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7화
띠리리리리!
“네! 백화 매니지먼트 실장 백서련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네? 네. 네.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요? 아, 네.”
“네? 잠시만요.”
쉬지 않고 걸려 오는 전화에 백서련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녀는 온갖 장소에서 걸려 오는 전화를 받으면서도 이게 현실인지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뭐, 확실히 그럴 법도 하다. 빚내서 만든 사무실은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었고, 매일 컵라면이나 먹으면서 끼니를 연명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막상 당황하는 거치고는 대처를 참 잘하네.’
백서련은 평소에는 어리바리한 거 같으면서도 막상 업무에 들어가면 똑 부러지게 행동했다.
소파에 앉아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나는 나지막이 감탄했다.
“유현 씨. 뭐 해요?”
긴 소파에 가로로 누운 강혜림이 내 허벅지에 머리를 얹으며 물었다.
나는 이마를 찌푸렸다.
“뭐 하십니까? 무겁습니다.”
“무겁다니. 여자한테 실례인 거 모르세요? 제가 얼마나 가벼운데.”
“그런 말 듣기 싫으시면 머리 치우세요. 딱밤 맞을래요?”
“아, 아니요!”
딱밤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가호를 포기하고 나서, 묘하게 강혜림이 나를 신체적으로 건드리는 일이 늘어났다.
가호가 있을 때는 하계의 존재는 텔러를 건드리지 못했지만, 지금은 나 또한 하계의 존재나 다를 바가 없으니까. 신기할 만도 하겠지.
그래도 이대로 놔두면 2절 3절을 넘어 뇌절까지 할 거 같아서 주의를 주기로 했다.
“혜림 씨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도 모릅니까?”
“에이. 저희가 남인가요? 세상 누구보다도 끈끈한 사이잖아요.”
강혜림은 싱글거리는 얼굴로 지지 않고 받아쳤다.
묘하게 능글맞게 구는 그 모습이 은근히 열 받게 느껴졌다. 2일 전,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을 끝내고 그녀는 계속 이런 상태였다.
이러다 한번 넘어져서 코가 깨져야 정신을 차리지?
“후우. 지쳐라.”
때마침 적당히 업무를 끝낸 백서련이 수화기를 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아뇨. 힘들긴 하죠. 그래도 즐거워요. 예전이라면 제가 전화를 걸어도 무시했을 곳에서 이쪽에 먼저 전화를 걸어 주다니. 얼마나 기분 째지는지 아세요?”
“아, 네…….”
“아무튼, 이게 현실인지 믿기지 않아요. 그저께부터 그, 두 분이 악명 높은 사상세계 하나를 클리어 하셨다니.”
백서련의 말에 강혜림은 힛 웃으며 어깨를 으쓱 세웠다. 본인이 생각해도 참 대단하게 느껴진다 싶은가보다.
‘사실, 나도 그러지만.’
비록 내부의 도움을 받은 영향도 없잖아 있지만, 클리어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강혜림과 나였다. 당장 성공해 놓고도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었으니, 오죽하겠는가?
어찌 됐든 이번 사상세계를 클리어 한 여파 때문인지, 백화 매니지먼트에는 온갖 러브 콜이 날아왔다.
“서련 씨. 그렇다고 아무런 연락이나 다 받지는 마세요. 전부 다 들어주기엔 아직 여유가 없습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특히 클랜 쪽이나 다른 매니지에서 오는 것은 나름 거절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쪽은 애초에 이쪽을 어떻게 집어삼킬지 궁리만 하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언론이나 다른 쪽에서 오는 연락은 무시 못 해요.”
그건 나도 안다.
강혜림은 이번 사건을 통해 엄청난 명성을 얻었다. 덤으로 컬렉터 등급도 올라서 최단기간 정6품을 달성했다.
사람들은 혜성처럼 등장한 검후라는 신인에 관해서 막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녀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했다.
“일단, 언론사 쪽에서 연락이 온 건 몇 개 킵 해 뒀어요. 이 중에서 메이저한 곳 하나와 커넥션을 잡고 인터뷰 한번 하면 될 거예요.”
“그밖에 다른 곳은?”
“몇몇 곳에서 벌써부터 CF를 찍는 게 어떠냐는 제안이 왔어요. 다만 다 고만고만한 곳들이라 이걸 받을지 말지 고민이에요.”
“그건 거절하는 게 좋을 겁니다. 당장 큰손들이 아니면 협약한다고 해서 딱히 크게 돌아오는 건 없거든요.”
강혜림이 지금 가지는 가치는 어마어마했다.
그럴수록 그녀의 발걸음은 무거워야 한다. 부른다고 아무 데나 다 찾아다니면 역으로 얕잡혀 보이게 된다.
“알았어요. 유현 씨 말대로 이건 거절하도록 할게요.”
백서련은 머리가 좋아서 척하면 척하니 알아먹었다.
그렇게 적당히 상황을 정리한 그녀는 눈가에 호기심을 가득 담은 채 물었다.
“그보다 유현 씨, 정말로 가호를 포기하신 거예요?”
“그렇죠.”
“그러니까 내가 만질 수 있지~~”
“어허.”
강혜림이 내게 손을 뻗으려고 하자 나는 그걸 칼같이 쳐 냈다. 그녀가 아쉬운지 앓는 소리를 냈다. 어림도 없지.
“텔러가 정말 그래도 되는 건가요?”
“안 된다는 법은 없죠.”
“신기하네. 저 그런 거 처음 봤어요. 애초에 그래도 되는지도 처음 알았고.”
“저도 이번에 처음 해 봐서 알았습니다.”
“헐.”
뭐가 어찌 됐든 가호를 포기했다는 것은 이제 일종의 나의 아이덴티티로 자리 잡았다.
“가호를 포기하면 위험한 거 아니에요?”
“일단, 불편한 점은 있죠. 당장 저희 텔러들은 가호를 통해 공간을 뛰어넘으며 어디로든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이제 나는 그것이 안 된다. 먼 곳을 가려면 직접 두 다리로 움직이는 거 말고는 답이 없다. 사실상 나의 행동반경이 이 서울이라는 곳에 국한된 것이었다.
“게다가 사상세계에 들어가거나 전투에 돌입할 경우에, 관조자의 방으로 함부로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기존 가호가 유지될 때는 [관조자의 방]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었지만, 가호를 포기한 지금은 그것에도 제약이 생겼다.
사상세계 안쪽에서는 출입이 금지. 바깥에서도 전투에 들어갈 경우 출입이 금지.
그 외 일상에서는 오갈 수 있다지만, 없던 ‘제한’이 생겼다는 것은 생각보다 컸다.
“그 밖에 여러 가지가 있지만, 뭐 가장 큰 것은 앞에 열거한 둘이죠.”
“헉. 그거 괜찮은 거 맞죠?”
“애초에 제 안전만 보존하려고 했으면 이런 짓 안 했죠. 전 만족합니다.”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였다는 자각은 있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내가 원해서 내린 선택이었고 반대로 얻을 수 있는 혜택은 톡톡히 보고 있으니까.
오히려 왜 처음부터 이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어찌 됐든 저도 앞으로 혜림 씨와 함께 사상세계를 다니며 싸우게 됐으니, 사실상 컬렉터라고 봐도 무방하죠. 서련 씨가 더 바빠지겠군요.”
“유현 씨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에요! 그래서 그러는데, 혹시 앞으로의 계획은 있으신가요?”
계획이라.
나는 두 손으로 깍지를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은 있죠. 다만, 지금은 상황을 정리하는 게 우선입니다.”
이번 사태로 나의 서재는 너무 급격하게 커졌다. 다른 텔러라면 차근차근 과정을 밟아 가면서 키워야 할 서재를, 나는 몇 단계씩 건너뛰면서 키워 버렸으니.
당초에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시청령과 구독령이 훨씬 많아지고 말았다.
기존에 내 시화를 즐겨보던 성령들과 새로 온 성령들. 그들이 섞이면서 꽤 시끄러워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나는 내 서재에 룰을 만들어야 했다.
새로운 시청령들을 휘어잡지 못할 경우, 오히려 나의 시화가 그들에게 휘둘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철저한 규칙을 만들고, 그것을 어기는 성령이 있다면 칼같이 블락(Block)을 먹여야 한다.’
다른 중소규모 서재들도 꼭 지켜야 하는 철칙을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보다 작은 서재도 그러는데, 오히려 나는 이걸 짜는 것이 늦은 셈이었다.
‘그나마 아직 난리를 피우는 성령들이 없어서 다행이지.’
정확히는 사탄의 덕분이었다.
성령 중에서는 자만심이 하늘을 찔러 대하기 까다로운 자들도 더러 있었다.
자신이 성령의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중계, 하계의 존재들을 하찮게 여기는 자들.
그 수가 매우 적다 하더라도 1,000명이 넘는 구독령 중에서 그런 자가 하나가 없을까?
‘자고로 사람이 다섯 모이면 무조건 쓰레기가 하나 있다는 격언이 있지. 성령들이 열에 하나, 백에 하나로 줄여도 최소 10명은 넘는다는 소리야.’
그런 자들은 텔러가 아무리 부탁을 해도 오히려 땡깡을 부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사탄은 그들의 훌륭한 억제책이 되었다. 그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 성령들이 함부로 나대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사탄이 가장 위험하지.’
나는 쓰게 웃었다.
늑대나 하이에나를 제압하겠다고, 호랑이를 부른 꼴이다.
당장에 내 서재를 포기하고 가만히 지켜보겠다고 한 사탄이지만, 언제 기회를 틈타서 내 서재의 후원자를 자처하려 들지 몰랐다.
그는 교활한 뱀이었고, 무려 2세대에 성령 둘을 타락시킨 전적이 있지 않던가?
지금은 내게 웃으면서 살갑게 굴지만, 언제 그가 독니를 드러낼지 모를 일이었다.
‘그 증거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게 선물을 건넸지.’
나는 내 개인 인벤토리에 잠든 아이템 하나를 가라앉은 시선으로 보았다.
나와 강혜림이 콘스탄티노플 사상세계를 끝낸 당일, 사탄은 시화를 끝내기 전 다른 성령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선물을 주었다.
그것은 일전 나와 개인적으로 만나서 치른 내기의 대가였지만, 그가 선물을 줬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사탄의 속내를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 텔러는 내가 찜했으니, 너희들은 눈독 들일 생각하지 말라 이거지.’
심지어 우리가 선물을 주고받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비치기까지 했다.
각별한 건 아니더라도 그와 내가 나름의 인연이 있다는 것은 사실. 하지만 사탄은 그것을 은근하게 포장해서 보란 듯이 퍼뜨린 것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아마 일부 성령들은 나와 사탄의 관계를 의심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만한 선물을 줄 줄이야.’
나는 인벤토리에서 사탄이 준 선물을 꺼내 들었다.
내 오른손 위에 살수처럼 생긴 과일 하나가 쥐여졌다.
“어라? 그게 뭐예요?”
내 옆에 앉은 강혜림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나는 딱히 숨길 것도 아니라서 솔직하게 대답했다.
“생명의 열매입니다.”
“네?”
“네에?!”
의외로 가벼운 반응을 보이는 강혜림과 다르게 백서련은 그야말로 입이 찢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놀랐다.
“그, 그게 정말로 생명의 열매라고요?”
“이걸 직접 준 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아마 그럴 겁니다.”
사탄이 직접 줬으니, 확실하겠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이 과일의 정보를 확인했다.
[생명의 열매]
생명의 나무에서 자란 열매입니다. 아직 완전히 성장한 게 아니라 갓 자라난 것이지만 그 안에 담긴 생명의 힘은 절대로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용자에게 막대한 생명의 힘을 선사합니다.
설명은 이것뿐이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직 덜 자란 생명의 열매지만, 이건 그 에덴동산에서 난 진품이 맞았다.
“왜? 이게 대단한 거야?”
“언니! 생명의 열매라고요?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두 과일 중 하나!”
“아!”
성경에서도 나온 두 개의 과일, 지혜의 열매인 선악과와 생명의 열매. 내가 지닌 것은 이 중 후자에 속한 것이었다. 복용하면 영원한 생명을 준다고 알려진, 최고의 아이템이다.
크기는 탁구공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그 가치는 천만금을 주고도 구하지 못할 정도.
“서련 씨는 그래도 나름 알고 계시군요.”
“그야 그렇죠. 컬렉터들을 보필하는 일을 하려면, 적어도 역사나 신화에서 유명한 이야기는 공부하는 게 필수니까요.”
“맞습니다. 뭐, 그 이상으로 이게 그만큼 유명한 거기도 하죠. 생명의 열매라니. 굳이 다른 것과 비교를 하면 북유럽 신화의 이둔의 황금사과, 올림포스의 넥타르와 암브로시아, 인도의 암리타, 혹은 불교의 감로에 맞먹으니까요.”
“그걸 선물로 받으셨다고요?!”
“뭐, 받았다 하더라도 당장에 이걸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애초에 완전한 열매도 아니고.”
지금 내게 쥐어진 생명의 열매는 다 자라지 않은 설익은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생명의 열매라는 이름값을 하기 때문에, 이것을 섭취하기만 해도 복용자는 말도 안 되는 생명력을 얻겠지만…….
‘당장 먹을 수는 없어.’
이걸 먹고 소화하기에는 아직 나의 격이 턱없이 부족했다.
생각 없이 먹었다가는 넘치는 생명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몸이 터지거나 변이를 일으킬 것이다.
‘바로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을 주다니. 그렇다고 가치가 없는 게 아니라서 다른 성령들이 의심할 수밖에 없잖아. 빌어먹을 능구렁이 같으니라고. 속셈이 훤히 보이는군.’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생명의 열매를 다시 인벤토리에 넣었다.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 내가 저 열매를 섭취할 수 있을 정도로 걸맞게 성장한다면 내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백서련은 여전히 덜덜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이전까지 나를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거의 경외감에 담긴 시선을 보내는 중이었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띠링!
내게 개인적으로 메시지 하나가 날아왔다.
‘뭐지?’
어지간한 성령들은 내게 메시지를 남기지 못하게끔 수신 거부를 해 놓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이렇게 소리가 울린다는 것은 내가 설정한 기준치 이상의 존재가 내게 직접 메시지를 보낼 때뿐이다.
‘설마 사탄이 또?’
그런 생각을 품으며 메시지 창을 확인한 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쪽이 나한테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