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76화
경기장은 기묘한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결투는 전혀 기대했던 것과 달랐지만, 그래도 결투는 결투였다. 승자와 패자가 정해졌고, 이견의 여지가 없는 결과가 나왔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은 당연했고, 여러 가지 이권이 엮인 사람들도 머리를 열심히 굴려야만 했다.
신인 검후가 중급 컬렉터 아티스트를 꺾었다.
주경수가 아무리 중급 컬렉터 중에서 싸움보다는 대중의 인기로 자리를 차지했다 하더라도 분명, 그는 중급의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나름 공고히 자리를 유지하던 그가 밑에서 올라온 자에게 따라잡혔으니, 모두가 이 사실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
자신의 [관조자의 방]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아가엘은 경기장 내부를 살피며 짜증 어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설마, 강혜림이 이길 줄은 몰랐다. 그 텔러에 그 컬렉터라고 해야 할까.
강혜림도 유현처럼 힘을 숨기고 있었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 숨겨 왔던 발톱을 꺼내 들었다.
“영악하긴.”
그녀는 저 방법을 안다. 대체, 누가 검후에게 저렇게 하라고 지시를 했는지 뻔히 알 수 있었다. 아가엘은 자신의 덩치보다 큰 쿠션의 위에서 앙증맞은 다리를 흔들었다.
혹시나 싶어서 결투를 구경했는데, 기분만 잡쳤다. 유현이 망하길 바랐는데, 오히려 그는 이번 싸움에서 이긴 덕에 이전보다 더 자리를 굳히게 됐다.
안 그래도 최근 대리로 승진한다는 소문까지 퍼져서 짜증이 잔뜩 올랐는데, 이런 광경까지 보게 되다니.
“지금 당장이라도 그 빌어먹을 얼굴을 찢어 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겠죠.”
아가엘은 안다. 자신이 섣부르게 움직일수록 유현은 그것을 빌미로 그녀를 몰아세울 거라는 걸. 녀석을 평범한 사원급 텔러로 보면 절대로 안 됐다.
지금까지 그녀가 상대해 왔던 적들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존재.
유현을 없애기 위해서는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분명 언젠가 기회는 올 테니.”
아가엘은 그때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 * *
[정정당당한 결투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성령들이 당신이 보여준 시화에 기뻐합니다.]
[성령들이 호쾌히 자신의 포인트를 투척합니다.]
[8,200TP를 획득했습니다.]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에 나는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포인트를 후원해 준 성령님들께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100TP 후원!]
[우리 검후 꽃길만 걷즈아아아!!]
[100TP 후원!]
[설마, 이런 상황에서 이길 줄이야. 저 번개를 다루는 검은 언제 배운 거임?]
[100TP 후원!]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온다기에 기대했는데, 생각했던 것 그 이상이네요.]
온갖 성령들이 직접 메시지를 활용하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대부분은 검후의 승리에 기뻐하는 것과 그녀가 보여 준 [천뢰검]에 대한 감탄이었다.
특히, 강혜림이 지금까지 사용한 적 없는 천뢰검을 사용하자 성령들의 반응은 매우 격정적이었다.
“하하. 제가 그러니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시화를 쉰 이유가 있다고.”
[성령들이 당신의 말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선술집의 취객이 100TP 후원!]
[쥐엔장~. 믿고 있었다구 텔러양반!]
“네. 선술집의 취객님 후원 감사합니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웃는 자가 1000TP 후원!]
[앞으로도 재미있는 시화, 기대하겠습니다.]
설마 사탄도 들어와서 구경하고 있었을 줄이야.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앞으로도 재미난 시화를 선보일 테니, 잔뜩 기대해 주세요.”
[성령들이 당신의 호언장담에 기대감을 부풀립니다.]
신중한 관점에서 이런 기대감을 심어 주는 행동은 나중에 부담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적당히 허세를 부리며 양념을 치는 것은 당장에 기뻐하는 성령들을 더욱 즐겁게 만드는 데 아주 효과적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번 결투를 통해 새로운 성령들이 내 서재에 들어온 타이밍이다.
여기서 뭔가가 더 있다고 은연중에 보여 주지 않으면 그들을 휘어잡기 힘들다.
‘뭐, 굳이 그럴 필요는 없던 것 같지만.’
이미, 성령들은 강혜림이 보여 준 싸움에 푹 빠져든 것 같았다.
그만큼 천뢰검을 사용한 그녀의 모습은 아름답고 또 멋있었다. 푸른 전류를 휘감으며 상대방을 쉬지 않고 몰아치는 공격이라니.
그녀에게 히든피스를 준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현재 시청령: 4053]
시청령의 숫자가 벌써 4천을 돌파했다. 물론 지금의 이슈 때문에 순간적으로 나타난 숫자이지만, 시간이 점차 흐르면 이 숫자는 그대로 내 서재에 고정된 층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아마 대리급 텔러 중에서도 이만한 시청령을 유지하는 자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쩌면 대리를 달고 과장으로 승진하는 데도 별로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자, 그러면 성령님들은 됐고. 이제는 현실의 사람들 쪽인가?’
이미 대기실 바깥에서는 취재진이 이쪽을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소란은 경기장에서 대기실로 복귀하는 강혜림이 복도에 출현했을 때 극에 달했다.
“검후님! 오늘 결투에 대해 인터뷰 부탁드립니다!”
“싸웠을 때 어떠셨나요? 상대는 그래도 중급 컬렉터 아티스트였는데!”
“그 번개는 대체 무엇이죠? 본인의 특성인가요?”
소란스러운 기자들에게 강혜림이 당황스러워할 것이 분명했기에 나는 곧바로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한쪽에 쏠려 있던 일부 기자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그들에게 한번 방긋 웃어 보이고는 기자들을 헤치며 그대로 강혜림의 곁에 섰다.
“누, 누구?”
“잠깐만. 방금 검후의 대기실에서 나오지 않았어?”
몇몇이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소개를 했다.
“여러분. 저는 백화 매니지먼트에 소속된 직원입니다. 저희 검후님께 묻고 싶은 것이 가득한 것은 저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제 막 결투가 끝나고 돌아온 참이라 본인이 피곤해하니, 물러서 주시지 않겠습니까?”
“…….”
“…….”
기자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단순히 말로만 해서는 그들이 쉽게 떠나지 않을 것을 알기에 기세를 흘리며 위압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눈동자만 굴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 전까지 시끌벅적했던 대기실 앞 복도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것마냥 침묵에 휩싸였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됐기에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물론, 기자님들이 얼마나 이번 일에 대해서 궁금해하는지는 아십니다. 저라고 그런 마음 모르는 게 아니거든요. 검후라는 신인 컬렉터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게 크시겠죠.”
몇몇 기자가 내 말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바보 같은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꾸욱 참으며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조만간 나오게 될 콜렉팅 매거진 다음 호를 보시면 됩니다. 거기에 검후에 대한 단독 인터뷰가 세세하게 실려 있으니까요.”
“뭐?”
“자, 잠깐만 지금 그게 무슨…….”
설마 이 자리에서 그런 광고를 꺼낼 줄 몰랐는지, 기자들이 당황한 눈치였다.
나는 그들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이쪽이 할 말만 꺼냈다.
“참고로 영입을 제안하고 싶으신 분들. 거기 뒤에서 눈치만 보고 계시는데, 아마 안 될 겁니다. 아, 물론 업무와 관련된 협업을 하고 싶으시다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다만 여기서는 안 되고 저희 백화 매니지먼트에 직접 방문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헉!”
뒤에서 몰래 이쪽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내 말에 숨을 집어삼켰다. 대체 어떻게 알았냐는 반응인데, 그렇게 책을 둥둥 띄워 놓고 있으면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가 없다.
특히나 저 뒤쪽에 낯익은 얼굴이 하나 더 있었다.
백서련이 이 전에 소속되어 있던 한울 클랜. 그중에서 나한테 실컷 얻어터졌던 양반의 낯짝이었다.
나는 이쪽과 눈이 마주치자 사색이 된 전광석에게 한번 씨익 조소를 지어 줬다.
“자! 저희는 여기까지! 찾아오신 분들께 모두 감사드리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나는 혹시라도 그들이 나를 붙잡을세라, 강혜림의 손목을 잡아끌며 대기실로 돌아왔다.
문밖에서 여전히 어리둥절한 사람들은 대기실 앞에 허망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속보! 불세출의 신인 검후의 등장!]
[사상세계를 클리어 하는 컬렉터. 변화의 시작을 알리나?]
[검후에 관한 인터뷰, 곧 발매될 콜렉팅 매거진에 전부 실려 있어…….]
“허 참. 난리도 아니군.”
개인용 패드로 포털 사이트를 장식한 뉴스를 확인한 중년인은 어이가 없는지, 헛숨을 내뱉었다.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그와 다를 바 없는 반응이었다.
누군가는 불편하다는 듯 헛기침을 하고, 누군가는 짜증을 억누르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 모두 각자 대형 클랜에 소속된 사람들이었다.
평소에는 경쟁자처럼 굴어서 잘 모이지 않는 이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은, 최근에 활동하고 있는 검후 때문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놔두면 안 됩니다. 저렇게 기세가 오르면 앞으로 몇 개나 되는 사상세계가 사라질지 모릅니다.”
누군가 그런 의견을 냈다.
“그래서 어쩌자는 겁니까?”
“뭐, 간단하지 않습니까? 예전에 했던 방식대로…….”
“지금이 그때와 같은 줄 아십니까?”
하지만, 그 지적은 바로 다른 누군가의 반대로 묵살됐다.
“상황을 보십시오. 검후는 이미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모두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는데, 여기서 갑자기 수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목이 모인 만큼 저희도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놔둘 수도 없지 않습니까? 저렇게 날뛰다가는 저희가 애용하는 몇몇 작업장마저 사라질 판입니다.”
“그럴 거면 회유하는 건 어떻습니까?”
“애초에 회유가 먹힐 거였으면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요?”
“일단, 해 보는 게 좋지 않습니까.”
순식간에 회의장에 여러 가지 의견이 나돌았다.
누군가는 강경하게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또 누군가는 조심스레 지켜봐야 한다고, 누군가는 신중하게 회유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혜림이 어중간한 하급 컬렉터였다면 의견이 이렇게 갈릴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번 결투를 통해 급격하게 성장한 것도 컸고, 무엇보다 그녀의 뒤에 어떤 세력이 있을 줄 모르기 때문이었다.
‘분명, 누군가 뒤에서 몰래 지원해 주고 있을 거다.’
‘혼자서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어. 백화 매니지먼트? 웃기지 말라 그래. 분명, 눈속임으로 내세운 더미가 분명해. 지금 중요한 건 그거지. 진짜가 누구냐는 거.’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않았다. 어쩌면 검후라는 인물을 몰래 키운 배후가 이곳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상대방을 떠보거나 은근하게 견제하는 말들이 오갔다.
당연히 의견이 일치될 리가 없었고, 회의는 지지부진하게 흘러가기만 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한 남자가 비웃음을 흘렸다.
“하이고. 다들 열심히들 산다. 그치 예리야?”
“시끄럽고 회의에나 집중하세요.”
“에이. 뭘 자꾸 그래.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할 텐데.”
상당히 불량해 보이는 30대 중반의 남자였다. 수염을 멋지게 기른 사람이었는데, 특유의 분위기와 아주 잘 어울렸다.
그는 이번 회의에서 자신이 소속된 클랜의 요청을 따라 대신 나오게 된 상급 컬렉터 임건우였다.
그의 행동에 다른 클랜의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건우 씨. 아무리 여기에 타의로 왔다지만, 회의에 집중하시죠.”
“대체, 네메시스 클랜은 뭐 하고 있는 건지. 쯧쯧.”
네메시스 클랜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클랜 중 하나지만, 가장 특이한 점을 꼽으라면 소수로 돌아간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소수 정예를 지향하는 팀으로서, 다수의 컬렉터를 보유한 다른 클랜과 다르게 보유 컬렉터의 숫자는 적지만, 그들의 실력은 가장 낮아도 종4품이었다.
임건우는 그중에서도 상급의 타이틀을 단 정3품의 컬렉터였다.
그는 애초에 이번 회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 큰 어른들이 고작 신인 하나 두려워서 저렇게 행동하는 꼴이라니. 그 이상으로 그는 사상세계를 자기들 멋대로 주무르며 검후를 배제하려는 늙은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클랜장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이딴 자리, 진즉 때려치우고 나갔을 거다.
그래도 가만히 있는 건 그래도 클랜장의 얼굴을 봐서라도 참고 있기 때문이었다.
‘배부른 돼지들이 더 탐욕스럽게 꿀꿀거리는 이런 곳에서 뭘 하라는 건지.’
그는 그저 무심하게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 * *
“때가 됐습니다.”
“뭐가요?”
사무실에서 백효와 놀고 있던 강혜림이 내게 물었다. 의자에 앉아 자신의 앞에 쌓인 서류를 정리하는 백서련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이제 곧 수료식이 열릴 겁니다.”
“아. 훈련소 이야기구나. 그러고 보니 벌써 그때인가?”
수료식이라 하면 바로 컬렉터 훈련소를 말한다. 컬렉터로 각성하는 사람들의 나이는 다양한데, 그중에서 성인의 경우에는 각성할 경우에 훈련소로 향한다.
그곳에서 향후 컬렉터로 활동할 수 있는 사람들을 교육하며 이수가 끝나면 수료식을 여는데, 그때가 클랜과 매니지에서 눈에 불을 켜는 타이밍이었다.
“그러니 가서 쓸 만한 사람이 있는지, 확인을 해 봐야죠.”
이제 곧 대리로 올라가는 나는 계약을 할 수 있는 컬렉터를 늘릴 수 있었다.
허용 가능한 인원은 최대 네 명. 정사원이 단 한 명만 계약하는 걸 생각하면 대리부터는 꽤 본격적이었다.
물론, 이 넷을 곧바로 다 채울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 명도 안 고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뭐, 없으면 어쩔 수 없지만.’
이제 곧 내 진급식도 머지않았다.
그러니, 그전에 한 명이라도 미리 찾아 놓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