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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99화 (99/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99화

처음에는 적이 쳐들어온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 뒤늦게 어떤 정신병자가 갑자기 이런 짓을 저지르겠냐는 생각이 미쳤고, 공간을 찢고 나오던 빛이 사라지고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을 확인한 나는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텔러?”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지면에서 한 50cm 정도 떠 있는 그녀는 아무리 봐도 나와 같은 텔러였다.

몸에 딱 맞는 양복은 주름 한 점 없을 정도로 깔끔했고, 피부는 투명하다고 할 정도로 새하얗다. 깔끔하게 틀어 올려 묶은 브레이디드 번(Braided Bun) 형태의 머리카락은 찬란한 황금빛이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가장 특이한 점을 꼽자면 등 뒤에 펼쳐진 마법진처럼 빛나는 기이한 형태의 날개였다.

혼성계에서 저런 날개를 지닌 종족을 나는 알고 있다.

“기익족(奇翼族)?”

동시에 기익족 여성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이쪽을 빤히 주시하는 눈동자는 휴양지의 바다를 방불케 하는 반투명한 에메랄드빛이었다.

그녀는 곧바로 지면에 착지하더니, 내게 고개를 꾸벅 숙여 왔다.

“시화실의 강유현 대리님 맞으십니까?”

“그래 맞아.”

이쪽을 높여 부른다는 것은 상대방이 나보다 직급이 낮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만든 것은 그녀의 존재였다.

내가 뭐라고 묻기도 전에 기익족 여성은 곧바로 자기소개에 들어갔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지원실 소속 텔러 셀린 사원이라고 합니다. 오늘부로 강유현 텔러님의 시화 보좌를 담당하기 위해 발령받은 참입니다.”

그래. 분명, 셀린이라는 이름이었다. 내 기억 속의 그녀와 똑같다.

“지원실이라고?”

“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내게 묻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당혹감을 숨기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지원실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지원실의 존재는 시화실을 보조해 주기 위한 것이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시화실의 텔러는 직급이 높아지면 지원실에서 보좌하도록 텔러를 붙여 준다는 것을.

그러나, 보통 지원실은 대리급에서도 중견 정도 되는 짬부터 사람을 보낸다. 나는 대리를 단지, 고작 며칠밖에 되지 않았다. 당연히 벌써 지원실의 지원을 받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찾아왔다고? 공문도 없이?

“이번이 특별한 사유라서 그렇습니다.”

셀린이 망설임 없이 그렇게 답했다.

“특별 사유?”

“네. 강유현 대리님은 천체주식회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대리로 승진하신 분이십니다. 이는 거의 최초의 사례고, 그 때문에 윗분께서는 이번 건에 한해서 약간의 ‘예외’를 두기로 정했습니다.”

“그게 바로 나에게 지원실 텔러 하나를 붙여 준다는 건가?”

“네. 맞습니다.”

흐음.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지금 벌어진 상황을 조심스레 분석했다.

나는 천체주식회사에서 가장 이례적일 정도로 빠른 속도로 대리를 단 텔러다. 본사에서 나를 주시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특별한 사유라는 이름하에 이제 막 대리를 단 나에게 지원실 텔러를 보낸 거겠지.

대리급 텔러 중에서 중간 정도 돼야만, 겨우 지원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점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특혜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마냥 기쁘게 받아들이기엔 너무 갑작스럽단 말이지.’

이런 상황에서 셀린의 등장은 내게 반가운 일이었지만, 나는 이렇게 상황이 딱 맞아떨어지는 것을 곱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는 자사에서 훌륭한 텔러가 하나 나타났으니, 회사의 차원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렇게 경쟁을 강요하는 천체주식회사가 일개 개인인 내게 일방적인 혜택을 부여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에 모종의 거래가 숨어 있지 않은 한 말이지.’

내게 아무런 공지도 없이 갑자기 지원실의 셀린을 보낸 것도 그렇고, 일을 아주 급하게 처리한 느낌이 없잖아 있다. 아마 그 기점이 된 것은, 내가 권지아와 함께 아귀도를 클리어 했기 때문이리라.

혼성계에 재차 이름을 새기고, 성령들의 큰 반향을 이끌어 내는 시화를 선보였으니까.

높으신 분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지켜보겠다는 건가?’

정말 순수한 선의로 나를 도우라고 지원을 보냈을 리가 없다. 내 생각대로라면 분명, 나를 곁에서 감시하는 역할도 겸하고 있으리라.

무표정한 셀린의 얼굴을 보면 본인도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있겠지.

‘지원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는 것은, 최소 부장급 텔러들이 모여서 무언가 정했다는 건데. 정확히 누가 뭘 어떻게 했는지 모르니, 아직 답은 나오지 않네.’

언젠가는 이렇게 될 일이기도 했다. 그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벌어졌을 뿐.

“그래. 만나서 반갑다. 셀린 정사원. 너무 갑작스러워서 조금 놀랐지만. 뭐, 특혜라고 하니 기쁘게 받아들여야겠지.”

“미리 말씀을 드리겠는데.”

셀린은 이 상황 자체가 별로 달갑지 않은지, 약간 눈가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이것은 순전히 위에서 내려온 명령 때문이지, 절대 저의 개인 의지가 아님을 인지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빌미로 제게 부당한 일을 시키는 것 또한 없었으면 하고요.”

“허.”

설마 당돌하게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줄이야.

그녀의 말투나 행동을 보면, 아마 본인도 자신이 처한 상황이 정치적인 무언가로 얽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달갑게 여기지 않다는 거겠지.

의도치 않은 휘말림. 어쩌면 사내 정치에서 밀려났기에 나 같은 녀석에게 배정받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

싫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뿜어내는 그녀는 어떻게 보면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것을 날 탓하고 있을 거다.

‘이거 참 재미있어지겠네.’

셀린이 수상하다면 그녀를 쳐 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미 지원실의 도움이 정해진 이상, 셀린을 보내도 다른 지원실 텔러가 오게 될 거다.

누가 오더라도 당연히 윗선의 입김을 강하게 받은 녀석들이 분명할 상황.

차라리, 셀린을 그대로 품고 가는 게 훨씬 나았다.

‘무엇보다, 셀린은 내가 아는 텔러기도 하니까.’

나는 과거를 떠올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딱딱한 말투를 구사하며, 나에게 여러 가지를 알려 줬던 한 텔러의 모습을.

쌀쌀맞은 겉모습과 다르게, 묘하게 잔정이 많은 어수룩한 텔러를.

‘인연이라면 이것도 인연인가?’

무엇보다 이건 충분히 내가 역으로 이용해 먹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 속내를 숨기며, 나는 밝게 웃으며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래. 후배라고 편하게 불러도 되지? 셀린 후배. 앞으로 잘해 보자.”

“……잘 부탁드리죠.”

딱딱한 표정으로 내 손을 맞잡으며 악수하는 셀린.

옆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던 우리 사무실 사람들이 살짝 질린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리 봐도 저 표정.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어.”

특히 안목이 뛰어난 백서련은 벌써부터 내 미소에서 무언가를 읽어 냈는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어허. 조용히 안 해요?

“저, 그래서 제가 할 일은 있습니까?”

“이번 일은 처음이야?”

“지원실에서 기초적인 교육을 받기는 했습니다.”

“실전은 처음이라 이거로군.”

“……그렇다고 볼 수 있죠.”

특혜라고 주장해도 보낸 텔러는 사실상 신참. 하긴, 나도 텔러로 생활한 기간을 놓고 보면 신참이나 마찬가지긴 하다. 직급만 높을 뿐, 짬 자체는 아주 낮으니까.

어떻게 보면 이제 막 처음 일하는 셀린이야말로 내게 보내기에 아주 적합한 텔러가 아닐까 싶었다.

“뭐, 지원실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것저것 배우기는 했지?”

내 물음에 셀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렇게 보여도 기초 교육에서 당당히 수석을 차지했으니까요.”

“아. 그럴 거 같더라.”

“네? 그걸 어떻게…….”

나도 모르게 나온 대답에 셀린이 의아해했다. 나는 곧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당연히 수석이니까, 나한테 보낸 거겠지. 아무리 그래도 나는 이제 막 대리를 달았잖아. 어떤 지원실 텔러가 자기보다 직급만 높고, 경력이 낮은 텔러와 일하고 싶겠어. 굳이 보낸다면 이제 막 현장에서 일하는 신참. 그렇다고 아무나 보내기엔 미덥지 못하니까,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녀석을 보냈겠지.”

“…….”

처음으로 무감정한 그녀의 눈빛에 약간이지만, 감정의 동요가 엿보였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상황만으로 여기까지 유추하는 나를 다시 보게 된 거겠지.

“아무튼, 너라도 와서 다행이다. 안 그래도 슬슬 나 혼자서는 일하기 벅차서 도와줄 일손이 필요했거든.”

“저는…….”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마. 시작부터 삐걱거리면 좀 그러잖아? 네가 걱정하는 일은 시키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

지원실 소속 텔러는 처음 발령을 받으면 시화실 텔러의 뒷바라지만 한다. 말이 뒷바라지지 온갖 귀찮고, 힘든 잡일을 떠안듯이 처리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셀린이 우려하는 것은 그런 부분이리라. 물론, 나는 그럴 생각까지는 없다.

‘아직 나를 신뢰하지 않는 녀석에게 벌써부터 중요한 일을 맡길 수는 없지.’

우선, 처음엔 간단한 일. 무엇보다 그녀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것만 시킬 생각이었다.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권지아와 강혜림을 향했다. 그녀들은 셀린의 등장에 당황해하면서도 자연스레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깨달은 것이다.

내가 함께 움직일 수 있는 컬렉터는 한 명뿐이다. 셋이서 함께 움직이기엔 아직 강혜림과 권지아의 수준이 꽤나 차이가 있으니까.

즉, 내가 한 명을 담당하면 자연스레 한 명은 소외된다는 소리.

그런데 여기서 셀린이 등장했으니, 이제 그럴 필요는 없어졌다.

중요한 건, 내가 누굴 고르냐에 따라 자연스레 셀린이 담당할 컬렉터가 정해진다는 거겠지.

둘의 표정에 자연스레 긴장감이 서렸다.

나는 씨익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나랑 같이 사상세계 갈 사람?”

권지아와 강혜림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

셀린만이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 촌극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 * *

결과만 놓고 말하자면, 이번에 내게 선택받은 사람은 권지아였다.

당연한 결과다. 아직 권지아는 약하다. 그녀의 기술과 경험, 지식은 분명 상급 컬렉터의 그것보다 더 대단하겠지만, 문제는 스펙이었다.

어떻게든 내게 빌린 포인트로 나름 기초적인 조건은 달성했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녀는 지금보다 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것도 그거지만, 나한테 빌린 포인트도 최대한 빨리 갚아야 하니까.’

이번 아귀도 클리어 건으로 그녀도 나름 막대한 포인트를 벌었지만, 내 빚을 전부 갚기에는 아직 모자랐다. 그녀도 새로운 무기나 장비를 맞출 필요도 있었고, 첫 시화로 벌어들인 것치고는 막대한 포인트는 금세 바닥을 보이고 말았다.

그 많은 포인트가 바로 소모된 것은 아쉽지만, 투자했으면 그만큼 돌아오는 게 있는 법이다. 권지아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말쑥해진 상태로 검을 쥘 수 있었다.

“상태는 어떠십니까?”

“……나쁘지 않다.”

좋다고 말하려다 회귀자 특유의 쌀쌀맞은 말투 필터링이 걸렸는지,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에게 나쁘지 않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아주 좋다는 뜻과 일맥상통하니, 나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는 거로 응수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상태는 지금 어떻지?’

나는 권지아의 상태 창을 슬쩍 살폈다.

이름: 권지아

특성: [무한 회귀](주인공)

칭호: 없음

보유 이야기: [명부의 해방자] [외강내유] [몽상가]

스킬: [명경지수] [감각 극대화] [멈추지 않는 의지] [설천신류(齧天神流)](비공개)

-스탯-

힘: 하급

민첩: 하급

체력: 하급

지력: 하급

마력(기): 하급

아무리 회귀자라 하더라도 역시 초반이라 그런지, 보유하고 있는 스킬이나 이야기는 많이 부족했다. 스탯도 거의 바닥이었고, 특성이라는 것도 딱 하나만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단 하나뿐인 특성이라 하더라도, 저 [무한 회귀] 하나가 다른 주인공급 특성을 싹 다 씹어 먹을 정도로 사기였고, 그녀가 지닌 스킬 중 내 관심을 자극하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설천신류?’

‘하늘을 물어뜯는다’라.

미래의 지식을 지닌 나도 처음 보는 기술이었다. 나라고 모든 것을 알고 있지는 않지만, 저만한 스킬이라면 그래도 어디선가 한 번쯤은 주워들을 법도 했을 텐데.

‘백련.’

[왜?]

‘그때 아귀도에서 권지아가 사용한 기술. 기억하고 있어?’

[아, 그거.]

백련은 그때를 떠올렸는지, 혀를 쯧 하고 찼다.

[살다 살다 그런 포악한 기술은 처음이었어. 내가 옛날 기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느낌으로도 알 수 있거든. 그 기술, 분명 말도 안 되는 신공 중 하나야.]

‘그런가? 역시, 회귀자는 회귀자라는 거네. 자신이 사용할 필살의 기술 하나는 남아 있으니 말이야.’

[다만, 본인은 펼치기 버거워해 보이더라고. 거기에 더해서 저런 기운을 감당할 무기가 얼마 없을걸? 나니까 그래도 버텼지, 어중간한 무기는 쉽게 부서질 거야.]

‘그런가…….’

아무리 회귀자라 하더라도 회귀를 한 시점에서 모든 것이 리셋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저만한 기술을 사용했다는 것은, 내가 모르는 일종의 특혜를 받고 있거나 회귀의 특성 자체가 갖는 효과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권지아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었지만, 본인 밑천을 쉽게 대답해 줄 거 같지는 않았다. 아무리 동료라도 이런 건 묻지 않는 게 예의기도 했고.

“흐음. 일단, 가죠. 이번 사상세계도 빠르게 끝냅시다.”

“그러지.”

권지아의 대답과 함께 서재를 개방하려던 찰나, 나는 뒤늦게 깜빡하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아, 맞다. 잠시만요.”

“음?”

“성령님들이 보내 주신 선물, 아직 안 열어 봐서.”

아귀도 때 있었던 일이 너무 커서 대리 승진 기념 선물을 받은 것을 깜빡하고 있었다.

분명 서재 개방하면 두 분이 나한테 선물 어땠냐고 물어볼 텐데, 아직도 안 열어 봤다고 따질 수도 있었다.

‘미리미리 확인해 봐야지.’

나는 곧바로 [관조자의 방]으로 이동한 뒤, 선물 창을 열어 내용물을 살폈다.

미카엘과 사탄.

두 존재에게 건네받은 선물을 확인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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