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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33화 (33/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33화

인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항상 주인공의 자리에 서고 싶었다.

어렸을 때 품었던 꿈, 그것을 이루지 못했다는 후회, 어머니가 내게 심어 준 희망.

그런 복잡한 것들이 얽히고 섞이며 만들어진 심지에 불을 붙인 것은 최도윤의 한마디였다.

-너에겐 가망이 없다.

그때의 나는 그 말이 사실이라 생각했다. 나는 별 볼 일 없는 놈이었고, 그렇기에 일찍이 내 꿈을 포기하고 최도윤의 아래로 들어갔다.

그렇게 살다 죽었고.

그렇게 다시 태어났다.

‘이제는 달라.’

강혜림을 보고 깨달았다. 그녀는 결국 마지막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다. 죽음을 앞두고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당당하고 아름답게.

그러니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성령들이 이게 무슨 일인지 당황스러워합니다.]

[대다수 성령이 미쳤냐고 의문을 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성령들이 시끄럽게 떠들었다.

나도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해한다.

그들의 세계에,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계에 텔러는 언제나 관조자였으니까.

텔러는 컬렉터처럼 포인트가 필요로 했지만, 절대 컬렉터처럼 굴지는 않았다. 언제나 뒤에 서서, 단지 지켜보는 것만으로 그들은 충분히 포인트를 벌 수 있었다.

직접 행동하지 않냐고 묻는다면 분명 이렇게 대답하리라.

-우리는 컬렉터라는 주인공을 만들어 주는 그림자다. 그런 우리야말로 또 다른 주인공이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구차하고 허울 좋은 변명일 뿐이었다.

뒤에서 받쳐 주는 게 좋아? 그림자로 만족해? 다른 사람이 빛을 받게 만드는 거로 충분해?

웃기는 소리다. 그러면서 자신의 명성에 신경을 쓰는 텔러들의 행동은 얼마나 모순이란 말인가?

나는 다르다.

이제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하는 것은 질렸다.

정말로 빛나고 싶다면, 정말로 컬렉터를 위한다면, 정말로 자신의 꿈을 노린다면.

‘직접 무기를 쥐고 싸워야 한다.’

이 세상이 한 권의 책이고, 정말로 우리가 그 안에 담긴 주인공이라면.

이 이야기의 페이지를 넘기는 것은 절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이어야만 하니까.

“서, 설마 지금 가호를 포기하신 거예요? 미쳤어요?! 그러다 죽으면 어쩌시려고!”

텔러에게 있어서 가호란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그들이 어떠한 위험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게 만들어 주는 최강의 방패. 나는 그것을 스스로 벗어던진 것이다.

평소에 화를 내지 않는 그녀는 이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화가 난 것 같았다.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혜림 씨가 고집을 부린 것처럼 말이죠.”

“…….”

예전의 나는 직접 싸우지 않았다. 그저 한 걸음 물러나서, 어두운 뒤편에서 스테이지를 부러움에 찬 채 보기만 했다.

비록 눈부신 무대에 서지 않았다고 해도, 군중의 환호를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충분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건 그저 추악한 자기 위로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난 무대에 서고 싶었다. 모두의 환호를 받고 싶었다.

재능이 없어도, 분수에 맞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최도윤이나 강혜림과 같은 찬란한 주인공이.

“혜림 씨가 하셨던 것처럼, 저도 각오를 다졌을 뿐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무대 위에 오른다.

내 모든 가호와 권위, 불안감을 떨쳐 내고서.

영광을 거머쥐기 위해.

“관객은 천 명 오버. 이름 없는 무명 배우의 첫 출정식치고는, 꽤 훌륭한 무대이지 않습니까?”

“하, 하하…….”

내 장난스러운 말에 강혜림은 어깨에 힘을 빼더니, 결국 작은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눈가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닦아 냈다.

애써 강한 척했지만, 그녀도 사실 죽음의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 내진 못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녀는 각오를 마친 듯 한결 가벼운 표정을 지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부탁해요.”

강혜림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검에 집중했다. 이전과는 다르게 진중한 태도였다. 무언가 깨달은 게 있다는 소리.

그녀의 몸에서 새하얀 가루와 같은 텍스트가 떠오르더니, 이내 정립되며 완전한 문장으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그녀의 몸에 흡수됐다.

지닌 글자가, 이야기로 바뀌는 과정.

마지막 각성의 징조였다.

“알겠습니다.”

스릉.

나는 검을 거머쥐었다. 급하게 [차원 상점]에서 구매한 적당한 수준의 검이었다. 내가 직접 산 거라서 수수료 이득을 챙길 수도 없는 완벽한 지출이었다.

지금부터 나는 강혜림이 완전히 각성하기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나 혼자만의 힘으로.

시스템이 내리는 것이 아닌, 스스로가 선택한 시련이었다.

“차원 상점 개방.”

내 앞에 온갖 차원에서 파는 물건의 리스트가 펼쳐졌다.

[보유 포인트: 83,280TP]

지금까지 쌓아 왔던 포인트들. 정사원급 텔러로는 도저히 거머쥐기 힘든 금액이지만.

나는 과감하게 투자를 택했다.

“전투에 관련된 이야기. 구입.”

[분검술을 구매합니다.]

[경극검을 구매합니다.]

[섬전보법을 구매합니다.]

…….

[12,300TP가 소모됩니다.]

사람들은 말한다. 텔러는 언제나 지켜보는 자이며, 그들은 현장에서 직접 뛰지 않는다고.

그리고 텔러들도 말한다. 우리는 굳이 현장에서 뛸 필요가 없다고.

[기감확장을 구매합니다.]

[라트란 용병검술을 구매합니다.]

[흑철창술을 구매합니다.]

[웨폰 체인징을 구매합니다.]

…….

[7,800TP가 소모됩니다.]

텔러는 싸우지 않아도 되는가? 반드시 가호를 지닌 채,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가?

그러라는 법은 없다. 텔러가 가호를 반드시 지녀야 한다는 규칙도 없고, 그들이 직접 컬렉터들과 함께 싸우지 말라는 규칙도 없다.

단지 모두가 이러한 것들을 당연하게만 여겨 왔을 뿐이다.

텔러는 싸우지 않는다고. 싸우지 않을 거라고.

[근접 격투술을 구매합니다.]

[신체 강화를 구매합니다.]

[순간가속을 구매합니다.]

[집중 강화를 구매합니다.]

…….

[8,200TP가 소모됩니다.]

그래서다. 내가 직접 싸우고자 마음을 먹은 것은.

모두가 하지 않았던,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이 방식으로.

나는 무대에 오른다.

[4,320TP가 소모됩니다.]

모아 두었던 포인트가 사라진다. 포인트로 전환된 이야기가 나의 몸에 흡수됐다.

[6,400TP가 소모됩니다.]

흡수된 이야기가 나의 존재를 더욱 공고히 했다.

[3,200TP가 소모됩니다.]

성령들은 숨을 죽인 채, 이 광경을 지켜봤다.

[보유 포인트: 2,300TP]

그렇게 남은 것은 고작 2,300. 무려 8만 이상이나 되는 막대한 포인트를 소모했다.

소모한 포인트로 하급 이야기를 대량으로 구매해서 내 몸에 꾹꾹 눌러 담았다.

‘전생의 모습과 동시에 그때의 힘도 함께 가졌으면 좋았겠지만, 그것까지는 욕심이겠지.’

하지만 지금도 나쁘진 않았다. 비록 피 같은 포인트가 날아갔지만, 그거야 나중에 더 많이 벌면 그만이었으니까.

지금은 싸울 차례다.

“마녀를 죽여라!”

“저년만 쓰러뜨리면 승기는 우리가 잡을 수 있다!”

이쪽을 노리고 달려드는 병사들. 나는 그들을 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몸속에 요동치는 이야기들이 당장이라도 자신을 사용해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나는 발걸음을 내디디며 손에 쥔 검을 뻗었다. 무덤덤한 눈빛으로, 그대로 오스만 병사들을 베어 넘겼다.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강하게.

검을 내질렀다.

순식간에 내 주위로 시체가 쌓여 갔다.

“무, 무슨……!”

“이, 이 자식은 대체 뭐야!”

“놈을 죽여!”

강혜림을 향한 길목을 막아선 탓인가, 적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하지만 나는 주눅 드는 일이 없이 자세를 잡았다. 가장 먼저 달려드는 녀석의 검을 쳐내고, 곧바로 반격해 목을 날렸다.

서걱!

머리를 잃은 빈 몸뚱이가 바닥에 쓰러졌다. 피 냄새와 함께 전장의 뜨거운 열기가 내 몸을 휩쓸었다. 가호가 있을 때는 절대로 느끼지 못한 감각이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감각.

[대다수 성령이 당신의 무위에 경악합니다.]

[일부 성령들이 당신이 정말 텔러인지 의문을 품습니다.]

내가 보여 주는 광경에 성령들이 기함을 토했다. 나는 거기에 반응하지 않았다. 쉬지 않고 움직이며 다가오는 적들을 하나둘 처리했다.

때로는 검을, 때로는 주먹과 발길질을, 때로는 바닥에 널린 다른 병장기를 이용해서.

하나의 방식에 구애되지 않는 다양한 공격 방법. 이게 나의 방식이었다.

“뭣들 해! 한 놈이잖아!”

“어서 뚫어!”

육체적인 능력은 전생과 비교하면 모자랐지만, 경험은 여전히 내게 남아 있었다.

싸우는 방법, 전투에 관한 지식, 쌓아온 기교.

상점에서 구매한 이야기가 아닌, 나 강유현이라는 존재가 지니고 있던 것.

그것이 시대를 뛰어넘어 고스란히 터져 나왔다.

적들의 허를 찌르고 흐름을 틀어막으며, 혼란을 유도한다. 때로는 치고 빠지고, 때로는 과감하게 파고들고.

적들은 그런 내 싸움 방식에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했다.

“젠장! 저 녀석은 대체 뭐란 말이냐! 대체 왜 혼자인데 뚫지 못하는 거냐!”

“그거야 내가 강하니까.”

푸욱!

분노에 차 지껄이는 녀석의 입가에 검을 박아 넣는다.

무르다. 너희들은 내가 종말 이후에 걸어왔던 시련과 비교하면, 너무 하품이 나올 정도로 물러.

‘하지만 확실히 힘에 부치긴 하는군.’

쌩쌩한 상태에서 곧바로 투입되어 벌써 40이 넘는 적들을 베어 넘겼다. 그중에는 일반 보병이 아닌, 십인장이나 백인대장도 섞여 있었다.

전투가 지속될수록 내 검의 예기는 무뎌지고 검격의 무게감이 사라졌다. 가호를 포기한 육신이 현실의 물리 법칙이라는 저항에 부딪히며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놈이 지쳤다! 이때 쓰러뜨려!”

오스만의 병사들이 살기를 풀풀 날리며 내게 접근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조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내 목적은 적들을 전부 쓰러뜨리는 게 아니었다.

시간을 끄는 거였지.

나는 뒤로 살짝 물러나며 물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버텼죠?”

“네. 차고 넘쳐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함께, 나의 어깨너머로 검풍이 터져 나오며 전방의 적들을 휩쓸었다.

콰과광!

폭음과 함께 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그 모든 것은 강혜림이 일격에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이제는 제가 다시 나설 차례니까요.”

강혜림이 내 곁에 섰다.

“휘유.”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계약자 강혜림이 신검합일(身劍合一)을 완전히 각성합니다.]

[계약자 강혜림이 창천검로(蒼天劍路)를 완전히 각성합니다.]

‘그야말로 무식하게 강해졌군.’

강혜림은 [고려시대 소드마스터]에 이어 미각성이었던 나머지 두 특성의 개화를 끝냈다.

그녀가 지닌 주인공급 특성 3개의 완전 개방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는, 지금의 광경이 증명하고 있었다.

“크아아악!”

“이럴 수가! 저 마녀는 지친 게 아니었단 말인가!”

강혜림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적게는 셋, 많게는 일곱이 넘는 적병들이 휩쓸렸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검풍에 닿은 갑옷이 베이고, 피부가 갈라지며 피를 흩뿌렸다.

기세등등하게 달려들던 오스만 병사들이 겁에 질리고, 전열의 곳곳에 구멍이 뚫렸다.

그 빈틈에 로마 수비병들이 나섰다.

“지금이 기회다! 목책을 세워라!”

“놈들이 다시는 못 들어오게 막아!”

어느덧 우리의 곁의 사령관이자 로마 황제인 드라가시스가 다가왔다. 그는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이게 대체……. 자네는 또 누구고?”

“당신을 돕기 위한 지원군입니다. 혜림 씨의 지인이죠.”

드라가시스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눈치였다. 갑자기 허공에서 사람이 생겨난 것은 둘째치고서, 내가 적들을 막아서는 사이 강혜림이 조금 전보다 훨씬 강해진 것이 이해가 가지 않을 거다.

“그대들은…… 정말 신께서 보낸 사자인가? 아니.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겠지. 고맙네. 덕분에 다시 놈들을 막아 낼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게 됐어.”

“그렇겠죠. 하지만 결국 이건 미봉책일 뿐입니다.”

나는 이미 전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읽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알고 있었다.

“당장은 막겠지만, 저쪽에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밀어붙인다면 속수무책으로 뚫릴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성벽은 더 이상 무용지물이 되겠죠. 악에 받친 놈들이 과연 시가지에 들어가 어떤 짓을 벌일지는…… 황제님도 아시리라 믿습니다.”

내 말에 드라가시스의 안색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실제 역사에서도 그랬다. 콘스탄티노풀을 함락시킨 오스만은 3일 동안 온갖 약탈을 일삼았었다.

저 성벽 너머에 겁에 질려 있는 백성들이 잔악한 적군들에게 어떤 꼴을 당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그렇기에 필사적으로 이곳을 지키는 것이었다.

“나도 알고는 있네. 하지만 방도가 없네. 애초에 병력이…….”

“아니요. 방법은 있습니다.”

방법은 있다. 정말 성공 확률이 희박해서 사실상 도박에 가까운 수였지만, 그것은 강혜림이 각성하기 이전의 경우였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전쟁이라면 분명 놈들이 물러날 때까지 버텨야겠죠. 이미 이질감을 느낀 황제님이라면 아실 텐데요? 이곳의 전쟁은 보통의 방법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그건 그렇네만.”

“여기서 저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납니다.”

나는 검을 들어 올려 적군의 막사 너머를 가리켰다.

“역으로 이쪽에서 적의 머리를 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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