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29화
나는 [관조자의 방]에 앉아서 사상세계의 모습을 살폈다.
넓은 평야의 한쪽에는 거대한 도시를 감싸는 성벽이 있었고, 맞은편에는 빽빽하게 들어찬 대군이 있었다.
‘제20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오스만 제국이 2,2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로마를 완전히 끝내버린 전쟁.’
침략을 위해 쳐들어온 오스만 제국의 병력은 최소 15만.
반면, 수비하는 동로마 제국의 병력은 7천 명.
단순 계산만 해도 병력의 차이가 20배가 넘었다. 여기에 컬렉터들 50명이 추가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어 보였다.
‘컬렉터 개개인이 일반 병사 이상의 힘을 낸다고 하더라도, 병력의 차이가 저렇게 나면 솔직히 답이 없어.’
혼자서 군단급 힘을 내는 고위 컬렉터라면 모를까, 애초에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컬렉터의 수준은 종5품에서 정8품의 사이다. 그들에게 엄청난 활약을 기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은 아직 특성을 완전히 개화하지 못한 강혜림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내가 오늘 그녀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는 그녀의 각성 때문이었다.
‘바로, 전생의 검후가 이곳에서 그 첫 명성을 쌓았었지.’
전생의 검후가 본격적으로 검후라는 이명을 얻고, 그 명성을 떨친 곳이 바로 이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이었다.
지금의 강혜림이 남은 특성마저 제대로 각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 가야만 하는 곳이었다.
‘물론, 전생의 검후가 활약하는 것은 앞으로 반년 뒤……겠지만. 지금 강혜림의 성장세를 보면 오히려 그때는 늦어. 지금이 가장 적기다.’
반년 뒤에는 너무 강해져서 이곳에 출입 자체가 금지될 가능성이 컸다. 애초에 그때까지 기다리기에는 내가 벌여 놓은 일이 너무 많아서 안 된다.
-유현 씨. 보이시죠? 지금 풍경.
“네. 잘 보입니다.”
-이거…… 이길 수 있을까요?
“흠. 글쎄요.”
강혜림은 티를 내려고 하지 않았겠지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야 15만 대군을 앞에 뒀다면 누구라도 같은 반응을 보일 거다. 다른 컬렉터 중 담이 작은 몇몇은 자리에 주저앉기까지 했으니까.
-50명이 넘게 들어와서 무난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거 같아요.
“500명이어도 부족했을 겁니다. 이쪽의 수비는 7천 명인 데 비해 저쪽은 15만이나 되니까요. 게다가 오스만 제국의 정예 보병 예니체리만 1만이 됩니다. 사실상 저쪽도 총력을 다 기울인 셈이죠.”
게다가 말이 15만이지, 그건 직접 전투에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을 뜻한다.
비전투 인력까지 합친다면 저쪽은 거의 30만에 가깝다. 그걸 수비하는 입장에서 마주하고 있으니 누구라도 질려 하기 마련이다.
-여기 사람들은 그렇다면 뭣 때문에 온 걸까요? 반응을 보면 모르고 온 건 아닌 거 같은데. 애초에 이곳은 컬렉터들이 파밍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잖아요.
“기회 때문입니다.”
-기회요?
“혜림 씨. 지금 무려 50명이 넘는 컬렉터가 모였습니다. 그리고 컬렉터마다 계약한 텔러들이 있죠.”
그리고 텔러마다 서재를 지니고 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서재가 몇 개인지 아십니까? 35개가 넘습니다. 그리고 그런 서재를 지켜보는 성령들의 숫자는?”
-네? 그건…….
“지금, 무려 2천이 넘는 성령들이 이곳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헉.
내가 대략적인 수치를 말해 주자 강혜림이 입을 쩍 벌리려다 곧바로 합 다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세차게 떨리며 주변 허공을 빠르게 훑고 있었다. 성령들이 보내는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이리라.
“이곳은 지금 단순히 자신의 서재만 보여 주는 공간이 아닙니다. 더 크게, 더 멀리 보면 다른 서재의 성령들에게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기회의 장에 가깝죠. 성령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컬렉터를 새로 알게 될 수 있는 곳이니까요.”
-확실히, 그렇게 말씀하시니. 뭔가 예전보다 시선이 늘어난 것 같기도…….
“아마, 다른 서재의 성령들도 혜림 씨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을 겁니다. 소문의 컬렉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리고 혜림 씨가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그분들이 이쪽 서재로 넘어올지도 모르죠.”
-즉 여기는 사상세계 클리어가 아니라, 이렇게 다수의 컬렉터가 모인 점을 이용해서 제 서로가 잇속을 챙기는 게 목적이라는 말씀이죠?
“표현이 좀 그러긴 한데, 틀린 말은 아닙니다.”
텔러는 다른 서재의 성령들에게 이쪽을 어필함으로써 서재를 더욱 키운다.
반대로 매력을 제대로 보여 주지 못하면 이쪽의 성령들을 다른 서재에 빼앗기고 만다.
이곳은 단순히 사상세계를 클리어 하기 위한 곳이 아닌, 컬렉터와 컬렉터, 텔러와 텔러, 서재와 서재가 벌이는 치열한 전쟁터였다.
하지만.
“그렇게만 하면 남들과 다를 게 없죠.”
-네?
“저들과 똑같이 한다고 해서 뭐가 좋아지겠습니까? 혜림 씨. 우리가 지금까지 해 왔던 일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남들처럼 했습니까? 아니요. 다른 이들이 절대로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기상천외한 일들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성공했고, 여기까지 왔죠.”
-그……랬죠?
내 말에서 무언가를 읽어서일까, 강혜림은 어딘가 불안한 어조로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정답입니다.
“그러니 저희는 이곳 사상세계까지 클리어 할 목적으로 행동할 겁니다.”
-네?!
나는 너무 놀란 강혜림을 달래듯 말했다.
“위험하다 싶으면 뺄 겁니다. 하지만 일단 도전하겠다는 모션은 취하는 게 좋다는 거죠.”
뭘 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 크게 기대하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당초의 목적은 강혜림의 미개방 특성을 완전히 각성시키는 거였으니까.
전생의 그녀가 했던 것처럼 말이다.
‘애초에 전생의 검후조차 이곳을 클리어 하지 못했었어. 그나마 가장 오래 버티기는 했지만, 실패했지.’
하지만 그럼에도 전생의 검후는 이곳에서 막대한 명성을 쌓았고, 자신의 특성을 완전히 개화시킴으로써 향후 크게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반년이라는 시간의 차이가 있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그때의 검후를 따라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4개나 되는 사상세계를 클리어 했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포인트와 이야기를 획득했다. 심지어 성령들이 후원해 준 덕분에 지금 강혜림이 벌어들인 포인트는 아마 전생의 그녀보다도 훨씬 더 많을 거다.
‘컬렉터에게 있어서 포인트야말로 강함의 척도. 충분히 해 볼 만하다.’
만약에 정말로 극한의 확률을 뚫고서 가능성이 보인다면.
‘그때는…….’
내가 나서야겠지.
나는 소유 포인트를 확인하며 더욱 마음을 가라앉혔다.
* * *
아직 전쟁이 시작되지 않아 컬렉터들은 저들마다 안면을 튼 사람끼리 모였다.
그렇게 삼삼오오 모인 컬렉터들은 다른 컬렉터 모임을 경계 어린 시선으로 훑어봤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 강혜림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50명이 한꺼번에 뭉쳐도 모자랄 판에 벌써부터 서로를 경계하다니.’
애초에 저들의 목적은 사상세계의 클리어가 아닌, 주어진 시간 동안 자신이 얼마나 돋보이는 가다. 당연히 다른 컬렉터는 사실상 잠재적인 적일 수밖에 없었다.
강혜림은 그 모습이 꼴사나워서 고개를 털고, 성벽 바깥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봐, 아가씨. 혼자 있을 셈인가?”
“우리와 손을 잡는 게 어때?”
그런 강혜림을 노리고 몇몇 무리가 접근했다.
“같이 멋진 모습을 보여 주고 페이를 나눠 받을 수 있다고?”
“아가씨가 우리 쪽에 오면 다른 녀석들보다 더 돋보일 수 있을 거야.”
그들의 의도는 너무 뻔했다. 그녀를 자신의 무리에 속하게 해서 성령들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더 받겠다는 심보였다.
혹은 그녀의 아름다운 외형에 혹해서, 흑심을 품은 자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강혜림은 그들에게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무시할 뿐.
“뭐야. 기껏 말을 걸었더니, 무시하기냐?”
“이봐. 그냥 가자. 본인이 싫다는데, 어쩌겠어?”
“퉤! 재수 없기는. 지금까지 혼자서 사상세계를 클리어 했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나 보지? 이런 곳에서 혼자서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 두고 보자고.”
“오빠가 참아요. 혼자서 뭘 하면 될 줄 아는 건가 봐요. 하여튼 경계선을 멋대로 넘은 사람답네요. 어쩜 상도덕이 없어 상도덕이. 혼자서 다 해 먹으라 그래요.”
‘하.’
대놓고 이쪽을 들으라는 듯 말하는 저들의 행동에 강혜림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결국, 다 서로 이용해 먹을 생각이면서. 뻔뻔하기는.’
강혜림은 한숨이 나오는 걸 억지로 참아야만 했다.
지금까지 다른 컬렉터들과 만나는 일 없이 혼자서만 행동해서 그런가, 벌써부터 정신적인 피로감이 잔뜩 쌓이는 기분이었다.
‘그래. 참자. 유현 씨를 위해서라도 내가 참는 거야.’
강혜림은 속으로 분을 삭이며 자신의 허리춤에 걸린 검을 쥐었다.
두근두근.
손아귀를 타고 느껴지는 검의 감촉이 그녀의 심장을 뜨겁게 달궜다. 반대로 머리는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곧 있을 전투를 앞두고, 그녀의 피는 분명 들끓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웃기네.’
강혜림은 자조 섞인 실소를 흘렸다.
그녀가 언제부터 이런 걸 걱정했던가. 그녀가 믿는 텔러가 이곳을 추천해 줬다. 그렇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소리다. 지금까지 그래 오지 않았던가.
등 뒤에서 느껴지는 질투 어린 차가운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강혜림은 앞으로 있을 전투의 준비를 끝마쳤다.
짝짝!
“잘 왔네. 용병들이여!”
그 순간 갈채 소리와 함께 성벽 위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컬렉터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이쪽을 희망에 찬 눈빛으로 보는 그는 갈색 머리카락을 기른 시원해 보이는 미남이었다.
나이는 30대 중반 정도. 범상치 않은 직위를 증명하는 고급스러운 갑옷과 그를 보호하듯 선 호위 기사들이 뒤를 따랐다.
“뭐야. 누구지?”
“바보야. 오기 전에 뭘 들은 거야? 이곳 공성전의 수비 측을 맡는 환상체잖아.”
“무슨 왕이라고 했던가?”
대부분 컬렉터는 기본적인 정보를 접하고 들어왔지만, 애초에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서 다들 잘 모르는 눈치였다.
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짐은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시스 팔레올로고스라고 한다네. 꼴이 말이 아니지만, 로마 제국의 정통 황제이기도 하지. 이곳의 대표로서 그대들처럼 용감한 용병단이 수비를 지원하러 와 준 것에 감사를 표하지.”
이곳에 온 50명의 컬렉터는 황제에게 있어서 용병단이라는 ‘설정’이었다.
‘과연, 이런 방식이구나.’
강혜림은 속으로 나지막이 감탄하며 황제를 살폈다. 밝게 웃으며 말하는 것과 다르게 그의 눈빛은 침중하고 또한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피로가 절어 있었다.
이미, 수차례 치열한 전투를 치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짐은 그대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융숭한 대접을 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시간이 없을 거 같군. 오스만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네. 이제 슬슬 놈들이 들이닥칠 시간이로군.”
‘이 남자…….’
컬렉터들을 쓰윽 훑으며 말하는 드라가시스의 모습에 강혜림은 어딘가 이질감을 느꼈다.
황제나 그의 기사단, 그 외 수비하는 병사들은 모두 이야기로 구성된 환상체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만들어진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게임으로 치면 NPC에 가까운 존재들인데.
‘그런데…… 정말로 살아 있는 사람 같아.’
눈빛이나 목소리, 어조부터 그렇다. 그들은 누군가 정교하게 빚어서 만든 환상이 아닌 정말로 스스로 사고하고 움직이는 생명체 같았다.
그런 생각은 자신의 휘하 기사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더욱 확고해졌다.
“황제시여. 아무리 그래도 벌써부터 전의를 깎는 말씀은 삼가시는 게 좋습니다.”
“흥. 어차피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인데, 말을 아껴 무엇 하나? 경도 기왕 이렇게 된 거 자신의 속마음에 솔직하게 털어놓고,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게나.”
“욕해도 됩니까? 저 맺힌 거 많은데.”
“그렇다고 불경은 저지르지 말고.”
“어우 씨. 말은 못하면…….”
“하하! 그게 짐답지 않은가?”
죽음을 앞두고 초탈해 보이는 그 대화에 어딘가 맥이 빠질 법도 했지만, 병사 중 누구도 긴장을 흩뜨리지 않았다.
그들의 실없는 대화에 웃으면서도, 시선만큼은 성벽 너머의 적군을 쏘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부우우우!!
“놈들이 움직이는군.”
드라가시스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그의 말대로 정비를 끝낸 오스만 제국의 정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걸을 때마다 흙먼지가 크게 일어나고, 땅이 잘게 떨렸다.
꿀꺽.
그 광경에 압도된 컬렉터들이 긴장한 채, 자신의 무기를 손에 쥐었다.
그런 컬렉터들에게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이 시작됩니다.]
[적들의 공세를 버티며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십시오.]
[기회는 한 번뿐입니다.]
단 한 번밖에 없는 기회
그렇기에 모든 것을 걸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 싸움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