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41화
그가 누구인지 알아본 일부 성령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나 또한 이명을 통해 그가 누구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해가 지는 바다의 백왕(白王).
해가 지는 곳은 서쪽. 그곳의 바다라는 것은 서해를 의미한다.
백(白)이라는 것은 그가 지닌 상징적인 색깔을 뜻했다. 거기에 왕이라는 이름까지.
사해용왕(四海龍王) 중 하나인 서방백룡 광순왕(廣順王) 오흠(敖欽).
무려 대성군(大星群) 중 하나인 천계삼십육천(天界三十六天) 소속 성령이었다.
‘슬슬 이름값 있는 성령들이 하나둘 내 서재에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벌써부터 움직이는 자들이 있을 줄이야.’
심지어 벌써부터 내게 기 싸움을 걸고 있었다. 내 서재에 찾아온 것은 흥미지만 그렇다고 텔러인 내게 휘둘릴 생각은 전혀 없다는 뜻이겠지.
서방백룡은 성령 중에서 급을 따지면 2세대지만, 그 힘은 3세대에 가까웠다. 바다가 아닌 곳에서는 엄청 약하니까.
하지만, 그건 다른 사해용왕도 비슷하다. 무엇보다 저들의 가장 큰 강점은 단순히 힘 따위가 아니었다.
왕이라 불릴 정도로 막대한 재력.
그것이야말로 용왕이라 불리는 그의 진짜 무기라고 볼 수 있었다.
애초에 그 제천대성한테 여의봉을 털린 동해용왕은 어떤가. 그만한 신물을 털리고도 동해용궁의 위용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용왕이라는 자들의 재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일부나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지금 그 용왕 중 하나가 내 서재에 와서 내게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다.
-자. 내가 이만한 포인트를 후원해 줄 수 있는데, 이래도 블락을 먹일 것이냐?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확실히 1만 텍스트 포인트는 매우 큰 금액이었다. 저 포인트를 벌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환상체를 사냥해야 할까?
게다가 단순히 즉석에서 던진 포인트가 1만이다. 1만 포인트를 가볍게 여기는 행동을 보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않는 모양. 마음만 먹으면 더 쓸 수 있다는 걸 은연중에 과시하는 것이다.
서방백룡은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저 행동 하나만으로 내게 알아서 기라고 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흐음. 그 유명하신 사해용왕의 일인께서 제 서재에 찾아오셨다니.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손님을 잘 못 본 모양이네요.”
[해가 지는 바다의 백왕이 턱을 치켜세웁니다.]
“그래서 제게 뭘 바라신다고 하셨죠?”
[해가 지는 바다의 백왕이 10,000TP 후원!]
[너무 빡세게 하지 말고 좀 적당적당히 하세나. 거, 뭐. 우리가 떠들면 얼마나 떠든다고 그러는가?]
재차 이어지는 대량의 후원금.
방금 것과 합치면 무려 2만 포인트를 받은 셈이었다. 나처럼 정사원 텔러로서는 쉽게 만져 볼 수 없는 거금이나 다름없었다.
상대도 그것을 알기에 거만하게 나오고 있었다. ‘나 이렇게 돈 많다. 이래도 네가 과연 내 뜻대로 안 움직일 거냐?’라고.
“하하. 적당히…… 말씀이시죠?”
[해가 지는 바다의 백왕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후우, 적당히라. 적당히…… 적당히…….”
나는 그 말을 몇 번 반복하며 말꼬리를 늘렸다.
그런 나의 태도에서 몇몇 성령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야 그렇지.
“죄송하지만, 안 되겠네요.”
나는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
[…….]
순식간에 메시지 창이 조용해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성령들이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유일하게 반응한 것은 나와 대화를 나누는 당사자였다.
[해가 지는 바다의 백왕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습니다.]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제 대답이 충분하지 않았습니까?”
[해가 지는 바다의 백왕이 10,000TP 후원!]
[내 후원이 부족한 거냐? 그래. 대체 얼마를 더 주면 머리를 숙일 건데?]
백왕은 꽤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그야 그렇겠지. 그가 지금까지 이렇게 포인트로 해결하려고 해서 안 되던 적이 있었겠는가?
그는 왕이다. 어지간한 텔러나 컬렉터들도, 그가 던지는 포인트 앞에서 자존심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알아서 기었을 것이다.
그만큼 서방백룡이 후원하는 포인트는 막대했고, 다른 성령들도 놀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말이지, 그건 일반적인 텔러에게나 먹히는 방법이고.
나는 다르거든?
“후원이 부족한 게 아닙니다. 설사 이 이상의 포인트를 후원해 주셔도 안 되는 건 안 됩니다.”
나는 절대 협상의 여지는 없다는 듯 단호하게 끊어서 말했다.
이건 내가 짠 규칙이고 룰이다. 그것을 단순히 돈에 혹해서 예외를 두거나 내가 어긴다면, 과연 누가 이걸 지키려고 들겠는가?
“제가 만든 규칙이기에, 저 또한 예외는 없습니다. 이러한 규칙은 절대적이고 지엄하며, 공명정대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포인트를 뇌물로 줘도, 아무리 힘과 권위로 저를 겁박하려고 하셔도.”
나는 웃는 얼굴을 싹 지운 채,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정한 것을 바꾸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적어도 서방백룡님에 한해서는 말이죠.”
[이, 이이이이!!]
쿠르릉!
그의 분노 때문인지, 시스템 창이 거칠게 흔들렸다. 심지어 맑았던 하늘에는 먹구름이 생겼고, 멀리서 우레가 들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계의 존재가 하계에 자신의 힘을 개입할 정도로, 그가 지금 분노했다는 소리다.
하지만, 나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제네시스 시스템이 발동합니다.]
순식간에 주변의 소요가 가라앉았다.
혼성계 전체를 아우르는 시스템의 영향 때문에, 서방백룡은 함부로 자신의 힘을 선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매우 화가 났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해가 지는 바다의 백왕이 10,000TP 후원!]
[이 하찮은 텔러 주제에! 이 나를 능멸하려는 것이냐! 네놈은 내가 주는 돈이나 받아 처먹고 알아서 기어 다니기나 하면 된다! 포인트가 아무리 많아도 안 돼?! 돈으로 안 되는 건 없다!]
그 직후 연달아 후원금액이 터져 나왔다.
[해가 지는 바다의 백왕이 10,000TP 후원!]
[해가 지는 바다의 백왕이 10,000TP 후원!]
[해가 지는 바다의 백왕이 10,000TP 후원!]
[해가 지는 바다의 백왕이 10,000TP 후원!]
[해가 지는 바다의 백왕이 10,000TP 후원!]
직접 메시지로 3만. 그리고 추가로 던진 포인트가 5만.
합쳐서 8만이라는 거대한 포인트가 내게 다이렉트로 들어온 것이다.
이래도 안 흔들릴 거냐고 으름장을 놓는 그의 행동에 나는 피식 웃었다.
“후원을 해 주신 부분은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말이죠.”
나는 내 서재 관리 창을 띄우며 말했다.
“텔러 혐오 발언을 하셨네요. 졸업 축하드립니다.”
[해가 지는 바다의 백왕이 서재에서 추방당했습니다.]
나는 그대로 서방백룡인 그를 내 서재에서 쫓아냈다.
그 광경을 얌전히 지켜보던 다른 성령들이 숨을 삼켰다.
설마하니, 내가 정말로 그를 쫓아낼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겠지. 무려, 8만 포인트나 받았는데. 누구라도 미안하거나, 혹은 고마워서 뭐라고 못할 것이다.
“후원은 후원. 규칙은 규칙입니다. 설사 제 서재를 처음부터 봐 오신 성령님이라 하시더라도, 이 규칙을 어기는 순간 저는 가차 없이 블락을 먹일 겁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다른 분들도 그 점을 유의하셨으면 좋겠군요. 아시겠죠?”
[대부분 성령이 침을 꿀꺽 삼킵니다.]
그들은 내게 지려 하고 있었다. 설마 이만한 거금을 받고도 가차 없이 서방백룡을 쳐 낸 과감한 행동이나, 심지어 대성군 소속인 그를 상대로 한 치의 밀림을 보이지 않은 것까지.
“반응을 보니, 다들 잘 알아들으신 것 같아서 다행이군요.”
나는 다시 처음의 웃는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어떠한 성령도 내 말에 토를 달거나 하지 않았다.
역시, 이렇게 본보기로 한 명을 쳐 내면 말을 잘 듣는다니까?
뭐, 채찍질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는 당근 차례다. 너무 빡빡하게 굴면 성령들도 지쳐서 나가떨어지니까.
“물론, 초반이라 그런 점 양해 바랍니다. 좋은 분위기가 굳이 제재를 가하지 않아도 지속된다면, 그때는 규칙을 완화하는 방안도 생각 중이니까요.”
[성령들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일부 성령들이 그러면 어쩔 수 없다며 수긍합니다.]
이걸로 됐다.
비록 큰 손 하나를 날린 것은 조금 아쉽지만, 뜯어낼 건 뜯어냈으니 상관없었다.
애초에 혼성계에 큰손이 몇이나 있는데. 고작 서해용왕이 큰손의 전부는 아니었다.
[이노오오옴!!]
그 순간이었다.
나에게 강제로 쫓겨난 것에 분노한 서방백룡이 시스템의 의지를 거절하고 억지로 내 서재에 다시 접속한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시스템의 의지를 거스르려고 하시다니. 머리끝까지 화가 차신 것은 이해하지만, 지금 도를 넘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닥쳐라! 고작 정사원밖에 되지 않는 하찮은 텔러 주제에, 감히 누구를 향해 함부로 말을 하는 거냐! 포인트를 먹을 대로 먹어 놓고 이 나를 쫓아내겠다고?! 아직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녀석이라 세상물정 모르는구나!]
시끄럽게 소리 지르는 그를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돈만 많은 꼰대들은 상대하기 참 귀찮다니까. 포인트면 다 되는 줄 알잖아.
[감히 대성군 소속인 이 나를! 능멸하려고 한 죄는 크다! 네놈이 감히 얼마나 잘났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천계삼십육천을 모욕하고도 멀쩡하게 있을 거라고……!]
“한 가지 틀린 말씀을 하셨네요. 저는 천계삼십육천 대성군을 모욕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서방백룡님을 모욕한 적도 없죠. 그저 룰을 어긴 손님 한 분을 내보냈을 뿐이죠.”
[이, 이이이! 뚫린 입이라고 감히이이이이이이이!!!]
그 순간이었다.
[100TP 후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갑자기 들려오는 그 한마디에, 시끄럽게 소리치던 서방백룡이 입을 꾹 다문 것이었다.
[찬란한 빛을 닮은 자가 서재에 입장합니다.]
그 메시지를, 적어도 내 서재에 있는 성령 중에서 못 본 자가 없을 테니까.
[에, 에덴? 아, 아니 대체 왜 저자가…….]
[찬란한 빛을 닮은 자가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며 묻습니다.]
[그, 그게…….]
아무리 오흠이 4대 용왕 중 하나이며, 천계삼십육천의 바다를 지배하는 용왕이라고 하지만 감히 미카엘의 위용에는 비빌 수는 없었다.
미카엘의 시선을 받은 오흠이 말을 버벅였다. 그 이상으로, 분노 때문에 무리하게 힘을 끌어올려 시스템에 혼선을 준 그에게, 시간차를 두고 거대한 역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었다.
[시스템 이상! 외부 존재 개입을 확인합니다.]
[과도한 힘을 사용한 존재 확인.]
[시스템 규정상 절차 작업에 들어갑니다.]
[으어억!]
시스템 창 너머에서 서방백룡의 고통에 찬 신음이 울려 퍼졌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그렇지, 제네시스 시스템을 거스르기는 왜 거슬러?
[이, 이게……!]
아마 그는 이 제네시스 시스템의 위용에 관해서 자세히 몰랐을 것이다. 남부럽지 않은 자리에 올랐으니, 모든 게 다 우습게 보였으리라. 본인 입장에서 ‘사소한’ 잘못 같은 것도 재력으로 해결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 제네시스 시스템에 조금이라도 잘 아는 성령이라면 절대로 그런 행위는 하지 않는다.
제네시스 시스템이 어째서 혼성계 전역을 아우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다른 성령들이 그걸 따르니까? 모두가 이 시스템을 사용해서?
그게 아니다.
제네시스 시스템이 갖는 강제력은, 최상위 성령이라 하더라도 쉽게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작 2세대, 힘의 급수로 나누면 상위는커녕 겨우 중급에 턱걸이하는 용왕 주제에 시스템을 거스르려 하다니.
‘미친 거지.’
오늘 서방백룡이 범한 실수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자신의 화를 이기지 못해, 시스템의 흐름을 거부한 것.
그리고 두 번째는.
감히 내 서재에서 나를 우습게 보고 깽판을 치려 했다는 것.
[크아아악! 아, 안 돼!!]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동안은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하겠지.
회복에 전념을 다 해 요양해도 최소 몇십 년은 골골대야 할 거다. 그래도 대성군 소속이니까 저 정도에 그친 거지, 그런 소속마저 없었으면 더 가차 없다.
[해가 지는 바다의 백왕이 강제로 퇴거 조치당합니다.]
서방백룡은 시스템에 의해 강제로 서재에서 쫓겨났다. 그 광경을 보던 일부 성령들은 제네시스 시스템이 갖는 무서움에 치를 떨었다.
대성군 소속 2세대 성령이 저렇게 쪽도 못 쓰고 괴로워하는 것에 경각심을 느낀 것이다.
“자자.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다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여러분들이 룰만 잘 지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저건 좀 특이 케이스라서요.”
[일부 성령들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일부 성령들이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어쨌든 내게는 잘된 일이었다.
포인트는 포인트대로 벌고, 귀찮은 혹은 혹대로 떼어 냈으니까.
“그럼 아까의 말을 이어서 할까요. 혹시 제 방의 룰에 불만이 있다. 이의를 제기하고 싶으신 분은 손 한번 들어 주세요.”
조금 전의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봐 온 성령 중에서, 당연히 그것을 드러내는 자가 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지금은 사탄이 아닌, 미카엘이 내 서재에 찾아왔다. 공명정대하고 올바르기로 소문 난 미카엘이 눈을 치켜뜨고 있는데 누가 미쳤다고 나서겠는가?
“없으시군요. 그럼, 이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당연히 반대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