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53화
포옹은 길지 않았다.
어머니가 내게 손을 떼는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을 흘리며 그녀의 온기를 갈구하고 말았다. 그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져서 그 감정을 무마하듯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보며 그저 대견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실 뿐이었다.
“저는……아뇨. 고마워요.”
어머니는 내게 어떻게 된 것인지 묻지 않으셨다.
나도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덕분에 나는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걸 느꼈다. 애써 감춰왔던 미련을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떨쳐낸 것이다.
내가 걸어왔던 길이, 그리고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응원하마. 언제까지나.”
어머니는 그 말을 끝으로 내게 손을 흔들며 떠나셨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우리 어머니는 참 쿨하고 당당하신 분이었다.
그녀는 내게 등을 돌린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지금의 가족이 있는 곳을 향해.
“감사했습니다.”
나는 그녀가 들리지 않는 걸 알면서도,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리고, 부디 이번 생에서는 평화롭게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부모님은 종말의 시작과 동시에 돌아가셨다. 두 분뿐만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그때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부모님은 돌아가시지 않을 거다. 종말도 찾아오지 않을 거다.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니까.
* * *
“이런 제기랄!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 거냐!”
진풍은 자신의 서재에서 견딜 수 없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적당히 이용해 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컬렉터들을 사주해, 유현과 강혜림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 얼마 전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기대했던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고, 그래서 확인을 해 봤더니 유현은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처음에는 놈들이 도망이라도 친 거라고 생각했었거늘……!’
그걸 확인하기 위해 자신이 사주했던 컬렉터를 찾으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미 그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망친 게 아니다. 그들은 죽은 것이다.
‘어쩌지? 여기서 다른 놈들에게 시킨다고 한들…….’
오히려 꼬리가 길면 밟히게 된다. 만약 여기서 더 나아가면 진풍은 자신이 유현의 살해를 사주했다는 것을 들키게 될 것이다.
이미, 성령들도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건 알고 있다. 텔러 중 누군가가 유현과 강혜림을 죽이려고 한다는 소문은 벌써부터 퍼지고 있었으니까.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다……!’
그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답답해 죽을 것만 같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라는 생각으로 어중간하게 건드린 것이 화근이었다.
더 이상 진풍이 강유현을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아니, 단 하나 방법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그런 짓을 저질렀다가는 부서 내에서 자신의 무능을 입증하는 꼴이나 마찬가지.
그렇게 되면 자신의 자리가 저 아래까지 곤두박질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안 돼! 절대로 안 돼!”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얼마나 치열하게 살면서, 다른 놈들을 짓밟고 이 자리에 섰는데!
“승진을 앞두고 고작 저딴 녀석에게…….”
“흐음. 뭐가 안 된다는 걸까요?”
“……!”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진풍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낯익은 목소리. 진풍은 사색이 된 표정을 가까스로 고치며 자신의 서재에 방문한 존재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아, 아가엘님!”
그녀는 자그마한 요정의 모습을 한 텔러였다.
깜찍한 외형과 빛나는 날개를 지닌 그녀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요정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진면목을 아는 진풍은 두려움에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서, 선배님! 어, 어쩐 일로 제 서재에…….”
“흐음. 우리 진풍이가 과연 맡은 일을 잘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와 봤죠. 그래서 우리 진풍 사원. 제가 시킨 일은 어떻게 됐나요?”
“그, 그런…… 자,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네? 와! 다행이다. 역시, 진풍 사원이네요. 제가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든든한 후배!”
“그, 그렇죠.”
진풍은 식은땀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든 넘길 필요가…….
“그런데, 아까 안 돼 하면서 성질을 내던 건 대체 뭐였을까요?”
“……!”
순식간에 싸늘해지는 아가엘의 목소리에 진풍은 일이 단단히 틀어졌음을 직감했다.
자그마한 요정의 여인에게서 그를 압도하는 기운이 서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그게 아닙니다! 아가엘님! 잠시만 제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흐음. 우리 진풍 사원. 저 아가엘은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저는 진풍 사원을 믿었거든요. 그래도 지금까지 우리 잘해 왔잖아요? 그렇죠?”
“네, 네! 바로 그겁니다! 저는 지금까지 일 처리를 실패한 적이…….”
“하지만, 이번에 실패해 버렸네요? 맞죠? 와, 세상에.”
진풍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의 헛된 희망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깨닫고 말았다.
아가엘은, 그의 부서 선배는 이미 그가 어떤 상황인지 전부 다 꿰뚫어 보고 있었다.
“진풍 사원. 저 아가엘은 정말 슬프답니다. 우리 진풍 사원이 설마, 같은 회사의 소중한 동료를 죽이려고 했다니요.”
“다, 당치도 않습니다. 아가엘님! 제가 어찌!”
“아하! 그렇다면 진풍 사원은 지금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건가요?”
생글생글 웃고 있던 아가엘의 얼굴에 음영이 드리워졌다.
쿠웅!
“크헥!”
진풍의 몸이 거대한 압력에 짓눌려 바닥에 엎어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아가엘을 올려다봤다.
어째서 자신의 서재에서 자신이 이렇게 힘을 못 쓰는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얼굴이었다.
“왜요? 신기한가요?”
아가엘은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끄그그그극!”
“하긴, 궁금하겠죠. 진풍 사원이 왜 자신의 개인 서재에서 다른 텔러에게 이렇게 꼴사납게 제압당하고 있는지! 와, 정말이지. 우리 진풍 사원의 호기심은 제가 말릴 수가 없네요. 좋아요. 저는 친절한 선배님이니까, 우리 귀여운 후배를 위해서 설명해 주도록 하죠.”
아가엘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조잘조잘 떠들어 댔다.
“진풍 사원이 저희 부서와 계약할 때, 서재의 주도권을 넘겼잖아요? 다만, 주어진 업무를 제대로 처리한다면 그때마다 서재의 권한을 일부 돌려주기로 했었죠. 기억나죠?”
“크, 크르륵. 끄르르륵.”
진풍이 게거품마저 물려고 하자, 아가엘은 자그마한 손으로 손뼉을 짝 하고 쳤다.
진풍의 몸을 터뜨릴 듯 억누르던 압박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진풍 사원이 제대로 서재의 권한을 돌려받기 위해서는 대리를 달아야 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전까지는 진풍 사원이 이 서재의 권한을 일부 되찾았다고 하더라도 전부 얻은 게 아니라는 말씀!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요?”
그 질문에 담긴 의도를 진풍이 어찌 모를 수 있을까?
그는 고통 때문에 제정신을 차리기 힘든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가엘은 그 모습을 보며 꺄르르 웃었다.
“진풍 사원은 결국,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 자기의 개인 서재에서도! 제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만 하면 배를 터뜨려 죽을 수 있다는 말이죠! 어머나 세상에!”
그 말에 일체의 과장도 담겨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진풍을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저 아가엘은 마음이 아주 넓은 선배니까요! 덩치는 작을지언정, 누구보다도 이해심이 깊답니다. 그래서 저는 진풍 사원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줄 생각이에요!”
“기, 기회라 하심은?”
아가엘의 말에 무언가를 느낀 진풍의 눈에 서서히 이채가 맴돌기 시작했다.
교활한 그의 머리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것과 아가엘이 꺼내려는 제안의 손익을 빠르게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런 진풍의 속마음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아가엘이 말을 이었다.
“분명, 그 강유현 사원은 저희의 제안을 거절했겠죠. 그러니 진풍 사원이 이러는 거고요. 그의 재능은 아쉽지만, 이쪽의 제안을 거절했으니 가만히 놔둘 수도 없는 노릇! 그래서 저희는 진풍 사원에게 한 번 더 강유현 사원을 처리할 기회를 주려고 해요. 심지어 이번에는 초특가 서비스! 나름 포인트를 지원해 줄 생각입니다!”
“포, 포인트라면 설마…… 그걸 하라는 겁니까?”
“네 맞아요! 바로, 시화대전이죠!”
시화대전(示話大戰).
그 말을 듣는 순간, 진풍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시화대전이란, 서재와 서재의 주도권을 걸고서 컬렉터들이 서로 내기를 벌이는 행위를 일컬었다.
누구의 컬렉터가 더 뛰어난가, 누구의 시화가 더 대단한가.
이것은 텔러들 사이에서 벌일 수 있는 합법적인 전쟁이었고, 당연히 패자는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만 했다.
“자, 잠시만요. 아가엘님! 분명 녀석을 거꾸러뜨릴 방법은 이제 그것밖에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가…….”
“흐음. 대체, 뭐가 불만인 걸까요?”
“부, 불만이 아닙니다. 다만, 녀석과 계약을 맺은 검후라 불리는 컬렉터의 수준이 너무 뛰어나서…….”
“아아, 맞아요. 최근 유명해지고 있는 컬렉터였죠?”
진풍은 바보가 아니었다. 자신이 이번에 부린 수작이 실패한 시점에서, 이미 유현과 강혜림의 수준이 자신의 상상 이상임을 직감했다.
그걸 알기에 정면 대결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가엘은 그렇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히히. 이거 참. 진풍 사원도 부끄럼이 많으셨구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왜냐하면, 저희 펜타그램 부서에서 쓸 만한 컬렉터 하나를 지원해 줄 생각이니까요!”
“컬렉터를……?”
진풍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을 품었다.
아가엘이 직접 부서에서 컬렉터를 지원해 주겠다고 말했다. 심지어 아가엘이 쓸 만하다고 자부할 정도라면, 정말로 컬렉터의 수준이 높다는 소리였다.
“물론 이쪽은 아직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저희 부서에서 뒤에서 몰래 키운 컬렉터랍니다. 강하지만 난폭하고, 꽤나 다루기 껄끄럽죠.”
“설마, 스캐빈저 말씀이십니까?”
“에이. 그 정도는 아니죠. 스캐빈저 짓은 아직 하지도 않았는걸요? 그야말로 쌩 신품이에요 신품!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쪽에서 공을 들여서 키운 녀석이니까. 중견급 컬렉터 정도도 그냥 쓱싹해 버릴 정도라니까요?”
진풍은 그제야 이게 어떻게 흘러가는 상황인지 깨달았다.
펜타그램 부서 내에서 자체적으로 컬렉터 하나를 개발해서 키운 녀석이 있었다. 지금 그녀는 그 숨겨 둔 조커를 이용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과, 과연. 등장과 동시에 떠오르는 신성이라는 검후를 꺾은 컬렉터라면.”
“분명, 성령님들도 어어어엄청! 기뻐하실 거라고요!”
진풍은 자기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아가엘은 단순히 강유현을 없애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녀석을 제물로 삼아 부서에서 키우던 컬렉터의 인지도까지 한꺼번에 획득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떠올리기 힘든 간계.
진풍은 자신이 결국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아가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놈을…… 없앨 수 있다면……!’
이런 수모 정도야, 얼마든지 넘길 수 있으리라.
진풍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 * *
“흐음. 누가 내 이야기를 하나?”
나는 귀가 간지러운 것을 느끼며 사무실에 앉아 살리오 장검을 손질했다.
강혜림이 오랫동안 품어 온 덕분인지, 녀석은 이미 충분한 전류를 머금은 상태였다.
즉 1차적인 각성의 상태는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하지만, 아직이야.’
이미 살리오 장검은 처음의 녹이 가득한 유물의 모습이 아닌, 막 새로 만들어 낸 것처럼 깔끔한 검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겉모습일 뿐, 이 검 자체의 진짜 성능은 반의반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겨우 전원을 켠 수준에 불과하지. 중요한 건 이 검에 내제된 마도공학의 정수는 아직도 잠든 채로 남아 있다는 거.’
엄청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정수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검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나는 곧바로 ‘차원 상점’에서 구매한 [엔로피의 피]를 꺼냈다.
피라고는 하지만 사람처럼 붉지 않고, 반투명하고 점성이 있는 액체였다.
‘암흑 물질 사이를 부유하는 물고기, 엔로피의 피는 그 어떠한 재료보다도 마력의 전도율이 높지. 지금은 다들 모르는 사실이지만, 나중에는 대량의 포인트를 주고도 구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해진다.’
나는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것에 더해서, 적게 남아 있는 매물을 싹쓸이했다.
이 엔로피의 피를 이용해서, 나는 전류가 흐르는 길을 따라 마력 회로를 다시 복구시킬 생각이었다.
‘그냥 넣으면 안 돼. 다른 재료와 함께 첨가해야 풍화된 회로를 다시 새길 수 있다.’
나는 [군다락 뿔조각]을 꺼내 들었다. 한 손에 쥐어지지 않을 정도로 크고 날카로운 뿔. 이것은 엔로피의 피와 함께 살리오 장검에 마력 회로를 각인하기 위한 필수 재료였다.
날카로운 뿔의 끝을 조심스레 움직이며, 나는 전류가 흐르는 회로의 흔적을 찾아 새로운 마력 회로 각인 작업에 들어갔다.
조금만 엇나가는 순간 모든 과정이 무위가 되는, 극한의 집중을 요구하는 공정 작업.
하지만, 감각이 극대화된 내게 귀찮을지언정 힘든 과정은 아니었다.
그렇게 3시간 정도가 흘렀을까?
[살리오 고대 유물 장검이 살리오 제국 마도공학검으로 바뀝니다.]
[이제는 잊혀 전해지지 않은 이야기(無傳之話)를 발견했습니다!]
[이제는 잊혀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無錄之話)를 발견했습니다!]
[시스템이 당신의 업적을 계산합니다.]
[보상으로 100,000TP를 획득했습니다.]
[마력 회로를 각인에 성공했습니다.]
[각인사의 이야기를 획득했습니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포인트들.
무록지화와 무전지화의 업적마저 얻은 것을 생각하면 차고 넘칠 정도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완성했다.”
억만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최고의 검.
과거 고대 제국의 마도공학의 정수가 담긴 무기의 진면목이 내 앞에 그 자태를 드러낸 것이었다.
“어디 검의 상태를 확인해 볼까?”
나는 곧바로 시스템을 통해 검의 정보를 열었다.
그리고 정보를 확인하는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