재의 일부 권한을 사용해 성령들의 과도한 채팅을 조절하는 것 등이 있다.
그녀의 역할은 이른바 매니저다.
뭐, 다른 텔러들은 지원실 소속 텔러를 마치 자기 부하마냥 매우 부려먹는다고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당장은 말이다.
“시화. 시작한다.”
“네.”
나는 셀린에게 그렇게 일러둔 뒤, 그녀를 놔두고 관조자의 방을 나갔다.
* * *
‘갔나?’
셀린은 시화를 직접 선보이기 위해 떠난 유현을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그녀는 분명 기대를 받는 신인이었다. 하지만 그 평가가 무색할 정도로 지금 그녀가 겪고 있는 상황은 정반대였다.
셀린은 기수를 따지면 유현보다 더 높았다. 그녀는 나름 자기 기수에서 유망주로서 기대를 받았다. 실제로 그녀는 모습을 개화하는 속도가 다른 텔러보다 빨랐으며, 심지어 개화한 모습은 혼성계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기익족이었다.
당연히 그녀를 눈여겨보는 텔러들은 많았다.
문제가 있다면, 그녀의 딱딱하고 대쪽 같은 성격 때문이었다.
굽힐 줄 모르고, 틀린 건 틀리다고 똑 부러지게 말하고, 자신보다 직급이 높다고 절대 함부로 숙이지 않는다.
능력은 있지만 그 성격 때문에 그녀는 선임들에게 밉보이게 됐고 결국, 사내 정치에 휘말려 이런 곳으로 ‘좌천’된 것이었다.
‘그들은 내게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최연소 대리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강유현 텔러의 보좌를 맡는 것. 그리고 그의 일을 도우며 그를 감시하고 주기적으로 윗선에 정보를 보내는 것.
그 사실을 다시 상기하자 짜증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셀린의 고운 이마에 주름이 졌다.
‘내가 자기들 멋대로 움직일 줄 알고?’
이번 일을 잘하면 다시 원래 업무로 복귀하거나, 혹은 더 좋은 자리를 추천해 준다고 했지만. 셀린에게 마지막 기회고 뭐고 다 필요 없었다.
그녀는 고작 그 정도 협박이나 회유에 흔들릴 성격이 아니었다.
‘지원실 텔러로서 일은 하겠어.’
다만, 그것은 남이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였다.
유현의 일은 돕지만, 부당한 일은 돕지 않는다.
그의 행동을 감시하고 윗선에 자료를 보내는 짓 또한 하지 않는다.
하는 것은 지원실 텔러로서 주어진 일뿐.
셀린은 그런 텔러였다.
‘그리고 강유현 텔러도 미덥지 못하지.’
그녀는 유현도 쉽게 믿지 않았다. 최연소 대리는 확실히 대단한 타이틀이다. 다른 텔러는 절대로 하지 않는 가호를 포기하는 짓을 벌였다는 소문은 그녀도 들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그녀는 이 일과 관련된 유현 또한 곱게 보지 않았다.
그녀가 정치적인 제물로 사용된 것에는 유현의 존재가 갖는 책임도 적지 않게 있었으니까.
그만 없었어도, 그녀가 이런 곳에 오게 되지는 않았다.
이 ‘자격 미달’의 세계에 말이다.
‘그는 분명 소문대로라면 대단한 텔러겠지. 몇 마디 대화를 나눠 보지 않았지만, 다른 텔러들에 비해서 확실히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도 알겠어. 하지만 그것뿐이야.’
소문은 무성해도 소문일 뿐. 그녀는 실제로 본 것만 믿는 텔러였다.
‘뭐가 어찌 됐든, 내가 바라는 일을 하기 위해서 이런 곳에서 발목을 묶일 생각은 추호도 없어.’
셀린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유현에게 일부 양도받은 서재의 권한 창을 띄웠다.
막 개방한 서재에 엄청나게 많은 성령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의 로그를 확인하고 채팅을 관리하면서도 유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지켜보지.’
* * *
‘아마, 지금쯤 잔뜩 이를 갈고 있겠지.’
나는 은근히 내게 도전적인 시선을 보낸 셀린 정사원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이 상황을 별로 좋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도, 자의로 이곳에 온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 아마, 분노의 불똥은 내게도 튀었을 거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으니까.
‘그러니 어디 한번 보여 주도록 하지.’
네가 지금 누구를 보좌하게 됐는지, 그리고 네가 별거 아닐 거라 생각했던 내가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그 뇌리에 각인시켜 주마.
“어서 오십시오. 성령님들. 오랜만입니다.”
[100TP 후원!]
[하이하이.]
[100TP 후원!]
[오늘도 검후가 아니라 신인이네?]
[100TP 후원!]
[오늘은 뭘 할 생각임?]
“우리 신인이 아직 좀 성장이 부족해서요, 조금 더 강하게 키우기 위해 또 다른 사상세계를 클리어 할 생각입니다.”
또 사상세계냐고 묻겠지만, 성령들은 오히려 기대감을 품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텔러의 활약도 있지만, 자신들이 모르는 이야기가 잠들어 있는 사상세계 자체를 즐기는 것도 있다.
하나의 이야기가 구현된 또 다른 세계, 그곳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하는 것만으로도 성령들에겐 매우 만족스러운 일이다.
“오늘 갈 사상세계는 바로, 지하국(地下國)입니다.”
오늘은 이곳에 있는 보상 아이템을 얻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