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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84화 (84/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84화

혼성계의 역사는 우주의 기준으로 놓고 봐도 아주 길다.

당연히 오랜 역사의 속에서 혼성계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존재했다.

명예의 전당에 오른 성검전설도 그러했고, 그밖에 하계의 존재면서 자신의 격을 상승시켜 별의 자리까지 오른 이야기도 있었다.

그중에서 내가 기억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너무 의외라서 기억하고 있던 이야기였다.

그게 바로 용왕의 후견자다.

용왕의 후견자는 혼성계에서도 오래된 이야기다. 지금은 거의 전설 취급받는 이야기지만,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대성군 드래고니카.

용종 성령들의 모임. 혼성계에 존재하는 어지간한 용종들은 거의 다 이곳의 소속이라고 봐도 좋았다.

우주를 누비는 천공용, 세상을 파괴시키는 붉은 용, 제국에서 칭송하던 신룡 등등.

성령이며 용이며 한 세계를 풍미했던 지배자들이 몸을 담은 곳이 바로 드래고니카다.

선택받은 종족이라 불리는 용종들 중에서도 당연히 우열은 존재한다. 그중에서 으뜸가는 자들이 딱 일곱이 있다.

혼성계에서는 그들을 용왕(龍王)이라 불렀다.

얼마 전 내 서재에서 난동부리다가 쫓겨난 오흠은 이런 용왕의 자리에는 끼지조차 못한다. 그는 천계삼십육천 소속이라 드래고니카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들어갔다 하더라도 드래고니카에서 목도 제대로 필 수 없었을 거다.

‘대성군 드래고니카는 그 정도로 빡센 곳이야.’

용왕들은 타고난 강자였다. 태어날 때부터 강했고,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강해졌다.

그들은 용종 중에서 왕의 칭호를 달기에 아주 적합한 자들이었다. 마치, 왕의 칭호가 선택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일곱 용왕 중에서 딱 하나, 첫 시작이 미흡했던 존재가 있었다.

‘그게 바로 용왕의 후견자 이야기에 나오는 백룡왕.’

백룡왕(白龍王) 샤루리엘.

모든 용왕이 태생부터 왕이라고 불린 것과 다르게, 백룡왕은 태어날 때부터 약했다고 전해진다.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도 마찬가지였다.

강함을 숭상하는 용종에겐 약하다는 것 자체가 죄악이다. 당연히 백룡왕은 같은 종족에게도 천대와 무시를 받아왔다고 한다.

그런 존재가 오랜 세월의 노력 끝에 용왕의 자리까지 오른 것이다.

그것도 용종들이 가장 경멸하는 텔러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텔러와 용. 물과 기름 이상으로 성립될 수 없는 두 단어다.

용종은 텔러를 경멸한다. 직접 싸우지 않고, 뒤에 서서 그저 보여 주기만 하는 텔러의 행동은 용종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텔러들은 용과 친해지려야 친해질 수 없었다.

그 믿을 수 없는 일을 한 텔러가 저질렀다.

텔러가 용을 주인공으로 시화를 선보인 것도 놀라운데, 심지어 그 시화의 주인공이 종국에는 용왕의 자리까지 떡 하니 오른 것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업적. 때문에 모두가 입을 모아 샤루리엘의 계약 텔러를 용왕의 후견자라고 불렀다.

그 후견자의 이름이 바로 갈리아츠였다.

‘지금 어르신이 그 용왕의 후견자라고?’

숨기지 않은 내 감정을 읽어 낸 것인지 갈리아츠 어르신은 조금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그 반응을 보아하니, 나에 대해서 어느 정도 들은 바는 있군?”

“네, 네. 뭐, 그렇죠.”

“너무 놀라지는 말게. 이미 지나간 일이지 않은가? 이제는 전설 취급을 받을 정도로 오래된 먼 과거의 일이라네.”

“전설이라서 더 대단한 건데요.”

“그런가?”

“실제로 벌어진 일이고, 그 누구도 이룩하지 못한 업적인 것은 사실이죠.”

“그렇게 띄워 주지 않아도 되네. 누구도 이룩하지 못한 업적은, 자네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그건…….”

그렇게까지 말하니, 나도 딱히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제삼자에서 본다면 나나 갈리아츠 어르신이나 다 비슷비슷할 테니까.

“그냥 뭐, 좀 놀랐을 뿐입니다. 그 정도나 되시는 분이 대체 왜 이런 후미진 곳에서 일만 하시는 건지 모르겠지만요.”

갈리아츠가 선보인 시화는 혼성계의 역사에 남을 정도다.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충분했고, 그 이상으로 그의 직위가 확 올라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부장은 기본이고, 어쩌면 각 실에서 단 하나만 오를 수 있는 실장의 자리까지 갈 수 있었을 터.

“이곳에서 일하는 것은 내가 선택했기 때문이지. 너무 쉬지 않고 달리려고만 하면 미쳐 버리거든.”

그렇게 말하는 어르신의 목소리는 평온해 보였지만, 나는 어째 선가 그에게 무슨 사정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그걸 캐물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닌지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저도 나중에 은퇴하면 여기서 일이나 할까요?”

“그 말 진심인가?”

“아뇨. 농담인데요. 은퇴는 무슨, 생각도 한 적 없습니다.”

“크허허! 내가 바보 같은 질문을 했군. 그래. 지금의 자네는 한참 위를 보고 달릴 때지. 좋을 때야.”

“어르신도 가능합니다.”

“뭐?”

나의 기습적인 말에 갈리아츠 어르신은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이 됐다. 하지만 이 말은 진심이었다.

“한창 좋을 때도, 지금은 늦었을 때도 없습니다. 어르신. 누구나 자신이 하겠다고 굳은 마음을 먹는 순간, 뜨거운 열정을 불태울 그때가 최고의 순간인 겁니다.”

“…….”

회귀를 하면서 깨닫게 된 내 경험이었다. 물론, 이것이 모두에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리고 그것을 강요할 생각도 없다.

그저 이런 것도 있다는 것만 알아 줘도 충분했다.

“……자네 진심이로군?”

“제가 굳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서 뭣합니까?”

“크하하! 그래! 그것도 그렇군! 열정을 불태울 그때가 최고의 순간이라…….”

어르신은 어딘가 그리운 시선으로 먼 곳을 바라봤다. 아주 약간이지만 즐겁다는 듯 휘어진 그의 눈동자 속에 순간, 불꽃이 튀긴 걸 본 건 내 착각이었을까?

“이거, 내 정신 좀 봐. 우리 신동님께서 너무 은퇴한 늙은이에게 시간을 많이 쓴 게 아닌가 싶군.”

“그렇게 너무 띄워 주시면 오히려 듣기 괴로운데요. 그냥 편하게 하세요.”

“큭큭. 그래그래. 아무튼 만나서 즐거웠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리아츠 어르신. 나중에 또 놀러 올게요.”

“그래. 나도 그때를 기대하겠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나도 할 일이 많았다. 특히 이제 본격적으로 대리를 달았으니, 두 번째 주인공에게 집중할 차례였다.

“다음번에도 재미있는 이야기, 기대하지.”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에도 눈이 확 뜨이는 그런 멋진 시화를 선보여 줄 테니까요.”

나와 어르신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는 씨익 웃었다.

* * *

돌아가는 길은 한적했다. 아마 내가 어르신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를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던 텔러들은 전부 제풀에 지쳐서 떨어져 나간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그걸 노린 것도 사실이다. 적당히 시간을 끌면 알아서 포기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이대로 조용히 정거장까지 나가서 지구로 돌아가면 그만이지.’

이번 일은 제네시스 시스템의 지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곧바로 지구로 순간이동 할 수 없었다. 가려면 올 때와 마찬가지로, 정거장을 통해 우주 열차를 타는 것뿐이다.

이게 바로 출장을 갔다 오는 직장인의 심경인가? 속으로 그런 편한 생각을 주억거리고 있을 때, 복도의 맞은편에서 한 텔러와 마주쳤다.

“응? 뭐야.”

상대는 나를 보더니,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런, 낭패다. 설마, 텔러들이 오가지 않는 이곳에서 나를 알아보는 자와 마주칠 줄이야.

처음 보는 텔러였다. 그리고 눈이 확 뜨이는 미인이기도 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적발을 길게 기른 여성이었다. 지구 쪽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개화한 종족이 인간인 건 알겠다.

양복을 입었음에도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몸매와 한쪽 눈에 끼고 있는 황금 무늬가 새겨진 검은 안대까지. 상당히 강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대뜸 물었다.

“너, 지금 기록 보관실에서 나온 거냐?”

“아, 네. 그렇습니다.”

상대방이 질문을 던졌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답했다. 나는 동시에 그녀가 지닌 책을 살폈다.

‘황금빛……책이라.’

그녀가 지닌 책의 색과 흘러나오는 빛은 모두 황금색이었다. 물론, 갈리아츠 어르신과 비교하기엔 하자가 있었다. 어르신이 끝없이 빛나는 찬란한 항성 같은 빛이라면, 이쪽은 그보다는 못한 은은한 달빛 같다.

물론 비교 대상이 너무 대단해서 그렇지, 저 정도도 대단한 수준이었다.

‘그렇다는 건 눈앞의 텔러는 부장급은 된다는 건가?’

설마, 그 정도 되는 텔러를 이런 곳에서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처럼 저쪽도 내가 기록 보관실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놀라운지 ‘호오.’ 하고 자그맣게 감탄했다.

“너 설마, 거기 영감님이랑 아는 사이냐?”

“영감님?”

그녀가 말하는 영감님이라 불릴 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나는 어르신을 저렇게 부르는 기묘한 호칭에 살짝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갈리아츠님과 좀 알고 있습니다.”

“오. 영감님 이름까지 알고 있어? 이거 보통내기는 아닌 거 같은데…… 아!”

그녀는 그제야 내가 누구인지 알아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야기 들었어. 오늘 1달 만에 정사원에서 대리로 승진한 녀석이 있다고. 그 뭐였지. 강유현이라고 했던가? 인간의 모습을 한 텔러는 몇 없어서 기억하고 있는데, 네가 소문의 그 텔러 맞지?”

“네. 그게 바로 접니다.”

딱히 숨길 것도 아닌지라,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때문인지 나를 향한 그녀의 눈빛에는 조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흥미가 담겨 있었다.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나머지 눈빛이 2배는 되는 거 같다.

“캬. 이거 진짜였네. 만나서 반갑다. 나는 셀레스티나라고 해.”

“아, 네. 반갑습니다. 강유현 대리라고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사원이라 소개했었는데, 이제는 떳떳하게 대리라고 부를 수 있었다. 내 대답이 웃긴지, 그녀는 호탕하게 웃었다.

“큭큭. 보통 대리 막 단 녀석들은 사원 시절 버릇 못 버려서 한동안은 자기소개할 때 사원이라 부르던데, 너는 곧바로 대리라고 하는구나?”

“네, 뭐. 정사원으로 있던 기간이 워낙 짧다 보니.”

“그래! 맞아. 1달이면 더럽게 짧지. 금방 적응할 만했네. 보면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지. 게다가 그 영감님이랑도 알고 지내는 것도 놀랍기도 하고. 너, 혹시 어디 소속된 부서는 있냐?”

“없습니다.”

“흐음. 너만 한 인재가 아직 소속이 없다고? 주변에서 가만히 놔둘 거 같지는 않은데?”

“안 그래도 제게 많이도 접근하더라고요. 그래서 좀 피해 다니고 있습니다.”

“고생하네. 그보다 소문이 사실이냐?”

“뭘 말입니까?”

“너 가호고 뭐고, 다 포기하고 다닌다며? 듣기로는 컬렉터랑 같이 사상세계 들어가서 싸운다고 하던데.”

“네. 사실입니다.”

설마, 소문이 정말 사실인 줄 몰랐다는 듯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또다시 호쾌하게 웃어 재끼는 게 아닌가. 여러모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텔러였다.

말투도 그렇고 성격이 보통이 아니다.

“캬하하! 그래! 자고로 텔러에겐 이만한 패기와 포부가 있어야지! 요즘 것들은 맨날 똑같은 방법에 똑같은 시화에, 하여간 지겨워 죽겠다니까? 그래, 이렇게 만난 것도 반가운데. 혹시 너 우리 부서에 올 생각은 없냐?”

“부서요? 저는 시화실 소속인데요.”

“짜식이. 나도 시화실 소속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야.”

“……어디 부서이십니까?”

설마, 상대도 시화실 소속 텔러일 줄은 몰랐다. 모르는 얼굴이라 어디 다른 부서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셀레스티얼 빙 부서. 들어는 봤지?”

“아, 거기…….”

못 들어 봤을 리가 없다. 시화실에 있는 8개의 부서, 시화팔부(示話八部)는 전부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셀레스티얼 빙(celestial being)은 여러 부서들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케이스인데, 이쪽은 소수 정예로 운영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각 부서에 부장은 한 명뿐이라지만, 보통 직급이 그 아래로 내려가면 숫자는 확 늘어난다.

차장은 최소 셋은 필요하고, 과장은 열이 넘는다. 당연히 대리와 사원까지 내려가면 그 숫자는 만만치 않다.

그런데 셀레스티얼 빙 부서는 숫자를 다 합쳐도 채 열 명이 넘지 않는다. 부서에 영입할 인재를 허투루 뽑지 않으며, 뽑은 텔러는 하나하나가 자기 계급에서 상위권을 차지할 정도로 능력이 좋다는 소리다.

어떻게 보면 규모가 세력의 척도가 되는 부서치고는 매우 이질적인 곳이다.

“거기 엄청 빡센데 아닌가요. 그렇게 부서 영입을 함부로 하셔도 되는 겁니까?”

“나? 당연히 내가 거기 부장이니까, 내가 영입을 제안하는 거지.”

“네?”

“나머지 놈들도 다 내가 보고 뽑았어.”

“…….”

설마 했지만, 정말로 부장이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한 부서의 수장이 저런 행동거지를 지니고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보면 허울이 없어서 괜찮기는 한데, 정말 저래도 되는 건가?

“그래서 어쩔래? 우리 부서 오지 않을래? 섭섭하지 않게 해 줄게.”

하지만, 그 부장이라는 텔러가 나를 아주 뜨거운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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