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61화
[강유현이 시화대전-데스매치에서 승리했습니다.]
[필드가 사라집니다]
[승자에게 보상이 정산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런던의 시계탑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주변의 풍경은 물을 끼얹은 수채화처럼 허공에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길을 걸어 다니는 그림자도, 허공을 가득 메운 안개도.
모든 것이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듯이 말이다.
화이트채플의 풍경이 사라지고 콜로세움의 휑한 무대가 나를 반겨 줬다.
김한중의 시체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필드와 함께 시스템이 녀석의 시체를 치워 버린 것이었다.
결국, 패자의 말로란 저렇게나 허무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살아남았고, 승리했다.’
파아앗!
허공에 떠 있는 새하얀 스포트라이트 같은 빛이 콜로세움 중심에 있는 나를 비춘다.
마치, 승리자를 향한 찬송가를 부르듯, 빛은 모두에게 나의 존재를 드러냈다.
객석에 앉아 있는 수천 명의 시선이 전부 나를 향했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돌리며 관객들을 확인했다.
모두 정체를 알 수 없게 새하얀 마네킹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싸움이 끝났지만, 누구도 환호성을 내지르거나 기뻐하지 않았다.
나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뒤이을 반응이 어떤 것일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으니까.
짝짝.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작지만, 분명히 박수 소리였다.
그리고.
짝짝짝짝짝!
마치 박수 소리가 전염이라도 되듯, 순식간에 콜로세움의 객석을 가득 채웠다.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와아아아!
환성과 함께 박수가 끊이질 않았다.
모두가 내게 열광하고 있었다. 객석의 그 어느 누구도 나를 업신여기지 않았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박수갈채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전까지 내가 받아 온 관심은 맛보기에 지나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플 공성전도, 테오돌란트 습지에서의 싸움도 나는 무대에 올랐지만, 조연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철저히 주인공의 역할로 이 자리에 섰다.
그리고 비로소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 보였다.
짝짝짝.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가슴 속에 무언가가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나는 짜릿한 전율에 몸을 떨었다.
이런 느낌이었구나.
이게 지금까지 주인공들이 봐 왔던 무대 위의 풍경이었구나.
왜 이렇게 좋은 것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을까> 왜 나는 여기에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 멋대로 단정 짓고 있었을까?
스포트라이트의 아래는 이렇게나 즐겁고 짜릿한데.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미소를 굳이 참지 않았다.
가슴이 가득 뛰는 황홀함을 느끼고 있자니, 관객들 사이에서 다른 이질적인 시선을 발견했다.
여전히 이쪽을 흥미롭고 재미있게 보고 있던 자.
처음으로 이 무대에 박수를 전파한 사탄이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봐 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박수를 보내 줘서 고맙다고.
사탄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거로 답했다.
[잠시 후 시화대전이 종료됩니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박수는 콜로세움 전체에 울려 퍼지는 안내음에 막히듯 끊어졌다.
객석의 성령들은 아쉽다는 반응이었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불평을 꺼내지 않았다.
그들은 오늘, 절대로 쉽게 볼 수 없는 훌륭한 이야기를 목도했으니까.
비록 아쉬움은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 * *
“못 말리겠군요.”
객석의 어느 한구석. 멀리서 유현의 싸움을 지켜보던 미카엘은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뱉는 말과 다르게 미카엘은 어딘가 후련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강유현, 그 남자가 무언가 다르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직접 대면해서 대화를 나누며 더욱 확신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무대에서 자신의 제대로 된 실력을 보여 줄 줄이야.
단순히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은연중에 그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던 다른 성령들마저, 자기도 모르게 이야기에 빠지게 만들었다.
이야기에 목마르고 굶주린 성령들을 끌어들이는 매력.
강유현에게는 다른 텔러들에게 없는 그런 매력이 있었다.
‘이러니, 다른 성령들이 이렇게나 흥미를 품었던 거였군요.’
사탄이 왜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왜 일부러 관계를 과시했는지 미카엘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처음 유현에 대한 관심은 사탄 때문에 생긴 것이었지만, 지금은 미카엘 또한 유현에게 깊은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본인도, 유현의 매력에 빠져 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모인 장소에서 그런 짓을 저질러 버렸으니.’
유현의 상대, 김한중은 미카엘이 봐도 실력이 만만치 않은 컬렉터였다. 그것을 3천이 넘는 관객들의 앞에서 시원하게 텔러가 깨부순 것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텔러란 싸우지 않고 지켜보는 자라는 고정 관념을 깨부수기에 충분했다.
‘아마, 다른 대성군에서도 그를 노리겠죠.’
이미 에덴과 판데모니움이 관심을 가졌다. 게다가 이렇게 큰일을 저질렀으니, 다른 대성군에서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올림포스, 아스가르드, 태양정원, 수카바티, 레메게톤, 마비노기온, 리그베다, 아눈나키, 아베스타 등등.
머릿속에 떠오르는 곳들만 해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분명, 앞으로 시끄러운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재미난 일들 또한 벌어지겠지.
미카엘은 누구보다도 청렴하고 무욕해야 할 자신이, 정말 오랜만에 가슴이 뛸 정도로 흥분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에 자조의 쓴웃음을 지으면서, 굳이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기대하겠습니다.’
그녀는 유현에게 그렇게 작게 중얼거렸다.
* * *
“아, 아아……!”
진풍은 자신의 얼굴을 쥐어뜯으며 절규를 내뱉었다.
“있을 수 없다! 있을 수 없어!”
진풍은 김한중의 목이 날아가는 걸 본 순간부터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끔찍하게 느껴질 정도로 망가지고 일그러져 있었으며, 흐리멍텅한 눈동자는 그야말로 끝없이 떨어지는 나락처럼 공허했다.
적어도 패배는 했을지언정, 김한중만큼은 어떻게 살려야만 했다.
하지만 유현은 그럴 틈을 주지도 않고, 곧바로 김한중의 목을 날려 버렸다.
그것을 따질 수도 없었다.
누가 죽어도 절대로 탓하지 않는다, 데스매치란 애초에 그런 것이었다.
“나, 나는 이제 어쩌면…….”
대전에서 패배하고, 심지어 부서에서 지원해 준 비밀 병기마저 잃었다.
이미 모든 것을 잃은 진풍이었지만, 그보다 더욱 두려운 것은 펜타그램 부서에서 내려올 처벌이었다.
“여기 있었군요.”
“히익!”
아가엘이 등장하자, 진풍의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는 필사적으로 눈을 굴렸다. 평소에 생글거리는 아가엘의 표정은 딱 봐도 나쁘다고 느껴질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으니까.
“아, 아가엘님! 제, 제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닥치세요.”
“이, 이게 가능할 리가 없습니다! 분명, 녀석의 뒤에 다른 부서가 있을 겁니다! 그, 그래 맞아. 뒷배가 없을 리가 없어! 분명, 저희를 견제하는 다른 부서에서 녀석을 후원해 준…….”
“내가, 닥치라고, 그랬지.”
씹어 먹을 듯 말을 끊어서 하는 아가엘에게 가공할 만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필사적으로 변명의 말을 내뱉으려던 진풍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지금 상황이 변명이 통할 거라고 생각해? 이 병신 같은 놈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봐. 지금 객석에 성령이 얼마나 모였는지 알아? 무려, 3천이다. 심지어 중계방으로 본 숫자까지 합치면 5천이 넘어. 이 정도면 과장급 중에서도 거의 극에 달한 텔러의 서재에 맞먹는 수준이라고.”
아가엘의 입에서 쉬지 않고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 정도나 되는 관객의 앞에서 철저하게 박살 났어. 그것도 우리가 몰래 키워 온 컬렉터가 근본도 모를 신입 텔러에게! 지금 이게, 어떤 상황인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가?”
“그, 그게…….”
“후우…….”
겨우 이성을 되찾은 아가엘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상대가 다른 부서의 후원을 우리 몰래 업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 상황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소리랍니다.”
“그, 그렇다면…… 방법은 없는 겁니까?”
“방법? 방버업? 지금 우리 진풍 후배는 참 재미난 말을 하시네요.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않나요? 네, 맞아요. 방법이 없죠. 저희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최악으로 치닫지 않게 하는 것이 전부예요!”
“그, 그게 뭐죠?”
“바로, 책임을 묻는 거죠! 이 모든 일의 원흉에게.”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가엘이 꺄르르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절대로 웃고 있지 않았다. 사악하기 그지없는 요정 소녀의 눈동자는 이미 진풍을 버린 말로 보고 있었다.
진풍은 곧바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아가엘님! 부디 살려 주십시오!”
“애초에 말이죠, 이쪽에서 지원해 준 비밀 병기를 잃고, 임무마저 실패한 당신에게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아, 아닙니다! 저는 아직 제 능력을 제대로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아가엘님! 제, 제가 몇 년 동안 아가엘님의 아래에서 일해 왔습니까?! 이렇게 저를 쉽게 버리시는 건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십니다!”
“지금 너무하다고 했나요? 저기요 진풍 후배. 당신이 지금 저희 부서에 끼친 피해는 단순히 금액으로 산정할 수 없을 정도예요. 그걸 갚으려고 해도 당신 같은 머저리는 평생 일을 해도 갚을 수 없다고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 제가 고작 그것밖에 안 될 리가…….”
“아아. 꼴사납게 발악하시기는. 그리고 진풍 후배. 당신은 이 패배로 인해 서재의 모든 권한을 빼앗겼어요. 알겠어요? 모든 권한. 그것은 당신이 저희 부서에서 조금씩 되찾던 것 말고도, 저희가 아직 쥐고 있던 남은 권한까지 말하는 거예요. 진풍 후배.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작정하고 시간을 들여 키운 유망주를 잃은 데다 부서의 공공재나 다름없는 서재마저 하나를 빼앗겼어요. 네? 진풍 후배. 뭐라고 대답을 해 보세요. 네? 네?”
“…….”
“입이 있으면 대답을 해 보란 말이야!!”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진풍이 이번 실패로 얻은 대가는 너무나도 컸으니까.
하지만, 그가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컥! 커흑!”
아가엘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진풍의 목을 옭아매고 있었다.
진풍은 필사적으로 두 다리를 흔들며 발버둥을 치고 있었지만, 아가엘의 힘은 고작 그런 행동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이렇게 해 주는 것도 후배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는 것이나 다름없죠. 아무렴. 평생 노예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거기에서 해방해 주는 거잖아요?”
“사, 살려…….”
“하지만, 어쩔 수 없단 말이죠. 누군가는 책임을 안고서 떠나야 하니까요.”
“이, 이 개 같은 년……!”
우드득.
진풍의 목이 힘없이 꺾였다.
가호에 보호를 받는 텔러라 하더라도, 같은 부서의 상급자로부터 지켜 주지 못한다. 애초에 텔러로서 ‘모든’ 권한을 잃은 진풍은 그 가호조차 받을 수 없는 상태이기도 했다.
파스스.
진풍의 시체가 수많은 글자로 흩어졌다.
피육이 아닌 텍스트로 이루어진 텔러들은 결국 죽으면 자신의 신체를 구성하는 이야기가 구심점으로서 힘을 잃고서 분해됐다.
죽어도 남기는 것이 없었다.
텔러의 죽음이란 결국 이런 것이었다.
아가엘이 완전히 사라진 진풍의 시체가 있던 자리를 잠시 노려보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고민을 했다.
일단, 강유현의 존재가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이 건방진 녀석은 겁도 없이 펜타그램 부서에 싸움을 걸었다. 심지어 그냥 싸움을 건 것도 아니고 이렇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망신을 줬다.
그 모든 책임은 진풍이 지고서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부서가 입은 피해가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절대로 돌이킬 수 없다.
“하아, 이거 참. 이러다 우리 부장님이 아시면 큰일인데.”
그나마 다행인 점은 진풍을 유현에게 보내기 전에 이쪽에서 처리했다는 것. 유현이 혹시라도 펜타그램 부서의 정보를 캐물으려고 하면 생사여탈권까지 빼앗긴 진풍은 대답을 거부할 수 없다.
진풍은 부서의 말단이지만, 그렇다고 부서에 대해서 완전히 모르는 것은 아니다.
아가엘은 그것 때문에 진풍을 죽인 것이었다.
덜컹.
그 순간 대기실의 문이 열리더니, 유현이 들어왔다.
“음? 여기 있던 진풍은 어딜 간 거죠?”
유현은 아가엘을 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는 패배자인 진풍을 만나러 왔는데, 녀석은 없고 아가엘만 대신 있던 것이었다.
아가엘은 유현을 보는 순간 시선이 날카로워졌지만, 이내 평소처럼 밝고 명랑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머나.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펜타그램 부서의 아가엘 과장이라고 한답니다!”
“네네. 아가엘 과장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강유현 사원이라고 합니다.”
“아하하. 강유현 사원의 싸움, 조금 전에 잘 봤습니다. 정말 대단하시던걸요?”
“이거 참. 과장님께서 제게 관심을 가져 줘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웃으면서 말하는 유현은 ‘그런데’라며 말을 이었다.
“진풍 사원은 어디에 있나요?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그는 이제 없답니다. 목숨을 건 시화대전에서 패배했잖아요? 즉 패배한 순간 죽었다고 봐야죠.”
“흐음. 그거참 이상하네요. 저는 생사여탈권을 쥐기만 했지, 그가 죽으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말이죠.”
“아하하. 유현 사원이 아직 시화대전이 처음이라 잘 모르시는구나~. 원래 이런 거예요.”
“아하. 원래 이런 거다?”
“네. 그렇답니다!”
유현은 순식간에 웃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싸늘한 표정으로 아가엘을 노려봤다.
“개소리는 적당히 하지?”
유현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아가엘의 표정에 금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