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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47화 (47/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47화

테오돌란트 습지는 안개가 짙게 끼어 있기 때문에 오래 돌아다니기에 좋지 않은 곳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길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곳의 특징을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이나 벌이는 짓이다.

사방이 비슷한 풍경 같겠지만, 이곳에도 엄연히 길잡이는 있었다.

바로 내가 찾고 있는 늪지뿌리라는 환상체다.

이곳의 보스급 환상체는 ‘레프라’라고 부르는 거대 식물이다.

덩치가 코끼리보다 훨씬 더 큰 녀석은 습지의 중심에 깊게 뿌리를 내린 식인 식물이었다.

뿌리를 내린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 잔뿌리가 닿는 곳까지 감안하면 그 범위는 습지 전체를 아우른다.

그리고 여기서 알아 둬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늪지뿌리’의 존재다.

이곳의 일반적인 환상체로 불리는 ‘늪지뿌리’는 사실 ‘레프라’의 뿌리에서 자라난 일종의 변종 식물에 가까웠다.

당연하게도 ‘늪지뿌리’와 ‘레프라’의 뿌리는 미약하지만 서로 이어져 있다.

‘이 늪지뿌리 녀석만 잘 찾으면, 이곳의 보스급 환상체로 향하는 길을 단번에 알 수 있다는 소리지.’

우리는 금세 늪지뿌리 하나를 발견하고 녀석의 뿌리를 확인했다.

길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거침이 없었다.

그렇게 경계선을 뛰어넘어 우리는 순식간에 보스급 환상체, 레프라의 앞에 당도했다.

녀석은 오랜만의 먹잇감인 우리를 발견하고는 줄기를 촉수처럼 흔들었다.

보통 컬렉터가 최소 5명은 있어야 잡을 놈이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혜림 씨. 가죠.”

“네.”

이쪽은 한 명만 있어도 충분했다.

* * *

[테오돌란트 습지를 클리어 했습니다.]

[클리어 보상으로 3,000TP를 획득했습니다.]

[보상으로 기감확장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기존에 지닌 기감확장 스킬과 합쳐져, 기감확장이 감각확장-대(大)로 바뀝니다.]

[제초꾼 이야기를 획득했습니다.]

[늪지뿌리x9를 획득했습니다.]

[레프라 수액을 획득했습니다.]

…….

습지를 클리어 하자 보상을 알리는 메시지 창과 함께 우리는 사상세계 바깥으로 이동했다.

녀석을 쓰러뜨리는 데는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도 보스급이라 그런지 난동을 피우며 진흙을 마구잡이로 날리는 것은 꽤나 귀찮았지만, 그래 봤자 목숨을 몇 분 더 연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후우. 옷이 더러워져서 큰일 날 뻔했는데, 다행이네요.”

강혜림이 깨끗해진 복장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 싸움에서 녀석이 발버둥을 치며 사방에 휘날리는 습지의 물과 진흙에 잔뜩 더러워진 의복은, 사상세계의 클리어와 함께 활자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다치지만 않으면, 그걸 제외한 이 사상세계의 흔적은 클리어와 동시에 사라지니까요.”

물론, 보상으로 주어지는 재료 아이템의 경우에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 재료 자체가 하나의 개별적인 이야기로 존재하기 때문에, 사상세계에 묶이지 않은 탓이다.

“그래도 유현 씨의 그 검…….”

“아.”

강혜림이 걱정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녀는 내 손에 쥔 검을 보며 꽤나 안타까워하는 기색이었다.

내 검은 곳곳에 이가 나가 있었고, 조금만 더 휘두르면 부러질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애초에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에서 대충 꺼낸 무기였다. 여기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용했다.

“흠. 저도 슬슬 혜림 씨처럼 좋은 무기를 하나 맞춰야겠네요.”

강혜림은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의 클리어 보상으로 무기를 하나 받았다.

바로 오스만 제국의 왕, 술탄의 보검이었다. 실제로 아이템의 등급이 레어급인 보상이라서 당장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무기 중에서는 최상급의 녀석이었다.

“제 것이라도 드릴까요?”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리는 안 하시는 게 좋습니다. 컬렉터에게 자신의 무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아시지 않습니까.”

“유현 씨라면 괜찮아요.”

나를 그렇게 믿어 주는 건 고마운데, 애초에 그 검은 나의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나는 더 좋은 걸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

“어쨌든 이만 돌아갑시다. 여기 계속 있다가는 또 주위에서 뭐라고 한 소리를 들을 거 같거든요.”

어느덧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컬렉터들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설마설마했는데 우리가 정말로 클리어 할 거라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반응이다.

특히 이제 막 이곳에 들어와서 파밍을 하려고 했던 파티는, 그야말로 나라를 잃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조금 미안해지는군.

[성령들이 다른 컬렉터들의 반응에 손뼉을 치며 즐거워합니다.]

[일부 성령들이 컬렉터들의 리액션에 웃음을 터뜨립니다.]

정작 우리 시청령님들은 다른 녀석들이 절망에 빠져도 상관없이 그들을 보며 즐거워할 뿐이었지만.

뭐, 저쪽 컬렉터들에게 안된 일이지만, 이렇게 경쟁자들을 물 먹이는 것도 성령들이 즐거워 는 유희의 일종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컬렉터만 잘 되면 된다는 마인드이다.

“어서 가죠.”

어차피 우리는 챙길 거 다 챙겼다. 클리어 보상에 더해서 성령들의 후원까지. 게다가 시청령들의 숫자는 어느덧 또 올라서 2,500명에 육박했다.

‘공적치가 상당히 쌓였군.’

보통 공적치의 경우에는 시간만 지나도 알아서 쌓인다고는 하지만 그 속도는 현저히 느리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이미 대박을 몇 번이나 낸 탓인지, 공적치가 단 6번의 시화만으로 미친 듯이 상승해 버렸다.

[현재 공적치: 2,802]

[장기 미션-대리 승진]

-필요 공적치 2,802/3,000

-필요 포인트(TP) 10,000(완)

대리 승진까지 남은 공적치는 약 200.

보통 정사원이 대리로 오르기 위해서는 최소 3년 이상 걸린다는 걸 감안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성장세였다. 이렇게 빨라도 될까 싶을 정도로.

‘뭐, 빨리 오르면 오르는 대로 좋은 거지.’

승진을 코앞에 두고 있었지만, 정작 내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한용운의 책. 분명히, 그 색깔이 변했지.’

책은 그 사람을 나타낸다.

표지는 그 사람의 현재를. 책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그 사람이 지닌 가능성을.

결국 아무리 노력을 해도, 사람은 자신이 지닌 가능성을 넘어설 수 없다. 그것은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흘러나오는 빛이 바뀌었어.’

한용운의 책은 동색. 흘러나오는 빛 또한 동색이었다. 하지만 내가 한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의 책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미약하지만 은색으로 바뀐 것이었다.

‘누구라도 바뀔 수 있는 것일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가 바뀐 것은 내가 회귀한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바뀌었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모두가 나처럼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적인 관측은 하지 않았다.

오늘 한용운을 보며 나는 그 생각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

‘과연 가능성이란 무엇인가?’

애초에 가능성이라는 것을 빛의 색깔로 한정 짓는 것부터가 모순 같았다. 사람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무언가 계기만 받쳐진다면 사람이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책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당장에 환경이나 정신적인 요소를 고려한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한용운이 오늘 나와 강혜림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언제나 자신의 가능성을 닫아 놓은 채 살았겠지.

‘준비된 사람은 바뀔 수 있다. 얼마든지.’

나는 오늘 그 사실을 깨달았다.

모두가 바뀌는 건 아닐 거다. 하지만 한용운처럼, 마음 어딘가에 씨앗이 있는 사람은 분명 바뀔 수 있었다.

* * *

나와 강혜림은 무사히 사무실에 도착했다. 언제나와 같이 소파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외출했던 백서련이 돌아왔다.

“아. 오셨어요? 오늘은 어땠어요?”

“오늘은 좀 가볍게 가서 무난하게 끝냈습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그러는 서련 씨는요? 서련 씨도 엄청 바빠 보이시던데.”

최근 그녀는 사무실을 비우는 일이 잦았다. 강혜림과 계약한 덕분에 백화 매니지먼트는 최근 주가를 쭉쭉 올리는 중이었다. 덕분에 백서련은 바쁘게 지내고 있지만, 아무것도 안 하던 옛날보다는 나은지 얼굴은 언제나 밝았다.

“최근 한 잡지사 관계자와 만났거든요. 아마 조만간 인터뷰를 한번 진행할 거 같아요.”

“그거 좋은 일이네요.”

“어. 인터뷰?”

“네. 언니. 언니도 이제 이후로 본격적으로 방송을 탈지도 모르겠네요.”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상위권에 속하는 컬렉터들은 단순히 환상체 사냥뿐만이 아니라 유명한 연예인에 가까웠다. 방송 출연, CF 촬영,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퍼포먼스 투어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컬렉터가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는 것은, 이런 인터뷰야말로 제격이었다.

“으음. 나 그런 거 좀 부담스러운데.”

강혜림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 조금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시원에서 쭈구리마냥 컵라면만 먹던 그녀였기에 갑작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것이었다.

정작 그런 거치고는 칼만 잡으면 사람이 바뀌던데. 내 컬렉터의 정신 상태, 이래도 좋은가. 묘하게 회의감이 든다.

“유현 씨이이. 저 안 하면 안 돼요? 그냥, 사냥만 하는 게 제일 마음 편한데.”

“그거 하면 돈 엄청 들어올 겁니다.”

“……얼마?”

“억은 우습겠죠?”

“그럼 하겠습니다!”

돈이라는 말에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하는 그녀.

나와 백서련은 그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돈이 최고다.

“그보다 유현 씨는 지금 뭐하시고 계세요?”

강혜림은 내 곁에 앉아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련의 과정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구경했다. 그것은 백서련도, 내 어깨에 앉은 백효도 마찬가지.

부엉

그야 그럴 게, 나는 지금 낡아 빠진 검을 쥐고서 그 위에 기묘한 액체를 뿌리고 있었으니까.

굳이 숨길 것도 없기에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새 무기를 손질하는 중입니다.”

“새로운…….”

“……무기?”

순식간에 이상해지는 백서련과 강혜림의 표정.

“두 분 다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상하잖아요. 유현 씨가 지닌 그 검. 아무리 봐도 차원 상점에서 파는 싸구려 철검 아니에요? 엄청 녹슬었고, 제대로 역할도 못 할 거 같은데.”

강혜림의 지적대로다.

내가 지금 지닌 이 검은 차원 상점에서 100TP밖에 하지 않는 싸구려였다.

검의 질이 나쁜 것은 아니다. 정확히는 너무 오래 돼서 제구실하지 못하는 유물에 가까웠다. 나는 지금 그것을 손질하는 중이었다.

“이게 겉으로는 이렇게 보여도, 사실은 엄청나게 중요한 겁니다.”

이번 사상세계 클리어 보상으로 획득한 레프라의 수액.

애초에 내가 테오돌란트 습지를 가자고 한 것에는, 이 보상을 노린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혜림 씨. 이 검의 정보를 한번 살펴보세요. 뭐라고 나옵니까?”

“음. 살리오 고대 유물 장검이라고 나오네요.”

“제대로 보셨습니다.”

“이게 그렇게 좋은 건가요?”

싸구려 검 치고는 이름이 있다는 사실에 놀란 것 같지만, 그래도 이 검이 손질을 통해 나아질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반응.

“그 반응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닙니다만. 혜림 씨나 서련 씨는 모르겠지만, 이 살리오라는 것은 혼성계에서 꽤나 유명했던 한 차원의 이름입니다. 살리오 제국. 그 어떠한 차원보다도 마법과 기계를 함께 다루는 마도 공학으로 유명한 곳이었죠.”

그래. 과거에는 엄청난 영광을 지닌 곳이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이미, 수천 년도 더 전에 멸망했다.

“이 검은 바로 그 살리오 제국의 유물입니다. 그냥 유물도 아니죠. 고대 유물입니다.”

“그런데, 고대나 유물이라는 건 오래됐다는 소리잖아요.”

이름에 고대, 유물 이런 게 붙어서 좋은 것은 게임 속에서 뿐이다. 현실에서 고대, 하면 오래되고 쓸모없는 물건을 뜻하니까.

하지만, 이건 그녀들이 아직 뭘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혼성계에서는, 그 게임에서 먹히던 게 현실에서도 적용된다.

당장에 지구가 혼성계에 편입되는 ‘과정’이라 이런 게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게 컸다.

“보시면 알 겁니다. 조만간 성령님들이 보는 앞에서, 여러분들께도 보여 드리죠.”

살리오 고대 유물 장검.

지금은 혼성계에서 그 가치가 사라진 물건이지만, 미래에서 온 나는 이 무기의 진짜 가치를 알고 있다.

이 녹슨 검을 어떻게 해야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는지, 한때 찬란했던 문명의 모든 정수가 담겨 있는 무구를 어떻게 깨우는지.

전부 다.

“기대하세요.”

이거야말로, 사상세계에서도 절대로 구할 수 없는.

[차원 상점]에서만 존재하며 이제는 모두에게 잊힌 진짜 히든피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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