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아는 주인공들-27화 (27/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27화

백서련과 강혜림은 금방 친해졌다.

어딘가 순박하고 어벙한 면이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범인(凡人)들과는 다르게 자신만의 특출 난 재능이 있다는 점이 비슷해서일까?

둘은 오늘 처음 만났음에도 벌써부터 언니 동생 하고 있었다. 참고로 강혜림이 언니였다.

“계약은 이 정도로 해 두면 되겠군요.”

나는 계약서에 서명을 끝내며 말했다.

백서련에게 있어서 나와 강혜림은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최대한 양보할 수 있는 수준에서 계약 조건을 내걸었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지금까지 가만히 지켜보던 강혜림이 물었다.

“흐음. 서련아. 매니저는 주로 어떤 일을 해?”

나이만 따지면 강혜림이 백서련보다 연상이라 그녀는 편하게 말을 놓았다.

그녀는 아직 이쪽 바닥의 일을 모르기에 궁금한 눈치였다.

“아. 일단, 저희는 컬렉터들이 자신의 주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뒤에서 보조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천체주식회사 텔러로 치자면 지원실의 역할과 비슷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시화실 텔러가 대부분의 일을 자기 혼자서 처리하는 걸 생각하면, 매니저가 할 일은 지원실의 텔러보다 훨씬 더 많다고 볼 수 있었다.

“주 업무는 컬렉터의 스케줄 짜기, 식단 조절, 컨디션 조절, 코디, 약속이나 인터뷰를 대신 잡아주거나 브로커 업무까지 해요.”

“헐.”

강혜림의 입이 떡 벌어졌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엄청나게 많군요. 업무를 분담해 주는 다른 직원은 없습니까?”

“직원이 없어서 제가 다 해야 돼요. 걱정 마세요. 할 줄 아니까. 따로 사무실 차리기 전에는 꽤 이름 있는 클랜에서 일했었거든요. 거기 사람들과 안 맞아서 좀 하다가 때려치웠지만, 배운 건 많아요.”

그 배운 것들이 방금 열거한 것들인가.

그야말로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업무량이 따로 없다.

나와 강혜림이 아연한 표정을 짓자 백서련은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통달한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죄송해요. 사실 운전 같은 것도 제가 해야 하는데, 사무실 구하느라 차를 살 돈이 없어서…….”

“……운전도 하실 줄 아십니까?”

“아, 네. 일단 1종 보통이랑 대형 면허증은 있거든요.”

아니, 보통은 그렇다 쳐도 대형 면허증은 왜? 트럭 운전이라도 하시려고?

아담한 체구와 앳돼 보이는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스펙에 아무리 나라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건 뭐 더 없습니까?”

“음. 굴삭기 운전 기능사도 있기는 해요. 용접도 할 줄 알고요.”

“네?”

“혹시라도 이 일 못 하고 때려치우려면 따로 먹고살 방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인제 와서 어디 회사 들어가긴 글렀으니, 공사판에라도 들어가야죠. 뭐.”

“…….”

어찌 됐든 백서련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매우 유능한 인재였다. 저 정도의 업무를 처리할 능력을 지녔다는 것부터가 대단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연예인 매니저도 운전 따로, 스케줄 따로 있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하긴, 보통 그런 곳은 대형 클랜이나 가능한 거고 소형 매니지먼트는 어쩔 수 없으려나.

백서련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아, 아무튼 저 열심히 할 수 있어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도 믿으니까요. 그리고 서련 씨 혼자서 저 일을 다 처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상세계의 선택이나 다른 컬렉터의 섭외, 그 외에 스케줄 관리 등은 제가 맡을 테니까요.”

“네? 보통 텔러가 그렇게까지 하나요?”

백서련도 이쪽 바닥에서 일을 했으니, 알고 있을 것이다. 텔러는 사실상 컬렉터와 계약만 맺을 뿐. 그 외의 것들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텔러들이 신경 쓰는 것은 자신의 서재에 얼마나 많은 시청령이 방문하는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많은 포인트를 후원하는가? 가 전부다.

컬렉터와의 유대감을 키운다거나, 그들을 뒤에서 밀어 주듯 도와주는 일은 전혀 하지 않는다. 물론, 그건 일반적인 텔러의 경우에만 그런 거고.

“제가 좀 특이하거든요.”

“아, 역시.”

“……바로 수긍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앗! 죄송해요!”

“아뇨. 괜찮습니다. 뭐, 이런 거로 얼굴 붉힐 정도는 아니니까요.”

저것도 천연이라면 천연이겠지. 그리고 하는 행동을 보면 강혜림과 비슷해서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한다면 강혜림이 더 했지.

“어찌 됐든 아직 혜림 씨가 명성을 쌓지 못한 상태이니, 당장 필요한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도 제가 따로 할 일이 뭐 없을까요?”

“지금은 없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생기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매니저가 바빠지는 건 자신이 맡고 있는 컬렉터가 점점 인기가 생겼을 때다. 물론 인기가 없을 때는 어떻게든 인지도를 끌어 올리는 일을 하겠지만, 여기서 그건 내 역할이다.

지금은 컬렉터들 사이에서만 강혜림의 소문이 퍼졌겠지만, 조만간 사상세계를 클리어 하는 여성 컬렉터의 소문이 일반인들 사이까지 나돌게 될 거다.

그 소문의 근원지가 강혜림이라는 걸, 모두가 알게 되는 데까지 얼마 걸리지 않으리라.

그때가 되면 백서련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거다. 오히려 지금 있는 이 여유를 즐기는 편이 더 나았다.

‘어차피 혜림 씨의 성장세를 살피면, 조만간 진짜배기에 하나 도전해야 하니까.’

그리고 그것을 기점으로 그녀가 제대로 된 명성을 떨치게 될 거다.

동시에 하이에나들이 이쪽을 노리고 오게 되겠지.

물론, 지금 당장에 이쪽을 노리는 자들도 없지는 않다. 어느 정도 남다른 안목을 지녔다거나, 눈치가 빠른 녀석들은 벌써부터 내 밥그릇을 넘보고 있었으니까.

그 진풍이라는 녀석도 그럴 테고.

‘그러고 보니, 녀석도 슬슬 뒤에서 몰래 행동을 할 거 같은데.’

진풍의 성격상 내가 한번 크게 꼽을 줬다고 곧바로 상사에게 가서 일러바치지는 않을 것이다.

쓸데없이 자존심이 강한 녀석의 성격을 생각하면, 일단은 윗선에 알리지 않고 자기 선에서 일을 처리하려고 고집을 부릴 게 분명했다. 깨진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은 덤이고.

‘그때가 되면 더 재미있어지겠어.’

오히려, 나는 부디 녀석이 무슨 수작질을 부려 주길 바랐다.

그래야 그것을 역으로 먹어 치워서 이쪽이 성장할 원동력을 얻게 될 테니까.

* * *

진풍이 뒤에서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을 거라는 유현의 생각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젠장.”

자신에게 주어진 [관조자의 방]에 틀어박힌 진풍은 제네시스 네트워크를 살피며 이를 악물었다. 얼마 전 자신을 향해 폭언을 퍼붓던 유현의 모습이 뇌리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잊으려 할수록 그 반동으로 유현의 비웃음 어린 눈빛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으아아! 개 같은 놈!”

그걸 떠올리자, 진풍은 차오르는 화를 견딜 수가 없어서 씩씩거렸다.

“뭐? 감히 펜타그램 부서에 소속된 내게 꺼지라고? 선배 취급도 해 주지 않을 거라고?”

진풍은 그 말에 분노했다. 딱히 유현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지만, 진풍은 애초에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을 머리에 넣어 놓고 다니지 않았다.

그저 유현이 전부 다 잘못했고, 그 건방진 녀석을 어떻게 해야 혼내 줄 수 있을까 하는 궁리만 가득했다.

복수.

그래, 녀석에게 복수해야 한다.

진풍은 그렇게 정했고 그래서 방법을 찾는 중이었지만.

‘쉽지 않다.’

단 2번의 시화. 아니 이번에 새로 추가된 3번째의 시화를 통해 유현의 서재는 벌써부터 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재능이 넘치는 컬렉터와 그녀를 완벽하게 보조해 주는 뛰어난 수완의 텔러.

그들이 펼치는 이야기는 영웅담에 목이 마른 성령들을 만족시키기 충분했고, 벌써부터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당장 진풍이 살피고 있는 제네시스 네트워크의 게시판만 봐도 그랬다.

[이번에 막 정사원 달았는데, 시화 대박 낸 텔러 있다는 게 참트루?]

[거짓말 아님? 아니면, 뭐 대박 기준이 다른가?]

[ㄴㄴ첫 시작도 그런데 2번째 시화에서 시청령 100명이 넘었다더라.]

[응. 그거 주작이야.]

[주작 아님. 증거 있음 ㅅㄱ]

[나도 궁금해서 보니까, 구독령 비율이 시청령의 7할이 넘던데?]

[와ㄷㄷ 그게 가능한가? 보통 비율 35퍼만 넘어도 유지 잘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사기 소리 듣지. 하. 나는 2년 동안 허드렛일 도맡으면서 해도 겨우 시청령 50따리인데. 누군 2번째에 100이 넘냐.]

[ㅉㅉ그러니까 노오력을 했어야지.]

[윗놈 노오력은 무슨 정사원 게시판에서 그걸 찾고 있네. 여기 너나 나나 다 똑같은 놈들 아님? 100따리는커녕 50따리도 고마운데?]

[시화 3회 만에 시청령 세 자리 찍은 신입은 우리랑 똑같은 놈은 아니지 ㅋㅋㅋㅋ]

[ㄹㅇㅋㅋ 조만간 바로 진급해서 우리보다 높게 설 텐데 미래의 선배님 아님?]

[나 아는 선배님이 말씀해 주셨는데, 그 텔러 첫걸음 미션 때 3분도 안 돼서 완전 변신 끝냈다 카더라.]

[진짜? 어디서 이상한 헛소문 주워들은 거 아니지?]

[아, 그거 나도 들었음. 그래서 입사식 때 다들 눈에 불 키고 찾아다니던데? 와, 근데 설마 동일 인물일 줄이야. 역시 재능이 갑이구나.]

[여러분들도 노오오력을 하면 할 수 있습니다.]

[응. 노력해도 안 되죠? 대리도 못 달고 아직도 사원이죠?]

익명성이 보장되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정사원 게시판은 이미 유현의 소문으로 가득했다.

무엇보다 유현이 가지는 명성은 단순히 사원 게시판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분명, 위쪽 게시판에서도 난리가 났을 거다.’

아직 사원밖에 안 되는 진풍은 대리, 과장, 차장급 게시판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유현의 존재감은 다른 게시판을 살피지 못하는데도 그 여파가 느껴질 정도로 컸다.

아마, 성령들이 모이는 게시판에서도 지구에 새롭게 생긴 서재에 대한 소문이 알게 모르게 천천히 퍼지고 있을 것이다.

‘제길! 누구는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진풍은 질투심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미운 놈이 잘 나가기까지 한다는 소식에 이가 갈렸다.

‘나를 무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주마.’

진풍은 그 나름대로 경쟁을 거쳐 오며 여기까지 버텨 왔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상대방을 흔들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유현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안 된다. 애초에 그와 유현은 대등한 직급이었다. 그렇다고 남에게 사주하자니, 텔러는 [제네시스의 가호]를 받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보복의 대상은 다른 쪽으로 바뀌기 마련이었다.

‘그 계집 컬렉터를 거꾸러뜨린다.’

시화에 있어서 컬렉터의 존재는 필수 불가결이다.

컬렉터에게 문제가 생긴다? 그렇게 되면 시화도 망치고, 기껏 상승세를 타던 유현의 서재는 수직으로 하락하게 될 것이었다.

타겟이 강혜림을 향해 바뀌게 되자 진풍은 머리를 굴리며 계획을 짰다.

어차피 본인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다. 적당히 말로 꼬시기만 해도 대신 일을 처리해 줄 녀석들은 얼마든지 널렸으니까.

‘그래. 여기서 찾으면 되겠군.’

진풍은 사람들이 잘 살피지 않는 컬렉터 게시판을 뒤지며 눈을 빛냈다.

* * *

백화 매니지먼트와 계약을 하고서 일주일이 지났다.

그 사이에 강혜림은 2개나 되는 사상세계를 추가로 클리어 했다. 난이도는 높지 않았지만, 클리어 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법이다.

강혜림은 이로 인해 컬렉터 등급이 상승해 종7품까지 올랐다. 최중모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덕분이었다.

이제는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강혜림이라는 이름이 조금씩이지만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종9품 때부터 단신으로 사상세계를 클리어 하는 데 성공한 불세출의 신인.

당연히 사람들은 소문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성령들도 마찬가지였다.

‘시청령의 수가 벌서 200을 넘어서다니.’

얼마 전까지 100을 넘었던 것을 생각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세였다. 누가 보면 고작 100명 정도 더 늘어난 거겠지만, 바꿔 말하면 2배나 늘어난 거다. 그 차이가 체감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초기에 보였던 폭발적인 증가율이 슬슬 완만해지기 시작했어.’

나는 서재의 주인이었고, 서재에 얼마나 시청령들이 방문하는지. 또 그들이 구독을 얼마나 하는지에 대한 지표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내게 조금이지만, 활활 타오르던 인기가 천천히 식어 가는 징조가 보였다.

‘여기서부터 3차 고비로군.’

첫 관심을 모으는 1차와 그러한 관심을 바탕으로 치고 올라오는 2차는 무난하게 넘겼다.

하지만, 중요한 건 바로 이 다음이었다. 성령들은 처음에는 내가 보여 주는 시화가 신박해서 좋아했지만, 이것도 몇 번 하다 보면 적응이 되고 질리기 마련이었다.

즉 정체야 당연히 생기기 마련이었고, 그것을 타파하기 위한 전환점이 필요했다.

중요한 건 바로 3차 고비. 여기서 성공을 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갈 수 있는지 없는지가 갈린다.

‘그리고 오늘, 그것을 보여 줄 차례지.’

내가 오늘 선보일 것은 이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도박 수였다.

그걸 위해서 ‘특별한’ 사상세계를 고르기까지 했으니까.

그렇기에 내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빛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