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28화
“혜림 씨. 준비됐습니까?”
내가 묻자 강혜림은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답했다. 주변에 보는 눈이 있다 보니, 그녀는 지금 검후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힘들다고 징징대던 그녀도, 몇 번 하고 나니 익숙해져서는 별 불만 없이 잘했다. 아니, 오히려 이제는 본인이 주변의 반응을 통해 즐기는 단계까지 왔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
사실, 강혜림이 여기에 재미를 붙인 것은 어떻게 보면 백서련의 공이 컸다.
나의 경우에는 필요하니까 최대한 아는 선에서 강혜림을 꾸몄을 뿐이지만, 백서련은 또 이런 쪽으로 천부적인 재능과 열정이 있다 보니. ‘검후 강혜림’이라는 인물을 꾸미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단지 어떻게 꾸미느냐에서 그치지 않고. 어떤 타이밍에 어떤 말을 하거나, 어떤 식으로 행동을 하는지, 심지어 걸음걸이 하나까지.
백서련은 그 모든 것들을 구성하고 계산하며, 제삼자가 얼마나 대단하게 볼 수 있는지를 연구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진짜 광기.’
나 같은 콘셉트는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였다.
문제는 강혜림도 또 한 망상력 하는 여자라서, 백서련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채용하고 또 거기에 부응하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다는 점이다.
찐스러움 가득한 망상 넘치는 컬렉터와 광기 가득한 매니저가 힘을 합치니, 가히 굉장한 시너지 효과가 이루어졌고.
그렇게 지난 일주일간 강혜림은 꽤나 큰 명성을 쌓을 수 있었다.
‘오죽했으면 성령들의 반응보다도, 최근 그녀를 향한 일반인들의 인지도가 훨씬 더 많이 올랐을까.’
게다가 이러한 소문은 단순히 일반인들에게만 퍼진 것이 아니다.
당장 지금 들어가려는 사상세계의 입구 근처만 봐도, 이쪽을 눈여겨보는 컬렉터들이 상당히 많았다.
“저게, 요즘 소문이 자자하다는 그 검후인가?”
“검후라면…… 최근 사상세계를 무섭게 클리어 하고 있다는 그 신예 컬렉터?”
“벌써 4개나 클리어 했다는군. 대부분 저급한 사상세계지만, 개 중에서는 예전에 협회에서도 도전했다 실패한 라비린토스도 하나 있는 모양이야.”
“소문은 들었는데, 진짜였나 보네. 게다가 저 모습과 분위기를 봐봐. 쓰읍. 엄청 예쁘지 않냐?”
“말 걸어 볼까?”
“아서라. 저 고고한 모습을 봐. 우리가 말을 건다고 받아 주기나 하겠냐?”
주변에서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컬렉터들의 말을 엿들어 보니, 강혜림의 이미지 메이킹은 제대로 먹히고 있는 것 같았다.
과연 저들은 강혜림의 저 모습이 전부 꾸며진 것이고, 묵묵해 보이는 저 무표정 속에서는 지금 어떻게 해야 자신이 멋있어 보이는지 고민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행동할까?
‘참 이상하단 말이지. 애초에 내가 이렇게 만들긴 했는데, 뭔가 배알이 꼴린다고 해야 할까?’
특히 최근 들어 자꾸 나를 보면서 묘하게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는 강혜림을 보면 이유도 없이 꿀밤을 때려 주고 싶은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뭔가 건방져졌다고 해야 하나? 나랑 딱히 맞먹으려 드는 건 아닌데, 그냥 뭔가 좀 그랬다.
뭐, 그건 지금 당장 상관없는 일이지.
오늘 가장 중요한 것은 곧 들어갈 사상세계였으니까.
‘지금까지 강혜림이 클리어 한 사상세계는 대부분 컬렉터도 손을 놓은 곳이었어.’
너무 쉬워서 굳이 클리어 할 생각조차 느끼지 못하는 곳. 그저 적당히 파밍만 하게 놔두던가, 혹은 파밍을 안 해도 상관없는 곳들.
하지만, 오늘 가야 하는 곳은 달랐다.
입구에 몰려 있는 컬렉터들의 숫자가 증명하듯이, 오늘 강혜림이 가는 곳은 꽤나 메이저 한 사상세계라고 볼 수 있었다.
그만큼 규모도 크고, 얻는 보상도 많지만…… 위험하기도 했다.
나름 등급이 높은 컬렉터들도 사상세계에 진입하기 전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무기를 점검하고 있었다.
‘많이도 모였군.’
보통 사상세계를 적게는 혼자서, 많아 봤자 최대 4~5명의 파티로 돌아다니는 걸 생각하면 지금 이곳에 모인 인원은 확실히 대규모라 부를 만했다.
대충 보이는 숫자만 따져도 약 50여 명.
저게 따로 나눠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몰려서 들어가는 숫자인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만큼 이번 사상세계가 독특하다는 소리지.’
나는 강혜림을 슬쩍 살폈다. 다른 컬렉터들과 다르게 그녀는 별로 긴장한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 떠다니는 책은 이제 은근하게 은빛을 품고 있었다.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네. 만전이에요.”
“오는 길에 누누이 말했다시피, 이번 사상세계는 꽤나 위험합니다. 괜히 저 많은 숫자의 컬렉터들이 동시에 들어감에도 긴장을 하는 게 아니거든요.”
나름 짬밥 좀 먹었다는 컬렉터가 무려 50여 명이다. 그 정도의 숫자가 모였음에도 다들 썩 안도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보상을 나눠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이렇게 모여도 과연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이쯤 되니까 강혜림도 궁금증을 견디지 못한 눈치였다.
“대체, 어떤 곳이기에 그런가요?”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는 곳입니다.”
그녀에게도 설명했듯이 사상세계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다.
안쪽에 어떤 광경이 펼쳐져도 이상할 게 없는 곳이 사상세계다.
당장 신비로운 미궁 라비린토스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사람들 사이에 퍼진 이야기가 구현되어 현실화된 곳이니,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곳이었다.
이번에 가는 사상세계도 그러했다.
말 그대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는 곳. 사방에 위험이 산재하고, 언제 어디서 눈먼 공격에 맞아 다치거나 죽을지 모른다.
게다가 언제 어느 때나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던 다른 곳과 다르게, 오늘 가는 사상세계는 3개월에 한 번만 출입이 허가되는 장소였다.
무엇보다 특이한 점이라면, 저곳에 한번 들어갔다가 실패해서 나오면 다시는 출입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들어갔다가 실패하면 그걸로 끝.
말 그대로 실패라는 낙인이 평생 꼬리를 물게 되는 것이다.
“기회는 단 한 번. 실패할 경우 재도전의 기회조차 없습니다. 당장 한 번의 실패가 뼈가 아픈 컬렉터에게는 더더욱 그 의미가 큰 곳이죠. 그게 저희가 오늘 가려는 곳입니다.”
“그렇게 위험한 곳이라면, 오늘 굳이 저길 고른 이유가 뭔가요?”
“혜림 씨에게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녀는 이제 어느 정도 안정권에 접어들었다. 여기서부터 다른 컬렉터들처럼, 그저 파밍만 하면서 포인트를 벌고 천천히 강해지는 길을 택해도 나쁠 건 없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혜림 씨. 혜림 씨는 성공하고 싶어서 컬렉터가 됐죠?”
“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텔러지만, 제 목적도 혜림 씨와 별다를 건 없죠. 저는 성공하고 싶고, 누구보다도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것은 혜림 씨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혜림 씨의 목적이나 동기 의식은 다분히도 개인적이고, 또 욕망이 넘치지만. 저는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칭찬을 해 주고 싶을 정도죠.”
“네…….”
“하지만, 그거 아십니까? 어중간한 욕망은 결국 본인을 갉아먹는다는 걸. 정말로 자신이 그걸 바란다면, 뼈가 부러지고 살이 짓눌러 터져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그래서 묻는 겁니다. 혜림 씨에게는 그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십니까?”
“그건…….”
내 진지한 질문에 강혜림은 섣불리 답을 내놓지 못했다.
“당장에 대답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다만, 조만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야 하실 겁니다. 저를 위해서도, 혜림 씨 자신을 위해서도 말이죠. 제가 오늘 이곳을 고른 것은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기하고 있던 컬렉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공에 떠 있는 새하얀 입구가 갑자기 빛을 내뿜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닫혔던 사상세계가 오늘 다시 새롭게 열렸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자! 가자! 남들이 못했던 걸 우리가 성공해 보자고!”
“어디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직접 봐 주지!”
컬렉터들은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아 넣듯 그렇게 외치며 사상세계로 향했다.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갔고, 강혜림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입구는 순식간에 빈 공터가 되었다.
나는 주변을 슬쩍 살폈다. 이곳에는 컬렉터들 말고도, 자신과 계약을 맺은 컬렉터들을 살피러 온 텔러들이 몇몇 있었다.
그중 일부는 내게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왔지만, 곧바로 접근해서 말을 거는 자들은 없었다.
텔러들도 잔뜩 긴장했기 때문에 지금 다른 경쟁자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컬렉터가 무려 50명이 모였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서재의 크기를 합치면, 성령들의 숫자도 꽤나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서재가 동시에 똑같은 사상세계를 비춰 주는 것이다.
의도치 않은 합방. 그리고 모처럼 이루어진 커다란 무대.
‘정상의 자리는 오직 하나.’
과연, 이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주인공은 누구일 것인가?
오늘 그 결과가 정해지는 날이었다.
* * *
지금까지 사상세계를 혼자서 클리어 해 온 강혜림에게 모처럼 다른 사람들과 사상세계에 들어가는 경험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안쪽에 들어가는 순간, 순식간에 바뀌는 풍경에 그녀는 2번째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와아아아아!!
곧바로 들리는 것은 하늘을 뒤흔드는 커다란 함성.
강혜림은 그제야 자신이 커다란 성벽의 위에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주변의 다른 컬렉터들도 강혜림과 별다른 바 없는 반응이었다.
따스한 바람이 점점 열기를 머금기 시작하는 5월의 바람.
그 너머에서 불어오는 것은 십 수만의 군세가 만들어 내는 거대한 흙먼지였다.
‘저건…….’
강혜림은 이런 상황에서도 당황을 내색하지 않으며 전장을 살폈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꽤나 높은 성벽으로 이루어진 곳. 그리고 이 성벽을 지키기 위해 도열한 구현체들이 더러 있었다.
그리도 맞은 편, 멀리서 보이는 것은 이쪽을 침략하는 거로 추정되는 구현체들.
강혜림은 본능적으로 이 사상세계가 뭘 해야 하는 곳인지 깨닫고 말았다.
‘저 숫자 적들의 군세로부터 이쪽을 지키는 거야?’
단순히 지키는 것보다도 이쪽을 크게 걱정하게 만드는 것은 적들의 규모였다. 강혜림은 왜 유현이 자신에게 이곳에 대해 미리 알려 주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알려 줘도 소용없으니까.
게다가 오히려 이곳에 대해서 세세하게 설명을 했다면 두려움 때문에라도 오지 않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강혜림은 눈을 돌려 다른 컬렉터들을 살폈다. 그들은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듯, 멀리서도 확연히 보일 정도로 많은 적을 보며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조금 전까지 전의를 불태우던 컬렉터도, 손에 쥔 무기를 자기도 모르게 놓칠 정도였다.
강혜림은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켰다. 그 순간, 유현에게서 통신이 날아왔다.
-들리십니까?
“네. 들려요.”
신기한 일이었다. 당장에 주저앉고 싶었는데. 유현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어디선가 용기가 샘솟는 기분이었다.
[관조자의 방]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유현은 혀를 내둘렀다.
-저도 얼핏 듣기만 해 봤는데, 직접 보니 만만치 않군요.
“유현 씨는 여기가 어디인지 아시나요?”
-그 전에 주위가 어떤지 보이십니까?
“네. 다들 지치고, 힘들고, 벌써부터 겁에 질려 있어요.”
성벽을 지키는 환상체들은 갑옷과 창을 걸쳤지만, 그들의 얼굴은 피로감에 찌들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철옹성 같은 거대한 성벽의 곳곳이 파손되어 있었고,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수는 또 어떤가. 성벽 위의 환상체들도 적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눈이 확 떠질 정도로 많았지만, 숫자란 결국 상대적인 것.
이곳을 침략하기 위한 적들의 수는…… 아무리 봐도 이쪽의 수십 배는 족히 넘어 보였다.
컬렉터들이 질려 할 만도 했다.
“보니까 시간적 배경은 이미 전투를 여러 차례 치른 뒤인 거 같아요. 여기는 대체…….”
-전쟁터입니다.
유현의 차분한 목소리가 강혜림의 머릿속에 뚜렷하게 울려 퍼졌다.
-중세의 끝과 함께 근세의 시작을 고했던, 역사에서 손꼽히는 공성전.
15만이 넘는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동로마 제국의 종지부를 찍었던 최후의 전쟁.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