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25화
최중모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가는 걸 느꼈다. 주변에 가득 차오르는 메시지가 어지러운 그의 정신을 더욱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꽉 쥔 주먹에 식은땀이 차오르는 걸 느끼며 최중모는 눈알을 굴렸다.
‘대체, 언제부터?’
아니, 애초에 이것은 잘못된 의문이었다.
처음부터다.
눈앞의 남자, 강유현은 처음부터 이 상황을 상정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나를 은근히 떠봤던 것도, 옆에 있는 여성 컬렉터를 대신해서 나선 것도, 제 화를 못 이겨 감정을 드러낸 것도 전부다.’
그가 계산 한 대로 흘러가고 있던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최중모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고 피부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는 뻐근한 뒷덜미를 어루만지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의 가장 큰 패착이라면 역시, 상대방의 진짜 정체에 대해서 몰랐던 것이었다.
‘그냥 컬렉터를 돌봐 주는 매니저라고만 생각했다. 컬렉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대신 나선 행동도 그렇지만, 협상에 능했어. 누가 봐도 텔러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지.’
강유현이 처음 보였던 공손한 모습이 텔러라는 의심을 씻은 듯이 지워 버렸다. 애초에 텔러라고 밝혀도, 진짜인가 의심했을 것이다.
텔러들은 오만하다. 그들은 중계의 존재로서 하계에서 활동하는 인간들을 우습게 여기고, 깔보는 경향이 컸다. 본인들이 갑이라 생각하고 거만하게 굴었다.
최중모가 봐 온 텔러라는 종족은 그러했다.
하지만, 유현은 그러지 않았다.
외향은 말할 것도 없었고, 행동과 말투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그는 너무나도 감쪽같았고, 그렇기에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저런 텔러가 있었다고?’
깜빡 속은 입장에서는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최중모가 아니더라도,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가 서 있어도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최중모는 자신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자신의 목을 옥죄게 됐다는 걸 제외하면 말이다.
‘여, 여기서 어떤 변명을 해야…….’
그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오해라고 잡아뗄까? 아니다. 오히려 그랬다가는 더 거센 비난을 받고 만다. 이미 그는 외통수에 몰렸다. 여기서 그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이 판도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성령들은 이미, 이 상황을 전부 다 지켜보고 있었다.
최중모가 하계의, 그것도 한국 정부나 그 산하 협회를 등에 업고 있다면 유현은 그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존재를 등에 업고 있었다.
‘아, 안 돼.’
막대한 역사와 이야기를 지닌 초월적인 자들은 유현의 편이었다. 심지어 이 상황의 명분조차 저쪽이 위였다.
저들에게 협회의 이미지가 나쁘게 찍힌다면, 그리고 성령들의 사이에서 그런 소문이 빠르게 퍼진다면.
그것은 최중모 뿐만이 아니라, 협회에 소속된 모든 컬렉터의 문제로 번지고 만다.
이야기가 현실화되는 지금 세상에서 나쁜 소문만큼 위험한 건 없었다.
‘방법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최중모는 빠져나갈 구멍을 찾으려고 했다.
그는 분명 궁리하면 어떻게든 활로가 열리게 될 거라고 굳게 믿었다.
‘아.’
하지만 그런 생각은 유현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너무나도 쉽게 허물어지고 말았다.
이쪽의 마음속 구석까지 꿰뚫어 보는 검은 눈동자.
그것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휘어진 그의 눈동자 사이에 보이는 눈빛은 마치, 그의 영혼까지 쥐어 짜내려는 거인의 손아귀 같았다.
최중모는 전신에 탈력감이 밀려왔다.
‘방법이…… 없다.’
최중모는 다리에 힘이 풀려 소파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상대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자, 유현은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중모 씨가 똑똑해서 다행이네요.”
자리에서 일어난 유현은 최중모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여 주었다.
그러나, 최중모에게 있어서 유현의 손길은 마치 거인이 두드리는 것마냥 무겁게 느껴졌다.
최중모는 떨리는 눈동자로 유현을 올려다보았다. 역광 때문에 유현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샐쭉 휘어진 그의 눈매만은 확실하게 보였다.
꿀꺽.
최중모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유현이 말로는 똑똑해서 다행이라고 했지만, 절반은 사실이고 절반은 거짓이었다.
‘사실, 더 멍청한 인간이기를 기대했는데.’
최중모는 머리가 워낙 좋다 보니, 자신의 패배를 깔끔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이쪽이 바라던 결말이기는 한데, 조금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여기에 더 멍청한 인간이 앉아 있었다면, 그리고 그가 자신의 패배를 시인하지 않고 추하게 잡아떼려고 했다면.
‘그랬다면 더 뜯어 갈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
그런 유현의 속내를 모름에도 최중모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는 요 몇 분 사이 수년은 흐른 것처럼 수척해져 있었다.
최중모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이미, 설명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랬……었죠. 네. 사상세계 클리어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해 드리겠습니다.”
원래는 그래서는 안 됐지만, 지금 터져 나오는 성령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최중모는 바보가 아니었다. 고작 이걸로 셈을 맞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두 분께는 제 무례에 대한 추가 보상을 따로 해 드리겠습니다. 제 모든 것을 걸고.”
“하하하. 그렇게까지 해 주시지 않으셔도 되는데. 뭐, 본인이 좋다고 하니까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죠?”
유현은 거기까지 말하고, 이제는 한번 물러날 때라고 느꼈다.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몰아세우면 반드시 역풍을 맞게 된다. 적당히 치다가 빠질 타이밍을 잘 잡을 줄 알아야 했다.
“성령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이번 한 번은 성의를 봐서라도 넘어가 주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입니다만.”
강유현의 말에 실시간으로 성령들이 반응했다.
[대다수 성령이 그렇게 하자며 동의합니다.]
[소수의 성령이 아직 부족하다며 항의합니다.]
물론 일부 성령들은 건방진 협회를 어떻게든 찍어 누르자고 외치고 있었지만,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뭐. 그래도 성령들의 호응을 이끌어 낸 것은 참 다행이었지.’
유현의 서재에 모인 성령들은 무엇보다도 영웅담을 바라는 자들이었다.
영웅담의 기본 골조가 무엇인가? 고난과 역경, 그리고 극복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성령들이 강혜림이 고난에 처하는 걸 반긴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목표를 위해 피할 수 없는 벽에 부딪히는 건 어쩔 수 없으니 이해하겠지만, 이렇게 사람에 의해서 발생하는 인위적인 벽은 고구마를 먹는 것처럼 싫어했다.
답답한 걸 싫어하는 성령들은 자극적인 이야기를 좋아했고, 그들은 언제나 막히지 않고 승승장구하는 것을 바랐다. 사이다를 마시는 것처럼 말이다.
유현은 그런 성령들의 성향을 이용해서, 최중모를 악역으로 찍고 그를 몰아세운 것이었다.
‘그래도 대부분이 사리 분별을 할 줄 알아서 적당히 물러나 줬길 다행이지.’
유현이 최중모에게 한 방 먹여 준 덕분에 성령들의 불만을 크게 잠재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일부 극성맞은 성령들은 최중모를 찢어 죽이라니, 협회를 뭉개 버리라니 터무니없는 요구하고 있었다.
유현은 그런 소수의 의견을 묵살했다. 오히려, 지나치게 과도한 메시지를 남발하는 일부 성령들을 블락(block)을 먹이기까지 했다.
‘어차피, 모든 성령을 만족시킬 수 없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99명이 좋아해도, 1명은 싫어할 수 있었다. 결국은 취향의 차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 1명이 싫다고 짜증을 내며 활개 치는 것을 놔둘 생각도 없지.’
분위기라는 것이 그렇다.
다수가 침묵하면 소리치는 소수가 결국 눈에 더 띌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들의 도를 넘은 메시지는 다른 성령들에게 거슬리게 느껴질 수도 있으니, 차라리 이렇게 놔둘 바에는 깔끔하게 쳐 내는 것이 나았다.
‘앞으로의 서재 분위기를 생각해서라도 이게 옳아.’
블락을 먹은 성령들에게는 안된 일이었지만, 유현에게는 그들을 잘라 내는 것이 나무의 곁가지를 쳐 내는 것처럼 필요한 일이었다.
어디에도 휘둘리지 않는 자신만의 서재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로 한 일이었다. 괜히 그가 사탄의 서재 후원 제안을 거절한 것이 아니었다.
‘어찌 됐든 일은 잘 마무리됐군.’
사실, 보상을 따지면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강혜림이었다.
사상세계 클리어 보상은 엄연히 컬렉터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며, 그것은 대부분 현금 같은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유현이 얻은 게 없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었다.
[다수 성령이 당신이 보여 준 협상을 마음에 들어 합니다.]
[300TP를 후원받았습니다.]
[100TP를 후원받았습니다.]
[100TP를 후원받았습니다.]
…….
‘사상세계에서 환상체를 잡는 걸 보여 주는 것만이 시화의 전부는 아니지.’
협회에 찾아가 최중모와 거래를 통해 담판을 짓는 것도 성령들에게 큰 볼거리였다.
물론 이번 시화에서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유현이었지만, 강혜림의 캐릭터성을 지켜 주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유현이 앞장서서 그녀를 변호해 주고, 최중모를 몰아세우는 것이 또 성령들에게는 좋게 다가왔다.
‘언제까지 컬렉터에게만 시화를 다 맡길 수는 없는 법. 텔러도 발품 팔아야지.’
지금까지 텔러들은 컬렉터들을 단순히 보여 주기만 할 뿐, 그들과 어떠한 교감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렇게 활동하는 텔러의 모습은 성령들에게 있어서 어딘가 신기하고 새롭게 느껴진 것이었다.
그러한 호평이 포인트의 후원까지 이어졌다.
“그럼, 오늘 안으로 계좌에 돈을 넣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도록 하죠.”
이미, 한번 크게 깨진 최종 모는 놀라울 정도로 고분고분해졌다. 여기서 그가 무슨 발악을 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유현이 자신보다 훨씬 더 고단수라는 것까지.
“아, 참.”
자리를 떠나려는 유현이 막 떠올랐다는 듯 그런 소리를 냈다.
최종 모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 이상한 건 아니고. 혹시 여기서 사람 하나 찾을 수 있을까 해서요.”
“……누굴 찾으시는 겁니까?”
협회는 기본적으로 컬렉터와 관련된 업무를 하지만, 그래도 국가의 기관이다 보니. 시, 구청이 하는 업무도 어느 정도 대신 해 주기도 한다.
물론 주 혜택을 받는 자들은 컬렉터들이지만, 유현의 부탁을 들어준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으리라. 굳이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고 말이다.
“혹시 컬렉터 중에서 최도윤이라는 사람 있습니까?”
“최도윤? 처음 듣는 이름이군요. 컬렉터가 맞습니까?”
“컬렉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저도 자세한 건 몰라서요. 다만, 나이는…… 흠 지금이라면 18살에서 19살 정도 됐겠군요. 키는 한 184는 될 거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얼굴이 연예인 뺨치게 잘생겼습니다.”
그렇게 설명하는 유현은 어딘가 싫은 것 같으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눈치였다.
“아무튼, 혹시라도 알아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료는 제네시스 네트워크를 통해 보내 주시면 됩니다.”
유현은 즉석에서 [제네시스 네트워크]를 통해 최중모와 연결을 주고받았다.
최중모는 얼떨떨해하면서도 일단 부탁받은 일이니, 들어는 줄 생각이었다. 엿을 먹은 건 먹은 거고, 상대는 텔러지 않은가. 이런 방면을 통해 연줄을 만들어서 그에게 나쁠 건 없었다.
“혹시, 그밖에 다른 특징은 없습니까?”
“음.”
“알려 준 거로도 충분하지만, 다른 게 더 있으면 찾는 게 빨라지니까요.”
“다른 특징이라……. 아!”
유현은 머리에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특징을 떠올렸다.
“싸가지가 존나 없습니다.”
“……네?”
* * *
우리가 협회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자 강혜림이 그제야 안도의 숨을 퍼뜨렸다.
“파하! 후으. 진짜 긴장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런 것 치고는 잘 버티시던데요?”
“조금만 실수해도 안 된다고 생각해서 필사적으로 연기했거든요. 진짜 분위기 엄청 숨 막히던데. 흐유. 힘들다.”
“잘하셨습니다. 다만, 안심은 못 시켜드리겠군요. 앞으로도 자주 그래야 하니.”
“히잉. 그냥 평소대로 하면 안 돼요?”
“절대 안 됩니다.”
나는 평소의 강혜림을 떠올리고는 정색하며 말했다.
성령들에게 그녀의 평소 모습을 보여 준다고?
누구 서재 망칠 일 있나.
“어차피 하다 보면 익숙해질 겁니다. 게다가 아까 못 봤습니까? 다들 혜림 씨 보고 웅성거리던 거. 혜림 씨가 한 연기가 제대로 먹혔다는 겁니다. 카리스마 있고, 냉철하며 이지적인 여성. 얼마나 멋집니까?”
“그……런가요?”
“네. 제가 장담합니다. 아마 다들 뒤에서는 혜림 씨가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지 감탄하고 있을 겁니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습니까? 끝까지 밀고 나가셔야죠. 떠올려 보세요. 모두가 혜림 씨를 칭송하고, 혜림 씨는 유명해져서 돈방석에 앉는 겁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돈방석…… 헤헤.”
내 감언이설에 순식간에 풀어지는 강혜림. 정말, 칭찬에 한없이 약한 여자다.
헤실헤실 웃던 그녀는 문득 궁금한 게 떠올랐는지, 내게 물었다.
“그보다 저희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볼일은 다 끝난 거 아니에요? 아! 알겠다. 배고프시구나? 히힝. 좋아요. 오늘은 제가 한턱낼게요. 돈도 벌었겠다, 제가 쏘죠. 아무렴. 전 유망주니까요.”
“턱 한 대 맞고 싶으십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다른 볼일이 있어서 그래요.”
“다른 볼일이요?”
“매니지먼트를 구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아무래도 협회에서 있던 일 때문에 깜빡한 거 같았다.
뭐, 기억하고 있다 하더라도 과연 찾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협회 근처에는 중소규모의 매니지먼트가 아주 많았으니까.
법원 근처에 변호사 사무실이 깔려 있듯, 협회 근처에는 클랜과 매니지먼트가 엄청 많았다.
건물 하나에 간판이 수십 개씩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걸 보면 무슨 현대 미술을 보는 거 같았다.
‘대충 이쯤일 텐데.’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내 기억에 남는 이름을 살폈다.
여러 간판을 살펴보던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어딘가 익숙한 그 이름을 눈에 담는 순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