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4화
“그게 정말로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믿기지 않겠지만, 한번은 걸어 볼 만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각성을 끝낸 강혜림은 이 전과 비교해도 미안할 정도로 확실히 강해졌다. 적당히 힘을 아끼면서도 적병을 셋 이상을 동시에 날려 버리는 그 위력은 이미 중견급 컬렉터라 불러도 손색없었다.
“무엇보다 인제 와서 마땅한 다른 방도가 없는 것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끄응. 그 말이 맞네. 할 수 있는지 따지는 게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거겠지.”
“아주 무리한 작전 같겠지만, 마냥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지금 혜림 씨의 힘을 빌린다면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물론 강혜림 혼자서 저 대군을 돌파하는 것은 아무리 그래도 무리가 있다. 적어도 그녀가 저 안쪽까지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쪽에서도 호위해 줄 병력이 필요로 했다.
“때마침 저쪽도 잠시 물러나 주는군요.”
강혜림이 적들을 휘젓고 그 틈에 무너진 목책을 보강하니, 오스만 병사들도 이 이상 공세를 유지하지 않았다. 그들은 뒤로 슬쩍 물러나며 전열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계획을 실행한다면 지금이 적기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황제님.”
“어쩌고 자시고 그것 말고는 마땅한 방도가 없지 않잖은가? 이대로 있으면 서서히 말라죽을 것이 뻔하니,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는 것이 맞겠지.”
드라가시스는 이미 답을 내린 것 같았다.
“비록 실낱같은 희망이지만, 지금까지 없던 희망이었네. 자네들은 모르겠지만, 내게는 이 한 줄기의 빛이 태양보다도 더 밝게 느껴진다네.”
“그렇다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인원을 뽑아야겠군요. 너무 많아도 안 되고, 그렇다고 적어도 안 됩니다. 실력도 출중해야만 하죠.”
어느덧 우리의 주위로 기사들과 병사들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지쳐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눈빛이 죽어 있는 이가 없었다.
“병력은 300명 정도 필요합니다.”
“300명인가.”
드라가시스는 무거운 표정으로 병사들을 살폈다. 300명은 적은 숫자가 아니다. 하지만 10만이 넘는 대군을 상대로 돌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이기도 했다.
여기에 참여한다면 절대 살아 돌아올 수 없다. 사실상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승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연료로 불태우는 것이다.
고민하는 것도 당연하다. 지금 그가 하려는 명령은 사실상 나가서 죽으라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백성을 위하는 성군인 드라가시스가, 그 말을 섣불리 꺼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300명의 목숨은 절대로 가볍지 않다.
“본인이 말하기 힘드시다면, 제가 대신 말하겠습니다.”
“아니. 됐네. 나는 그렇게까지 염치가 없지는 않아. 이건 분명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겠지.”
드라가시스는 어느 정도 마음을 다잡았는지, 결연한 의지를 품은 채 병사들의 앞에 섰다.
조금 망설이던 그는 입술을 뗐다.
“제군들. 오늘 나는 그대들에게 평생 갚지 못할 막대한 빚을 졌네. 그것은 나의 목숨이요, 내 백성들의 안위요, 내 국가의 위신이었네. 그대들은 최선을 다해 이 보잘것없는 제국을 지켜줬지.”
평소에 마음속에 꾹 담아 놓았던 말들을 하나씩 추려내며.
그는 말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말했었지. 신께서 우릴 도우신다고. 반드시 막을 수 있다고. 하지만 나는 아네. 신께서는 우릴 돕지 않아. 이 도시를 지키는 것은 이 땅을 지키는 것은 바로 우리네.”
나는 좌중을 쓰윽 훑어봤다. 모두가 드라가시스의 연설에 집중했다.
어느덧 상황을 정리한 강혜림이 내 곁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대들이…… 지금까지 이 도시를 지켜 준 것이네.”
그러니, 라며 드라가시스가 말을 이었다.
“염치가 없지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부탁하겠네.”
그는 로마의 정통한 황제이며 이 병사들의 지휘관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명령이 아닌 부탁을 입에 담았다.
“부디 마지막까지 우리의 고향을 지키기 위해 힘을 보태 줄 수 있겠는가? 오늘 나는, 이 지긋지긋한 굴레를 끊기 위해 몸소 나설 생각이네. 나와 함께 할 자들은 이곳에 남아 주게. 이건 명령도 강요도 아니네. 살고 싶다면, 하기 싫다면 하지 않아도 좋다네. 그대들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네.”
아무도 나서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투.
그럴 것이다. 그는 분명 혼자서라도 적진을 향해 돌진을 감행할 각오를 다졌을 것이다.
“나와…… 함께 가 줄 자들이 있는가?”
그 말을 들은 병사들의 사이로 잠시 소요가 퍼져 나갔다. 웅성거림은 파문을 그리며 멀어져 갔고, 이내 병사들은 동시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행동하는 자들이 있었다.
철그럭. 철그럭.
갑옷을 입은 몇몇 병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곳곳에 상처를 입고, 당장 서 있는 것이 고작인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눈빛만큼은 살아 있었다.
“…….”
“…….”
뿐만이 아니었다. 도열해 있던 대부분 병사가 무기를 쥐고 앞으로 나섰다. 갑옷을 걸친 기사들도, 돈을 받으러 온 용병들도 전부.
모두가 황제의 부탁에 응해 최후의 작전에 지원한 것이다.
그 광경을 본 드라가시스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고맙네. 정말로…… 고마워.”
“그렇다면 이걸로 인원은 꾸려졌군요.”
애초 예상했던 것보다 지원자가 훨씬 더 많았다. 오히려 여기서 추려 내야 할 지경이었다.
나는 이쪽을 보는 병사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 갑시다. 살아남으러.”
* * *
오스만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전장을 살폈다.
성벽이 무너졌고, 그곳으로 병력을 투입한 것이 조금 전. 하지만 로마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상황은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드라가시스. 그대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군.”
메흐메트 2세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이미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이게 그의 삶의 목적이고, 그가 반드시 이루고자 하던 대업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성을 공략했다.
다만.
‘이번에는 뭔가 다르다.’
언제나 성벽이 무너지는 순간, 승리는 오스만의 것으로 돌아왔다. 순식간에 적들의 수비는 뚫렸고 그의 숙적인 드라가시스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성벽이 뚫렸음에도 쉽사리 공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조력자가 남아 있었다는 것인가?”
그도 안다. 신의 사자라 불리는 용병단이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들은 가진 힘이 대단한 것에 비해 너무나도 겁이 많아서, 위험하다고 생각이 들면 도망치기 바빴다.
아무래도 이번 조력자는 다른 겁쟁이들과 다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변하는 건 없다.”
메흐메트 2세는 곧바로 공격 명령을 내리려고 했다. 그 순간 적진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잡혔다.
목책을 쌓아 무너진 성벽을 메꿔야 할 적들이 오히려 목책을 치우며 길을 트기 시작한 것이었다.
‘미치기라도 한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적진에서 갑옷을 갖춰 입은 기병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메흐메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생각이냐. 나의 숙적이여.’
* * *
나와 강혜림은 3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성벽의 앞에 섰다. 우리들의 곁에는 총사령관인 드라가시스도 함께했다.
전열을 정비하던 적들이 우릴 보며 당황해하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 멀리 떨어진 막사 앞에 있는 적들의 수장까지.
[성령들이 숨을 죽이고 지금 상황을 지켜봅니다.]
[대다수 성령이 부디 승리하길 기원합니다.]
“유현 씨. 정말로 가능한 거겠죠?”
“인제 와서 겁이라도 먹은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걱정 마세요. 혜림 씨도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이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고. 지금 혜림 씨의 힘이라면, 길만 터 줄 경우 분명 적장의 목을 벨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을 위해 무려 300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이 작전에 자원했다.
강혜림이 걱정하는 게 뭔지 안다. 죽음을 각오한 저 병사들에게 나름의 죄책감을 지니고 있겠지.
“혜림 씨. 저들은 자신의 의지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조국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그들을 동정하지 마세요. 오히려 저들에게 모욕이나 다름없습니다.”
“저는…….”
“정말로 미안하고 죄송하다면, 반드시 성공하세요.”
내가 진지하게 말하자 강혜림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제 이쪽도 전력을 다할 차례다.
드라가시스에게 신호를 보내자 말 위에 탄 그가 검을 뽑아 세웠다.
“전원!”
그대로 검을 휘두르듯 내지르며, 가슴속에 담긴 각오를 끌어모아 웅혼한 외침을 토했다.
“돌격!!!!!!”
300인의 결사대가 그대로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말발굽이 땅을 울렸다. 적들이 대응에 나섰다. 정면에 장창을 쥔 보병들이, 후방에서는 활을 든 궁병들이 섰다.
궁병이 시위를 당기고, 활을 쐈다.
촤자자작!
푸른 하늘을 뒤덮는 우레와 같은 화살의 세례들. 순간이지만 태양 빛마저 가리는 화살 비었다.
“온다!”
“막아라!”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보고 모두 방패를 치켜들었다. 직후 방패를 타고 묵직한 충격이 흘렸다.
티팅!!
히이잉!
으아악!
쏟아지는 화살의 속에서 모두가 무사한 건 아니었다. 화살의 세례에 운이 없는 몇몇은 그대로 낙마하거나 뒤처졌다.
“돌아보지 마! 멈추지 말고 달려!”
“길을 열어라!”
그러는 사이에도 말은 멈추지 않았다. 결사단은 이를 악물고 달리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적들이 재차 화살을 쏘려 했지만, 멈추지 않고 달린 덕분에 적진에 다다를 수 있었다.
“뚫고 간다!”
“뒤처지지 마라!”
콰드득!
선두가 적들과 충돌했다. 갑옷을 입은 말들이 적진을 꿰뚫고 마구잡이로 짓밟았다. 전열을 채 갖추지 못한 오스만 방어선은 쉽게 허물어졌다. 전선에 크게 구멍이 뚫렸고, 우린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적들도 마냥 당하지만 않고 반격을 가했다.
“막아라! 놈들을 막아!”
“술탄을 지켜라!”
사방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시야가 빠르게 흘러간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공격을 가하는 결사 대원들. 쓰러져 가는 적들. 그 사이로 반격을 꾀하는 자들.
“하아. 하아.”
완전히 허를 찌르는 기습이었지만, 병력의 차이가 압도적이었다.
그렇게 내 시야 속에서, 결사대가 쓰러져 갔다.
하나씩. 하나씩.
생명이 꺼져 갔다.
으득!
강혜림이 이를 악무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뭐라고 대답해 줄 수 없었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희생을 발판 삼아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 전부였다.
말이 입에 게거품을 물며 달렸다.
“가십시오!”
“여긴 저희가 막겠습니다!”
300이 넘는 기병의 위력은 뛰어났다. 하지만 적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쐐기 형태로 돌진하고는 있지만, 나아갈 때마다 이쪽의 전력이 바깥부터 깎여 나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결사 대원들은 몸을 날려서라도 적들을 붙들고, 자신을 희생했다.
전부 중심에 있는 나와 강혜림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을 알기에.
그들의 각오를 절대 헛되이 할 수 없기에.
우리는 멈출 수 없었다.
“시파히다!”
“놈들이 나섰다!”
적들도 우리가 무엇을 노리는지 깨달았다. 그래서 녀석들도 최후의 카드를 꺼냈다.
오스만 최고의 정예 보병인 예니체리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기병 시파히가 말을 타고 나선 것이다.
“우리가 뚫겠습니다!”
“목숨을 바쳐!”
호위 기사들이 그렇게 외치며 정면으로 나섰다.
콰과광!
기병과 기병이 충돌했다. 병사와 병사, 말과 말이 부딪치고 엉키고 쓰러졌다. 곳곳에 함성과 비명이 난무했다.
그 탓인지 이쪽의 돌진에 제동이 걸렸다. 적들은 그 틈에 우리를 포위하려 들었다.
[성령들이 가슴을 졸입니다.]
[성령들이 숨을 삼킵니다.]
“말을 버려라!”
“거의 다 왔다! 이대로 밀어붙여!”
우리는 말에서 내렸다. 적들이 앞을 막았지만, 나와 강혜림은 압도적인 무력으로 놈들을 돌파했다.
“술탄을 지켜라!”
“놈들을 막아!”
적들은 사력을 다해 우리를 막았다. 처음 공성전 때와는 전혀 다른 그림이 펼쳐졌다.
이제는 우리가 뚫으려는 자들이고, 저들이 막으려는 자들이 됐다.
병장기가 충돌하고 피가 튀었다.
그럴 때마다 결사대가 하나둘씩 죽어 나갔다.
“가세요.”
쓰러진 자들은 우리의 발목을 붙잡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의 등을 떠밀며, 대신 적들에게 집어삼켜졌다.
조금 전까지 드라가시스와 농담을 따먹던 호위 기사 하나가, 적들의 창칼에 찔리면서도 우릴 향해 웃어 보였다.
“크흑!”
“제길!”
일부 병사들이 눈물을 삼켰다. 동료이자 친우였던 자들의 죽음을 애도할 여유조차 그들에게 없었다.
강혜림이 뒤를 돌아보려고 하는 순간, 내가 일갈했다.
“뒤돌아보지 마세요! 혜림 씨! 앞만 보고 달리는 겁니다!”
나는 예니체리들을 베며 외쳤다. 이마를 타고 땀이 흘렀다. 숨도 차올랐다. 벌써 몇이나 벤 거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강혜림은 이를 악물고 달리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이 끔찍한 난전 속에서도 그녀의 무위를 빛을 발했다.
[고려시대 소드마스터]
장난스러운 이름과 다르게 그 힘은 진짜다. 특히 척준경의 특성은 이런 대군을 맨몸으로 돌파하는 상황에서 더욱 효과가 뛰어났다.
여진의 악몽이자, 혼자서 수천의 군세를 뚫어 냈던 고려시대 최강의 검이.
시대와 세계를 뛰어넘어 이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마녀를 막아라!”
적들도 강혜림이 제일 위험하다는 걸 알고 그녀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그에 질세라 결사대가 몸을 던지며 그들을 막았다. 나도, 드라가시스도 마찬가지였다.
“성녀님을 지켜라!”
양 진영이 거칠게 뒤엉켰다. 나는 혼란 속에서 오른손에는 검을, 왼손에는 창을 쥐고 무아지경으로 휘둘렀다. 창으로 적들의 급소를 찌르고, 검으로 적의 목을 잘랐다.
내게 다가오는 적들이 순식간에 시체가 되어 하나둘 쓰러졌다.
‘괴로워.’
전신의 힘을 계속 쥐어짜 냈다. 한시도 쉬지 않고 풀 악셀로 전력 질주를 멈추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부족했다. 적들은 아직도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다. 그만큼 나도 최선을 다해 싸울 수밖에 없었다.
‘더. 더. 더.’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더 많이.
하나의 적을 쓰러뜨리면 그만큼 아군의 부담이 줄어든다. 그리고 강혜림이 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 싸움을 끝낼 최후의 열쇠가.
그러니 계속 싸웠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흐르는 땀이 눈을 아프게 찔러도.
“달려!!!”
그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더는 멈출 수 없었다.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저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무엇을 위해?
‘살기 위해.’
살리기 위해.
이것은 이쪽의 모든 것을 건 최후의 돌격.
쓰러져 가는 자들을 향한 진혼가조차 허락하지 않는, 무자비한 행군이었다.
와아아아아!
적들은 끝이 없었지만, 희망은 있었다. 드디어 고지가 보였다.
적들의 수장인 메흐메트 2세가, 멀지 않은 곳에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 멀리서 점으로 보이던 그가 어느덧 육안으로 표정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까지 좁혀졌다.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모습을 드러냈다.
만용인가 아니면 도발인가. 어쩌면 우리가 이길 수 없다는 걸 확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혜림 씨!”
“알겠어요!”
그사이에 낀 적들만 수백이었지만, 그래도 나와 강혜림은 정면에 섰다.
적들이 몰려왔다. 그들의 무수한 창과 칼이 우리의 목숨을 노렸다.
“후욱.”
숨이 차올랐다. 과도한 운동량에 호흡이 딸렸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래도 쓰러지지 않고 정신을 더욱 끌어모았다.
한순간의 방심이 죽음에 직결하는 외줄 타기.
멈추는 순간 죽는다.
“비켜어어어!!”
강혜림이 검을 휘둘렀다. 검 끝에 실린 검기가 폭탄처럼 터져 나왔다. 땅이 뒤집히고 적들이 쓰러졌다. 그 빈틈을 메꾸기 전에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병장기를 뚫고 무리하게 파고들어서일까? 어깨에 격통이 내달렸다. 뺨에도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텍스트로 화해 사라졌다.
“유현 씨!”
“저는 괜찮으니까, 뒤돌아보지 말고 달리세요!!”
강혜림이 내 상처를 보고 놀랐지만, 이 정도는 상처 축에도 못 꼈다.
이쪽이 1초를 망설일 때마다 결사 대원 1명의 목숨이 사라진다.
우리는 그 무거운 생명의 짐까지 등에 업고 있었다.
비록 만들어진 존재라 할지라도,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절대 뒤돌아봐서는 안 됐다.
“거의 다 왔습니다!”
술탄과의 거리는 이제 50m
나는 손에 쥔 창을 고쳐 쥐었다.
“으랴압!”
그리고 힘을 줘, 그대로 투척했다.
창은 허공을 일직선으로 꿰뚫으며 술탄을 향해 날아갔다. 적들이 그 광경에 아연해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채앵!
그의 곁에 선 호위가 검으로 창을 쳐냈다. 술탄은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이쪽을 노려봤다.
나는 그런 놈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지금입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방패를 주워들고 비스듬하게 세웠다. 이쪽을 향해 달려오던 강혜림이 방패를 밟았다. 그녀는 내가 방패를 밀어내는 힘을 이용해 적진을 향해 높게 도약했다.
물론, 그래도 부족하다.
아무리 각성을 했다 해도 50m가 넘는 거리를 한 번에 뛰어넘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촤아악!
강혜림의 등 뒤로 새하얀 날개가 펼쳐졌다.
짧지만 하늘을 날 수 있게 해 주는 [이카로스의 날개]였다. 아직 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저 거리를 빠르게 돌파하는 거야 누구라도 가능할 것이었다.
“마, 막아라! 어서 막아! 활을 쏘란 말이다!”
새하얀 날개를 펼친 그녀는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보였다. 적들은 입을 쩍 벌렸다. 성령들도 경악이 담긴 메시지를 남발했다.
강혜림이 당황하는 적들의 머리 위를 가로질렀다. 누군가 밑에서 창을 찔러 왔지만, 그녀는 곡예에 가까운 회피 기동을 선보이며 전부 피해 냈다.
어느덧 강혜림은 메흐메트의 지척까지 다가갔다. 저쪽도 뒤늦게 검을 뽑아 휘두르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쪽이 훨씬 더 빨랐다.
“으아아아아!!”
최대 가속도에 도달한 강혜림이 목이 찢어지라 고함을 내질렀다. 열정, 또는 광기가 함께 섞인 무언가였다.
칼날에 담긴 새하얀 검기가 순간이지만, 엄청난 기세로 치솟아 올랐다.
나는 홀린 듯 그녀의 검에 시선을 빼앗겼다.
백색의 검기.
저것이야말로 그녀가 검후임을 증명하던 최고의 비기.
파아앗!
검이 포효를 내지르며 휘둘러졌다.
그것은 공간마저 가르며, 검과 방패마저 뚫고 그대로 메흐메트 2세의 가슴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