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98화
사상세계의 클리어와 동시에 세계의 붕괴는 멈췄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컬렉터들은 자신이 살았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과 동시에 바깥으로 쫓겨나듯 튕겨 나갔다.
남게 된 것은 오직 유현과 권지아 뿐.
[사상세계 ‘아귀도’를 클리어 했습니다.]
[15,000TP를 획득했습니다.]
[사상세계의 이야기가 당신들에게 깃듭니다.]
[단둘이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선보였습니다.]
[보상으로 10,000TP를 획득했습니다.]
[‘명경지수’스킬을 획득했습니다.]
[‘명부의 해방자’ 이야기를 획득했습니다.]
[이야기를 흡수하여 스탯이 상승합니다.]
[당신의 격이 아주 약간 상승합니다.]
아귀도의 모든 것들이 끝에서부터 새하얀 활자의 조각으로 변해 천천히 흩어졌다.
권지아는 그 중심에 서서 멍하니, 시선을 빼앗겼다.
어느덧 유현이 그녀의 곁에 다가와 섰다.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너…….”
유현의 얼굴을 본 권지아는 억눌러 왔던 마음이 복받쳐 오를 것만 같아서 일부러 고개를 틀어 그의 시선을 피했다. 회귀자의 특성으로도 쉽게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의 격동이었다.
유현은 권지아의 반응에 피식 웃으며 말없이 그녀처럼 끝부터 부서져 가는 사상세계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아귀도를 구성하던 일부 텍스트가 유현의 앞에 모이더니, 한 권의 책을 만들었다.
강혜림과 활동하면서 만들어진 책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책이자 새로운 이야기.
유현은 잠시 고민하다, 책에 제목을 새겼다.
“그보다 기분은 어떠십니까?”
제목을 새긴 유현이 기습적으로 권지아에게 물었다.
권지아는 잠시 무슨 대답을 할지 망설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다.”
“아직 모르겠습니까?”
“그래.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권지아는 몇 번이고 삶을 반복했지만, 이런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 싸운 적도 없었고, 최후에 승리를 쟁취한 적도 없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선에서는 이번이 최초였다.
그리고 이렇게 가슴이 세차게 뛰는 적도, 처음이었다.
그녀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유현을 힐끔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음?”
“나는 아직 이런 걸 잘 모르니까…….”
권지아가 자신의 곁에 선 유현을 올려다보며, 불안한 듯 두 손으로 주먹을 꼭 쥐며.
용기를 내어 말했다.
“앞으로도, 많이 알려 줬으면 좋겠다.”
“…….”
도저히 예상하지 못한 기습적인 그 말에 유현은 순간이지만, 벙찌고 말았다.
그녀의 대답이 놀라웠을 뿐만 아니라 분위기도 한몫했다. 사라져 가는 백색의 세상 속에서 단둘만 남은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무슨 고백이라도 하는 것 같잖아.’
유현은 괜히 쑥스러워져서 검지로 뺨을 긁적이다가, 이내 어깨에 힘을 빼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얼마든지요. 당신이 알고 싶지 않더라도, 질리도록 알려드릴 테니 앞으로도 각오하세요.”
“바라던 바다.”
어느덧 사상세계가 끝을 고하고, 어지러이 진행되던 정산이 드디어 끝났다.
[축하합니다. 당신들은 도저히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된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수많은 성령이 당신들의 업적을 칭송합니다. 이는 혼성계에서 쉽게 잊혀지지 않을 하나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혼성계에 당신들의 이름이 퍼집니다.]
혼성계에 이름이 퍼진다는 것은 그만큼 소문이 난다는 소리다. 소문이 퍼지면 퍼질수록, 유현과 권지아의 이름은 혼성계에서 나돌게 될 것이고, 그러한 소문은 자연스레 [이야기]가 되어 둘의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성령들이 손뼉을 치며 둘의 성공을 축하합니다.]
[74,300TP를 후원받았습니다.]
밀려왔던 후원 창이 열리자 쌓인 후원 포인트가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사상세계를 클리어 하고 보너스를 받으면서 획득한 것이 약 2만. 거기에 더해서 성령들의 추가 후원까지 합치면 9만을 넘어 10만에 육박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히든피스를 획득한 추가 업적과 아직도 감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후원을 지속하는 성령들.
거기에 더해서 또 소문이 퍼졌는지, 새롭게 몰려오는 시청령들까지.
어느덧 유현의 서재의 시청령은 마의 벽이라 생각했던 5,000을 돌파했다.
텔러에게만 주어진 각종 서브미션을 클리어 했다는 메시지가 축포처럼 터져 나왔다.
[누적 획득 포인트: 182,500TP]
그렇게 이번 시화를 통해 벌어들인 포인트는 무려 18만TP.
단순 후원 금액만 이 정도고 구독령의 증가로 인한 구독비와 서재에 모인 성령들의 시화로 인한 수수료, 거기에 더해 최근 계약을 맺은 덕에 추가로 들어오는 광고비까지.
그것을 다 합칠 경우에는 25만 포인트를 넘어서게 됐다.
‘단 한 번의 시화로 이렇게 벌다니.’
이건 유현도 의도한 일이 아니었다.
강혜림과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을 때도 이와 비슷했지만, 그래도 규모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작았다.
어느 정도 서재가 성장세를 보인 이후에 한계를 넘어선 이야기를 한 번 더 보여 주니, 들어오는 보상이 수준을 달리했다.
‘만약 내 서재가 더 성장하고, 이와 비슷한 수준의 시화를 또 보여 주게 된다면.’
그때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많은 양의 포인트를 긁어모을 수 있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상 가는 막대한 명성까지.
물론, 그게 하고 싶다고 쉽게 할 수 있는 것일 리가 없었다. 지금도 거의 목숨을 건 외줄 타기의 끝에 가까스로 성공할 수 있었으니까.
아마, 당장 똑같이 하라고 해도 못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면.’
분명 가슴 뛰는 이야기를 또다시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고.
유현은 그렇게 굳게 믿었다.
유현은 손에 든 책을 더 강하게 쥐었다.
책의 표지.
제목이 있어야 할 주어진 공간에는
[꿈꾸는 자들의 이야기]라고 적혀 있었다.
* * *
그날, 유현과 권지아가 아귀도 사상세계를 클리어한 날, 백화 매니지먼트를 주시하던 여러 클랜은 한 가지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백화 매니지먼트가 아귀도를 노린다는 소식을 듣고서, 밑에 사람들을 시켜서 그들을 방해하고 뭘 하려는지 조사를 지시했던 일이었다.
[아귀도 사상세계 클리어 보고서.]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사람들은 모두 제각각의 반응을 보였다.
누구는 짜증을 내고, 또 누군가는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분석하고, 또 누군가는 이번 일이 불러일으킬 영향을 생각했다.
“방해하라고 보냈더니, 실패했다고?”
“사상세계 클리어? 결국, 백화 매니지먼트는 또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건가?”
“믿을 수가 없군.”
하지만, 보고서를 읽은 그들의 머리에 떠오르는 한 가지 공통된 의문이 있었다.
“대체, 권지아가 누구야?”
백화 매니지먼트가 또 일을 저질렀다고 해서 이번에도 검후의 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올라온 보고서를 확인해 보니, 검후는커녕 처음 보는 컬렉터의 이름이 떡하니 적혀 있었다.
그리고 추가로 들어온 정보를 확인해 보니, 더욱 가관이었다.
권지아는 이번에 백화 매니지먼트가 새롭게 영입한 컬렉터였다.
그것도 갓 양성소를 졸업해 수료식을 끝내고, 이제 막 종9품 컬렉터라는 등급을 배정받은 컬렉터.
그런 그녀가 별로 관심을 주지 않았던 아귀도를 클리어 했다는 거였다. 그것도 클랜의 방해마저 뚫고서.
심지어 아귀도 내부에 숨겨진 저승 옥졸의 존재, 그들을 지휘하는 해골 장수에 대한 이야기까지 곁들어지면서 자료를 탐독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깊은 골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보고서가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몇 차례 검토를 거쳐 여기까지 올라오는 이 서류에 개인의 사견 따위가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현실이라는 소리였다.
‘저만한 컬렉터가 있었다고? 그런데 아무도 몰랐단 말이야?’
‘영입부는 대체 뭘 하는 거야! 이런 인재를 눈뜨고 놓쳤다 이 말인가?!’
‘내 이것들을 그냥……!’
애먼 사람들을 향한 분노가 들끓는 와중에도, 작금의 상황은 그들에게 절대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을 뇌리 깊은 곳에 각인시켰다.
백화 매니지먼트에 검후의 뒤를 이어 또 하나의 대단한 컬렉터 하나가 새로 들어갔다는 것을.
* * *
“흠.”
나는 사무실의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다음 사상세계를 준비하기엔 아귀도에서 심력을 소모한 것이 너무 컸다. 미친 듯이 싸울 때는 막상 몰랐는데, 전부 다 끝났다고 하니 몇 날 며칠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깡으로 며칠을 쉬는 짓은 하지 않았다.
나 자신에게 준 휴가는 고작 이틀. 그리고 이 2일 사이에도 나는 잡다한 일들을 처리하는 기행을 선보였다.
‘뭐, 딱히 힘들진 않았지만.’
지금까지 워낙 쉬지 않고 달려와서 그런가, 딱히 진짜 쉬는 것도 아닌데도 오히려 편하기는커녕 ‘이래도 좋은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종말에서도 하루도 멈추지 않았고, 회귀한 이후에도 그랬었다.
이제는 이렇게 꾸역꾸역 일을 해 나가며 사는 것이 내 삶이 되고 말았다. 쉬면 쉬는 대로 불안해서 못 견디겠다.
‘그것이 나쁘냐고 묻는다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적응이 된 건지, 아니면 감각이 무뎌진 건지.
뭐가 어찌 됐든 지금의 나는 사실상 워커홀릭이었다. 그런 내게 2일의 시간 동안 쉰다는 것은 나름 큰마음을 먹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나름 재충전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썩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제 슬슬 다시 움직여야겠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품으며, 나는 내 맞은편에 앉은 두 명의 여성을 살폈다.
평소라면 자연스레 내 옆에 앉아야 할 강혜림은 오늘은 웬일인지 반대편에 앉아있다. 그리고 강혜림의 곁에는 권지아가 가만히 앉아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눈이 확 뜨이는 미인이었고, 나와 계약을 맺어 준 홍복인데.
“왜 자꾸 저를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
조금 전부터 나를 빤히 주시하는 게, 뭔가 기분이 묘했다.
“네, 네? 무슨 소린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군.”
두 사람이 동시에 그렇게 대답했다. 강혜림의 경우에는 이제 권지아도 한 식구가 됐으니, 내숭을 부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 사무실 내에서 만큼은 검후로서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진짜 카리스마인 권지아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찐과 짭인가?”
“그건 무슨 소린가?”
“찐? 짭? 유현 씨야말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아뇨. 모르면 됐어요.”
강혜림의 경우에는 짭 콘셉트였고, 권지아는 찐 콘셉트였지만. 굳이 이 말을 입 밖으로 낼 정도로 나는 멍청하지 않았다.
다만, 아까부터 나를 자꾸 주시하는 두 사람의 시선이 걸리는데.
대체, 뭐 때문에?
그렇게 서로 왜 보는 겁니까? 아닌데? 안 보는데? 이런 식의 시선 교환이 몇 차례나 이루어 졌을까?
“아, 증말.”
결국, 대표 자리에 앉아서 보다 못한 서련 씨가 짜증을 내며 이 기묘한 분위기에 종말을 고했다.
“두 분 다 눈치만 보지 마시고, 서로 유현 씨가 자기 데려가 달라고 말을 똑바로 하세요!”
“서, 서련아!”
“크흠.”
강혜림은 뜨악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권지아는 헛기침하며 시선을 살짝 피했다.
나는 그제야 둘이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설마, 지금 둘 다 저한테 자기를 사상세계로 데려가 달라고 시위하고 있던 거였습니까?”
“아, 아닌데요오.”
“그래. 맞다.”
“앗!”
아닌 척하려던 강혜림은 권지아가 당당하게 대꾸하자, 깜짝 놀라며 곧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네 맞아요!”
“흐음.”
나는 둘의 행동을 보고 왜 그랬는지,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다.
“뭐, 슬슬 사상세계에 갈 때가 되기는 했죠.”
“맞죠? 그러면 당연히 저죠!”
강혜림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저께에는 이 ‘후배’와 단둘이서 갔다 왔잖아요. 순서를 살피면 당연히 저죠.”
“아니. 그 말을 쉬이 넘길 수 없겠군.”
권지아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나는 아직 부족하다. 사상세계는 지난번이 처음이었지. 빠르게 강해지기 위해서는 이번에도 내 차례가 맞다고 본다. 나는 아직 부족한 ‘후배’니까. ‘선배’가 이해해 줄 수 있겠지?”
“으극!”
자신이 내뱉은 주장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은 강혜림은 화살에 맞은 사람처럼 이상한 소리를 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니! 정당한 수순을 생각하면 내가!”
“공정하게 생각하면 횟수는 그쪽이 많을 터. 이번에도 나다.”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두 사람을 보니, 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전 아직 누구와도 가겠다고 말하지 않았는데요?”
물론, 필요성은 느끼고 있었다. 담당하는 컬렉터가 늘어나면서 분명, 이렇게 될 거라고 어렴풋이 예상은 했으니까.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은 일반적인 텔러와 다르다. 당연히 보통의 텔러가 여러 명의 컬렉터를 커버하는 것과 다르게 나는 둘만 되고, 상당히 바빠진다.
이런 문제는 분명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이걸 어쩌면 좋을지 속으로 고민하는 순간,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나와 권지아, 강혜림의 사이에 놓고 허공에 기묘한 빛이 공간을 벌리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뭐지?’
뒤이어 벌어진 광경에 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