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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32화 (32/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32화

전선이 붕괴한다.

가까스로 쌓았던 목책이 무너지고, 그 틈새를 비집고 적들의 창칼이 밀려들어 왔다.

방패를 든 로마 보병들이 어떻게든 몸을 던지듯 막아서려고 했지만, 숫자의 폭력 앞에서는 무력했다.

“전선이 밀린다! 모두 후퇴……!”

“안 돼! 여기가 뚫리면 끝이야!”

“젠장! 그럼, 어떡하라고!”

절망이 전염병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드라가시스는 안타까움에서 나오는 한탄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안 되는 건가?”

어쩌면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희망의 빛은 이 지옥을 밝히기에는 너무나도 작고 미약했다. 강혜림은 분명 강했고 기대 이상으로 활약했지만, 그녀의 도움만으로도 저 많은 적을 감당하지 못했다.

강혜림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검을 멈출 수 없었다.

‘막아야 해. 단 하나라도 더!’

이미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고, 먼지와 땀이 뒤섞여 그녀의 꼴은 엉망이었다.

당장이라도 주저앉아서 쉬고 싶은 생각이 가득했지만, 그녀의 몸은 통제에서 벗어난 것 마냥 검을 휘둘렀다.

‘대체 왜?’

모든 것이 사라진 것 같은 무아지경의 속에서 그녀는 스스로 물었다.

어째서 포기하지 않지? 왜 멈추지 않는 거야?

그 질문에 강혜림은 대답을 내릴 수 없었다.

‘모르겠어.’

이렇게까지 싸워야 하는 걸까?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인데, 그냥 적당히 빠지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만둘 수 없었다.

여기서 멈추고 도망치는 순간, 자신이 지니고 있던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목책의 일부가 무너졌다.

강혜림의 안광이 빛나며 그녀는 곧바로 뚫린 곳으로 몸을 날렸다. 이제는 극의에 이른 검격이 적들을 무참히 쓸어 버렸다.

하지만, 적들의 수는 베도 베도 끝이 없었다.

“크윽!”

결국, 무리로 한계에 봉착했다. 강혜림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 하던 것을 가까스로 견뎌 냈다. 그러나 그사이에 날아오는 적병의 창은 제대로 피할 수 없었다.

날카로운 창끝이 그녀의 왼쪽 어깨를 찔렀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화끈한 통증 때문에 왼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성녀시여!”

“모두 은인을 지켜라!”

드라가시스의 검이 강혜림을 찌른 병사의 목을 꿰뚫었다.

“이보게. 괜찮은가?”

“네. 심각한 수준은 아닙니다. 하지만…….”

강혜림은 떨리는 왼손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당장 [회복 이야기]가 담긴 포션을 발라야 했지만, 당장에 회복할 상처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가 전선에서 자리를 비울수록 이쪽의 피해는 커진다.

무엇보다 적들은 이쪽에 조금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았다.

“뚫렸다! 놈들을 죽여!”

“크하하핫! 모두 약탈하고 쓸어 버려라!”

파도처럼 밀려오는 오스만 병사들을 보며 드라가시스가 직접 나섰지만, 그로서도 역부족이었다. 적병을 베어 넘길수록 그의 몸은 무겁게 변했고, 어느덧 일반 병사와 힘겨루기에서도 밀리기 시작했다.

“크윽!”

“주군!”

“빌어먹을 오스만 놈들! 황제님을 지켜라!”

병사들도 지쳐서 그렇다 할 전력이 되지 못했다. 새로 들어오는 적들은 체력을 비축해 쌩쌩한 반면, 이쪽은 이미 탈진 상태에 가까웠으니까.

“크악!”

“크르륵!”

일방적인 유린이 시작됐다. 병사들이 죽어 나가고, 호위 기사 중 몇몇은 한꺼번에 여럿의 적을 상대하다 전신이 난도질당했다.

강혜림은 떨리는 시선으로 그 광경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끝이다.

이미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녀는 한계였다.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어.’

자만이었다.

지금까지 남들이 하지 못했던 일들을 혼자서 해냈다는 자만. 앞으로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자만. 그것이 그녀에게 막연히 잘 될 거라는 헛된 생각을 심었다.

‘나는…… 어쩌면 좋지?’

* * *

상황은 나쁘게 흘러갔다. 아니, 굳이 표현하면 최악이라 해도 좋았다.

강혜림의 필사적인 분발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해진 흐름은 피할 수 없었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죽어 나가는 환상체 병사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대다수 성령이 안타까워합니다.]

[일부 성령들이 강혜림의 태도에 답답해합니다.]

[소수 성령이 그녀의 행동에 손가락질합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성령들의 반응도 문제였다.

대부분은 강혜림이 열심히 노력했다는 걸 알기에 안타까워했지만, 일부는 그녀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럴 거면 왜 남았냐, 결국 이쪽도 다른 컬렉터와 별 다를 바가 없지 않으냐.

당연하게 기존에 내 서재에 머물던 구독령들과 새로 들어온 성령 간에 언쟁까지 오가기 시작했다.

[100TP 후원!]

[아니, 하지도 못할 거면 대체 왜 한 거임? 진짜 고구마처럼 답답하네.]

[100TP 후원!]

[여기까지 한 걸 잘했다. 칭찬해야지, 좀만 막힌다고 고구마타령 징징. 꼬우면 딴 서재 가세요.]

[100TP 후원!]

[검후니 뭐니 최근 바짝 뜬다고 해서 봤더니, 결국 실망만 하고 가네요.]

[100TP 후원!]

[갈거면 그냥 나가ㅋㅋ]

졸지에는 직접 메시지로 강혜림을 응원하는 게 아닌 저들끼리 싸우는 지경까지 왔다.

내가 어떻게든 말리고 중재하려고 해도 시청령이 1천 명이 넘다 보니, 전부 다 커버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제길.’

메시지 창이 더러워지고, 당연히 거기에 질려서 일부 성령들이 떠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당장에 이것을 제대로 다잡지 못한다면, 꽤 많은 손님이 떨어질 판이었다.

이럴 때 저들이 찍소리도 못할 정도로 강한 누군가가 꽉 잡아 주면 좋을 텐데.

띠링.

그 순간이었다.

줄어드는 시청령들 중에서 더 이상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웃는 자’가 서재에 입장합니다.]

“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성령들도 다를 바 없는 반응이었다.

[서재의 모든 성령이 침묵합니다.]

조금 전까지 시끄럽게 떠들던 성령들이 전부 입을 다물었다.

그야 당연하다. 지금 들어온 자는 같은 성령이라 하더라도 급이 전혀 달랐으니까.

가장 어두운 곳에서 웃는 자.

비록 다른 성령들처럼 이명을 썼지만, 저렇게 유명한 성령은 이명을 써도 그 진짜 정체는 누구라도 알기 마련이다.

대성군 판데모니엄의 일곱 군주 중 하나.

혼성계의 시작을 함께 했다고 알려진 1세대 성령인 그의 등장에 모두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의 등장은 너무나도 반가웠다.

‘왜 바로 안 찾아오나 했더니, 바로 지금? 마치 잰 듯한 타이밍에 들어오는군.’

그의 성향을 생각하면 도저히 우연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당장 급한 불은 꺼진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가장 어두운 곳에서 웃는 자가 분위기가 왜 이러냐며 웃습니다.]

“그거야 다들 긴장해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성령들이 당신의 발언에 경악합니다.]

내가 너무 편하게 말을 꺼내서일까, 다른 성령들이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을 내게 보내왔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 악명이 높은 판데모니엄의 군주를 저렇게 대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처럼 비칠 테니까.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좋은 타이밍에 오셨네요. 저는 서재를 열 때, 바로 오실 줄 알았는데.”

[가장 어두운 곳에서 웃는 자가 100TP 후원!]

[저도 나름 바쁘게 지내서요. 그러다 갑자기 소문이 나서 시간 난 차에 찾아온 겁니다. 상황을 보니 꽤 재미있게 흘러가는 것 같네요?]

능구렁이 같은 양반 같으니라고.

누구보다도 부정적인 감정에 민감한 그는 지금 내가 보여 주는 시화가 어떤 상황인지, 쉽게 눈치챘을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강혜림은 한계에 봉착했다.

시화의 근간을 이루는 주인공이 경각에 달한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저리 물어보니, 어찌 성격이 좋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더 재미있어질 겁니다.”

나의 눈빛에서 무언가 의도를 읽어냈기 때문일까?

[가장 어두운 곳에서 웃는 자가 즐겁다는 듯이 웃습니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웃는 자가 1,000TP 후원!]

[기대하죠.]

100TP만 써도 되는 직접 메시지에 10배나 되는 금액을 투척하다니. 역시 1세대 성령은 다른 성령들과 비교해서 그 통이 매우 크다.

“이제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끝이니까요.”

사탄과 평온하게 대화를 주고받았기 때문일까, 아직도 나를 향한 성령들의 시선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무시했다.

저들은 아직 놀라기에 이르다.

내가 지금부터 보여 줄 것은, 그들의 상식으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범주의 것일 테니까. 놀라는 건 그때 해도 늦지 않다.

나는 즉시 [통합 구역]을 벗어나 사상세계로 이동했다.

* * *

끝인가…….

강혜림은 지면에 검을 박아 넣고 쓰러지려는 몸을 다잡았다. 하지만 상처에서 흐르는 피와 한계까지 치달은 호흡이 그녀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유현이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제네시스의 가호]를 받은 그는 환상체들이 인식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이 치열한 전쟁터 속에서 홀로 가만히 서 있는 유현의 모습은 너무나도 이질적일 수밖에 없었다.

“유현……씨.”

“혜림 씨. 끝났습니다.”

“…….”

강혜림은 그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유현의 말이 맞다. 결국, 끝이었다. 그녀는 결국 실패한 것이다.

“저, 저는…….”

“포기하셔도 좋습니다.”

“…….”

“여기 계속 있으면 죽을 겁니다. 저는 그걸 원치 않습니다. 비록 지금까지 이어지는 성공 가도에 흠집은 날망정, 죽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당신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도 안 되는 일이 있을 뿐.”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그 말이 강혜림의 마음을 납덩이처럼 짓눌렀다.

강혜림이 고개를 푹 숙였다. 도저히 유현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녀는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맞아요. 세상에는 안 되는 일이 있죠.”

“……포기하시겠습니까?”

“절대!”

강혜림이 소리 질렀다.

평소에 보인 적 없는 분노에 가득 찬 일갈이었다.

“알아요! 이게 제 고집이라는 것쯤은! 분명 유현 씨 말대로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있어요. 무슨 짓을 저질러도, 결국 도달할 수 없는 그런 과정이.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포기한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왜 그런 잔인한 말을 하시는 건가요?!”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에 쌓인 울분을 토하듯 외쳤다.

예전에도 그랬다. 컬렉터로 각성해서 교육을 받을 때도, 주변에서는 그녀에게 혀를 내둘렀다.

너는 뭘 해도 안 된다고, 그냥 빠르게 이 길을 접고 다른 걸 하는 게 좋다고. 너 따위가 뭘 할 수 있겠냐고.

그 말에 그녀는 순간이지만, 포기했었다.

하지만.

“유현 씨가 알려 줬어요. 제게 재능이 있다고. 남들이 할 수 없는 걸 저는 할 수 있다고. 그 덕분이에요. 저는 진짜 저에 대해서 알게 됐어요. 그렇게 여기까지 왔어요. 그리고 방금 깨달았어요. 제가 뭘 하고 싶은지.”

까드득.

바닥에 짚은 손에 힘을 줘 주먹을 꽉 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은 도망치기 싫어요. 이제 그런 건 지긋지긋해요.”

절망 속에 살던 그녀는 성공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버렸다.

지금껏 알지 못했던 희망, 메말랐던 그녀의 마음을 적셔 주는 하늘에서 내리는 감로와도 같은 빛.

그것을 알아 버린 이상, 더 이상은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었다.

“죽을 겁니다.”

“알아요. 분명 죽겠죠.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미안해요. 저, 정말로 바보 같죠? 이 중요한 순간에 고집이나 부리다니.”

강혜림은 힘없는 실소를 흘렸다.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이 순간에도 그녀는 자신이 유현에게 폐를 끼치는 것에 관한 죄스러움만 남아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그녀는 멈출 수 없었다.

이건 그녀의 욕심이었다. 검을 쥔 이상, 절대로 굽힐 수 없는 그녀의 고집이기도 했다.

“그렇습니까.”

유현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하지만 혜림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분명 실망했겠지. 어쩌면 나를 경멸할지도 몰라. 말을 듣지 않고, 내 멋대로 행동을 했으니까.

유일한 미련이라면, 단지 그것뿐이었다.

“죽어라! 마녀야!”

방어선을 뚫은 오스만 지휘관 하나가 힘겹게 선 강혜림을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막아야…….’

검을 들고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그녀는 일어서는 것이 고작이었다. 검을 휘두를 힘은……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강혜림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끝이구나.’

그녀는 눈을 감았다. 곧 이을 격통이 다가올 것을 생각하며.

그 순간 유현의 목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깨부쉈다.

“그거 다행이군요.”

그게 무슨…….

강혜림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유현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그녀를 질책하지 않았다. 경멸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이쪽을 차갑게 볼 거라고 멋대로 착각하던 그의 얼굴은.

너무나도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짓고 있었다.

[제네시스의 가호를 해제합니다.]

[한번 해제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해제하시겠습니까?]

“해제한다.”

그와 동시에.

유현은 아공간에서 검을 꺼내 강혜림을 향해 달려들던 오스만 지휘관의 목을 날렸다.

도저히 눈을 뜨고도 믿을 수 없는 깔끔한 일격.

강혜림의 눈동자에 아연함이 깃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 모든 상황을 숨죽이고 지켜보던 성령들도 마찬가지였다.

[성령들이 믿을 수 없다며 당신을 손가락질합니다.]

[성령들이 지금 이게 꿈인지 당황해합니다.]

모두가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다. 그 감정의 여파는 고스란히 메시지를 통해 전해졌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웃는 자가 100TP 후원!]

[크하하하하하하하!!!]

유일하게 사탄만이 그 광경을 보며 미친 듯이 폭소를 터뜨렸다.

“일어나세요.”

유현은 주변의 모든 것들을 무시하고 강혜림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혜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문득, 바로 얼마 전의 일이 지금과 겹쳐 보였다. 그녀가 절망에 빠졌던 그 날, 그때도 유현이 이렇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렇게, 그녀의 손을 잡아 줬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때와 다르게, 이번에 잡은 손은 온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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