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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87화 (87/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87화

유현과 헤어진 권지아는 사상세계에서 무아지경으로 싸움에 빠져 있었다.

캬아악!

온몸이 검게 그을리고 삐쩍 마른 미라 같은 괴물. 보이는 모든 것을 먹어 치우려는 아귀(餓鬼)가 권지아에게 달려들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머리와 몸이 양분되어 쓰러졌다.

바닥에 쓰러진 아귀는 순식간에 새하얀 이야기의 덩어리로 바뀌며 일부는 허공에 녹아 흩어지고, 또 일부는 권지아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쓰읍. 후우.”

권지아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호흡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점차 차분해지는 육체와 달리 그녀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그게 오전에 보았던 그 괴짜 텔러 때문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권지아는 이를 악물고 검을 고쳐 쥐며 다음 먹잇감을 찾아 나섰다.

현재 그녀가 움직이고 있는 사상세계는 불교의 이야기, 염부제(閻浮提)의 맨 아래가 배경인 곳이었다.

삼악도 중 하나인 아귀도라 불리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 곳에서 권지아는 자신의 고민을 싹 털어 버리기라도 하듯 아귀들을 사냥했다. 하지만 검으로 아귀의 목을 베면 벨수록, 그녀의 마음은 족쇄를 단 것처럼 계속 무거워졌다.

권지아는 괜히 화가 나서 이를 악물었다.

전부 그 녀석 때문이다.

‘대체, 뭐지? 어떻게 텔러가 직접 활동할 수가 있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녀석인데, 왜 갑자기 나타났지?’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다. 당장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은…….

‘녀석은 나에 대해서 무언가 알고 있어.’

무수히 반복된 삶을 통해 얻게 된 직감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그녀가 지닌 저주나 마찬가지인 특성이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죽일까?’

그것은 회귀자의 특성에서 비롯된 사고였다. 권지아는 바로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떨쳐 냈다. 이 회귀자 특성은 그녀에게 해가 될 법한 것들은 모조리 밟아 으깨야 적성이 풀리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본성은 그렇게 잔혹하지도, 모질지도 않았다.

그녀는 이성으로 특성의 힘을 이겨 내며 판단을 보류했다.

‘일단은 지켜본다.’

강유현이라는 텔러가 누구인지 알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그녀의 반복된 삶에 비하면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쪽도 내게 접근한 걸 보면, 분명 이유가 있겠지.’

반복된 삶이 항상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큰 틀에서 벗어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강유현이라는 존재는 그런 틀을 부수기에 충분했다.

일반적인 사람이 아닌 텔러.

당연히 지금 사회에서 지닌 가치는 거대하고, 그녀에게 미칠 영향은 지대했다.

과연, 그는 그녀의 이 저주받은 굴레를 벗게 해 줄 구원자인가?

아니면 그녀의 목적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될 것인가?

그 결과는 분명, 짧은 시간 내에 결정 나겠지.

권지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를 떴다.

* * *

사락. 사락.

고요한 [관조자의 방]에서는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이 작게 울렸다. 물론, 나의 귀에만 들리는 소리였다.

나는 책의 이런 부분이 좋았다. 책을 넘길 때 나는 소리와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촉. 그리고 다음 페이지에 펼쳐지는 새로운 글자의 조합들. 가끔 시끄러운 검 하나가 옆에서 칭얼대고는 했지만, 나는 자연스레 그걸 무시하고 책에 집중했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나갈 무렵, 이미 해는 저물고 밤이 찾아온 뒤였다. 관조자의 방은 아공간에 있는 곳이지만, 벽에 달아 놓은 모니터를 통해 시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읽었던 책을 덮고, 방의 한구석에 쌓인 책 위에 올려놓았다.

‘겨우 다 읽었네.’

내가 가져온 책은 총 67권. 그중에서 읽은 것은 42권밖에 되지 않았다.

오늘 하루 동안 한 사람의 인생이 담긴 책 42권을 읽은 것을 ‘밖에’라고 표현을 하는 게 이상하겠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그게 맞기는 하다.

가져온 67권 중에서 내가 읽은 것은 약 6할인 42권이다. 즉 나는 나머지 25권은 읽지 못했다는 소리다.

시간이 없어서? 바빠서?

그게 아니다.

‘갈리아츠님이나 사탄 때와 똑같아. 저 책들은 지금의 나는 읽을 수 없다.’

격의 차이 때문에 이렇게 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놀랍기는 했다. 아무리 그래도 권지아는 일개 개인이며, 하계에 속한 인간이다. 이제는 어엿한 대리로 올라온 내가 그녀가 지닌 책을 전부 읽지 못했다는 게 은근 충격이었다.

묘하게 자존심이 상한다고 해야 하나.

바꿔 말하면, 권지아의 삶은 그만큼 범인의 것을 아득히 넘어섰다는 말도 된다. 특히, 내가 읽을 수 없게끔 처리가 된 책에는 분명 중요한 요소들이 담겨 있을 것이다.

‘역시, 이게 바로 회귀자가 지닌 삶의 무게라는 걸까? 책장 자체는 이미 금빛을 초월한 빛을 내고 있었지. 어쩌면 그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얻은 것들은 있다.

표본으로 따지기에는 매우 좁지만, 읽게 된 42권의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들은 상당히 많았다.

최우선으로 알게 된 건 권지아의 정신이 상당히 벼랑 끝에 몰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였다. 책의 숫자만 봐도 수백 권이 넘었는데, 그만큼 삶을 반복했다면 누구라도 미쳤을 테니까.

‘정신력이 한계까지 봉착하고 만 거지. 다만, 지금까지 이성을 놓지 않은 것은 특성의 힘 때문이려나?’

대체 목적이 무엇인지 권지아의 책에 나와 있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무언가를 위해 수백 번이 넘는 삶을 반복했다. 지금에 와서는 목적은 거의 흐릿해지고, 그저 기계처럼 행동을 반복할 뿐.

의지와 목적이 고갈되는 순간, 이 반복되는 삶은 재시작하는 기회가 아닌 끝내지 못하는 저주가 되고 만 것이다.

‘보통 소설 속 회귀자들은 두 번이나 세 번째면 그냥 알아서 뚝딱 다 해 먹던데. 이 혼성계가 아무리 소설의 법칙에 영향을 받아도 이런 부분은 자비가 없군. 이게 현실인가?’

아무튼, 지금 권지아의 상태는 썩 좋다고 볼 수 없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반복된 삶에 의욕을 꽤나 상실했으며, 인간불신과 텔러를 향한 증오심 때문에 컬렉터로서 제대로 된 활동도 힘들다.

‘대체 왜 저 정도의 인물이 내 기억 속에 없나 했더니, 텔러와 계약을 맺지 못했다면 수긍이 가.’

무엇보다 너무 자주 죽은 탓에 역사에서 두각을 드러내기도 전에 잊혀진 영향도 있었다.

실제로 그녀가 죽은 경우는 대다수가 사상세계에서 사소한 것으로 빚어진 실수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원인을 따진다면 그녀의 안일함도 있지만, 신뢰하는 동료 없이 항상 혼자 다닌 탓이 컸다.

‘회귀자의 특성 때문인가, 아니면 과거에 무슨 일을 겪었기 때문인가. 아직은 모르겠군.’

더 알아보려면 나머지 책들도 읽어 봐야겠지만 문제가 있다.

회차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 많은 잠금이 걸려서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것이 남아나질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 잠금이라는 것이 갈리아츠님의 책을 읽을 수 없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갈리아츠님의 황금빛 책은 내가 건드리기 힘들 정도로 거대해서 읽지 못했다면, 권지아의 것은 마치 그녀 스스로가 보여 주길 필사적으로 거부하는 느낌이다.

‘이 잠금의 해제 조건이 따로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단 말이지.’

나는 아직 내 능력에 대해서도 자세히 모른다. 애초에 어쩌다 회귀를 하게 된 건지도 모르는데, 능력을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걸 모르는 상태에서 너무 내 힘에만 매달리는 건 옳지 않다. 능력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내 힘으로 그녀를 설득해야 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내 입으로 말하기 뭣하지만, 권지아에게 있어서 나라는 존재가 그 희망이었다.

‘반복된 삶에서 단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던 특이점. 그게 바로 나야. 내가 만약에 그녀의 입장이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분명히, 아닌 척하더라도 흥미를 품고 있겠지. 그녀는 내가 텔러인 걸 이번에 처음 안 것 같았으니까.’

다만 아직 걸리는 점은, 지독한 인간불신에 텔러를 증오하는 그녀가 과연 내게 마음을 열어 줄까 하는 부분.

‘그건…… 차차 알아 가면 되는 거겠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얌전히 있던 백련이 반응했다.

[쳇. 뭐야 갑자기. 혼자 죽은 듯이 가만히 앉아 있더니.]

“볼일은 다 봤어.”

[아. 그러셨어요? 그래서요?]

“비꼬지 마. 가만히 놔둔 것에 대해서는 미안해. 그래도 너도 이럴 때는 사색의 시간을 갖는 게 좋지 않았어?”

[사색의 시간은 개뿔이! 야! 내가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얼마나 처박혀 있었다고 생각하는 건데! 사색이라면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고!]

“아차.”

[아차? 아차아?]

따져 봤자 자신이 손해라는 걸 알았는지 결국, 백련이 먼저 손을 들었다.

[에휴. 그래 내가 뭘 따지겠니. 나는 그저 검일 뿐인데]

“아니, 미안하다니까.”

[됐고. 그래서 시간을 들여 고민했으니, 어느 정도 답은 나왔겠지? 뭐 알아낸 거라도 있어?]

“어. 있어. 그녀가 지닌 힘에 대해서.”

[지닌 힘이라고? 그런 게 있었나?]

“있어. 왜냐하면, 그녀는 회귀자거든.”

[뭐?]

내 말에 백련이 믿기지 않는지, 멍청하게 되물었다. 나는 별거 아니라며 설명을 이었다.

“그것도 고작 몇 번 한 게 아니야. 정확한 횟수는 모르지만, 세 자릿수는 이미 넘었어. 과장 보태면 죽었다 회귀하는 걸 밥 먹듯이 한 셈이지. 아마 내가 더 몰아세우면 그녀는 회귀라는 능력을 이용해서 무슨 방법을 취했을 거야.”

[……대화를 따라가기 힘드네. 하지만 네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납득이 가. 회귀자라니. 이거 완전 희귀한 특성 아니야? 죽어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니까. 네가 그때 눈이 돌아가서 카페를 뛰쳐나갈 만했네.]

“보통 희귀한 특성이 아니지. 실패하면 몇 번이고 도전할 수 있는 능력. 남들이 모르는 정보를 알아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힘. 저 정도로 많이 회귀를 했다면, 기본적인 재능이 모자라더라도 그런 것마저 커버할 수 있는 게 회귀 특성이야.”

[너랑 비슷하네?]

“이제 첫 번째인 나와는 비교도 안 되지.”

[……대체, 너는 그걸 또 어떻게 안 거냐?]

“같은 회귀자로서의 감. 그리고 내 능력 중 하나.”

[그러냐.]

백련도 인제 와서 더 캐묻거나 하지 않았다.

이미 내가 보여 준 것만 해도 그녀를 놀라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이제는 이 정도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다는 소리지.

[그런데, 회귀자라면…… 장난 아니겠네. 네 말마따나 엄청 죽었다는 소리잖아. 평범한 사람의 정신이 그것을 견딜 수가 있을까?]

“못 견디겠지. 어지간히 멘탈이 강철이어도 힘들 거야.”

회귀자가 보면 대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만큼 끔찍한 것이 없다. 죽지 않는다는 건 좋은 일이겠지만, 바꿔 말하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한다는 소리니까.

만약, 자신이 인생에서 최선을 다해 훌륭한 삶을 살았다고 해 보자. 그리고 마음 편히 눈을 감았는데,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면?

‘그것뿐만이 아니지.’

살아오면서 온갖 험한 꼴은 다 당했을 거고, 못 볼 꼴도 많이 봤을 거다.

그뿐일까? 자신이 알고 지내고 친하게 지냈던 사람, 회귀를 하게 되는 순간. 그 모든 인간관계가 리셋되고 만다.

친했던 친구가, 혹은 연인이 바로 다음 회차에서 자신을 몰라보면 무슨 기분일까?

“말투나 행동을 보면 회귀자 특성 자체가 지닌 몇 가지 효과로 정신 보호가 되고 있겠지. 아직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야.”

[그게 계속 지켜지지 않으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아니야? 엄청 위험한 거 같던데. 수틀리면 바로 칼부림도 날 거 같고.]

백련의 걱정은 당연한 거였지만, 나는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바꿔 말하면 수백 번을 겪어도 정신이 멀쩡하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멀쩡할 수 있다는 거야. 물론 임계점은 있겠지, 하지만 지금 그게 아니라면…… 내가 최선을 다해 케어를 한다면 바꿀 수 있어.”

[의외로 자신감이 넘치네.]

그야 그렇지.

전생에서 온갖 인간군상을 다 만났던 나다. 무엇보다 사회성이 결여되어 걸어 다니는 폭탄 같은 사람과 10년 가까이 지냈는데, 권지아 정도면 선녀다.

오히려 회귀자와 함께 일한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기대감마저 들었다.

“앞으로 두고 보자고.”

[유현아…… 너 지금 표정 좀 변태 같아.]

“어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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