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58화
강혜림은 대기실에 홀로 앉아 정면의 모니터에 흘러나오는 콜로세움의 모습에 집중했다.
아주 거대한 무대 위, 유현과 상대방이 올라오는 것과 동시에 순식간에 풍경이 바뀌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그녀는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다리를 떨었다.
‘내가, 내가 나갔어야 했는데.’
그녀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이 저 위에 서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그런 자신을 대신해서 은인이나 다름없는 유현이 대신 나갔다는 점이었다.
‘만약에 유현 씨가 조금이라도 잘못된다면 나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럼에도 강혜림은 유현이 나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자신이 대신 싸우겠다고 자처했지만, 유현이 안 된다고 못을 박은 탓이었다.
강혜림은 조금 전 대기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왜 안 된다는 건가요! 유현 씨가 굳이 저기에 나갈 필요는 없잖아요!”
강혜림은 언성을 높이며 그렇게 말했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 하지만 불안감과 유현이 자신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충격 때문에 그녀는 차분할 수가 없었다.
유현은 흥분한 강혜림을 부드럽게 달랬다.
“혜림 씨. 이 싸움은 제 싸움입니다. 여기에 혜림 씨를 굳이 휘말리게 할 생각은 없어요.”
“저, 저는 유현 씨의 컬렉터에요! 텔러를 대신해서 싸우는 컬렉터! 당연히, 제가 대신 나가야 하는 게 아닌 건가요?!”
“일반적인 텔러라면 그렇겠죠. 왜냐하면, 그들은 싸우지 않으니까.”
하지만, 유현은 다르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싸우기로 다짐했었다.
“무엇보다 저는 이 자리에서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제가 단순히 누군가에게 묻혀서 가는 게 아니라고, 저도 싸울 수 있다고. 그 가치와 자격을 보여 줘야죠.”
“그, 그건…… 그러실 필요 없잖아요.”
강혜림은 유현의 굳은 의지를 느끼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평소의 그녀라면 유현의 말을 믿어 주고, 그에게 맡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것은 그녀가 조금 전부터 계속 느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분명, 그녀는 어째서 자신이 이렇게 불안하냐고 묻는다면 대답하지 못하리라. 이것은 이성이 아닌 순수한 감각의 문제였으니까.
그렇다고 ‘감각을 지나치게 맹신하는 게 옳은가?’라는 물음조차 지금의 강혜림에게는 통용되지 않았다.
거의 본능적인 것이나 다름없는 불안감. 그녀의 태도는 아이가 악몽을 꾸고서 부모님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행동에 가까웠다. 여기에 이성적인 타박이나 설득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래서 강혜림은 어떻게든 유현을 말리려고 했지만.
“바로, 그런 태도 때문입니다.”
“……!”
유현의 그 한마디에 그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유현은 창백한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고서 어떠한 반박도 하지 못한 강혜림을 보며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혜림 씨를 얼마나 봐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혜림 씨가 불안해 보이는 건, 저도 압니다.”
“저, 저는…….”
“네. 혜림 씨는 저를 걱정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거겠죠. 그 부분은 정말 고맙습니다. 하지만 결국 혜림 씨는 저를 믿지 못하고 계신 겁니다. 지금 벌어지는 상대와의 싸움에서 제가 이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거 아니신가요?”
“…….”
강혜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 맞아. 나는……유현 씨를 믿지 못하는 거였어.’
어째서 불안감을 느끼는 걸까. 그건 결국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유현을 향한 일말의 불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니, 강혜림은 참을 수 없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는 나를 믿어 줬는데, 나는 그를 믿어 주지 못한다니.
이처럼 이기적인 행동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소중한 사람이라고, 목숨을 다해 지킬 은인이라고 여기면서도 결국 자신의 행동은 일방적으로 유현을 자신의 틀에 제멋대로 끼워 맞췄다.
강혜림은 자기혐오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그녀의 머리 위로 따스한 온기가 내려앉았다.
“걱정 마세요. 저는 혜림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약하지 않으니까요.”
유현의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마치,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그녀의 머리를 간질였다.
“그러니까, 제대로 보여 주려는 겁니다. 혜림 씨가 지금 불안해하는 것이 사실은 정말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고. 멀리서 저를 우습게 보면서 아무것도 아니라 비웃는 녀석들에게 틀렸다고. 그 가치를 증명하려는 거죠.”
그것은 유현이 일전에 테오돌란트 습지에서 한용운에게 했던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르면 보여 주면 된다. 저들에게 내가 어떤 녀석인지, 그 이미지를 똑똑히 각인시켜 준다.
그 말에 강혜림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바로 지금에 이르지만, 여전히 강혜림의 마음속에 거칠게 흔들리는 불안감은 쉬이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생각은 시계탑이 솟은 런던의 풍경과 함께 유현이 상대해야 할 컬렉터가 모습을 감추는 부분에서 정점을 찍었다.
‘은신……이라고? 모습이 보이지 않아.’
단순히 근접전으로 싸우는 것이 아닌, 주변에 동화되어 상대방을 기습하는 암살자였던 건가?
심지어 그 수준이 엄청나게 높았다. 지금의 그녀도 정면에서 대적하면 쉽게 우위를 점할 수 없을 정도로.
‘이래서는…… 유현 씨가 위험하잖아.’
심지어 대전의 배경이라 할 수 있는 것도 유현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안개 낀 도시, 그 안쪽을 분주히 돌아다니는 검은 그림자들.
저렇게 장애물이 많아서야 상대방의 모습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조금 전부터 계속 그녀의 폐부를 찔러 왔던 불안감은 결국, 현실이 됐다.
* * *
‘흐음. 자.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
김한중은 인파 속에 숨으며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유현을 유심히 지켜봤다.
유현을 살피는 김한중에게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남들이 갖지 못한 뛰어난 특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펜타그램의 후원을 받으며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다.
지금 그의 실력은 대낮에도 종6품 컬렉터는 쉽게 암살할 수 있을 정도다. 이렇게 어둡고 시야가 제한된 곳이라면 그의 은신 효과는 몇 배나 늘어난다.
마음만 먹는다면, 중견급 컬렉터도 죽일 수 있다.
김한중은 지금 그런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떻게 죽이는 게 좋을까?’
김한중은 자신이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싸움은 오직 자신을 위해 마련된 무대. 그러니 자신은 그저 이 위에서 최대한 즐기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무엇보다 상대가 무려 텔러다.
‘처음에 검후라서 기대했는데, 텔러도 나쁘지는 않겠지. 아니, 오히려 텔러는 죽으면 어떻게 될지 너무 궁금해.’
과연, 텔러의 피는 붉을까? 그들도 죽기 직전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살려 달라고 호소할까?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김한중은 밀려드는 쾌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천천히, 가지고 놀아 줄게.’
어둠 속에서 유현을 지켜보는 그의 눈동자가 샐쭉 휘어졌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어?’
유현이 김한중이 있는 곳을 돌아본 것이었다.
김한중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경직시키고 말았다.
‘들켰어? 내가?’
그럴 리가 없었다. 김한중은 단지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조심스레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유현의 시선은 그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뭐, 뭐야!’
그를 발견한 건 우연이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김한중은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던 당혹감을 느꼈다.
은신을 간파당했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요?
그 순간 김한중에게 아가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이번 시화대전의 신청자는 진풍이었지만, 김한중과 계약으로 묶인 것은 그녀였다.
“뭐가?”
-꽤나 당황한 기색이네요? 자신의 은신에 자신이 있던 거 아니었나요? 아이, 참. 특히 이번에 필드도 어떻게든 유리하게 해 줬다고 생각하는데…….
“……말 안 해도 제대로 할 거야.”
아무리 눈에 뵈는 게 없는 그라고 하지만, 아가엘이라는 텔러는 본능적으로 거리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상으로 계약으로 묶인 관계다 보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제길. 제멋대로 굴기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저 요정 년의 목도 비틀어 버리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김한중은 은신한 채로 유현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애초에 이쪽을 보는 것은 결국 우연이라고, 어서 목을 날려서 끝낼 생각이었다.
김한중이 유현의 지척까지 접근해,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팅!
“뭣!”
유현이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치자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 * *
[아주 제대로 당황하고 있네.]
‘그렇겠지. 자신에게 유리한 필드에 자신이 있는 은신이었을 테니까.’
김한중은 공격이 실패하자 귀신같이 다시 안개 속에 몸을 숨겼다. 하지만 조금 전처럼 섣불리 다가오는 짓은 벌이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알아본 거야?]
‘그냥 이걸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이 있거든.’
김한중의 은신은 확실히 대단하다. 아마 혜림 씨가 이곳에 있었다면 아차 하는 순간, 크게 당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는 기습이 먹히지 않는다.
애초에 녀석은 나와 상성이 너무 나빴으니까.
‘책을 본다는 것이, 설마 이런 쪽으로도 도움이 될 줄이야.’
김한중이 지니고 있는 은색의 책이 몸을 숨긴 녀석의 머리 위에 둥둥 떠 있었다.
그 책을 인식하고 녀석의 위치를 특정 짓게 되니, 안개 속에 숨은 녀석의 모습이 흐릿하게나마 보이게 된 것이었다.
‘뭐, 대충 이렇게 될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무려, 사탄의 인식저해조차 꿰뚫어 본 능력이다. 아무리 잭 더 리퍼의 특성을 지녔다 하더라도 고작 하계 인간의 은신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이제 어쩔 거야? 보아하니, 네가 은신을 간파하고 있다는 건 확신하고 있는 거 같은데.]
“저쪽에서 오지 않으면 이쪽에서 가면 되지.”
어떻게든 이쪽을 이기기 위해 필드도 자신들이 유리한 것으로 설정했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노력은 내 책을 보는 능력 하나에 전부 물거품이 됐다.
안개 속에 숨어 상대방을 기습하려는 게 무위가 된 이상, 김한중이 지니고 있는 전투력은 순식간에 절반 아래로 떨어진 셈이었다.
“자, 그러면 슬슬 움직여 볼까?”
그 말과 동시에 나는 검은 그림자 같은 인파에 숨어 있는 녀석을 향해 달려들어 백련을 휘둘렀다.
* * *
카가강!
김한중의 단검과 유현의 백련이 충돌하며 불꽃이 튀겼다.
가까스로 유현의 공격을 막아 낸 김한중은 평소에 짓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대, 대체 어떻게……!”
“고작, 은신으로 뭘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게 오히려 더 우스운데.”
“이 새끼가!”
유현의 별거 없는 도발에도 김한중은 과하게 반응했다.
그는 언제나 승리자였고, 먹잇감을 잡아먹는 포식자였다. 그런데 고작 텔러 하나에게 그것이 부정당했다는 사실이 그의 자존심을 크게 훼손시켰다.
“그래, 됐어. 어차피 은신으로 처리하지 못한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
김한중은 거리를 뒤로 벌리며 양손에 단검을 하나씩 고쳐 쥐었다.
기습이 그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정면에서 대결하는 게 약하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는 경험이 풍부했다. 죽이는 싸움이라면, 이쪽이 유리했다.
“적어도 뭔가 숨겨진 한 수는 있어 보이지만, 그렇다고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지 마!”
김한중의 주위로 붉은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피에 절어 있는 잭 더 리퍼의 이야기가 담긴 활자였다.
그것이 김한중의 신체 능력을 강화하고, 그의 눈을 붉게 물들였다.
김한중이 두 허벅지에 힘을 주는 순간, 이미 그의 몸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 유현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성령들이 눈을 빛냈다. 은신을 파훼 당한 김한중에게 실망을 느끼려는 순간, 그가 정면 싸움도 나쁘지 않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빠르고 강했다.
하지만.
채앵!
유현은 어느덧 김한중의 단검을 막아 낸 뒤였다.
‘어떻게?!’
어지간한 컬렉터는 반응조차 하지 못하는 속도였다. 그의 육체 능력을 순간이지만, 폭발적으로 향상해 내는 스피드는 자칫 잘못하면 김한중 본인도 제어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유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의 움직임을 읽어 내고 공격을 막아 낸 것이었다.
“너, 너는 대체…….”
김한중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녀석은 평범한 텔러가 아니라고.
“이걸로 공격은 끝이지?”
유현은 김한중의 경악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놀라고 자시고, 애초에 그의 목적은 자신의 능력을 이 자리에서 보여 주는 것.
김한중은 그것을 위한 훌륭한 포석이었다.
“그러면 이제 이쪽에서 간다.”
그 말과 동시에, 유현이 손에 쥔 백련에 변화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