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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31화 (31/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31화

이곳의 사령관이자 황제인 드라가시스는 애타게 지원군을 외쳤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체념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 지원군은 없을 거라고, 용병들은 전부 ‘원래 세계’로 도망갔을 거라고.

몇십 번이 넘게 반복되는 이 지옥에서 숱하게 겪어 오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서걱!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얼마나 반복된 지옥인가.

이곳은 멸망이 예정된 세상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이 결국에는 만들어진 존재라 하더라도.

‘나의 조국, 나의 백성들이 쓰러져 가는 꼴을 두고 볼 수 있겠는가.’

이것이 예견된 운명이라면, 그 운명에 필사적으로 저항해 보이겠다.

몇 번, 몇십 번을 죽는다고 하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으리라.

그 흔들림이 없는 단호한 각오야말로 그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징표였다.

“와라! 오스만의 개들아!”

“저기 적장이 있다!”

“죽여서 술탄께 바쳐라!”

드라가시스를 알아본 오스만 병사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황제시여! 피하십시오!”

“여긴 저희가 지키겠습니다!”

“아니. 더는 물러설 수 없다.”

호위 기사들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지만, 드라가시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도망친다 한들, 결국 그의 최후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맞이할 똑같은 결말이라면 그 과정만큼은 다르게 만드는 것이 그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조국과 백성을 위하여! 로마의 천년 역사를 위하여!”

“크윽! 로마 제국을 위하여!”

황제의 굳은 결의를 알아본 호위 기사들은 입술을 깨물고 호응하듯 외쳤다.

그들도 어찌 희망이 없다는 걸 모를까. 그럼에도 주군만큼은 안전하게 보내 주고 싶은 게 신하의 마음이다. 다만 황제가 마음을 다잡았으니, 신하된 도리로서 마지막까지 따를 뿐.

와아아아!

잠시 전열을 정비한 오스만 보병들이 창과 방패를 들고 우르르 몰려왔다. 그 광경을 본 로마 병사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당장은 버틴다고 하더라도 결국, 자신의 주검은 저 오스만의 잔악한 군화 아래 짓밟히게 되리라.

그 미래를 직감하면서도 황제는 검을 들었다.

“모두……!”

거기까지 외쳤을 때였다.

아직 무너지지 않은 외벽의 위로 새하얀 인영이 뚝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순식간에 일선에서 몰려오는 오스만 병사 열을 베어 버리며 강제로 소강상태에 빠지게 했다.

“크아악!”

퍼지는 비명과 함께 석벽의 가루가 안개처럼 뿌옇게 일었다.

직후 먼지구름이 마치 거인이 검을 내리친 것처럼 반으로 쩍 갈라졌다.

“저자는…….”

드라가시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미 도망쳤을 거라고 생각했던 용병 중 한 명이었다. 다른 용병들과 다르게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고, 외모가 워낙 아름다워서 기억하고 있었다.

“대체, 왜……?”

도망간 것이 아니었나?

무너진 성벽의 틈새에서 빛이 강혜림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그 광경을 보던 로마 병사 한 명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잔 다르크……?”

“아아. 성인(聖人)이시여.”

드라가시스는 병사의 말을 들으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기의 순간에 나타난 그녀는 정말로 신께서 내린 성인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경건하고 아름다우며, 그리고 강하다.

“도우러 왔습니다.”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

검을 쥔 강혜림은 오스만 병사들을 앞에 두고도 두렵지 않은 듯 말했다.

드라가시스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용병이여. 그보다 다른 사람들은……?”

“그건…….”

대답을 망설이는 그녀에게 그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 됐네. 말하지 않아도 알 거 같으니. 그대라도 도우러 와 줘서 고맙다네. 하지만, 혼자 남아도 괜찮겠나? 이미 전황은 돌이킬 수 없다네.”

“그래도…… 싸워야죠.”

강혜림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그녀라고 이렇다 할 작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자신에게 이곳을 추천해 준 유현을 믿었고, 이곳의 ‘사람’들이 허무하게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드라가시스에게는 그녀의 작은 선행과 용기야말로 세상 그 무엇보다 크게 다가왔다.

“놀랍군. 여태 여기까지 온 모든 용병은 제 살길을 찾고자 도망만 쳤는데 말이지.”

“전부…… 기억하시는 건가요?”

“놀랐는가? 그렇겠지. 애초에 우리는 이곳에서 만들어진 존재들이니까. 드라가시스라는 이 이름조차, 진짜는 이미 먼 과거의 역사 속에 스러져 갔겠지. 지금 있는 것은 그 잔재이자, 찌꺼기일 뿐.”

“그건…….”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아니까.”

그의 목적은 이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의 백성들에게 안식을 쥐여 주는 것.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는 이 지옥을 몇 번이고 반복할 자신이 있었다.

드라가시스의 표정에서 각오를 읽어 낸 강혜림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돕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싸우겠어요.”

“정말로 고맙네.”

드라가시스의 감사는 빈말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이곳에 남고자 하는 자가 없었다. 모두 성벽이 무너지는 순간부터 전황의 불리함을 느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갔으니까.

처음에는 그들을 붙잡으려고도 했고, 애타게 부르짖기도 했다.

하지만,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고는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자는 다르다.’

강혜림은 어떻게든 멋있게 싸우려고만 하던 다른 용병들과 전혀 달랐다. 애초에 그녀를 용병이라 부르는 것조차 그녀에게 모욕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비록 그 찌꺼기밖에 되지 않는 우리지만, 부디 부탁하네.”

“아니요. 당신들은 찌꺼기 따위가 아니에요.”

강혜림은 드라가시스의 자조에 고개를 저었다.

“저는 당신들이 모두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도운 거고, 그렇기에 함께 싸우려는 거예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우릴 사람이라고 생각해 준단 말인가?”

“싫으신가요?”

도리어 되묻는 강혜림의 말에 드라가시스는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가슴속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무언가가 자꾸 말문을 막았다.

분노? 아니다.

이건 기쁨이었다.

“……싫을 리가.”

떨리는 입술을 움직이며 가까스로 대답을 내놓는다.

“어찌 싫겠는가? 우리의 삶이, 이 무분별한 발악이, 필사적으로 지키고자 했던 것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누가 싫어하겠는가?”

인정받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포기했던 현실을 다시 인정받게 되자, 드라가시스는 전쟁 중임에도 입가에 미소를 그릴 수밖에 없었다.

비록, 한마디 말일 뿐이었지만.

“고맙네. 나는 그 말에, 구원받은 거야.”

“그렇게 거창하게 부를 정도의 도움은 준 적이 없습니다.”

“아니. 그거면 충분하네. 때로는 누군가에게 따스한 말 한마디가, 천금보다 귀중하니 말이지.”

그러니, 포기하지 말자.

그녀의 말대로 내가 걸어온 길은 절대로 틀리지 않았으니까.

비록 이번에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희망을 보았으니. 그다음에도 기꺼이 이 지옥을 도전할 수 있으리라.

“아니. 실패하면 안 되지.”

드라가시스는 고개를 저었다.

모처럼의 조력자가 나타난 기회다.

지휘관으로서, 한 국가의 황제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어찌 이 기회를 놓치겠는가?

“부탁하네. 시간을 벌어 주게. 방어선을 설치하면, 놈들도 함부로 넘어오지 못할 걸세.”

“기꺼이.”

강혜림은 검을 쥐었다. 그런 그녀의 곁으로 황제의 호위 기사들이 하나둘 섰다.

기사들이 검을 뽑았고, 그 뒤에 병사들이 도열했다. 이들 중 그 누구도 눈빛에 두려움을 품고 있지 않았다.

품은 것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열망뿐.

그 광경을 본 오스만 병사들이 압도되었다.

“뭐, 뭣들 하는 거냐! 모처럼 뚫린 길이다! 어서 놈들을 쓸어 버려!”

오스만 병사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지켜라!”

강혜림이 검을 쥐었고, 드라가시스가 소리쳤다.

“전선을! 백성을! 국가를! 그리고 우리의 은인을!”

“와아아아아!”

이에 질세라 로마 병사들도 고함을 내질렀다. 창과 검, 방패를 쥐고서 적들을 향했다.

갑옷과 갑옷, 무기와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력을 다해 뚫으려는 자들과 목숨을 다해 지키려는 자들이 다시 충돌했다.

* * *

나는 그 싸움에 압도됐다.

나는 전생에 많은 싸움을 봐 왔고, 또 겪어 왔다.

그러나 단언컨대, 내가 봐 왔던 그 어떤 싸움도 지금의 전투보다 경건하지 못할 것이다.

[선술집의 취객이 할 말을 잃습니다.]

[포기 않는 수행자가 저들의 싸움에 승리를 기원합니다.]

[다부다드의 풍요가 주먹을 불끈 쥡니다.]

[대다수 성령이 당신의 시화에 감화됩니다.]

[4,320TP를 획득했습니다.]

평소에 떠들기를 좋아하던 성령들조차, 지금 순간만큼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지켜봤다.

그들은 강혜림이 보여 주는 이야기에 눈을 떼지 못했다.

모두가 도망쳤을 때 홀로 맞서 싸우는 그녀의 용기에 감화되었고, 그녀와 함께 싸우고자 목숨을 불태우는 병사들에게 마음 깊이 공감했다.

그래.

모두가 이 이야기에 빠져든 것이다.

‘책이…… 변한다.’

좁은 길목을 지키며 필사적으로 싸우는 강혜림. 그녀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책이 변하기 시작했다. 동색에서 막 연한 은빛을 내뿜던 표지가, 어느덧 완전한 은색으로 탈바꿈했다.

그것은 강혜림이 전생의 자신을 따라잡는 것을 의미했다.

[강혜림의 특성 ‘고려시대 소드마스터’가 완전히 개화합니다.]

[미개방 특성 ‘신검합일’이 일부 개방됩니다.]

싸움을 이어 나갈수록 그녀의 빛은 강하고 뚜렷해졌다.

무엇을 위해 싸우고, 또 무엇을 위해 저렇게까지 하는가? 그녀는 그 오랜 질문의 해답을 찾으려는 고행자처럼 보였다.

‘보여 주십시오. 혜림 씨. 당신의 싸움을.’

어느덧 내 서재에 모인 성령들의 수가 800을 넘었다.

그리고 그 숫자는 실시간으로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아직까지 남아 있는 서재가 있었다고?!”

[통합 구역]을 떠나지 않은 일부 텔러들이 나의 시화를 보며 경악한다.

컬렉터들이 떠나고 텔러마저 물러나며 서재가 닫으려 했지만, 아직 콘스탄티노플의 사상세계는 끝나지 않았다.

내가 끝내지 않을 거다.

띠링. 띠링.

서재에 입장하는 성령들의 메시지가 시끄럽게 울린다.

성령들은 이야기를 찾았다. 닫힌 서재에 머물던 그들은 꺼지지 않은 빛을 찾아 나의 서재로 몰렸다.

마치, 그것이 당연한 흐름인 것처럼 말이다.

[축하합니다! 시청령이 1,000명을 달성했습니다!]

[서브미션-시청령 1,000달성!]

[서브미션-구독령 300달성!]

[서브미션-구독령 500달성!]

그런 알림이 연달아 터졌지만, 나는 한눈을 팔 수 없었다.

내 시선은 조금 전부터 강혜림에게서 못 박힌 채, 떠나지 못했다.

와아아아아!!

챙! 채챙!

“크아악!”

“죽여!”

싸움은 이 이상은 불가능할 정도로 격화됐다.

시체가 쌓였다. 그들은 모두 뒤엉켜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오스만 제국은 모처럼 잡은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기 위해 대부분 병력을 무너진 벽으로 밀어 넣었다. 반면 수비 측은 투입할 인원이 여의치 않았다. 좁은 길목의 이점을 살려 필사적으로 항쟁했지만, 끝없는 물량에 점점 밀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대로면 진다.’

강혜림이 최선을 다해 싸우고는 있었지만, 그녀 혼자서 이 많은 손을 다 감당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그녀 덕분에 간이 전선을 설치하는 데 성공했고, 원래 계획보다 시간을 벌 수는 있었다.

하지만.

“흥, 뭐야. 잘난 체하며 남더니, 결국 저 꼴인가?”

“보아하니, 별로 버티지도 못하겠군.”

불현듯 내 신경에 거슬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조금 전부터 나를 염탐하던 녀석들이 들으라는 듯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뒤를 돌아보자, 놈들은 오히려 나를 비웃기까지 했다.

“이봐. 그쪽 컬렉터 슬슬 지쳐 보이는데, 포기하는 게 어때?”

“맞아. 그 정도 해 먹었으면 빠질 때 됐잖아?”

나는 그런 놈들을 향해 싸늘하게 말했다.

“닥쳐. 머저리 자식들.”

“뭐, 뭐?”

“귓구멍이 멀었나? 닥치라고 했다고.”

“이, 이 자식이 지금……!”

“지금 뭐. 내가 틀린 말을 했나? 패배하고 꼬리를 말고 도망간 녀석들 주제에, 대체 무슨 낯짝으로 아직도 남아 있지? 뭐. 내 서재에 조금 빌붙으면 뭐라도 떨어질 줄 알았나? 아니면 자신의 손님을 모두 빼앗은 내가 고꾸라지기라도 바라나?”

“이, 이……!”

내 지적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어서인지, 놈은 얼굴을 붉힌 채 반박하지 못했다.

그래도 꼴에 자존심은 상했는지, 나를 죽일 듯 노려봤지만.

오히려 내가 살기를 담아 노려보자 움찔하더니, 내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에 나는 놈들을 향한 혐오감이 밀려오는 걸 느꼈다.

“겁쟁이 자식들. 잘난 체를 해? 욕심을 부려? 네놈들은 그마저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의 권리를 부르짖는 쓰레기일 뿐이야.”

“…….”

자신의 컬렉터를 믿지 못하고, 단지 포인트를 벌어 오는 기계처럼 다루면서.

자신의 시화를 제대로 보여 줄 생각도 없이, 단지 성령들에게 어떻게든 빌붙을 생각만 하면서.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타인을 멋대로 논하는 거지?

“부끄러운 줄 알면 닥치고, 지켜보기나 해.”

내가 서슬 퍼렇게 노려보자 놈들은 알아서 꼬리를 말았다.

나는 다시 강혜림을 살폈다. 성벽이 무너지고 어느덧 2시간이 지났다.

오전에 시작됐던 싸움은 정오를 지나 가장 더울 때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체력이 무한한 것이 아니기에, 그녀는 자연스레 지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수비 병력도 이미 체력의 한계를 맞이하고 있었다.

“막아! 조금만 더 버텨!”

“으아악! 아, 안 돼!”

결국, 최후의 저지선이 뚫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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