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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83화 (83/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83화

[재미있구나.]

빌딩의 꼭대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의 공간 속에서 그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목으로 내는 소리가 아닌 마치, 영혼이 진동을 통해 울음을 토하는 느낌.

목소리의 주인은 조금 전까지 자신이 주시하고 있던 한 텔러를 떠올리며 차오르는 흥미로움을 숨기지 않았다.

[최근에 등장한 신입이라고 했던가?]

소문이 무성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등장과 동시에 곧바로 모습을 개화하고, 시화실 소속 텔러면서 가호를 포기하고 직접 무기를 쥐고 싸우는 소문은 천체주식회사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것은 이 드높은 옥좌에 앉아 있는 회장의 귀에도 들어왔다.

준의왕(噂議王) 롯피우트

천체주식회사의 설립자이자 이곳의 회장, 그리고 태초부터 존재했던 텔러.

그는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춘 채, 조금 전 이쪽을 올려다보던 한 텔러를 떠올렸다.

본인은 아주 멀어서 안 보일 거라 생각했겠지만, 롯피우트는 다 보고 있었다.

이쪽을 올려다보던 그의 눈동자, 그 안에서 요동치는 열망의 불꽃.

그것이 얼마나 뜨거운지, 롯피우트는 메말라 가던 자신의 감정에 아주 미약하게나마 불씨가 지펴진 것을 깨닫고 큭큭 거리며 웃었다.

이 혼성계의 이야기를 찾고 모으고 만들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섭렵했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이제 어지간한 이야기는 자신에게 감흥조차 주지 못했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재미있는 녀석이 나타났군.]

기대받는 신인의 등장은 언제나 있었지만, 이번만큼 흥미롭지는 않았다. 롯피우트는 문득 궁금해졌다. 저 강유현이라는 텔러가 과연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보여 줄지, 그리고 그가 어디까지 올라가려고 할지.

물론, 거기에 자신이 손을 대면서 끼어드는 짓은 당연히 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는 이제 그저 높은 곳에 앉아서 지켜보는 자에 불과했으니까.

[부디, 이 혼성계를 빛낼 아주 멋진 이야기를 만들길 기대하네. 어린 텔러여.]

최초의 텔러, 롯피우트는 유현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으음. 갑자기 오한이 드는데.”

[갑자기? 아까 전까지는 안 그랬잖아. 긴장이라도 한 거야?]

“아니. 건물 들어오면서 누가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거든.”

[아, 그거? 착각 아닌데?]

“뭐?”

나는 백련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답을 촉구하는 반응에 백련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네가 아까 올려다보던 꼭대기. 거기에서 시선이 느껴졌었거든. 네가 별말 안 하길래, 그냥 알고도 넘어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네.]

“헐.”

설마, 조금 전의 그것이 착각이 아니었다고?

잠깐만. 꼭대기에서 시선이 느껴졌다는 것은 나를 내려다본 것이 설마, 회장이라는 소리인가?

회장 롯피우트. 그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곳에 소속된 이상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천체주식회사의 창립자이며 단 한 명밖에 없는 이곳의 탑이었으니까.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만든 것은, 그가 어지간한 텔러와는 급이 다른 역사와 이야기를 지닌 존재였다는 것이다.

‘최초의 텔러. 세상에 단 넷밖에 없다고 하던…….’

나도 자세한 건 모른다. 전생에서, 그것도 종말의 막바지에 우연히 주워들은 정보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텔러라는 종족에 대한 기원이 어떻게 됐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 어지간한 성령들도 텔러의 기원을 묻는다면 모른다고 답할 것이다.

그만큼 텔러라는 종족은 비밀에 휩싸여 있다.

그중 잘 알려진 정보 중 하나는 바로 최초에 존재했던 네 명의 텔러다.

준의왕(噂議王) 롯피우트

연유왕(讌遊王) 담천

비극왕(悲劇王) 카타르시스

그리고 이 넷 중 유일하게 왕의 칭호가 없는 오엘로

‘이중 왕이라고 불리는 자들은, 지금 각자 텔러로서 자신만의 세력을 지니고 있지.’

롯피우트는 천체주식회사를.

담천은 희극단패를.

카타르시스는 엑소도스를.

유일하게 오엘로만 왕의 칭호도 없고, 세력이 없는 거로 알고 있다. 듣기로는 워낙 자유로운 존재라서 어디에 소속되지도 않고 소속조차 만들지 않은 채, 혼성계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고 한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그 롯피우트가 나를 주시했다고?’

최초의 텔러는 당연히 쌓아 온 이야기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다. 대부분 성령이 텔러들을 무시하지만, 회장님 정도 된다면 1세대 성령들과 맞먹을 것이다.

그 사탄과 미카엘과 동등한 선에서 설 수 있는 존재라는 거다.

그런 자가 나를 주시했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아니. 좋게 생각하자.’

적어도 사탄처럼 나를 어떻게든 집어삼키려는 짓은 하지 않을 거 아닌가. 그래도 자기 회사 소속 텔러인데 예쁘게 봐주면 봐줬지, 적대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다.

오히려 흥미를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여러모로 유명한 녀석이니까.

‘게다가 저쪽이 내게 관심을 갖는다고 해서 내게 돌아오는 이득이 딱히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롯피우트는 한 조직의 수장이다. 그런 그가 나에게 호의를 보이며 혜택을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천체주식회사의 회장님이지 않던가?

천체주식회사는 자유롭고 필사적인 경쟁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곳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를 만들어낸 회장이 경쟁을 해칠 행동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내게 흥미가 있어도, 딱히 손을 내밀어 주는 흥미는 아닐 거라 생각한다. 오히려 어떻게 할지 지켜보고 구경하는 쪽에 가깝겠지.

‘막상 이렇게 생각하니, 좋다 말았네.’

그래도 회장이 아직 말단에 가까운 나를 기억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어떻게 보면 큰 소득이었다. 적어도 지금의 내가 그만한 자의 관심을 끌 정도는 된다는 소리니까.

‘여기가 진급식이 열리는 회장인가?’

이미 안쪽에는 다양한 텔러들이 있었다. 그들은 문을 열고 들어온 나를 보더니, 시선을 집중했다. 등 뒤에 백련을 차고 있으니, 내가 누구인지 사실상 대놓고 알려 준 셈이었다.

“저자가.”

“이번에 대리로 진급한다고? 엄청난 속도로군.”

“진짜 가호를 포기한 건가? 등 뒤에 검까지…….”

모두가 그렇게 수군거렸다. 나에게 함부로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어쩌면 경계 받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곧 진급식이 시작한다는 안내음이 들려왔다. 당사자는 단상 옆으로 이동하라고 하기에 나는 거기에 가서 섰다.

평소라면 진급을 하려는 텔러의 숫자가 두 자릿수는 가볍게 넘어야 하지만, 이번에는 워낙 특별 케이스로 앞당겨진 탓에 숫자는 나를 포함해서 다섯밖에 되지 않았다.

아마, 나를 제외한 넷도 구색을 끼워 맞춘 것에 지나지 않았으리라.

-지금부터 진급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당사자들은 단상 위로 올라와 주십시오.

진행자의 안내에 따라 움직였다.

단상은 꽤나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그곳에 서니, 사방에서 내게 시선이 집중됐다.

-과장으로 진급하는 가르강 외 넷은 이 시각 부로 승진이 확실시되었으며 앞으로도 본사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노력하길 기대하겠습니다.

진행자의 목소리는 회장 전체를 울렸다.

그는 가장 직급이 높은 가르강의 이름을 담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자 중에서 나를 보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로 나를 향한 관심은 지대했다.

[다들 너만 보고 있네.]

‘그야 그렇겠지. 그렇게나 화려하게 저질렀는데.’

사실상, 나 혼자 때문에 만들어진 자리나 마찬가지다. 이곳에 모인 자들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내게 관심이 집중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많은 텔러들의 관심은 처음이지만 말이지.’

무엇보다 이곳의 회장이 내게 관심을 가졌다.

예전의 나였다면 회장은커녕 어지간한 텔러들의 관심도 받지 못했을 거다. 실제로도 그랬다.

무시 받고, 천대받고.

죽는 그 순간에서도 기억해 주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모두 진급자들을 위해 박수.

짝짝짝짝.

회장이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박수가 이번에 승진한 텔러들을 향한 찬송가처럼 들려왔다.

모두가 눈부신 주인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거대한 그림자 아래에 잠겨서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고 싶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세상에 의미 없는 죽음은 없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겐 삶도 죽음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이 베푼 선행도, 그들이 행한 악행도.

전부 의미가 없는 것이다.

“…….”

나는 눈을 감고 그때를 떠올렸다. 필사적으로 주인공의 뒤를 따라잡으려고 했던, 결국에는 절망해서 포기했던 그때의 나를.

만약에.

아주 만약에.

‘그때 포기하지 않고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다면, 나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지금처럼 과거로 돌아오지도 않고, 옛 과오를 바로잡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어도.

정말 이 악물고 끝까지 가고자 마음을 먹었다면 그때와 같은 결말을 맞이했을까?

‘의미 없는 가정이지.’

전부 지나간 일이다. 만약 그때 그랬다면, 만약 그 시절 이랬다면.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곱씹는 헛된 꿈에 불과하다. 결국, 우린 꿈에서 깨야 하고 현실을 살아야만 한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저 깨어 있는 지금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아니, 아니지. 적어도 나만큼은 그게 아니지.’

비록 존재가 바뀌었지만, 나는 과거로 돌아왔다. 전생에서 일어났던 그 끔찍했던 종말도, 수없이 죽어 나가던 사람들도 내게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이었다.

나는 과거의 실수와 과오를 바꿀 수 있다.

그러니 계속 나아가자. 앞으로도 지금처럼, 아니 지금보다 더 열심히.

최소한 이 자리에서 내게 날아오는 박수만큼은 즐기도록 하자.

이건 다시 기회가 주어진 내게 바치는 선물이다.

모든 실패를 딛고 일어선 자를 향한 송가(頌歌)다.

“감사합니다.”

눈부신 무대와 같은 단상의 위에서 나는 이쪽을 향해 손뼉을 쳐 주는 텔러들을 향해 그렇게 답했다.

* * *

진급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를 노리던 텔러들이 내게 다가오려 했다.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던 나는 궁색한 변명조차 하지 않은 채, 자리를 빠르게 벗어났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지체하는 순간, 텔러들의 벽에 둘러싸여 자신의 부서에 오라고 강요를 받을지도 모른다.

[왜? 좋은 거 아닌가?]

‘그야 내가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니 기쁘기는 한데, 그래도 귀찮은 건 귀찮은 거야.’

애초에 나는 어디에 소속될 생각이 없었다. 시화실은 그대로 할 거고, 굳이 부서에 대한 소속은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마땅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남들의 시선을 피해 회장을 벗어난 나는 곧바로 내 기억 속의 장소를 떠올리며 그곳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적어도 다른 텔러들은 찾아오지 않을 곳, 그러면서 내가 만나야 할 텔러가 있는 곳.

“기록 보관실.”

그곳은 여전히 찾아오는 텔러가 하나도 없이 한산했다. 아니, 한산하기는커녕 너무 공허해서 소름 돋을 지경이었다.

비슷하게 생긴 보관함이 공간을 빽빽하게 가득 채운 모습은 몇 번을 봐도 숨이 막힌다.

그 중심에서 용인의 모습을 한 텔러가 나를 발견하더니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가 지닌 찬란한 태양 같은 책도 여전했다.

“허허허. 이거 참. 오랜만이라고 해야 하나?”

“굳이 따지면 1달 정도 됐으려나요?”

“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군. 그래. 이번에 대리로 승진했다지?”

“알고 계셨습니까?”

“소문은 이미 무성하게 퍼졌으니까. 오히려 모르는 게 이상하지. 그래서 기분은 어떤가?”

“최고죠 뭐. 말할 필요가 있나요?”

“크흐흐. 내가 괜한 걸 물었군.”

분명 만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에 지나지 않지만, 어쩐지 오랫동안 헤어진 친구를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그것은 어르신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만나면 이런 기분이었던가?

“그래서 이렇게 다시 찾아왔다는 건 그때의 약속 때문이겠지?”

“언제까지 어르신이라고만 부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난 상관없는데?”

“아이고, 어르신.”

“큭큭. 농담이네. 뭐, 내 이름을 들으러 이 공간까지 귀찮게 발걸음을 한 신동에게 말해 주지 않을 건 없지.”

어르신은 장난스럽게 웃으시더니, 내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갈리아츠. 나의 이름은 갈리아츠라고 한다네.”

“갈리아츠…….”

그 이름을 몇 번 읊조린 나는 불현듯 전생의 기억 중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용왕의 후견자 갈리아츠!’

눈앞의 존재가 바로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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