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90화
일행은 갑자기 손님이 찾아올 줄 몰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쪽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손님이 찾아왔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자. 여기까지 왔으니, 이미 마음은 정하신 거겠죠?”
끄덕.
권지아는 대답 대신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약간 반항적으로 느껴지는 그 행동마저 필사적으로 자존심을 지키려는 거 같아서 은근히 귀엽게 느껴졌다.
내 안내에 따라 사무실에 들어온 그녀는 맞은편의 빈자리에 앉았다.
백서련과 강혜림의 시선이 그녀에게 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나는 곧바로 권지아에게 물었다.
“커피 마실래요?”
“……그럼, 아메리카노로.”
내가 백서련에게 시선을 보내자, 그녀는 얼떨떨하면서도 대답했다.
“어…… 저희 매니지에 맥심밖에 없는데. 아메리카노는 비싸서…….”
아니, 최근에 번 돈은 다 어디 갔습니까?
그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오는 걸 눌러 담았다. 아마 빚 갚는 데 다 썼겠지.
권지아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이 대로면 괜히 분위기만 이상해질 것 같아서 나는 곧바로 현찰을 꺼내 백서련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이게 뭐냐는 시선을 던졌다.
“나가서 사 오세요.”
“제가요? 저 매니지 대표인데요?”
“남은 돈은 서련 씨 용돈 하세요.”
“금방 갔다 올게요!”
매니지 대표를 지폐 몇 장으로 마음껏 부려 먹을 수 있다는 것이 과연 올바른 사회인의 행동인가에 대한 고찰은 나중으로 미루자.
그렇게 백서련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떠났고, 이제 남은 것은 강혜림이었다. 내 시선을 받은 그녀는 자신은 절대로 이 사무실을 나가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담은 눈빛을 보내왔다.
누가 뭐래나?
나는 곧바로 권지아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읽어 보시고 마음에 들지 않는 조항이 있는지, 확인해보세요.”
“음.”
권지아는 근엄한 표정으로 계약서를 샅샅이 훑어봤다. 하지만 내가 고심해서 작성한 물건답게 그녀는 어떠한 트집도 잡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잡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괜찮군.”
“그거 다행이군요.”
“……유현 씨. 이분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강혜림이 내게 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아까부터 나와 마주 보며 앉아 있는 권지아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경계심과 불만이 반반 섞인 눈빛이었다.
“이번에 제가 새로 영입한 컬렉터입니다.”
“아. 이분이 그…… 두 번째?”
묘하게 두 번째를 강요하듯 말하는 건 내 착각일까?
강혜림이 대화에 끼어들어서 그런지, 권지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를 향했다. 미래에 대한 지식이 있는 그녀는 강혜림을 알아보고는 눈을 살짝 크게 뜨더니, 이내 내 쪽으로 시선을 보내왔다. 네가 한 짓이냐? 그녀의 눈빛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우리 둘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일까? 강혜림이 평소보다 조금 더 까칠하게 나왔다.
“저한테는 아무런 말씀도 안 해 주셨네요.”
“갑자기 정해진 일이었거든요. 그리고 제가 조만간 후배를 찾아오겠다고 말하지 않았었나요?”
“그래도 좀 오래 걸릴 줄 알았죠.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그녀는 잠시 권지아를 슬쩍 보더니, 말을 아꼈다. 나는 그 모습에 잠시 속으로 고민했다.
생각보다 혜림 씨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은근하게 반대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역시, 위기감을 느끼기라도 한 걸까?
내가 그녀에게 선배로서 대범한 마음가짐을 갖는 것에 대한 장대한 설교를 어떻게 시작할까 고민하던 와중 먼저 입을 연 것은 권지아였다.
“내가 불편한가?”
“어, 어?”
설마 저쪽에서 직설적으로 물어 올 줄 몰랐는지, 강혜림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제삼자가 있다면 이제는 자연스럽게 나오던 검후라는 가면조차, 지금 상황에서 효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권지아는 애초에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지,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그럴 법도 하지. 자신의 자리를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니까. 특히 그쪽처럼 유명한 컬렉터라면 더더욱.”
“아니, 나는, 그…….”
“내가 그쪽을 심란하게 만들었다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싶군.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미움받는 역할은 이미 익숙하니까.”
그녀의 말에 강혜림도 놀랐고 나도 놀랐다. 아마,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가장 놀랐을 거다.
회귀자가 사과했다고?
그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회귀자란 무엇인가? 자고로 자신에게 사소한 시비만 걸어도 상대방의 뚝배기를 시원하게 깨 버리는 족속들이 아니던가? 첫 만남에서 인사보다 ‘죽인다’, ‘꺼져라’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내뱉는 게 회귀자다.
특히 권지아처럼 2회차도 아니고, 무한 회귀에 가까운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런데 솔직하게 사과를 했다는 건, 그녀도 진지하다는 소린데.’
무슨 심경에 변화라도 생긴 것일까? 내가 그런 시선을 담아 보내자 권지아는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이내 고개를 슬쩍 돌려 시선을 피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찌 보면 내겐 좋은 변화의 바람이 분 셈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그녀의 말을 수긍했다.
“혜림 씨. 저쪽도 저렇게 나오니까, 너무 뭐라 하지 마세요. 화 푸시고요.”
“화…… 안 났어요.”
내 말에 강혜림은 나를 살짝 쏘아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내가 야속하게 보인 것 같지만, 그 이상으로 권지아가 당당하게 사과했기에 자기만 나쁜 사람이 된 느낌을 받았으리라.
나는 그녀에게만 들리게끔 귓속말로 전했다.
‘알죠. 혜림 씨가 나쁜 거 아니라는 거.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상대방도 혜림 씨처럼 어떻게 대할 줄 몰라서 쑥스러워하는 거니까요. 마음이 넓은 선배로서, 혜림 씨가 이해해 주세요.’
‘마음 넓은…… 선배요?’
‘네. 이제 혜림 씨도 어엿한 컬렉터인데, 선배 대접도 받아야죠. 저는 혜림 씨가 그 역할을 정말 잘할 거라 믿고 있습니다.’
이런 거짓말에 가까운 달래기가 먹힐까 싶었는데, 풀어지는 검후의 표정을 보니 아주 제대로 먹혀든 것 같았다. 칭찬에 한없이 나약한 여자, 그 이름은 바로 강혜림이다.
“저 왔어요!”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나갔던 서련 씨가 아메리카노를 들고 사무실에 들어왔다.
그녀는 그래도 용돈이 생겨서 기분이 좋은지, 곧바로 우리들에게 잔을 하나씩 건넸다.
“음.”
권지아는 사무실 내 분위기를 살피다가 나쁘지 않다는 걸 깨달았는지, 다시 계약서에 시선을 던졌다.
쭈욱 시선을 내리던 그녀는 계약서의 마지막 서명란을 주시하다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이번에는 무엇을 말하는지, 나는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분명 그녀의 마음 어딘가에는 변화를 바라는 갈망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이다.
“계약서에 서명. 끝났다.”
권지아는 곧바로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휘갈기지 않은 정갈한 글씨였다. 계약서가 작성이 완료되자, 이내 빛을 뿌리며 가루처럼 흩어졌다.
컬렉터와 텔러 간의 계약이 이로써 완벽하게 성사되었음을 알렸다.
“여러분. 이번에 새로 들어온 컬렉터, 권지아 씨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권지아다…….”
권지아는 조금 부끄러운지,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조금 전 사과로 마음이 풀린 덕인지 혜림 씨는 가볍게 넘어갔고, 서련 씨도 또 독특한 사람이 들어왔네 하는 감상만 흘렸다.
의외로 가장 고비일 거라 생각했던 권지아의 영입은 이렇게 성공적으로 끝나게 됐다.
* * *
나와 권지아는 다시금 아귀도 사상세계에 방문했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라고 한다면 나와 권지아가 제대로 된 계약을 맺었다는 것, 그리고 권지아의 모습이 꽤나 많이 변했다는 것 정도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산발이었던 머리를 어느 정도 정리하고 옷도 나름 갖춰 입은 채였다.
‘흐음. 역시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눈치는 챘지만, 인물이 아주 좋단 말이지.’
강혜림과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강혜림이 타고난 허당기를 애써 숨기며 고고한 모습을 풍긴다면, 권지아는 그보다 훨씬 더 무겁고 진중한 느낌이었다.
검후로서 강혜림이 고고한 학이라면, 권지아는 창공을 누비는 송골매와 같았다.
날카로운 눈빛과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 그 이상으로 상대방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까지.
특성의 힘 덕분인지, 그러한 기세는 더욱더 시너지를 발휘하고 있었다.
‘이거라면 성령님들도 확실히 좋아하겠어.’
무엇보다 이 전까지 권지아의 몸 상태가 그렇게 썩 좋지 않아서, 나는 내 피 같은 포인트를 이용해 온갖 이야기를 사들여 그녀에게 욱여넣듯이 먹였다.
덕분에 권지아는 신체적인 스펙은 이전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올랐다.
나는 자신에게 이야기를 건네주는 나를 보며 그녀가 묻던 때를 떠올렸다.
‘드세요. 지금 그 상태로는 사상세계는커녕 운동부터 해야 할 판이니까요.’
‘설마, 공짜인가?’
‘그럴 리가요. 빌려주는 겁니다. 나중에 갚으셔야죠.’
물론, 공짜로 빌려준 건 아니다. 내가 투자한 만큼 나중에 그녀에게 다시 받아 낼 생각이었다. 물론, 이자는 없다. 나는 클린한 텔러니까.
컬렉터의 장점은 신체 능력을 이런 식으로 급격하게 올릴 수 있다는 거였다.
신체 트레이닝을 통해 몸을 만드는 긴 과정을 겪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기본적인 준비를 끝내고, 나는 그녀와 사전에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아귀도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제 서재를 개방하려고 합니다. 준비됐습니까?”
“얼마든지.”
허락도 떨어졌겠다, 나는 곧바로 서재를 열었다.
내가 시화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퍼져 나갔는지, 곧바로 성령들이 내 서재로 우르르 몰려왔다.
[100TP 후원!]
[대하! 대리 하이라는 뜻!]
[1000TP 후원!]
[강유현 텔러님. 이번에 대리로 승진했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리고 별거 아니지만, 제 성의니 받아 주세요.]
“아이고. 후원 감사합니다.”
[100TP 후원!]
[뭐임? 설마, 벌써 대리 단 거임? 와 미쳤네.]
서재의 개방과 동시에 나에게 인사를 건네며, 내가 대리로 승진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부가 축하의 메시지를 날렸다. 나는 연신 고개를 꾸벅이며 감사를 전했다. 아마 승진했다고, 이렇게 축하를 받는 텔러는 나밖에 없을 거다.
선물의 세례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직 우리 서재의 진짜 큰손들의 선물이 남아 있었으니까.
[가장 어두운 곳에서 웃는 자가 10,000TP 후원!]
[축하드립니다. 조만간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실제로 보니 더 놀랍군요. 축하한다는 의미로 나중에 따로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네. 어두운 곳에서 웃는 자님. 감사합니다.”
[찬란한 빛을 닮은 자가 10,000TP 후원!]
[저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이건 제 개인의 성의니, 받아 주세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정말로.”
사탄과 미카엘이 서로 경쟁을 하듯이 내게 개인 메일로 선물을 보내왔다. 저 둘이 주는 것인 만큼 보통 물건이 아닐 거다. 당장 열어서 확인해 보고 싶지만, 지금은 업무에 집중해야 할 때. 선물은 나중에 확인하자.
‘게다가 새로운 성령들의 모습이 눈에 띄는군.’
얼마 전까지 못 보던 성령들이 확 늘었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해당 성령들의 존재감이 작지 않다는 것이 내 관심을 자극했다.
‘1세대 성령은 둘뿐이지만, 어느덧 2세대 성령들의 숫자가 많이 늘었어.’
그리고 2세대 성령들은 전부 다 특정 대성군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이었다.
최근 연달아 이어진 시화대전과 컬렉터의 결투 때문인지, 나의 인지도가 늘어난 상황. 거기에 관심을 품은 대성군의 성령들이 슬슬 드러날 때가 되기는 했다.
‘아직은 2세대라고 하지만, 대성군 소속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리스 신화의 올림포스.
북유럽 신화의 아이젠죌트너.
도교의 천계삼십육천.
불교의 극락정토(極樂淨土)
인도신화의 리그베다.
켈트의 마비노기온 등등.
‘그 외 아눈나키, 아베스타, 천인제국까지.’
여러모로 존재감이 거대한 대성군 출신들이 많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어째서 나의 서재를 찾아왔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내 서재와 어떻게든 전속 계약을 맺고 싶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들이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다. 당장에 그 사탄과 미카엘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그들과 맞먹으려 들려면 적어도 저쪽에서도 1세대를 보내야만 했다.
‘그전까지는, 단지 지켜보기만 하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이야기는 쉬워진다.
그쪽이 바라는 대로, 보여 주도록 하지.
[성령들이 뒤늦게 새로운 사람의 존재를 깨닫습니다.]
내가 대리로 승진했던 사실이 워낙 크다 보니, 성령들은 이제야 권지아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100TP 후원!]
[헐. 검후인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이었네? 대체 누구임?]
[100TP 후원!]
[강유현 텔러가 검후를 버렸다! 아니, 근데 저 사람도 엄청 예쁜데?]
[100TP 후원!]
[아니, 우리 검후 누나 어디 갔냐고! 근데 이분도 좋다. 헤헤.]
검후가 아닌 다른 사람이 서 있다는 점에서 성령들은 놀라움을, 그리고 상당한 외모를 뽐내는 권지아의 모습에 호기심을 품었다.
나는 그들에게 웃으며 상황을 설명해 보였다.
“아, 참. 여기 있는 이 아가씨는 권지아라고 합니다. 이번에 제가 대리로 올라가면서 새롭게 계약을 맺은 컬렉터죠.”
당연히 성령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검후를 버린 거냐, 강혜림은 어디 갔냐, 뭐 이런 시답잖은 농담도 나왔다.
검후의 이야기를 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강유현 텔러가 고른 새로운 컬렉터가 과연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하는 호기심이 가장 컸다.
검후라는 컬렉터를 발굴한 나이기에 그다음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몰고 왔다.
“성령님들이 꽤나 궁금해하시는 거 같아서, 오늘 시화는 새로운 신입의 이야기를 선보일 생각입니다. 물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직접 보고 뽑은 사람입니다. 최소한 여러분들을 실망시키지는 않을 거라고 장담하죠.”
내가 조금 바람을 넣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권지아가 조심스레 귓속말을 전했다.
‘이렇게 해도 괜찮은 건가? 너무 과하게 분위기를 띄운 거 같은데.’
‘괜찮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는 해 줘야죠. 지아 씨의 첫 데뷔 아닙니까?’
그리고 그것을 위한 준비는 다 끝냈다.
“자, 들어가시죠.”
나는 기대감 어린 성령들의 시선을 받으며, 권지아를 이끌고 사상세계로 향했다.
끔찍한 아귀들이 머무는 아귀도.
그곳에 숨겨진, 또 하나의 히든피스를 찾기 위해.
‘그런데.’
안쪽에 들어온 나는 내부 풍경을 살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또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