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86화
아침 일찍 해가 떠오르는 사무실을 확인하며 나는 복장을 점검했다.
지난날 축하의 의미로 벌인 술 파티는 새벽이 깊어서야 끝났다. 그리고 내가 거기서 새롭게 안 사실이 있다면, 의외로 난 술이 참 세다는 거였다.
‘설마, 나 말고 나머지 셋이 먼저 나가떨어질 줄 누가 알았겠어.’
가장 의외였던 건 신가령의 주량이었다. 누가 보면 사회생활 오래 하면서 이런 자리를 많이 가진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그녀가 가장 먼저 리타이어 했다.
제일 세 보였는데, 사실 최약체라는 클리셰를 몸소 보여 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나마 혜림 씨가 가장 주량이 강했지.’
컬렉터라 그런지 아니면 체질 때문인지, 그녀는 잘 취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나와 대작을 하던 것도 그녀였고, 밤이 깊어서 신가령과 백서련을 데리고 백서련의 원룸으로 떠난 것도 그녀였으니까.
‘사무실의 뒷정리는 일단 대충했으니까, 나머지는 서련 씨에게 맡겨야지.’
그녀는 분명 숙취로 고생하겠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다. 그렇다고 신가령을 불러와서 청소를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무엇보다 나는 오늘 바쁘다. 대리를 달고 오늘로 1일 차. 이제 나는 대리 강유현으로서 다시금 텔러의 업무에 들어갈 차례였다.
“가자.”
[어후. 어제 그렇게 마시고도 멀쩡해?]
“별거 없던데 뭘.”
나는 백련을 등에 차고 사무실을 나섰다.
막, 아침이 떠오른 도시는 상당히 바쁜 활기를 띤다. 사람들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출근하는 차들이 도로를 가득 메웠다.
그런 사람들의 사이를 움직이던 나는 어느 한 사상세계를 찾아 움직였다.
[어딜 가려고? 강혜림은 안 불러?]
‘안 불러. 이건 나 혼자서 할 일이거든.’
[아. 설마, 그때 그 여자 만나러 가는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리가 된 나는 이제 본격적으로 계약 컬렉터의 숫자를 늘릴 수 있게 됐다. 이미 강혜림이라는 든든한 컬렉터가 있지만, 그렇다고 두 번째 세 번째를 어중간하게 뽑을 생각은 없다.
‘무조건 그녀를 이쪽으로 영입해야 해.’
[칫. 그렇게 버릇없는 여자가 뭐가 좋다고.]
백련은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그건 아직 그녀가 권지아의 진짜 능력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이다. 그걸 굳이 입 아프게 설명해 줄 수는 없어서 나는 두고 보면 알 거라고 넌지시 말했다.
나는 그렇게 한 사상세계의 입구에 도착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이곳을 오가는 컬렉터들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적당히 빈 의자에 앉아 시간을 때웠다.
* * *
사람들의 출입이 통제된 사상세계의 입구 근처. 아침 일찍 나선 권지아는 자기보다 먼저 온 불청객을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
권지아는 눈앞의 남자를 보고 표정을 굳혔다. 대체, 왜 저 남자가 여기에? 그런 의문을 해결할 틈도 없이 남자는 싱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앞에 섰다.
“오늘은 날씨가 좋네요. 그렇죠, 권지아 씨?”
“강유현……이라고 했지. 너, 대체 목적이 뭐냐?”
“오. 제 이름을 기억해 주셨네요.”
“닥치고, 내가 묻는 말에나 대답해.”
권지아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녀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빠르게 TP를 모아서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이런 벌써부터 이런 사소한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더 귀찮게 한다면 그때는.
권지아가 살벌한 생각을 품는 걸 모를 강유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지난번에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권지아 씨 아직 소속된 매니지나 클랜이 없는 거로 아는데, 이 기회에 저희 백화 매니지먼트와 계약을 맺지 않으실래요?”
“일없다. 꺼져라.”
권지아는 그렇게 냉랭한 말을 남기고 강유현을 지나쳤다.
백화 매니지먼트?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다. 아마, 별 볼 일 없는 곳이리라.
‘이번 회차’에 갑자기 떠오르는 것 같지만, 인제 와서 특별하게 여길 생각은 없었다. 무수히 반복되는 세계를 겪으면서 모든 것이 비슷하게 흘러가는 건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그녀는 어딘가에 소속되는 것을 별로 달갑지 않게 여겼다. 조직에 들어가는 순간, 그녀의 자유는 사실상 박탈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 위해서, 목표로 삼은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혼자가 편했다.
“혹시, 본인이 원하는 대로 활동하지 못해서 그러시는 건가요?”
“…….”
정곡을 찌르는 말에 권지아의 발걸음이 멈췄다.
등 뒤에서 유현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조바심이 나시죠? TP는 벌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어딘가에 소속이 되면 원치 않은 뺑뺑이만 돌 것 같고. 게다가 계약을 맺자니, 텔러 녀석들은 별로 달갑지도 않고 말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겠죠.”
“너…….”
권지아가 눈에 불을 켜며 강유현을 돌아봤다.
“네가 뭘 안다고, 그렇게 지껄이는 거지?”
“안다고 하시면 어쩔 건데요?”
“뭣…….”
오히려 뻔뻔한 대답이 돌아와 권지아가 말문을 잃었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유현을 노려봤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그냥 모르거나 죄송하다며 넘어가지 않던가?
그녀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강유현은 그녀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보통의 사람이 아니었으며, 이런 상황을 그냥 넘길 위인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 잘 압니다. 제가 거기에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말을 하면서 강유현은 내심 확신했다.
이미 비슷한 삶을 수백 번 반복한 권지아지만, 자신만큼은 그녀에게 처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평소라면 개소리로 치부하며 무시했을 권지아였다. 하지만 마냥 그러자니, 눈앞의 남자가 묘하게 걸렸다.
지금까지, 지난 회차를 통틀어서 그녀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전부 다 그녀의 뛰어난 능력과 결과물을 보고 접근한 사람들이었다. 그러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지금 당장이 아닌 몇 년 이후의 미래였다.
하지만, 강유현은 달랐다.
그는 대체 그녀의 무엇을 봤는지, 수료식 날 다짜고짜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녀가 마음속으로 품은 불안함을 보란 듯이 꼬집었다.
이런 일은 반복되는 삶에서 처음이었다.
의심과 경계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호기심.
미약한 기대감과 경계감이 뒤섞인 시선을 받으며, 강유현은 씨익 웃었다.
“여기서 벌써부터 다 말하면 재미가 없죠. 그래서 대화를 나누자고 하는 거고요.”
“흥. 마음에도 없는 헛소리를.”
“헛소린지 아닌지는 겪어 봐야 아는 게 아닐까요?”
“…….”
권지아는 뻔뻔하기까지 한 그 대답에 순간이지만, 정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었다. 아주 조금이지만, 그녀는 마음이 약간이나마 흔들리는 기분마저 느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다른 무언가에 의해 강제로 찬물이 끼얹어졌다.
권지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했다. 마치, 가면을 갈아 낀 것마냥 그녀는 갑자기 차가워졌다.
스르릉.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권지아가 검을 뽑아 들었다.
갑작스러운 권지아의 행동 변화에 강유현은 놀랄 법도 했지만, 그의 표정은 오히려 더욱 차분해졌다. 강유현은 권지아의 행동을 세세히 분석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어. 트라우마로 인한 트리거? 아니야. 그것과는 다른 반응이야. 과연, 저게 그 회귀자의 특성 중 하나인가?’
그가 읽은 것은 권지아의 이번 회차의 책뿐이지만, 그렇다고 그녀에 대해서 마냥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특성과 이 세계의 특이점을 생각하면, 직접 보지 않고도 충분히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있었다.
‘회귀자 특성이라면 응당 그럴 테니까.’
모든 컬렉터는 컬렉터로서 각성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만의 특성을 얻게 된다.
제일 평가가 낮은 엑스트라급 특성에서, 가장 고평가를 받는 주인공급 특성까지.
권지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지닌 회귀자 특성은 모든 컬렉터가 애타게 바라는 주인공급 특성이다. 하지만 그만큼 강한 특성은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특성의 힘이 사용자에 비해 지나치게 강력하면 사용자는 오히려 특성이 지니고 있는 [이야기의 힘]에 휘둘리고 만다.
얼마 전 강혜림에게 박살이 났던 주경수도 그랬다. 원래 그런 성격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의 특성 중 하나인 [카사노바]에 휘둘리고 있었다. 지나치게 여자를 밝히고, 또 거기에 탐닉했다.
‘분명, 회귀자 특성은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하겠지.’
그리고 유현이 분석한 바에 의하면 회귀자 특성의 효과 중 하나는 고조되는 감정을 강제로 가라앉히는 것.
아마, 저것은 권지아가 의도한 것이 아닌 말 그대로 특성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고정되는 행동일 것이다.
자신을 낱낱이 분석하는 시선을 느꼈는지, 권지아는 강유현에게 지급받은 검을 겨누며 이를 드러냈다.
“꺼져!”
가시를 세우며 외치는 그녀는 너무 오랫동안 상처를 받아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된 불신의 짐승이었다. 적어도 유현은 그녀를 그렇게 봤다.
“그리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강유현의 앞에 선 그녀는 단순한 회귀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똑같은 삶을 반복하며, 사람에게 상처를 입고 배신을 당한 영겁의 피해자였다.
강유현은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권지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못 믿으시는 것 같으니, 보여 주도록 하죠.”
강유현은 여전히 이쪽을 경계하는 권지아에게 크게 한발 다가갔다.
권지아는 살기를 내뿜으며 강유현의 목젖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계속 그대로 걸어오면 찌르겠다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그 흔들리지 않는 칼끝이 닿기 직전, 유현의 발걸음이 멈췄다. 유현은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권지아의 칼날에 가져다 댔다.
스윽.
권지아의 기세마냥 날카로운 검은 강유현의 손가락에 상처를 입혔다.
상처를 타고 붉게 맺힌 핏방울이 날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그것은 이내 새하얀 활자로 바뀌며 허공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그 광경을 본 권지아가 몸을 크게 떨었다.
“무슨…….”
“보시다시피, 저는 인간이 아닙니다.”
“뭐?”
“다시 제 소개를 하죠.”
강유현은 예의를 담아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천체주식회사 시화실 소속 텔러. 강유현 대리라고 합니다.”
사람인 줄 알았던 강유현의 정체를 알게 되자, 권지아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텔러였다 이건가?
“이제 제 이야기를 들어주실 마음이 생기셨습니까?”
이쪽을 향해 진지하게 물어보는 강유현의 모습을 보며, 권지아는 난생처음으로 겪는 기묘한 감정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 * *
권지아가 크게 고민하는 것이 보였다.
당장 긍정적인 답변을 해 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내가 이야기꾼이라는 정체를 밝히자, 검을 겨누고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나름의 긍정적인 변화다.
나는 그녀의 반응만으로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극한의 인간불신. 거기에 더해 어지간한 상황에서 회귀자 특성 때문에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도 불가능.’
어떻게 보면 정말 영입용으로는 정말 최악의 대상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녀만 한 사람과 함께 하려면 이 정도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회귀자란 그런 존재다. 내 모든 걸 다 걸고서 반드시 데려와야 하는 최고의 주인공.
미래에 벌어질 사건을 직접 겪어서 남들이 모르는 지식도 풍부하며 초짜처럼 어리바리하지도 않다. 그러면서 강해질 길은 얼마든지 열려 있으니, 그야말로 성장할 수 있는 완성형 캐릭터였다.
[뭐야. 되게 뜸 들이네.]
‘나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니까 그래.’
[왜? 텔러라고 말했으니, 그나마 더 반응이 좋아져야 하는 거 아닌가?]
백련의 말마따나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다. 당장 지구에서 텔러가 지닌 이름의 값은 매우 높은 가치를 지녔으니까.
아마 어지간한 컬렉터라면 텔러가 계약을 내미는 순간, 절해 오며 받아들일 각오가 됐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권지아의 반응은 백련의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오히려 텔러라는 대목에서 그녀에게 약간이나마 증오심마저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회귀자라는 것은 미래의 일을 다 겪었다는 소리지. 그리고 지구의 미래라고 한다면…….’
종말.
그곳에서 텔러들이 사람들을 얼마나 착취하고 이용해 먹는지, 겪거나 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그녀가 회귀자라면, 권지아는 아마 그러한 미래를 직접 겪었을 가능성이 컸다. 텔러를 증오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럼에도 권지아가 당장에 나를 가만히 놔두는 것은, 내가 평범한 텔러가 아니라 서다.
내가 그렇게 보여 줬으니까.
“후우. 정 말씀하기 곤란하시다면, 당장에 대답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충분히 생각하실 필요가 있겠죠.”
그러니 나는 권지아에게 대답을 미루도록 시간을 주기로 했다.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찾아온 내가 쉽사리 포기하자, 오히려 권지아가 당황했다.
“자, 잠깐!”
“그러면 다음에 뵙죠.”
나는 그녀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야기꾼이 지닌 특권 중 하나인 [관조자의 방]으로 순간이동을 한 것이다.
[뭐야. 더 안 물어봐도 돼?]
“지금은 여기서 멈추는 게 나았어. 그 이상 보채려고 했으면 역효과야.”
[너답지 않네.]
나답지 않다니.
나는 쓰게 웃으면서 굳이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련아. 네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러는 거 같은데, 나라고 그냥 생각 없이 물러난 건 아니거든?’
혼자만 들리게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내가 가져 온 수십 권의 책들을 펼쳐 보였다.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는 신비로운 책.
그래.
전부 다 권지아의 책장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물러나는 건 역시 나답지 않지.’
이렇게 많이 빌렸다고 연체료를 물지는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