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26화
[백화 매니지먼트]
온갖 다양한 이름의 매니지먼트의 사이에서도 별로 특출날 것이 없는 곳이었지만, 내게는 달랐다.
그리운, 그러면서도 기억하기 싫은.
그런 모순적인 정취가 느껴지는 이름.
“여깁니다.”
“네? 여기가 눈여겨봤다는 거기에요?”
“네. 올라가죠.”
나는 강혜림을 이끌고 백화 매니지먼트 사무실을 향했다. 위치는 2층인 데다가 사무실의 문은 작고 초라했다. 아마, 내부도 넓지는 않겠지. 이 큰 건물에 수십 개가 넘는 매니지먼트가 벌집마냥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곳이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똑똑.
“계십니까?”
내가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후르릅! 자, 잠시 만요!”
뭘 먹고 있는지, 급하게 후루룩거리는 소리와 다급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와 강혜림은 서로를 슬쩍 보고는 다시 굳게 닫힌 문으로 시선을 향했다.
안쪽에서 꽤나 큰 거사를 치르는지,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를 5분.
모든 정리가 끝났는지, 닫혔던 문이 열렸다.
“누구세요?”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민 것은 앳돼 보이는 여성이었다.
어깨까지 살짝 닿는 보브컷에 눈동자는 크고 동그랗다. 조금 전까지 라면을 먹고 있었는지, 입가에 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본인은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어딘가 어벙하고 모자란 모습보다도 나를 놀라게 만든 것은 그녀가 예전에 봤던 모습과 거의 변함이 없다는 점이었다.
‘아니. 분위기는 그때와 확실히 다르군.’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종말이 벌어지고 나서 몇 년 이후였다. 외향적인 부분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했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크게 차이 났다.
적어도 내가 알던 그녀는 이렇게 얼빠진 표정은 지어 보인 적이 없었다.
‘하긴. 그때는 온갖 험한 꼴을 보고 겪어 왔으니, 지금이랑 다른 게 당연한가?’
이렇게 가만히 서 있는 것도 예의는 아닌지라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이곳이 백화 매니지먼트가 맞습니까?”
“네. 그런데요. 혹시 무슨 볼일이라도……?”
그녀는 경계감과 기대감이 반쯤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나보다는 오히려 내 곁에 선 강혜림을 향해 있었다. 단번에 컬렉터라는 걸 알아본 것이다.
나는 그녀의 기대를 부응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저희 쪽 컬렉터님께서 매니지먼트를 구하고 있었거든요.”
“잘 오셨습니다!”
반만 열렸던 문이 완전히 개방됐다.
나와 강혜림은 그녀의 안내를 따라 사무실에 들어섰다. 바깥쪽에서 봤듯 안쪽은 좁고 단출했지만, 관리를 꾸준히 하는지 상당히 깔끔했다. 사무실 전화기와 업무 처리용 컴퓨터, 그 외 잡다한 서류들까지.
구석에 쌓여 있는 컵라면 빈 용기는…… 못 본 거로 하자.
우리는 사무실의 중앙에 마련된 자리에 마주 보듯 앉았다.
“저희 백화 매니지먼트에 들어오시겠다고 하셨죠? 우선 자기소개부터 할게요. 저는 이 백화 매니지먼트의 대표인 백서련이라고 해요.”
“무려, 대표님이시군요.”
“……저밖에 없지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하자, 그녀는 살짝 움츠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무거워졌지만, 백서련은 애써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괜찮아요! 앞으로 바뀔 테니까요! 아무튼, 여러분께서 여기에 찾아오셨다는 건 저희 매니지먼트와 계약하고 싶으셔서 그러신 거죠?”
“네. 계약을 원하시는 건 여기 이쪽입니다.”
내가 강혜림을 소개시켜 주자 강혜림은 고개만 살짝 까닥이는 거로 답했다. 시크한 사람인가? 백서련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자, 나는 강혜림을 툭 치며 말했다.
“혜림 씨. 여기서는 굳이 콘셉트 잡으실 필요 없습니다.”
“아, 그래요? 에구. 다행이다. 안 그래도 오늘 진 다 빠졌었거든요.”
“헤?”
순식간에 태도를 바꿔 버리는 강혜림의 모습에 백서련이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뭐, 그 기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다. 강혜림은 겉모습만 보면 그야말로 이상적인 컬렉터의 모습이었으니까. 눈빛은 날카롭고 이지적이고, 냉철한 외모는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긴다. 괜히 입만 꾹 다물면 검후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백서련이 곁눈질로 강혜림을 힐끔 본 것도 외모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 속마음만 놓고 보면, ‘세상에 저런 컬렉터가 내 사무실에 찾아오다니!’라며 기뻐하지 않았을까?
뼈아픈 진실을 보여 준 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여기로 하실 건가요?”
“여기 말고는 없어요.”
“저기…….”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우리 둘을 보더니, 백서련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혹시 두 분 관계가 어떻게 되나요? 일단 그, 이쪽 분은 컬렉터인 건 알겠는데. 남성분께서는…….”
“어떻게 보이십니까?”
나는 문득 장난기가 들어 그렇게 물었다. 궁금하면 맞춰 보라는 듯.
내 물음에 백서련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컬렉터는 아니신 것 같아요. 컬렉터라면 괜히 다른 사람을 소개시키려고 여기까지 함께 찾아올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어디 다른 클랜이나 다른 매니지먼트 소속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닌 거 같아요.”
“이유는요?”
“일단, 그쪽 분의 태도가 여유로운 게 커요. 보통 다른 데서 염탐을 왔다고 생각하면 분석을 하려고 하던가, 아니면 깔보고 무시하기만 하거든요. 하지만 일반인 같지도 않아요. 두 분이 친한 사이인 것도 그렇지만, 자연스레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부분에서 평범하다고는 느끼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백서련은 말을 하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마치 이걸 말해도 되나 고민하는 눈치였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의견을 듣고 싶어서 그렇거든요.”
“혹시…… 텔러신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그 뭐라고 해야 할까…… 분위기가, 그냥 그렇게 느껴졌어요.”
분위기가 그렇다?
내가 눈썹을 꿈틀거리자 백서련이 황급히 설명을 이었다.
“그러니까 보통 텔러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잖아요? 물론 성격이 일반적인 텔러들과는 다르기는 한데,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요. 대충 보면 모르겠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마치 이 현실과는 어딘가 동떨어진 것 같은 묘한 기운이 있거든요. 그래서…… 텔러라고 생각했어요. 만약, 틀렸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백서련 씨 말이 맞으니까요.”
“네?! 그렇다면…….”
“네. 맞습니다. 저는 천체주식회사 시화실 소속 텔러, 강유현이라고 합니다.”
내가 순순히 인정하자, 백서련은 황망한 표정이 되었다. 설마, 컬렉터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텔러까지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세상에.”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백서련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나지막이 감탄했다.
‘좀 놀랍네. 최중모도 내가 텔러라는 것은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었는데. 그녀는 나를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는 건가?’
재능, 혹은 본능의 영역에 가까운 안목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어느 정도 객관화시켜서 구분할 줄 알기까지.
‘역시…… 괜히 미래에 빛을 보는 게 아니었군.’
나는 문득 전생의 일을 떠올렸다.
백화 매니지먼트. 지금은 이렇게 불리지만, 그녀는 훗날 종말 이후에 사람들을 이끄는 거대한 조직인 백화단을 이끄는 수장이 된다.
뛰어난 판단력과 안목, 그리고 사람을 이끄는 카리스마로 수장의 자리까지 올라간 케이스였다. 모든 것이 힘으로 지배되는 그때를 생각하면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만큼 그녀가 보여 준 능력이 출중하다는 소리다.
그리고.
나는 살짝 가라앉은 시선으로 백서련과 강혜림을 살폈다.
그녀들은 조금 전부터 묘하게 서로를 살피며 호기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오늘이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도, 어딘가 오랫동안 만나 온 친구를 마주하는 느낌.
본인들은 그게 신기한지 의아한 눈치였지만, 제삼자인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옛날 검후도…… 종말 이후에 백화단에 소속되어 있었지.’
물론, 나는 종말 이후에 검후를 본 적이 없다. 종말 이전, 그녀가 유명한 컬렉터로 활동할 때만 멀리서 어렴풋이 본 게 전부였다. 하지만 소문은 들었다. 검후가 백화단에 소속되어 있다고.
어디 그녀뿐이었으랴. 검후 말고도 나름 종말에서 이름을 날리던 몇몇 사람도 백화단 소속이었다.
먼 미래, 함께 종말을 헤쳐 나가는 동료가 시간을 건너뛰어 다시 만난 것이다.
만일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분명, 그녀들은 서로에게 무언가 끌림을 느끼고 있겠지.
‘잘된 일이야.’
둘이 서로 호흡이 맞지 않았다면 백화단이 종말 이후에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되었을 리가 없다. 게다가 나는 백화단에 몇 번 찾아간 적이 있었고, 그쪽의 분위기가 어떤지도 알았고 있었다.
적어도 백서련과 강혜림은 죽이 잘 맞는 단짝이었다.
뭐, 나도 백서련과도 여러 번 대화를 주고받았고, 나름…… 친하다고 할 정도 사이기는 했다.
지금 그녀가 여기서 백화 매니지먼트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녀가 내게 자신의 옛이야기를 해 줬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백서련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어딘가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다시 그녀를 만나게 된 것에 대한 반가움도 있었고, 그럼에도 그녀는 날 기억하지 못한다는 안타까움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강하게 옥죄는 감정은 바로 ‘죄책감’이었다.
살아 있는 그녀의 모습을, 애써 밝게 웃는 그 모습을 보니 더더욱 그랬다.
왜냐하면, 백서련은.
‘그녀는…… 최도윤에게 살해당했었으니까.’
백서련 뿐만이 아니다. 백화단 자체가 최도윤의 손에 무너졌다.
이유야 간단했다. 백화단이 최도윤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백화단은 종말 속에서도 인간성을 지키며, 모두 힘을 합쳐 세상을 헤쳐 나가자는 주의였다. 굳이 표현하면 정의의 집단이었다.
반대로 최도윤은…… 말 그대로 안하무인, 사이코패스, 일인 군단이었다.
자신을 방해하면 죽인다, 거슬리면 죽인다, 조금이라도 이용해 먹으려면 죽인다.
그냥 머릿속에 ‘죽인다’라는 단어만 입력하고, 출력하는 냉혈한 살인 기계에 가까웠다.
어떻게 보면 백화단과 최도윤의 충돌은 예견된 일이었다. 오히려 그만큼 버틴 게 신기할 정도였다.
나는 최도윤의 사람으로서 어떻게든 백화단과 최도윤의 사이를 최대한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었다.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그 외 잡일은 전부 내 담당이었으니까.
나는 백화단 사람들이 마음에 들었고, 그들은 꼭 이 세상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백화 단주인 백서련과도 친분을 쌓게 된 거였고 말이다.
최도윤과 싸움을 말리려고 찾아갔던 그때, 백서련은 나를 보며 말했었다.
-늦었어. 어차피 네가 사이에 무슨 짓을 해도, 이미 틀어진 사이는 돌아오지 않아.
-그래도……!
-당장은 넘겨도, 분명 머지않은 미래에 다시 충돌하게 되겠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아쉽게 됐네. 이제 너와도 못 만날 거 같으니 말이야.
-…….
-저런 인간성을 상실한 괴물과 지내지 말고, 우리 쪽으로 오는 게 어때? 너라면 내가 잘해 줄 수 있어.
나를 향한 호의였을까, 아니면 악명이 자자한 최도윤의 팀 중에서 그나마 내가 인간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녀는 내게 자주 그런 제안을 하고는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었다. 내게 있어서 최도윤이야말로 가장 튼튼한 동아줄이었고,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으니까.
결국,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백화단과 최도윤의 사이는 최악으로 치닫고 말았다. 애초에 둘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었다. 중간에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결국 벌어질 일을 미루기만 할 뿐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은…….
“유현 씨? 유현 씨 괜찮으세요?”
“아.”
강혜림의 목소리에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아까부터 계속 멍 때리시기에.”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요.”
“전 또 갑자기 어디 아프신 줄 알았어요. 그래서 어쩌실 거예요?”
“계약해야죠. 그럴 생각으로 찾아왔으니까요.”
나의 말에 백서련의 눈동자에 감동이 차올랐다. 아마 지금의 그녀는 사무실을 차렸지만, 사람은 오지도 않고 어쩔 줄 모르는 상태였을 거다.
그런 상태에서 텔러와 계약을 한 컬렉터가 한꺼번에 찾아왔으니, 기뻐 날뛰어도 이상할 건 없었으리라.
‘그래. 결국, 다 과거의 일이야.’
지금의 백서련은 내가 알던 백서련과는 다르다. 하지만 그녀가 지니고 있는 재능은 그리고 앞으로 보여 줄 뛰어난 수완만큼은 확실히 믿을 수 있었다.
백서련을 향한 개인적인 동정심이 나를 여기로 이끌었을지언정, 그녀를 선택하게 만든 것은 결국 그녀의 능력이었다.
“저희는 백화 매니지먼트와 계약하겠습니다.”
“네! 환영합니다!”
계약 조건은 따지지도 않고 곧바로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모습을 보니, ‘그래도 확실히 경험이 미숙하기는 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던 그녀였다면 의심부터 하고 봤을 텐데 말이다.
이제 앞으로도 함께 지낼 사이가 됐으니, 나는 백서련에게 궁금한 것이 있어서 물었다.
“혹시 서련 씨는 꿈이 있습니까?”
“꿈이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는데도, 그녀는 진지하게 고민하며 답을 내놓았다.
“그냥…… 돈을 왕창 버는 거요.”
“그렇군요.”
대체 왜 강혜림과 죽이 그렇게 잘 맞나 했더니, 꿈도 비슷했구나.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그저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문득, 전생의 일이 떠올랐다.
-백화 단주님은 뭘 하실 겁니까?
-우리가 알고 지낸 사이도 하루 이틀 아닌데, 그냥 이름으로 불러. 그래서 뭘 하고 싶냐고?
-언제까지 이 지긋지긋한 시련만 하다 죽을 건 아니잖습니까. 언젠가는 시련도 끝나고, 세상이 다시 예전처럼 살기 좋아지겠죠.
-살기 좋아지기는. 나는 종말 이전 세상도 그렇게 좋지는 않았어. 뭐, 그래도 나중에 굳이 뭘 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그때의 그녀는…… 퇴폐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었다.
-그냥, 돈을 왕창 벌고 싶네.
역시나, 내가 알던 그녀다운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