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5화
해냈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유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강혜림이 사뿐히 지면에 착지했다. 마치 세상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모두 강혜림을 홀린 듯이 바라보기만 했다.
적장 메흐메트 2세는 가슴을 베이고도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피가 흐르는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들었다.
그가 본 것은 자신을 벤 강혜림이 아닌 피를 흘리며 싸우던 드라가시스였다.
“…….”
“…….”
멀리 떨어진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유현은 잠자코 그 광경을 지켜봤다.
몇십 번이나 반복된 죽고 죽이는 전쟁. 둘은 그 양 진영의 수장이었다. 어떻게 보면 원수나 마찬가지였다.
과연 메흐메트는 뭐라고 말을 할까? 믿기지 않을 것이다. 이미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순간 졌으니 그럴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의 패배에 대해서 한탄을 할 수도 있고, 이런 반칙 같은 방법을 사용한 드라가시스를 원망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씨익.
“훌륭하다. 나의 숙적이여.”
메흐메트 2세는 웃었다.
자신의 오랜 숙적을 향해, 자못 대견하다는 듯.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스스스.
차분히 눈을 감은 메흐메트 2세의 몸이 새하얀 활자로 바뀌며 사라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따르던 오스만 병사들도 하나둘 가루처럼 흩어졌다.
따스한 봄의 꽃잎이 휘날리듯
십만이 넘는 대군이 눈을 가득 채우는 활자로 변하는 광경은 아름답기만 했다.
그 새하얀 활자의 세상 속에서 강혜림이 검을 치켜세웠다.
하늘을 향해, 자신의 승리를 선포하듯이.
모든 병사가 그 광경을 아연하게 바라봤다.
“이, 이긴 거야?”
“정말?”
“이겼어! 우리가 이겼다고!”
와아아아아!!
생존한 결사대의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전염되듯 성벽에서 이 광경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병사들도 기쁨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드라가시스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아연한 기색이었다.
이겼다.
언제나 패배하던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드디어 종지부를 찍었다.
가슴을 가득 채우는 이 뜨거운 달성감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뜨거운 것이 목을 타고 넘어와 눈까지 차올랐다.
드라가시스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 이거였어.”
그가 바라던 것.
그것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었다.
드라가시스는 멀리 떨어진 성벽을 바라봤다. 그곳에서 병사들이, 백성들이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고 있었다.
그래.
“난, 이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거야.”
자신의 조국, 고향, 그리고 백성들.
그들이 고통받지 않고 웃으며, 그저 즐겁게 지내길 바라는 것.
반복되는 죽음 속에서도 그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던 유일한 바람이었다.
“고맙네. 정말로.”
드라가시스는 유현과 강혜림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2,200년의 역사를 지닌 로마 제국의 정통 황제인 그가 고작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인 것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에게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아니, 누가 그에게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야말로 칭송받아 마땅한 조국의 수호자였다.
“정말로, 고마워. 비록 만들어진 우리지만, 그렇기에 절대로 이 은혜는 잊지 않겠네.”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유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상처가 쓰려 왔고 땀이 잔뜩 났지만, 그런 건 지금 느끼는 기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허공에 흩날리는 활자들을 보며, 유현은 말을 이었다.
“이렇게 기쁨에 웃고, 눈물을 흘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
“당신들은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스스로 낮추시지 않아도 됩니다. 떳떳하게 사람 대 사람으로서, 그렇게 감사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가?”
드라가시스도 그 말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유현의 말에 그는 자신을 여태까지 옭아매던 모든 족쇄를 벗어던진 기분이었다. 어느덧 강혜림도 이쪽으로 다가왔다.
“자네들에게 대체 뭐라 감사를 표할지 모르겠군.”
드라가시스는 무언가 보상이라도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저들에게 돈 같은 거로 보상을 다 해 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 더 좋은 것을 줘야만 했다.
“그러니, 자네들에게 기사의 작위를 주겠네.”
“그건…….”
유현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기사의 작위라는 것, 심지어 정통 로마 제국의 기사 작위라는 것은 단순히 들리는 말보다 훨씬 더 큰 무게감을 갖는다.
특히 혼성계에서라면 더더욱.
“고귀하고 강인한 두 사람이여. 나 콘스탄티노스 11세 드라가시스 팔레올로고스의 이름으로, 그대들에게 무훈 기사의 작위를 수여하는 바이다.”
드라가시스는 자신의 검을 수직으로 세워 자세를 잡으며 그렇게 읊조렸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새하얀 활자가 흘러나오더니, 유현과 강혜림의 몸에 흡수됐다.
드라가시스가 씨익 웃었다.
“비록 약식이지만, 부디 고맙게 받아 줬으면 좋겠군.”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정말 과분한 선물이니까요.”
빈말이 아니었다.
기사의 작위라는 것은 일종의 칭호에 가깝다. 그리고 이러한 칭호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소유자에게 막대한 [이야기의 힘]을 선사해 준다.
기사, 그것도 전장에서 공을 세운 무훈 기사 작위는 모든 신체 능력을 올려 주며 전투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주는 힘이 있었다.
포인트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선물이었다.
“그거 다행이군.”
드라가시스는 그 말을 끝으로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활자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벗어던지고, 마침내 해방을 맞이한 사람처럼.
“부디, 그대들의 앞길에 무구한 영광이 함께하기를 빌겠네.”
“감사합니다.”
“은인들이시여, 정말로 감사합니다.”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함께 싸운 결사 대원들이 드라가시스의 뒤로 도열하며 각자 한마디씩 던졌다.
순수함을 품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은 채였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사라졌다.
하얗고 눈부시게.
하늘을 향해 올랐다.
문득.
유현의 시야가 하얗게 빛나며 보고 있는 것과 다른 풍경을 비췄다.
‘이건.’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도시였다. 아름다움이 살아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침략의 흔적이 없이 평화가 가득했다.
그 안에서 시민들이 기뻐하며 환호하고, 한 남자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종소리가 울려 퍼지며 하늘에서 승리를 축하하는 꽃잎이 천천히 내려왔다.
남자는 시민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며 마주 손을 흔들어 줬다.
언뜻 보이는 그의 옆모습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한 남자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것.
모든 것을 바쳐 가면서도 손에 쥐고자 했던 것은 모두의 행복이었다.
그는 이내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더니, 뒤를 돌아보며 유현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시야가 하얗게 점멸하고, 유현은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왔다.
옆을 보니, 강혜림도 같은 광경을 봤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아.”
강혜림은 그런 탄식을 내뱉더니 이내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황급히 소매로 눈물을 훔쳤지만,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혜림 씨.”
“모, 모르겠어요. 그냥…… 그냥 눈물이 멈추지 않아요.”
유현은 그녀를 나무라지 않았다. 그녀가 무슨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는 그도 짐작하는 바였다.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시련을 넘어섰다는 기쁨. 그럼에도 모두를 지키지 못했다는 슬픔.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것에 대한 안도감.
그 모든 것들이 복잡하게 작용을 하며 그녀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그래.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혜림 씨는 아직 컬렉터로는 초보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녀가 성장을 빠르게 했을 뿐, 실제로 그녀가 컬렉터로 활동하게 된 것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다. 그녀의 반응은 오히려 이게 정상이었다.
‘그보다.’
유현은 비어 버린 평야를 보며 중얼거렸다.
“정말로…… 성공했구나.”
성공할 거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정말 도박에 가까운 수였다. 강혜림이 모든 특성을 다 개화하고 전력을 다해야 겨우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당장 죽을 뻔한 위기를 한두 번 넘은 게 아니었다.
그래도 성공했다. 지금까지 누구도 클리어 하지 못했던 이 사상세계를 처음으로 클리어 한 것이다.
이는 전생에서조차 누구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었다.
“정말로.”
유현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푸른 하늘 위에서 반짝이는 별들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강혜림을, 그리고 유현을 보고 있었다.
[성령들이 당신들의 업적을 칭송합니다.]
[놀라운 업적! 상계의 존재들이 당신들의 이름을 입에 담습니다!]
[이는 어떠한 하계의 존재도 성공하지 못한 일입니다.]
[10,000TP를 획득합니다.]
대부분 성령은 유현과 강혜림이 이 사상세계를 클리어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다른 컬렉터들처럼 도망을 칠 거라고. 적당히 버티다가 빠질 거라고.
왜냐하면, 그게 그들에게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하계의 인간은 겁이 많고 도전을 두려워했으니까.
그래서 실패할 거라고 생각했다.
[당신들의 이름이, 혼성계에 서서히 퍼져 나갑니다.]
하지만, 성공했다. 모두의 예상을 보란 듯이 배신했다.
이루지 못할 거라는 난관을 넘어섰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멈추지 않았고, 자신의 성공을 두 손으로 거머쥐었다.
그렇기에 성령들은 그들의 이름을 외쳤다.
이것을 칭찬하지 않으면 대체 뭐에 기뻐하며 무엇에 열광한단 말인가?
멈추지 않고 한계를 뛰어넘으며 세상을 구한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바라는 영웅의 이야기였다.
[세계에 당신들의 이름이 각인됩니다.]
“하.”
전생에서는 본 적이 없는 문구에 유현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원래라면 강혜림만 봐야 할 문구였다. 하지만 이제는 유현도 그녀와 똑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유현은 그제야 자신이 정말로 무대 위에 섰다는 것을 재차 실감했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주인공의 자리에 올라섰다는 것까지도.
띠링!
[축하합니다! 사상세계를 클리어 하셨습니다!]
[누구도 이루지 못한 최초의 업적!]
[10,000TP를 획득합니다.]
[당신들은 단둘이서 이 세계에 새겨진 저주를 없앴습니다.]
[추가로 10,000TP를 획득했습니다.]
[성령들이 당신들을 칭송합니다.]
[5,000TP를 획득했습니다.]
…….
끝없이 이어지는 메시지의 행렬에 눈이 아파 올 정도였다.
자신이 언제 이만한 메시지를 받아본 적이 있던가? 이만한 포인트는?
그는 보잘것없는 엑스트라였다. 무대에 서지도 못했고, 누구도 알아주지 못했다.
죽는 그 순간마저도, 성령들은 그에게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
모두가 그를 보고 있었다.
모두가 그의 이름을 외쳤다.
텔러면서도 검을 쥐었고, 텔러면서도 싸웠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들의 칭송.
그 무수한 은총이 단비처럼 그의 몸에 스며들었다.
그 모든 것이 새롭게 태어난 그를 축하해 줬다.
* * *
지평선 너머, 세상의 끝이 서서히 바스라지 듯 사라진다.
사상세계를 클리어 했으니, 이제 이 세상을 구성하는 이야기도 힘을 잃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우수에 찬 눈빛으로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새하얀 조각으로 흩어지는 그것은 무수한 빛에 반사되는 바다를 보는 것 같았다.
어느덧 마음을 추스른 강혜림도 내 곁에 섰다. 눈시울이 살짝 붉게 물든 그녀는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우리, 결국 해냈네요.”
“네. 해냈습니다.”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해냈어요.”
“그러네요. 해냈네요.”
실없이 주고받는 대화.
하지만, 이 풍경을 두고 그 이상의 말을 주고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느덧 나와 강혜림을 제외한 주위의 모든 것들이 활자로 바뀌었다. 일부는 녹아내리듯 사라지고, 또 일부는 나와 강혜림의 몸에 흡수됐다.
우리는 계속 대화를 주고받았다.
“저희, 이제 돌이킬 수 없겠죠?”
“그렇겠죠.”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던 사상세계를 클리어 했다. 그리고 나는 텔러임에도 가호를 벗어던지고 직접 싸웠다.
우리의 행동이 지구를 넘어 혼성계에 얼마나 큰 여파를 몰고 올지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어쩌면 온갖 위험한 일에 휘말릴지도 몰랐다.
차라리 남들처럼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며 적당히 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저희는 함께 맞죠?”
내 걱정을 꿰뚫어 본 것 같은 강혜림의 말.
나는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비록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지만, 분명 그때도…… 저희는 함께 싸우겠죠.”
“그거면 된 거예요.”
풍경이 흩어진다. 경계선마저 흐릿하게 변하고 모든 것이 활자 하나로 균등하게 변했다.
세계가…… 사라진다.
세상을 구성하던 텍스트는 어느덧 내 앞에 모이더니, 한 권의 책으로 변했다.
어느덧 6번째가 된 책.
나의 6번째 시화의 결정체.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언제나 그런 말을 들어왔다
너에겐 가치가 없다고
사람은 저마다 주어진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올려다봐서는 안 되고, 손을 뻗어서도 안 된다.
세상이 그렇게 말해 왔었다.
-꿈은 크게 가져라. 그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단다.
나는 어머니의 말을 믿으며 그런 세상과 싸우고자 했다.
하지만 난 너무 약했고, 싸우기도 전에 포기하고 말았다.
'이제는'
그러지 않으리라.
그러한 나의 각오를 새기기라도 하듯 나는 책에 새로운 제목을 적어 넣었다.
기존의 제목 [검후전기]가 아닌, 이제 나도 함께 나아가는 새로운 시화의 이름을.
[싸우는 텔러와 검후의 이야기]
이것이 이 세상을 장식할, 나의 첫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