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아는 주인공들-24화 (24/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24화

나는 앞장선 남자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책을 확인했다.

‘표지와 흘러나오는 빛이 전부 밝은 은색이라.’

금색이 아니라서 안도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금빛은 정말 선택받은 자만 얻을 수 있다는 걸 감안하면 저 중년인은 절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조금 전 상황을 통제하며 이쪽에 깍듯이 대한 것만 봐도 그렇다. 이쪽을 밀어붙이려다가도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자 곧바로 태도를 바꿨다.

‘단순히 타고난 재능이 아닌 오랜 세월 경험이 누적되어 이룩한 경지인가?’

그렇기에 더더욱 조심해야만 했다. 저쪽은 나와 비슷하게 경험이 쌓여서 완성된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방금 시비를 걸어온 고준호를 제압함으로써 퍼포먼스는 확실하게 보여 줬지만, 애초에 나와 강혜림의 목적은 사상세계 클리어의 보상을 받으러 온 것이다.

실리를 취하기 위해서는 저 남자와 담판을 지을 필요가 있었다.

‘최중모. 이곳 협회 본부를 관리, 담당하는 구역 책임자. 임원급은 아니지만, 나름 쌓아 온 짬이 있는 데다가 은퇴한 전직 컬렉터로군.’

그의 책을 통해 얻은 정보로 나는 최중모에 대해서 가볍게 분석했다.

상당한 책략가. 머리가 잘 돌아가고, 상황을 파악하는 눈치가 있다. 감정을 숨기는 데 능한 데다가 전직 컬렉터라 현장의 실태도 잘 꿰뚫고 있다.

그야말로 늙은 너구리라 불리기 충분한 남자다.

“자. 이쪽으로 오시죠.”

최중모가 우릴 안내한 곳은 손님을 맞이하는 객실이었다. 나와 강혜림은 소파에 앉았고, 맞은편에 최중모가 앉았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며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

“저는 최중모라고 합니다. 보잘 것 없지만, 이곳에서 나름 중책을 맡고 있죠.”

“저는 강유현입니다. 이쪽은 강혜림이고요.”

“그렇군요. 두 분께서 사상세계를 클리어 하는 데 일조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둘은 아니고요. 정확히는 우리 아가씨가 혼자서 클리어 했죠.”

“어이쿠. 그러셨습니까? 혼자서 클리어 하셨다니, 여전히 믿기지 않군요.”

말은 가볍게 했지만, 뼈가 있었다. 정말로 강혜림 혼자서 했는지, 묻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혜림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 화제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시하게 굴었다. 그 대신 내가 그녀를 변호하듯 나섰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었죠. 실력을 보여 주기 전까지는.”

즉 너희들이 의심했으니, 실력으로 증명했다는 소리다. 그리고 최중모는 그것을 멀리서 확인을 했다. 많은 사람이 봤으니, 모른 척하기도 그렇겠지.

“흐음. 확실히 그렇겠네요. 그래서 저희에게 바라는 게 뭡니까?”

“바라는 거라뇨. 말씀을 이상하게 하시는군요. 저희는 사상세계를 클리어 한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고 있을 뿐입니다만.”

“흐음. 하지만 어디를 해결했는지…….”

“앙바르 산맥의 코볼트 폐광과 미노타우로스가 기거하는 라비린토스입니다. 확인해 보시면 금방 아실 텐데요?”

나는 의도적으로 말꼬리를 늘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아니면…… 협회에서는 아직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기라도 한 겁니까?”

“…….”

생글거리며 웃던 최중모의 얼굴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물론 그것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나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 나와 강혜림의 겉모습을 보고 방심했겠지. 나이도 어려 보이고, 적당히 말로 타이르면서 일방적으로 휘두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을 거다.

안일하다. 나는 겉으로는 젊어 보여도 미래의 지식을 알고 있는 데다, 그 끔찍한 세계에서 10년을 넘게 버텨 왔다.

나와 그는 삶의 밀도 자체가 달랐다.

“흐음. 그러고 보니, 그런 보고가 들어왔던 것 같았군요. 워낙 허황된 소리처럼 느껴져서 나중에 판단하려고 보류한 상태였었죠.”

최중모는 모른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다른 컬렉터들도 2개의 사상세계가 클리어 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모른다고 하면, 협회의 능력에 의문을 품게 될 수밖에 없게 된다. 훌륭한 처신이었다.

‘혹시라도 모른다고 잡아떼면 바로 그 부분을 물어뜯으려고 했는데, 잘도 빠져나가는군.’

속으로 그런 평가를 하면서도 나는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그러셨군요. 뭐, 이제라도 제대로 알게 됐으니. 다행 아닐까요? 그러니 저희는 사상세계를 클리어 한 보상을 받고자 합니다. 국가에서도 정해 준 정당한 권리 아닙니까?”

나는 일부러 정당한 권리를 강조하며 말했다.

“으음.”

최중모는 잠시 고민에 빠진 기색이었다. 아마 어떻게든 신중하게 할 말을 고르고 추려내며, 이쪽의 요구를 돌려서 거절할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쉽지 않을 거다. 일단, ‘명분상’ 나의 주장은 흠잡을 곳이 없을 정도로 타당했다.

강혜림이 충분히 클리어를 할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 줬고, 거기에 더해서 국가에서 지정한 법대로 정당하게 보상을 요구한 것이다.

어떻게든 보상을 주는 걸 미룰 수는 있어도, 완전히 거절하기는 힘들 것이다.

‘애초에 주도권은 이쪽이 쥐고 있으니까.’

칼을 쥔 건 나다. 그리고 상대는 방패를 들고 그걸 방어하는 중이었다. 애초에 서로 대등한 입장이 아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최중모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흐음. 아무래도 이 안건은 제가 함부로 정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것 같군요.”

그가 고른 선택지는 자신이 멋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일부러 책임 권한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겠다 이건가?

나는 곧바로 반박했다.

“그거 이상하군요. 저희를 이쪽으로 데려왔다는 건 당신이 책임자라는 소리가 아니었는지요. 아니면 설마 자신의 역할도 모르고 멋대로 저희를 불렀다는 소린가요? 협회의 일 처리가 고작 이거밖에 안 됐습니까?”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무래도 다시 살펴보니,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끝날 일입니까?”

최중모는 정말 죄송하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설마 여기서 자신의 자존심을 모조리 버리고, 고개를 숙이며 사과해 올 줄이야. 괜히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게 아니라 이건가.

이렇게 되면 보상을 받는 것이 꽤나 미뤄질 수 있었다. 저쪽은 어떻게든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안 된다며 시간을 끌 것이다.

“흐음. 최중모 씨라고 하셨죠? 그냥,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털어놓죠.”

“솔직하게라면……?”

고개를 슬쩍 들어 올린 그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이쪽이 던진 떡밥에 반응했다.

“뭐, 협회에서 솔직히 저희에게 제대로 된 보상을 주지 않을 거라는 건압니다.”

“아니, 어찌 그런…….”

“서로 간에 내숭은 떨지 맙시다. 녹음기라도 걱정하십니까? 그런 건 없으니 걱정 마시죠. 지금 중요한 건, 애초에 그쪽은 보상을 주기 싫다는 거 아닙니까? 간 보는 건 적당히 하고, 서로 진득하게 이야기해 보자고요.”

‘경계선’을 컬렉터들끼리 정한 불문율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협회의 지분이 전혀 없지는 않다. 아니, 정확히는 국가 자체가 관여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사상세계란 클리어만 하지 않으면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 그렇기에 정부에서 현상 유지를 선택했고, 협회나 컬렉터들도 그것을 받아들였다.

정부와 협회는 귀찮을 일거리를 늘리지 않기 위해서.

컬렉터들은 자신의 안정적인 파밍을 위해서.

하지만 대중들에게 그걸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으니, 그래도 겉으로는 사상세계를 클리어 한 컬렉터에게는 보상을 하겠다고 공표를 했다.

그런데 여기서 나와 강혜림이 대놓고 엿 먹이듯 사상세계를 클리어 해 버렸으니.

협회의 입장에서는 참 난감하게 된 것이었다.

‘주면 안 되는데, 그렇다고 안 주겠다고 뻗댈 수도 없겠지.’

하지만, 결국 그들은 선택을 내려야 할 것이다. 이쪽에서 어쭙잖게 미루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최중모는 잠시 안경을 벗고 두 손으로 눈두덩을 비비더니, 이내 내게 강렬한 시선을 보내왔다. 고작 안경을 벗었을 뿐인데도,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이쪽도 다 까놓고 솔직하게 나오니, 저쪽도 똑같이 나오겠다는 거다.

“유현 씨는 이쪽의 아픈 곳을 적나라하게 찌르시는군요.”

“뭐, 저희라고 사정을 몰라서 사상세계를 클리어 했겠습니까?”

“……뻔뻔하시군요. 지금 당신들은 모두가 입을 다물고 합의한 상황에 찬물을 뿌린 겁니다. 알고는 계신가요?”

“뻔뻔한 게 아니죠. 당당한 겁니다. 사상세계가 왜 존재합니까? 성령님들께 이야기를 보여 주고, 컬렉터의 가치를 증명하며, 그들이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하는 꼴을 보시죠. 전부 그 뜻에 위배되고 있습니다.”

“이게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사상세계가 생성되면 당연히 그것을 분석하는 데 막대한 인력과 돈이 소모됩니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죽을지도 모르죠. 저희는 혹시 모를 인명피해를 막기 위해서 일부러 사상세계를 놔두는 겁니다.”

“그래서 자유로워야 할 이야기를 그대로 묶어 두겠다? 핑계 한번 거창하시군요. 현상 유지로 바뀌는 건 없습니다.”

“바뀌지 않기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역으로 묻죠. 만일 그쪽에서 하는 대로 움직였다가 사람이 죽으면, 그쪽이 책임을 지실 겁니까?”

“저희가 책임을 왜 집니까?”

나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어조로 물었다. 그렇게 나오자 당황한 건 최중모였다.

“예?”

“저희는 그저 컬렉터로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했을 뿐입니다. 그에 따른 보상을 받을지언정 책임을 물어야 한다니, 이상하군요.”

“지금 그게…….”

“말장난하는 거냐고요? 저는 진지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상세계를 탐색하다 죽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애초에 컬렉터라는 직업이 항상 그런 위험을 달고 지내는 거 아닙니까? 그게 무서우면 컬렉터를 왜 합니까? 뭐를 위한 시화고, 뭐를 위한 이야기입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죽든지 말든지. 결국, 제 팔자고 제 능력입니다. 죽음을 추모할 수는 있을지언정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무엇보다 저희는 컬렉터가 할 일을 했을 뿐이고,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박수를 받지 못할망정, 오히려 역으로 핍박하려 드시다니. 이게 이쪽의 방식입니까?”

“말조심하시죠.”

이쪽에서 작정하고 속을 박박 긁으니, 최중모도 점점 감정이 격양됐다.

그는 눈빛만으로 나를 찔러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나는 그런 최중모에게 비웃음을 던졌다.

“제가 왜 말을 조심합니까? 제가 한 말 중에서 틀린 거라도 있습니까?”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그렇게 함부로 말해도 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하, 목숨이 달린 일이라고? 이게 다 사람들을 위한 거라고?

최중모의 말에 나는 그를 향한 짜증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웃기는 소리다.

사람이 죽지 않기 위해라고 말하지만, 결국 그 끝에 얼마나 많은 자가 죽었던가?

너희들이 조금이라도 더 똑바로 처신했더라면, 그 같잖은 손해를 감수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애초에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게 아닌가?

“만약, 사상세계 클리어를 하다 사람이 죽으면 분명 그건 슬퍼할 일이겠죠. 하지만 그게 두렵다고 사상세계를 가만히 놔둔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움직인 겁니다. 지금 컬렉터들은 썩어 빠졌습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도전조차 하지 않는 겁쟁이가 됐죠.”

“당신들은 다르다는 겁니까?”

“네. 다릅니다. 우리는 철저히 주어진 일을 위해 활동합니다. 누구처럼 숨지도, 멈추지도, 그렇다고 남들을 붙잡지도 않죠.”

“……그런다고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신들은 지금 잘못 생각한 겁니다. 그게 주어진 일이다? 그쪽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합니까?”

“흠. 결국, 보상을 주지 않겠다는 말씀처럼 들리네요.”

“잘 들으셨군요. 유현 씨. 당신들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변하는 건 없습니다. 그게 사회고, 그게 시스템입니다. 아셨습니까?”

이쪽이 무슨 말을 해도…… 인가.

뭐, 애초에 순순히 내 말을 들어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나오시는군요. 최중모 씨는 후폭풍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후폭풍? 하, 고작 둘이서 뭘 하겠다는 겁니까?”

“고작 둘이라……. 뭐, 그쪽 입장에서는 고작 둘처럼 보이겠네요.”

“…….”

내 의미심장한 말에 최중모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실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과연 다른 분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다른 분들? 대체, 여기 어디에…….”

“그렇지 않습니까? 성령님들?”

나는 허공에 대고 물었다.

내 말에 최중모는 눈동자를 굴렸다. 워낙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보니, 내가 지금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했는지 깨달은 것이었다.

“당신, 뭘 한 겁니까!”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샬드랄라의 지도자가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냅니다.]

[선술집의 취객이 최중모를 거세게 비난합니다.]

[대다수 성령이 믿을 수 없다며 분노합니다.]

……

…댐을 개방하듯, 뒤늦게 미친 듯이 밀려오는 메시지 창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이, 이게 대체…….”

지금은 은퇴했지만, 전직 컬렉터인 그라면 아직 [제네시스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을 테고. 이것을 못 볼 리가 없지.

그리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를 수가 없을 테고 말이야.

‘어리석긴.’

그는 처음부터 이 좁은 공간에 우리 셋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목격자는 없고, 증언할 사람도 없다. 이곳의 이야기가 바깥에 흘러나갈 일도 없었다.

본인도 그걸 노렸겠지. 그래서 본심을 드러내며 이쪽을 겁박하고, 망발을 내뱉었다.

최중모가 부릅뜬 눈으로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을 내게 보내왔다.

뒤늦게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이다.

“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뭡니까?”

“이거 참. 그러고 보니, 제가 자기소개도 하지 않았군요.”

나는 소파에 앉은 채, 한쪽 다리를 꼬았다.

한 손으로 턱을 비스듬하게 괴며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최중모 씨. 저는 강유현이라고 합니다.”

그에게 나의 존재를 각인시키듯, 또박또박.

“그리고 천체주식회사의 시화실에 소속된 텔러죠.”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최중모에게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 서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최중모 씨.”

그가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