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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97화 (97/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97화

부엉.

“……그래. 백효야. 고생 많았어.”

나는 [각인]의 효과가 끝나 다시 자그마한 몸으로 돌아온 백효를 부드럽게 맞이해 줬다. 아무리 조건부 성장을 시켰다 해도 이번 비행은 백효에게도 꽤나 무리했던 일이라, 녀석은 내 어깨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나는 백효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뒤 싸움이 열리는 무대를 올려다봤다. 눈 부신 빛이 터져 나오는 저 위에서 강렬한 충돌이 연달아 벌어지고 있었다.

지반이 무너지는 이 상황 속에서도 귓가에 또렷하게 울리는 검명.

권지아의 싸움은 그 정도로 치열하고 또 처절했다.

“지금…… 어떻게 되고 있는 겁니까?”

내가 말없이 그녀의 싸움을 지켜보는 도중, 겨우 제정신을 차린 컬렉터 중 몇 명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싸우고 있습니다.”

“싸우고 있다고? 대체, 누가…….”

“설마, 아까 그 새하얀 섬광이…….”

“네.”

나는 그들을 돌아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 세계의 붕괴를 막기 위해 한 사람이 싸우고 있죠.”

“…….”

“…….”

컬렉터들도 그제야 자신들의 목숨이 저 위에서 싸우고 있는 권지아의 손에 달렸다는 걸 깨달았는지, 분위기가 진지하게 변했다.

그들은 내가 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보내며, 간절히 빌었다.

제발, 이겨 달라고.

* * *

카아앙!

[흐하하하하핫!]

튕겨 나간 명도를 다시 쥐며 자세를 잡은 해골 장수는 강렬한 웃음을 토해 냈다.

이전까지 감정이라는 것을 드러낸 적이 없었지만, 그녀의 검이 갑옷을 뚫고 몸에 박힌 순간부터 해골 장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한 가지 감정을 떠올렸다.

바로, 호승심이었다.

[이게 대체 얼마 만이더냐! 이 감각! 이 기분!]

이제는 얼마나 됐는지, 세는 것을 포기한 긴 시간 동안 그는 언제나 이곳을 지켜 왔다.

왜 지키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지켜야 한다는 생각만 그의 뇌리 깊숙한 곳에 각인되어 있었다.

지킨다.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

-대체, 무엇을 지켜야 하지?

모른다. 하지만 지켜야만 했다. 그게 그의 삶의 이유였다.

의지도 마모되고 감정도 메말라, 단지 이유 모를 목적 하나만을 바라보며 자리를 지켜 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해골 장수는 잊고 있었던 자신의 옛 감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처음엔 너희들을 향한 분노만 있었다.]

붉게 타오르던 그의 안광이 푸른빛으로 변했다. 무기질 적으로 침입자를 죽이기 위해 존재하던 그의 분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배제해야 할 적이 내 부하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내게 잊고 지냈던 상처마저 입혔으니까.]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상처가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그의 감정을 일깨웠다.

[그 점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드디어, 내가 뭘 하고 싶었는지 깨닫게 됐으니까. 무인으로서의 본분을 말이지!]

그는 싸우고 싶었다.

그는 무사였고, 장수였다. 검을 휘두르는 자였다.

검을 쥔 자는 싸워야 했다. 싸우기 위해 존재했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언제 올지도 모를 적들을 미래영겁 기다리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고맙구나! 이름 모를 적수여! 나 오늘, 이 자리에서 그 염원을 이루게 되나니!]

“시끄럽군. 그렇게 고마우면 비켜 주지 그러나?”

[그러나, 그것과 이것은 별개. 정말로 그러고 싶다면, 이 나를 상대로 당당하게 승리를 쟁취해 내 시체를 넘어 보아라!]

“이미, 시체 주제에 시끄럽다!”

권지아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해골 장수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이전의 싸움에서 밀렸던 것은 정말 무기 때문이라고 항변하기라도 하듯, 그녀의 위세는 훨씬 더 매서워졌다.

명도를 휘두르며 그것을 막아 내던 해골 장수는 권지아의 바뀐 기세에 감탄을 흘렸다.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흉악한 기세로다! 단순히 무기를 바꿨다고 해서 변할 수 있는 게 아닐진대, 심경의 변화라도 있던 것인가?]

“네 덕분에 깨달은 게 있었거든.”

[그런가.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 뭐가 어찌 됐든, 서로 신명 나게 싸워 보자꾸나!]

해골 장수는 이전과 다르게 열의가 가득한 목소리로 그렇게 외쳤다. 하지만 목소리와 다르게 그의 태도는 신중하기 그지없었다. 이전처럼 무작정 달려드는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

권지아는 그것이 훨씬 더 귀찮다는 것을 오랜 세월의 전투로 알고 있었다.

‘이쪽은 타임 리미트가 있어. 시간을 끌면 무조건 불리해진다!’

권지아는 다급한 심정으로 해골 장수 너머에 있는 명부의 말뚝을 곁눈질했다.

그 시선을 모를 리 없는 해골 장수는 웃음을 토해 냈다.

[크하하. 이 나를 앞에 두고도 다른 곳에 시선을 보낸다는 것인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자존심을 자극하는구나! 좋다! 그대가 바라는 대로 해 주마!]

해골 장수는 수비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서로의 모든 것을 부딪치는 치열한 싸움이었다.

오래전 주어진 명령은 이제 어찌 되든 좋았다. 중요한 것은, 드디어 이 오랜 세월의 무료함을 씻어 줄 적수가 나타났다는 거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싸움을,

아니, 마지막이기에.

화려하게 불태우는 것이다.

[그대가 원하는 싸움, 받아 주마! 오너라! 모든 것을 걸고 내게 부딪쳐라!]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었다!”

권지아는 이빨을 악물며 해골 장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전력을 토해 내듯 뿜어져 나오는 오러가 해골 장수를 덮쳐 왔다. 해골 장수는 명도를 비스듬하게 잡으며 그런 위협적인 공격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튕겨 내듯 맞섰다.

콰과광!

검과 검이 충돌했다. 청명한 검명은 어느덧 폭음으로 변해 주변에 충격파를 흩뿌렸다.

치열한 접전이 지속됐다. 검을 휘두르고 방어하고, 찌르고, 흘려내고. 그것을 이어 나가면서 해골 전사는 자신의 공허했던 마음이 충만하게 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래. 이거다. 이게 내가 그토록 바라던 거였다!

[이게 내가 원했던 거였다!]

“쫑알쫑알, 시끄러워!”

[어째서 분노하는 것인가? 그대는 이 싸움이 전혀 즐겁지 않은 건가?]

“즐거울 리가 없잖아!”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권지아는 지금 당장이라도 저 나불거리는 해골의 하관을 날려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이었다.

해골 장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이상하군. 그대는 나와 같은 부류가 아니었는가?]

“내가…… 너와 같다고?”

[그래. 나는 안다. 그대와 나는 동류라는 걸.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목적을 상실한 사람만이 그런 분위기를 낼 수 있으니 말이지. 내 말이 틀렸는가?]

“…….”

정곡을 찌르는 말에 권지아가 입을 다물었다. 신화의 이야기로 구성된 환상체에게 이런 지적을 받았다는 사실이 치욕스럽기보다도 자기도 모르던 내면을 타인이 제대로 꿰뚫어 봤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묘한 반응이로군.]

해골 장수는 그제야 무언가 깨달았는지, 나지막이 감탄사를 흘렸다.

[아아. 그런가. 그대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거로군?]

발견하지 못했다.

그것은 권지아가 오랜 세월을 살아가며 잊어버렸던, 그녀의 삶의 목적.

해골 장수는 결례를 범했다는 듯, 진심을 담아 권지아에게 사과했다.

[미안하게 됐군. 그대는 내게 삶의 목적을 되찾아 줬지만, 아무래도 나는 그게 불가능할 거 같으니까.]

“……누가, 그걸 모르는 줄 알아?”

[음?]

“나도 알아. 분명, 나는 무언가를 애타게 바라고 있다는 것을.”

권지아도 모르는 게 아니다. 애초에 이 이야기는 유현과 만났을 때도 한번 나눈 적이 있었다.

“분명, 그것은 지금 당장 내가 뭘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는 게 아니겠지.”

잊어버린 것을 되찾기엔 그녀가 걸어온 길이 너무 길었다. 애초에 잊어버렸기에, 떠올리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마치 좋은 꿈을 꿨는데, 잠에서 깨어나고 그것이 무엇인지 기억에서 소거된 느낌.

분명 즐겁고 기쁜 일인데, 그것을 떠올리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그 답답함.

그것이 고작 칼 몇 번 부딪쳤다고, 해소될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그걸 바라는 게 아니야.”

그래. 그녀에게는 지금 따로 할 일이 있지 않았던가.

“당장에 널 쓰러뜨리고, 그 말뚝을 다시 뽑겠어. 그게 지금 내가 할 일이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해골 장수를 노려보며 말하는 권지아의 단호함에 푸른 안광을 흘리던 해골 장수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흘렸다.

[그런가?]

아무래도 자신은 상대방을 너무 얕잡아 봤던 것 같다.

그녀는 단순한 침입자가 아니었다. 상실했던 그의 삶의 목표를 다시 일깨워 줬으며, 그의 모든 것을 걸고 부딪쳐야 할 일생일대의 적이었다.

그런 자를 앞에 두고서, 입으로만 떠들고 행동으로 보이지 않다니.

이 얼마나 오만한 짓이란 말인가.

해골 장수는 스스로 반성했다.

[잘 알겠다.]

그러니 이 싸움을 받아 준다.

해골 장수는 양손으로 명도를 강하게 쥐고, 최후의 싸움을 맞이하기 위해 자세를 취했다.

[피차 말은 필요 없겠지. 중요한 건 오직 하나. 이 싸움에서 누가 이기느냐.]

그의 푸른 안광이 찻잔 속의 태풍처럼 검은 동공 안쪽에서 강하게 소용돌이쳤다.

권지아는 해골 장수의 진심을 읽어 내고 그녀 또한 백련을 강하게 쥐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많은 힘을 소모했지만, 여기서 남은 것을 전부 다 쥐어 짜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지는 건 이쪽이 될 테니까.

[이 얼마나 가슴이 뛰는 싸움인가. 그대와 검을 나누는 것이 이게 마지막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한탄스러울 수가 없군.]

“…….”

권지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붕괴하는 세상 속에서 그녀의 집중력은 극한을 향해 치달았다.

백련에 한계까지 밀어 넣은 강렬한 이야기의 힘이 오라의 형태로 변했다. 하지만 이전에 보여 준 짐승의 발톱과 같은 형상이 아니었다.

‘내 모든 것을 불태울 최고의 일격.’

검 끝에서 피어나는 오러는 흉악한 짐승의 머리를 띄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을 기술이었지만, 미래를 향한 강렬한 마음이 순간이지만 그녀의 한계치를 뛰어넘게 만들었다.

[그래. 바로 그거다.]

해골 장수는 그 모습에 전율을 느꼈다. 그 또한 명도에 모든 힘을 불어넣었다.

최후의 싸움을 맞이하는 둘 사이로 팽팽하게 당겨진 분위기가 한계까지 치달았다.

그리고.

파앗!

둘이 동시에 움직였다.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가 해골 장수를 물어뜯기 위해 입을 벌렸다. 해골 장수는 새하얗게 극한까지 압축된 한 줄기 섬광을 그대로 내질렀다.

이대로 저 짐승의 머리를 관통해, 그 너머 적수의 심장을 함께 꿰뚫기 위해.

올곧고 흔들리지 않게 뻗는다.

촤악!

이번 격돌에서 충돌은 없었다. 권지아와 해골 장수는 서로 서 있는 위치가 바뀐 뒤였다.

등을 돌린 채, 돌아보지 않는 둘은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검을 내지른 자세 그대로였다.

[……훌륭하다.]

해골 장수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오른손에 쥔 검을 제외하면, 그의 상반신은 반절 이상이 거대한 짐승의 이빨에 뜯겨 나간 듯 사라져 있었다. 갑옷도, 육체를 받쳐 주는 뼈도 마찬가지.

반대로 권지아의 상처라고 한다면, 최후의 격돌로 뺨에 그어진 자상이 전부였다.

그가 전력을 다해 내지른 검은 결국 짐승의 이빨에 찢겨나갔다.

그 최후의 흔적이라고 할 만한 것만이 권지아를 살짝 스쳤을 뿐이다.

명백히 이쪽의 패배였다.

[전력을 다했지만, 졌다. 이견의 여지가 없는 나의 패배로군.]

“…….”

권지아는 해골 장수를 돌아봤다. 그녀의 시선은 처음부터 자신이 이길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 흔들림이 없었다.

해골 장수는 그것이 참을 수 없이 즐겁고 뿌듯했다.

[받아라.]

해골 장수는 손에 쥔 명도를 그녀에게 던지듯 건넸다.

[내 적수를 위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다.]

“…….”

권지아는 말없이 명도를 받아들였다. 자신의 선물을 거부하지 않는 모습에 해골 장수는 낮은 목소리로 웃음을 흘리더니, 권지아를 향해 충고의 말을 날렸다.

[그대. 내 최고이자 최후의 적수여. 분명, 나는 그대의 공허한 마음에 불조차 지피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그대는 언젠가 나처럼 분명 목적을 찾게 될 것이다.]

“너…….”

[그러니 멈추지 마라! 계속 나아가라! 그 목숨이 스러지지 않는 한 분명, 기회는 찾아올 터!]

해골 장수는 웃음과 함께 서서히 몸이 스러져갔다. 화려한 갑옷은 순식간에 녹이 슬어가며 바스러졌고, 백골은 서서히 검에 부식되며 가루처럼 흩어졌다.

그는 고개를 짓쳐들어 하늘을 향했다

[나의 모든 한은 이 자리에서 전부 다 풀었도다! 한 명의 무인으로서 기쁘게 떠나겠다!]

그 말을 끝으로 해골 장수의 몸은 분해되어 사라졌다.

그 최후를 지켜보던 권지아는 자신의 손에 쥔 명검을 바라봤다.

[히든피스 ‘명도’를 획득했습니다.]

한 줄의 메시지만이 그녀가 이 싸움의 승리자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었다.

[성령들이 당신의 싸움을 칭송합니다.]

권지아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수천 개가 넘는 무수히 많은 별빛, 그들이 모두 권지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성령들이 당신의 승리를 예찬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의 싸움이 아니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무대의 아래에서 쟁취한 회귀자의 삶의 의지였다.

“끝났다.”

권지아는 명도를 허리춤에 걸어놓은 뒤, 바닥에 박힌 명부의 말뚝을 쥐고 힘을 줘서 뽑아냈다. 깊숙이 박힌 것 치고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쉽게 뽑혔다.

그렇게 세상의 붕괴가 멈췄다.

[사상세계 ‘아귀도(餓鬼道)’를 클리어 했습니다.]

이 모든 험난한 과정을 하나로 일축하는 무미건조한 하나의 문장.

거기에 그녀의 고난과 갈등, 노력은 단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걸로 좋겠지.’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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