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88화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사상세계로 출근을 나가는 권지아와 나는 다시 마주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녀가 갈법한 사상세계는 이미 꿰차고 있었고, 입구에서 죽치고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됐으니까.
사상세계의 입구는 내가 지구로 넘어왔을 때, 사용한 게이트와 비슷하게 생겼다.
반투명한 유리 같은 동결된 공간의 위로 입구가 벽처럼 서 있었다.
입구는 새하얀 활자의 조각 수만 개가 소용돌이처럼 빨려 들어가듯 회전하고 있었다. 그 근방에는 출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출입을 확인하는 협회의 직원들과 사상세계를 오가는 컬렉터들이 전부.
이런 이른 시간에는 컬렉터들마저 거의 없는 데다가 입구 주위에는 협회 사람도 없어서 사실상 개인적인 만남의 장이라고 볼 수 있겠다.
“안녕하세요.”
권지아는 오늘도 별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활동하기 편한 트레이닝복에 등 뒤에 찬 검. 그리고 여전히 정리하지 않은 머리까지. 환상구현체를 사냥하러 가는데 저런 복장이라니,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건지, 아니면 생각이 없는 건지.
‘하긴. 혜림 씨도 처음에는 저랬지.’
아직 한 달도 안 된 일 가지고, 그땐 그랬지 하는 것도 웃긴 일이다.
나는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
내가 인사를 건네자 권지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말없이 나를 주시했다. 표정을 읽기 힘들었지만, 길게 자란 앞머리 사이로 언뜻 보이는 눈빛은 매우 강렬했다.
그래도 첫 만남과 차이는 느껴졌다.
‘어제보다는 적의가 좀 줄어든 느낌이네.’
저 반응을 보니, 내가 떠난 이후에 그녀도 나름의 고민을 한 것이 분명했다.
“지아 씨 어제 이후로 잘 지내셨나요? 혹시 바쁘지 않으시다면 시간 괜찮으신가요?”
딱히 그녀에게 긍정적인 답변을 바라고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친근하게 대하더라도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꺼져라’나 ‘죽인다’가 전부일 테니까.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침묵을 유지했다.
승낙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절의 말도 내뱉지 않을 줄은 몰랐다.
침묵. 그것이 내포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의 나는 아직 잘 모른다. 하지만 대답을 유보했다는 것이 적어도, 그녀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나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다는 걸 역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권지아는 나를 잠시 지그시 노려보더니, 도망치듯 나를 쌩 하니 지나쳤다. 나는 그런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 뭔가 반응이 어제와는 확실히 다르다.
‘설마, 내가 은근하게 뿌린 떡밥이 먹혀든 건가?’
내가 평범한 텔러가 아니라는 암시는 이미 전해 줬다. 그녀도 분명 그것을 알고 있다. 알고 있기에 다른 텔러를 향한 증오가 나에게는 향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다른 무언가가 있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놔두게?]
‘아니. 따라가 봐야지.’
나는 곧바로 권지아의 뒤를 쫓아 그녀가 들어간 사상세계에 따라 들어갔다.
‘이곳이 아귀도라고 했었나?’
사상세계 아귀도(餓鬼道)
삼악도(三惡道)의 세계 중 하나를 지칭하는 곳이며 이곳에서는 굶주린 망자들이 항상 고통을 받으며 형벌을 받는 곳이라고 전해져 있다.
과연 구전된 설명을 뒷받침하듯, 검게 메마른 대지는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듬성듬성 자라난 나무는 뒤틀리고 검게 탔다. 잿빛 먼지가 담긴 바람이 불어 시야를 크게 제한했다. 사방에 회색빛 장막이 쳐져 답답함이 밀려왔다.
[상당히 삭막하네.]
‘그런 세계니까.’
지금까지 돌아다녔던 여러 사상세계와 비교하면, 이곳은 라비린토스와 마찬가지로 [신화]의 영역에 속한 이야기가 펼쳐진 곳이다.
신화라는 것은 모든 이야기에서 가장 정점에 서 있다. 당연히 신화를 배경으로 한 사상세계는 아직 현대에 그렇게 많지 않았다. 있더라도 대부분 제대로 된 신화가 아니라서 컬렉터들의 관심 밖에 나고는 했다.
‘설마, 이런 곳에서 사냥하려고 들 줄은 몰랐는걸.’
사상세계 아귀도는 나도 익히 아는 곳이다. 보통 사상세계가 환상체만 잡아도 나름의 포인트 보상과 함께 부산물을 떨구지만, 아귀도는 그게 매우 척박한 곳이다.
아귀 자체도 생긴 것이 끔찍하고 상대하기 꺼리는 환상체인데, 잡아도 별걸 주지 않는다. 당연히 컬렉터들이 기피하기에 충분한 대상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왔다는 건, 뭐라도 먹을 게 있어서겠지?]
‘맞아.’
라비린토스에서 [이카로스의 날개]라는 히든피스가 있던 것처럼, 이곳 아귀도에도 그에 걸맞은 히든피스가 하나 숨겨져 있다.
권지아가 회귀자라면, 미래의 지식을 아는 그녀라면 분명 히든피스를 노리고 있을 거다.
‘그런데, 이상하네. 내 기억 속에서 이곳의 히든피스를 찾은 컬렉터는 적어도 그녀가 아니었는데.’
게다가 아귀도의 비밀이 밝혀지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다. 당장 권지아가 이곳을 노리는 거치고는 내 기억과 부합되는 정보가 많이 틀리다.
‘설마, 그녀가 실패라도 하는 건가?’
회귀자가? 설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내 이성이 곧바로 반론을 펼쳤다.
권지아가 지니고 있는 수백 권의 책. 그리고 그녀가 여태까지 겪어 왔던 일.
‘깜빡하고 잊고 있었군. 그녀가 내가 생각하는 회귀자와 다르다는 걸.’
보통의 회귀자는 2회차에 모든 것을 해내는 초인이다. 그게 보통 회귀자에게 갖는 인식이다.
반면, 권지아는 상당히 자주 죽었다.
이전까지는 분명 잘했겠지만, 끝없이 반복된 회귀의 삶에 지치고 멘탈이 나간 탓이었다. 같은 행동을 반복하더라도, 순간의 실수나 판단에 의해 생사가 갈리는 곳이 사상세계인 점도 컸다.
‘이럴 게 아니라 우선, 그녀를 찾아야겠어.’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권지아가 어디에 있는지 금세 찾아낼 수 있었다.
이곳에 들어온 그녀가 보란 듯이 환상체와 싸움을 벌이고 있었으니까. 눈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베는 소리와 아귀의 괴성이.
나는 곧장 소리가 들린 곳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곳에는 권지아가 아귀 셋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강하네.]
그녀의 싸움을 처음 본 백련의 평가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의견에 동조했다.
권지아는 강했다. 검을 휘두르는 데 망설임이 없었고, 아귀에게 위축되지도 않았다. 어떻게 보면 강혜림과 비슷했는데, 둘의 차이를 꼽자면 강혜림은 타고난 재능이었고 권지아는 쌓아 온 경험이라는 것이 달랐다.
[무엇보다 저 싸우는 방법…… 엄청 필사적이야.]
나 또한 동감한다.
아귀 셋과 싸우는 권지아의 싸움은 어딘가 애처롭게 느껴졌다.
‘저건 싸움 같은 게 아니야.’
싸움이 저렇게 필사적일 리가 없다. 권지아의 움직임은 정리가 됐다기보다는 거의 짐승에 가까웠다.
그래. 저것은 발버둥이다.
마치, 자신이 잊어버린 무언가를 되찾기 위한 필사적인 발악. 그럼에도 잊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그것을 어떻게든 알기 위해 뭐라도 하려고 하는…… 공허한 열망이었다.
나는 빨려 들어가듯 그녀의 싸움을 잠자코 지켜봤다. 서재는 개방하지 않았다. 오직 이곳에는 나와 백련만이 유일한 관객이었다.
권지아의 싸움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아귀 셋을 상대로 승리했다.
텍스트로 와해되는 아귀의 시체가 허공에 녹아내리듯 사라진다. 권지아는 그 자리에 반쯤 주저앉으며 거칠게 요동치는 호흡을 정돈했다.
‘무리하게 싸워서 지친 건가?’
그녀가 싸우는 걸 처음 봤지만, 분명 오버 페이스였다. 아귀 셋을 상대로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과하게 힘을 썼다. 도저히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이성적인 회귀자가 보일 행동 같지는 않았다.
캬아악!
잿빛 바람의 사이를 뚫고 아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팔다리는 삐쩍 마르고, 배만 기이할 정도로 볼록 튀어나온 모습. 흉측한 얼굴은 일그러지고 가늘고 긴 이빨이 구강을 뚫고 튀어나와 있었다. 피부는 다 타 버린 나무처럼 검다.
녀석은 바닥에 주저앉은 권지아를 보더니, 바로 이빨을 들이밀며 다짜고짜 달려들었다.
권지아는 그런 아귀를 보고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런 순간 공격을 당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반응.
그때, 내가 나섰다.
서걱!
백련을 쥐고 깔끔하게 휘둘렀다. 아귀는 순식간에 상반신이 비스듬하게 잘려 나가며 두 동강이 난 채 바닥을 굴렀다.
권지아는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왜요? 싸우는 텔러는 처음 봅니까?”
“너…….”
그녀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내가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그만. 하고 싶은 말은 많겠지만, 일단 휴식에 집중하세요. 보아하니, 몸 상태가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는데, 설마 모르고 있는 건 아니겠죠?”
“…….”
권지아는 입술을 꾹 다물고, 내 말대로 호흡을 정리하는 데 주력했다. 나는 곁눈질로 그녀의 몸 상태를 슬쩍 살폈다.
육체는 형편없다. 그런데 지니고 있는 기술은 급이 달랐다. 아마, 싸우고 싶어도 육체가 기술을 따라오지 못할 거다.
보통 회귀를 했다면 육체를 만드는 일부터 했을 텐데 그러지 않다니. 마음이 급한 걸까?
몇 분 정도를 쉬었을까. 그러는 사이 나는 3번 정도 이곳을 찾아온 아귀들을 모조리 격퇴했다.
“다 쉬었죠?”
“……그래.”
“지금 상태로는 별로 싸우지도 못할 겁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나는…….”
“고집부리지 마세요. 지금 본인의 몸 상태도 모른다고는 하지 않을 텐데요. 이대로 싸우려 했다가는 조금 전 그 꼴을 다시 겪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때도 제 도움을 바랄 거라는 생각은 버리시죠.”
조금 강하게 말하니, 그녀도 마지못해 납득한 기색이었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밥이나 한 끼 합시다.”
“…….”
권지아는 ‘뭐 이런 텔러가 다 있지?’ 하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 * *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권지아는 나의 제안을 어이없어했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지금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고깃집에 앉아 있었다. 밤이 아니라서 손님이 적었고, 그래서 주변의 눈치를 크게 볼 필요가 없었다.
“여기는 대체 왜……?”
“제가 먹고 싶어서요. 걱정 마세요. 돈은 제가 냅니다.”
돈이야 썩어 넘칠 정도로 있다. 안 그래도 별로 쓸 일도 없는데, 이전 황혼의 장막 녀석들의 비밀 금고를 턴 덕분에 현금이 엄청나게 많이 쌓였다. 금괴만 처분하더라도 몇 십 억은 가능하리라. 서련 씨가 들으면 거품 물고 기절하겠군.
지글지글.
나는 삼겹살을 열심히 구우며 권지아에게 물었다.
“이거 다 익었는데, 안 드십니까?”
“…….”
“안 먹으면 저부터 먹습니다.”
나는 누가 뺏어 먹기라도 할 새라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들었다. 삼겹살을 그냥 먹으면 심심하니 상추와 깻잎을 포개고, 거기에 쌈장까지 곁들였다. 그리고 한입에 쏙.
입안에 퍼지는 고기의 맛에 나는 눈을 감으며 그것을 최대한 음미했다.
이게 진짜 얼마 만에 먹는 삼겹살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먹는 데 집중하자, 오히려 권지아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너…… 정말 텔러가 맞는 건가?”
“무슨 뜻이죠?”
“직접 무기를 들고 싸우는 텔러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검을 휘둘렀다는 것은 지니고 있는 가호를 포기했다는 소리겠지? 그런 게 가능하다고?”
“가능합니다. 그 산 증인이 눈앞에 있으니까요.”
뭐, 이제 이런 반응은 슬슬 식상해서 질릴 정도다. 내가 이상하다는 건 나도 잘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별개다.
권지아가 조금 불만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부터 계속 먹기만 하는군.”
“밥 먹으려고, 여기 왔으니까요.”
“계약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건가?”
“물어봐 주셨으면 좋겠습니까?”
“그걸 목적으로 이 자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밥 먹는데, 일 이야기하면 체합니다.”
“정말인가?”
“아, 정말. 뭐라도 하길 바랍니까? 그렇다면 까놓고 물어보죠. 저랑 계약하실래요? 대우는 잘해드릴게요.”
“…….”
“거 봐요.”
여전히 못마땅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을 보는 순간, 나는 손에 쥔 젓가락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아. 좋아요.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진지하게 터놓고 이야기해 봅시다.”
나는 그와 동시에 손끝에서 텍스트를 뽑아내 주변에 각인을 새겼다. 새길 각인은 별거 없었다. 그저 우리 둘의 대화가 바깥에 흘러나가지 않기 위해 소리를 차단하는 것뿐이니까.
내가 진지하게 나오자, 권지아도 자세를 고쳐 잡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두드렸다.
“그래. 뭐부터 말해야 할까요. 계약은 어떤 걸 원하는지, 어떤 조건이 좋은지, 해서는 안 될 것,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 들어오는 포인트의 분배는 어떤지, 수수료는 또 어떻게 정할지. 그 외 기타 등등.”
나는 권지아의 눈앞에 컬렉터의 계약서를 뽑아 들며 온갖 리스트를 읊었다.
“이런 건 전부 다 필요 없습니다.”
나는 계약서를 집어던졌다.
권지아의 시선이 허공에 녹아내리듯 사라지는 계약서를 보다 이내 나를 향했다.
그녀의 두 눈빛에 담긴 것은 불신이라는 감정이었다.
그래. 불신.
그녀는 지금 나를 믿고 있지 못한다.
내가 가장 최우선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그녀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누구보다도 잘 안다.
“권지아 씨.”
나는 망설이지 않고 저질렀다.
“저는 회귀자입니다.”
백련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은 나만의 비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