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아는 주인공들-55화 (55/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55화

나는 진풍을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녀석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빨리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적어도 얼마 전 부렸던 수작질이 실패했으니, 한동안은 얌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저 녀석을 잘못 알고 있던 건가?’

무엇보다 저 의기양양한 표정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걸 의미하고 있었다.

‘나타나는 타이밍도, 딱 내가 서재를 개방했을 때라.’

아무리 봐도 일부러 노린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 서재의 성령님들도 갑작스러운 진풍의 난입에 당황하거나 혹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성령들은 나와 진풍의 관계에 대해서 잘 모른다. 하지만 서로의 반응만 봐도 썩 좋은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쉬이 짐작할 수 있으리라.

무대가 완전히 마련되자, 진풍은 곧바로 나를 찾아온 목적을 꺼내 들었다.

“강유현. 너에게 시화대전을 신청한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진풍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성령들이 진풍의 제안에 눈을 크게 뜹니다.]

[일부 성령들이 갑작스러운 사건에 흥미를 품습니다.]

‘시화대전이라고?’

진풍 녀석, 갑자기 와서 뭘 하려나 했더니 그거였나.

[시화대전이 뭐냐?]

이런 쪽으로는 지식이 없는 백련이 내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말 그대로 시화로 싸우는 거야.’

정확히 이 시화대전이라는 개념은 모든 텔러에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천체주식회사 소속 텔러들만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천체주식회사를 굴리는 주요한 원동력은 바로 끝없는 경쟁이다.

경쟁을 멈추고 자리에 주저앉은 텔러는 그야말로 가치가 없으며, 자연스레 후발 주자에게 잡아먹혀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 시화대전은 그런 경쟁을 더욱 부채질하기 위해 만들어진 요소였다.

[아니, 대체 텔러가 뭐로 시화를 통해 싸우는데? 천체주식회사가 원래 그랬었나?]

‘조직마다 특색이 있으니까.’

기본적으로 시화를 통한 경쟁은 간접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 잘하는 놈은 쭈욱 잘 나가고 안 되는 놈들은 미약한 대박의 가능성에 기댈 수밖에 없으니까.

그것을 뒤엎을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이 시화대전이다.

승자가 패자의 서재 권한을 가져갈 수 있는 합법적인 대결.

단순히 운빨이 아닌 순수하게 컬렉터의 실력과 그들을 보좌하는 텔러의 능력으로 승부를 본다.

어떻게 보면 ‘공정하게 경쟁’을 부추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제한이 없는 건 아니야. 일단,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신청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해. 작정하면 할 수는 있는데, 그러한 행동 자체가 손해로 돌아오니 안 하는 게 이롭지. 보통은 자신과 대등한 직급일 때 신청을 하거나, 혹은 하급자가 자신보다 직급이 1단계 높을 때 가능해.’

즉 진풍은 나와 같은 정사원이기 때문에 시화대전을 신청하는 것에 제한이 없었다.

[그 대전이라는 것이 어떻게 이뤄지는데?]

‘보통은 서로 각자 시화를 보여 주고, 관객들에게 평가를 받는 거지.’

[관객이라면 성령들이겠네. 하지만 그게 과연 공평할까?]

‘당연히 불공평하지. 아무리 성령들이라 하더라도 수준이 현저히 차이나지 않는 이상은 결국 자신이 즐겨 보는 서재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시화대전에서 주로 채용하는 방식이 컬렉터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대결이었다.

결국에 서재나 시화라는 것은, 사실상 컬렉터가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시화의 대결은 컬렉터의 대결이라는 소리였다.

[뭐야. 결국, 서재를 거는 싸움은 컬렉터를 대리로 맡긴 싸움이라는 소리잖아?]

‘그런 셈이지.’

다만, 무작정 서로 싸우는 대련은 아니다.

같은 사상세계를 두고 주어진 시간 내에 누가 더 많은 환상체를 쓰러뜨리는지, 혹은 누가 먼저 사상세계를 클리어 하는지.

서로의 실력을 겨루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다만, 저쪽이 그렇게 평화로운 방법을 제시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단 말이지.’

뻔뻔할 정도로 당당한 태도만 봐도 그렇다. 녀석은 분명히 자신이 있으니, 내게 이런 제안을 건넸을 것이다. 그 속내가 너무 뻔히 보여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흠. 대답하지 않는 건가?”

진풍은 담담한 척 연기하며 내게 물었다. 성령님들의 앞에서는 이미지 관리를 하겠다 이거로군.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책]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짓을 저지르고 실패했음에도 곧바로 내게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것은 뒤에서 녀석의 행동을 밀어 주는 자가 있다는 소리였다.

‘대충 각은 나오네. 펜타그램 부서에서 작정하고 지원해 주겠다. 이건가?’

이건 조금 의외다. 녀석이 실패하는 순간, 그쪽에서 녀석을 쳐 내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기회를 주다니.

적어도 내가 아는 펜타그램 부서는 그러지 않았다.

‘과거라고 다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쪽이 그렇게 마음이 넓은 놈들만 있는 부서는 아닐 테고, 아마 내가 모르는 다른 계산이 들어 있다는 소리겠지.’

저 멍청한 텔러는 그것을 위해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시키는 대로만 행동하고 있다는 소리다.

자신의 의지라고 할 것은 어떻게든 나를 짓밟기 위한 복수심뿐.

진풍의 눈이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 어서 내 신청을 받아들여라! 라고.

피식.

나는 그런 진풍을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

“싫어.”

순식간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뭐, 뭐라고……?”

“싫다고. 애초에 내가 왜 그쪽의 제안을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데? 애초에 시화대전이라는 건, 같은 직급끼리는 신청하는 것도 자유지만 거절하는 것도 자유잖아.”

나는 바로 이 점을 지적했다.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시화대전을 신청하면, 상급자는 거절할 수 없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 [시스템]이 개입하여 엄격한 심사를 끝내고, 합당한 신청이라는 결과가 나올 경우다.

반대로 같은 직급 사이에 시화대전은 신청도 자유지만, 거절하는 것도 자유다.

굳이 내키지 않거나 싫으면 얼마든지 거절할 수 있다.

[……야. 이렇게 거절해도 돼?]

‘물론, 보통은 안 그러지.’

시화대전을 신청했다는 것은, 일종의 자존심을 건 싸움을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을 거절한다는 것은, 보통 자존심이 강한 텔러들로서는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보통 대전 신청을 받으면, 너나 할 것 없이 승낙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데 인제 와서 식상한 소리지만.

나는 애초에 일반적인 텔러와 다르거든?

“그, 그건…….”

진풍은 당황스러워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녀석은 아무래도 내가 자신의 시화대전 신청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하지만, 미안해서 어쩌나. 나는 굳이 그런 귀찮은 짓을 수락할 필요가 없는데 말이지.

“네, 네놈은 텔러의 명예조차 없는 거냐!”

상황이 다급하게 흘러가자 진풍이 어떻게든 나를 붙잡고 늘어졌다.

녀석의 외침에 성령님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시화를 준비하던 강혜림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 아가씨는 또 왜 이렇게 흥미로운 시선으로 구경하는 건데? 지금 댁도 연관된 일이거든?

“그래. 애초에 겁먹었으니까, 도망을…….”

“지금 그게 남의 시화에 멋대로 찾아온 불청객이 함부로 할 소리인가?”

“뭐, 뭐?”

“애초에 시화대전 신청이야 뭐,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거잖아. 그런데도 굳이 내가 오랜만에 서재를 개방한 순간, 성령님들이 많이 모였을 때 찾아온 타이밍을 노린 거라면 너무 속내가 뻔히 보인다고 말해 주고 싶네.”

대놓고 정곡을 찌르는 말에 진풍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그, 그게 뭐가 어떻다고…….”

“왜? 찔리나? 이렇게 많은 성령님이 보고 계신 앞에서 대전을 신청하면, 내가 피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런데 그쪽이야말로 건방진 거 아닌가? 감히 지고하신 성령님들을 이런 방법으로 ‘이용하려고’ 들다니.”

“어, 어?”

내 말뜻을 제대로 알아먹지 못한 진풍은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지금 저 녀석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라는 눈빛은, 이내 그 진짜 뜻을 이해하고는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 아니다!”

“아니기는. 솔직히 그런 마음이 없지 않아 있는 거 아니었나?”

“그, 그런 게 아니라……!”

진풍은 당황해서 뭐라도 변명의 말을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워낙 기습적으로 맞은 원투 펀치라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녀석의 망설임이, 이 광경을 지켜보는 성령들에게 확신을 심어 주게 됐다.

‘멍청한 녀석. 내게 이런 말을 들은 순간부터, 어떻게든 다른 이유를 쥐어짜 내서 나를 압박했어야지.’

고작, 이런 단순한 선동조차 어떻게 하지 못하는 녀석이 부서에 소속되다니.

지금 텔러들의 수준이 얼마나 처참한지, 단편적이나마 보여 주는 부분이었다.

[와…… 너 진짜 장난 없다. 어떻게 이 순간을 교묘하게 포장해서 역습을 가하지?]

‘칭찬 고마워.’

어처구니없어하는 백련의 말에 나는 즐겁게 웃었다.

어떻게든 내게 시화대전을 신청하려던 진풍은 졸지에 성령들의 권위를 이용하려는 건방진 텔러가 됐다.

당연히 성령님들의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100TP 후원!]

[이거 참 속이 뻔히 보이는 행동이네. 양심 어디 갔냐?]

[100TP 후원!]

[어디 부서 소속인데, 이렇게 건방지지? 따로 언질을 줘야겠는데?]

이어지는 일부 성령들의 메시지에 진풍의 안색은 창백해지다 못해 사색이 되었다.

저대로 놔두면 그 자리에 선 채로 졸도할 판이었다.

저 건방진 녀석이 된통 당하는 꼴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즐겁지만, 그래도 적당히 해야겠지.

‘이제는 도움을 줘 볼까?’

[……너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야?]

‘너무하네. 꿍꿍이가 아니라 계략이라고 해 줘.’

[……숨길 생각도 없구나.]

애초에 내 과거를 아는 녀석에게 아닌 척하는 것은 기만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도움을 준다는 것에 거짓은 없다. 적어도 상황만 놓고 보면 도와주는 건 맞으니까.

“자자. 성령님들. 너무 노여워들 하지 마세요. 저 진풍 정사원이 아직 뭘 모르니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얼씨구? 은근히 감싸 주는 척하면서, 또 멕이네?]

나는 백련의 말을 귓등으로 넘겼다.

“그래도 시화대전을 신청하러 찾아왔는데, 너무 박대하기만 하면 또 저희 서재의 체면이 서질 않죠. 솔직히 성령님들도 기대되지 않습니까? 요즘 대전이 거의 없었잖아요.”

[성령들이 당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령들이 당신의 말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성령들이 바라는 것은 자신을 즐겁게 만들어 줄 이야기다. 그리고 시화대전은 충분히 성령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상대가 건방지지만, 그래도 하면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지금 성령들의 공통된 생각.

나는 그 부분을 살살 자극하면서 흐름을 나의 것으로 끌고 왔다.

[와, 너 진짜…….]

백련은 복잡한 반응을 보였다. 하는 짓은 분명히 음험하고 악독하지만, 그럼에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나름 인지도가 있는 펜타그램 부서와 최근 막 떠오르는 검후 서재의 대전! 성령님들. 흥미가 막 샘솟지 않습니까?”

[성령들이 당신의 말에 수긍합니다.]

[성령들이 재미만 있으면 뭐든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다시 성령들의 반응이 ‘대전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쪽으로 흘러가자 진풍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이대로 녀석에게 당근을 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솔직히 이 대전의 자체가 너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어?”

진풍은 내가 뒷말을 덧붙이니,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진풍 사원은 제가 알기로는 최근 시화도 제대로 보여 주지 않은 거로 압니다. 그의 서재의 시청령님들과 구독령의 숫자가 얼마나 됩니까? 제 반도 되지 않습니다. 비록 직급이 같다고 해서, 과연 이게 서로 대등한 대전을 할 수준인지는 저는 잘 모르겠군요.”

[100TP 후원!]

[흠. 확실히 그건 그래.]

[100TP 후원!]

[뭐, 이쪽 서재가 솔직히 사원급 수준은 이미 넘어섰지. 대리도 울고 갈 텐데.]

[100TP 후원!]

[이건 누가 봐도 검후네가 불리한 거 아님? 이겨도 얻을 게 없잖아.]

좋아. 분위기가 슬슬 무르익었다.

나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바로 그겁니다. 그러니까, 저쪽에서 저에게 대전을 신청했다면 그에 걸맞은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소리죠.”

“서, 성의라니. 대체, 뭘 바란단 말이냐!”

“적어도 이쪽에서 받아줄 만한 합당한 보상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는 소리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간단했다.

나한테 대전 신청을 하고 싶으면, 내가 허락할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제안을 가져오라는 것.

“흐음. 일단, 기본적인 성의를 봐서, 5,000포인트로 봐줄게.”

5,000TP는 사원급 텔러에게 있어서 거금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지금 진풍에게 그걸 내놓으라고 한 셈이었다.

부서에 소속된 녀석이라면, 분명히 꿍쳐 놓은 포인트는 있을 테다.

“이, 이이……!”

“싫어? 싫으면 말고.”

어차피 아쉬운 것은 내가 아니었다.

“하, 하겠다!”

진풍으로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녀석은 지금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이다. 여기서 내가 거절했다가는 부서에서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를 테니까.

“오. 그거 다행이네. 그리고 조건을 하나 더 추가하고자 해.”

“또,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아니. 이번에는 그쪽도 마음에 들 거야. 판을 키울 생각이거든.”

“판을…… 키운다고?”

“그래. 시화대전이라면 당연히 서로 무언가를 걸겠지. 그런데 성령님들이 기대하는 오랜만의 시화대전인데 서로 어중간한 걸 걸면 밋밋하지 않겠어?”

나는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서로의 전부를 거는 거야. 승자가 패자의 모든 것, 생사여탈권까지 쥐는 거지.”

“……진심이냐?”

진풍은 역으로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그야 그렇겠지. 내가 지금 한 제안은 녀석이 그토록 바라던 것일 테니까.

“물론, 진심이야. 여기에 계신 모든 분이 바로 공증인이 되어 주실 테니까.”

“크, 큭큭. 그래. 좋아. 그쪽에서 한 말이니, 무르기 없다.”

“얼마든지.”

진풍은 상황이 자신에게 알맞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는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미안하지만,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은 이쪽이다.

‘안 그래도 백련과 천뢰검을 마땅히 사용할 곳이 없었는데.’

때마침 좋은 타이밍에 적당한 상대가 나타나 줬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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