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23화
남자는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명백히 적의와 질투를 품고 있었다.
“거기 있는 아가씨가 사상세계를 클리어 했다는 거 같은데, 농담치고는 한번 고약하군. 여기가 어디라고 사기꾼이 함부로 들어와서 제 잘난 듯 떠드는 거지?”
우리를 향하는 그는 어조는 명백히 조롱적이었다.
나는 주변을 스윽 훑었다. 이쪽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말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반응이었다.
시비를 거는 의도는 명확했다. 종9품인 강혜림이 사상세계를 클리어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도 않거니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컬렉터들 사이의 규율을 무시한 것이 되니까.
하지만, 강혜림은 남자를 상대로 그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정면만 바라볼 뿐.
“너…….”
고장 종9품 컬렉터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남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이내 표정을 싹 바꾸며 우리를 향해 비웃음을 던졌다.
“하!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는군. 그래. 당연히 그러겠지. 사기꾼 놈들이 무슨 낯짝으로 그렇게 말하겠어! 사상세계 클리어? 고작 종9품 컬렉터가? 지나가던 개가 웃겠네!”
하하하!
남자의 호응에 주위에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어떠냐는 시선을 보내왔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거로 대신하고, 강혜림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얼음으로 이루어진 인형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남자는 설마 이렇게까지 해도 무시를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격한 감정을 드러냈다.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 거냐? 고작 종9품 따위가?”
상대가 저렇게 대놓고 물어 오니, 강혜림은 그제야 반응했다.
남자에게 말하는 것이 아닌, 고개를 돌려서 나를 본 것이었다.
귀찮은 모기 한 마리가 앵앵거리는데, 어쩌면 좋겠냐는 시선.
나는 과도하게 제스처를 취하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아저씨. 미안하지만, 우리 아가씨가 그쪽과 별로 상종하고 싶지 않다는군요.”
“뭐? 이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놈은 또 뭐야? 매니저 주제에 컬렉터들 사이에 멋대로 끼어드는 거냐?”
“매니저라기보다는 동료라고 불러 줬으면 좋겠군요.”
“저년의 동료라고? 그렇다면 너도 사기꾼이겠군. 어디서 이상한 소문을 주워듣고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긴 컬렉터 협회다. 험한 꼴 당하고 싶지 않으면 썩 꺼져. 이 사기꾼 새끼들아. 그러지 않으면 내가 직접 쫓아내 줄까?”
남자는 내게 얼굴을 들이밀며 으름장을 놓았다. 건장한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박감이 꽤나 사납다.
나는 역으로 웃으며 물었다.
“싫다면?”
“이 자식이…….”
“아, 참고로 우리 아가씨는 꽤나 매서우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하지만, 이미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남자는 내 경고를 듣지 않았다.
그는 내 멱살을 쥐기 위해서 팔을 뻗었다.
턱!
그의 손목을 붙잡은 것은 강혜림의 가녀린 손이었다.
“이건 또 뭔…….”
남자가 자신을 방해하는 강혜림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그 순간 강혜림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남자의 손목을 쥔 채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남자의 몸이 그대로 강혜림의 손짓에 딸려와 허공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회전했다.
쿠웅!
“크헉!”
남자가 바닥에 개구리처럼 엎어졌다. 강혜림은 남자의 손목을 붙잡은 채, 그의 팔을 뒤로 꺾듯이 확 젖혔다. 거기에 더해 등을 한쪽 발로 밟으며 일어나지 못하게 강하게 짓눌렀다.
“끄악!”
순식간에 벌어진 사태에 주변의 컬렉터들은 눈을 부릅떴다.
무엇보다 이 상황을 가장 믿기 어려운 것은 강혜림의 아래에 깔린 남자일 것이다.
나는 지면에 고개를 처박은 그를 내려다보며 작게 웃었다.
“그러게,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 거라고.
* * *
고준호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히 손을 뻗은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그 이후에 시야가 확 뒤집히더니 그가 바닥에 엎어진 것이었다.
일어나고 싶어도 한쪽 팔이 뒤로 꺾인 상태에 등 뒤로 자신이 한껏 무시했던 컬렉터의 발이 올라와 있었다. 말 그대로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지금 고작 종9품 컬렉터에게 졌다고?’
그 사실을 직시하는 순간, 참을 수 없는 창피함이 몰려왔다.
주변에서도 다들 눈을 크게 뜬 채, 바닥에 쓰러진 고준호를 보고 있었다. 괜히 선동하며 시비를 걸었던 자의 최후를 말이다.
“뭐야. 저 인간 종7품 아니었어?”
“잘난 듯이 나서더니, 대체 저게 무슨 꼴이야?”
“방심하다 당한 건가?”
“등급이 4개나 차이 나는데, 방심했다고 당한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고준호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수치심, 부끄러움, 그리고 분노. 그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을 노려봤다.
깔끔한 양복을 입은 남자. 강유현은 자신을 내려다보며 씨익 웃고 있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그의 눈매 사이로 흘러나오는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고준호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 새끼.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있었어……!’
마치 이렇게 될 거를 미리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강유현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으득!
“이…… 개자식이!”
그 사실을 견딜 수가 없어서, 자신이 받은 모멸감을 참을 수가 없어서.
고준호는 이를 악물고 몸에 힘을 줬다.
한쪽 팔은 뒤로 확 젖혀져 있었고, 등쪽은 강혜림이 체중을 실어 밟고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속박이겠지만, 고준호에게 방법이 있었다.
화아악!
그의 피부가 빨갛게 물들더니, 몸에서 강렬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고준호는 붙잡히지 않은 나머지 한쪽 팔을 지면에 짚고서, 그대로 힘을 줘 밀어냈다. 그러자 그의 몸이 강혜림을 등에 얹은 채로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 어어 뭐야. 진짜 제대로 할 생각인가?”
“미쳤군. 협회에서 싸움질하겠다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은 싹 다 무시했다. 고준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협회에서 싸움했다는 것보다도, 당장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
그는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기체술(氣體術)]을 사용했다. 체내에 돌아다니는 기를 몸에 둘러 신체 능력을 증가시키는 스킬이었다. 외공을 익힌 그이기에 신체 능력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이대로 몸을 완전히 일으키기만 하면, 저 건방진 낯짝을 제대로 뭉개 주리라.
고준호가 그렇게 마음을 먹는 순간이었다.
“가만히 있으세요.”
등을 밟고 선 여인이 말하는 것과 동시에.
쿵!
“……억!”
그의 등에 가해지는 무게감이 순간, 몇 배로 확 늘었다.
겨우 한쪽 팔의 힘으로 몸을 일으키려던 고준호가 다시 납작해진 개구리처럼 엎어졌다. 그는 어떻게든 반격을 가하려고 몸에 힘을 줬지만, 자신을 짓누르는 강혜림의 힘이 마치 거대한 바윗덩어리처럼 그를 놔 주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본 강유현은 눈을 빛냈다.
‘허. 설마, 천근추까지 사용하다니.’
천근추(千斤墜)는 내공으로 펼치는 기예의 일종으로써, 기를 이용해 몸무게를 무겁게 만드는 기술이었다. 고준호가 갑자기 일어나다 말고 다시 넘어진 것도, 강혜림이 천근추의 묘리를 이용해 그를 강하게 찍어 눌렀기 때문이었다.
‘기술을 배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 터득했어. 이전과 같아.’
대부분 컬렉터는 무언가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 [이야기]를 흡수한다.
검기를 사용하고 싶으면 [검기 이야기]를, 천근추를 사용하고 싶으면 [천근추 이야기]를, 파이어볼을 사용하고 싶으면 [파이어볼 이야기]를.
그들이 흡수한 [이야기]가 곧 그들의 기술이며 스킬이 되는 것이었다.
무언가 검술을 익히려면 누군가에게 배우고, 끝없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하지만 혼성계에서는 [이야기] 하나만 흡수하면 그것을 사용하는 법을 바로 깨닫게 된다.
그런데 강혜림은 지금 와서는 구시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스킬을 사용했다.
말 그대로 [이야기]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터득한 것이다.
‘이전에는 스스로 검기를 발현했고, 이번에는 천근추인가?’
검기 발현에 이어 천근추까지.
강혜림은 누군가에게 배우지도 않고, 스스로 이 힘을 깨닫고 터득했다.
말 그대로 입이 떡 벌어지는 천재성과 압도적인 재능이 빚어낸 산물이었다.
‘검후라는 이름만으로 선택을 했는데, 상상 이상이야.’
강유현은 강혜림을 향한 평가를 상향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자신에게만 어딘가 부족하고 못 미더운 모습을 보여서 그렇지, 강혜림은 지금도 충분히 잘해 주고 있었다. 표정과 목소리, 어조까지 완벽했으며 보여 주는 퍼포먼스는 그 이상이었다.
‘뭐야, 그러면 나한테만 그냥 어리광 부렸던 거야?’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유현은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주변을 살폈다.
일단, 중요한 건 지금 상황이었다. 강혜림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보기 좋게 자신보다 4등급이나 높은 컬렉터를 제압했다.
고준호가 이를 악물고 머리가 터져라 힘을 줬지만, 그를 짓누르는 강혜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힘에 부쳐 먼저 지친 것은 고준호였다.
“끄읍! 끄으으윽! 허억! 허억”
“마, 말도 안 돼. 기체술을 사용했는데도 못 일어났다고?”
“저 여자, 정말로 종9품이 맞아?”
주변에서 이런 반응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좋은 반응이야.’
모든 상황이 유현이 예상했던 대로 흘러갔다.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내서 사람들에게 강혜림의 낮은 등급을 각인시킨 것도 그였고, 의도적으로 여유를 가장해 누군가 나서게끔 유도한 것도 그였다.
고준호 같은 제 감정에 쉽게 휘둘리는 멍청한 인간이 있어서, 일이 더욱 수월하게 흘러갔다.
‘그리고 이제 슬슬, 다른 녀석들이 나설 때가 됐는데.’
유현이 재차 타이밍을 재는 순간, 멀리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보디가드처럼 차려입은 사람들이 인파를 헤치고 다가왔다.
“동작 그만! 지금 뭐 하는 겁니까!”
“협회에서 분쟁은 금지입니다!”
그들은 협회에 소속된 컬렉터들로, 혹시나 무슨 사건이 터질 경우에 나서서 중재하는 자들이었다.
원래라면 그들이 진작 나서야 했었지만, 타이밍이 조금 공교로웠다.
‘일부러 상황을 보고 적당하다 싶은 순간을 노렸어.’
아마, 그들은 진작 이 상황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곧바로 나서지 않았다는 것은 저쪽도 무언가 의도가 있다는 뜻.
‘뒤에서 지시하는 놈이 있군.’
그 상대를 알아차리는 건 금방이었다.
딱 봐도 책임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인파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란입니까? 협회에서 싸움을 벌이다니. 그렇게도 우리가 우습게 보였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건 안경을 쓴 삐쩍 마른 중년인이었다. 겉으로는 타이르듯 말을 하지만, 눈빛은 가장 날카롭게 지금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닿기가 무섭게 주변에서 구경하던 컬렉터들이 시선을 피하거나 몸을 떨었다.
저쪽이 책임자로군.
유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에게 다가갔다.
“여기 책임자십니까?”
유현이 말을 걸자 남성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기세에 눌렸을 테지만, 유현은 부드럽게 넘겼다.
중년인이 물었다.
“그쪽은 누구시죠?”
“저기 사건 당사자의 동료입니다.”
“싸움을 일으킨 당사자의 동료라고요?”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희는 싸운 게 아닙니다.”
“하. 싸운 게 아니다?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에이. 제가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왜 하겠습니까? 그저 서로 ‘약간’의 의견 충돌이 있었을 뿐이죠. 그러다 저쪽이 일방적으로 날뛰는 바람에 저희 아가씨가 어쩔 수 없이 제압한 겁니다. 이른바 정당방위죠.”
유현의 말에 중년인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제압이다? 이 소란이?”
“네. 제압이요. 우리 쪽 아가씨는 상처 하나 없지 않습니까? 어디 물건이 부서지지도 않았고요. 저 모습을 보세요. 저 평온한 표정의 어디가 싸운 사람의 얼굴입니까? 애초에 싸움이라고 부를 만한 건 벌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저희는 선의에 의해서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제압했죠.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군요.”
“…….”
유현의 말에는 은근히 뼈가 있었다.
중년인은 유현의 말에 잠시 그를 빤히 주시하더니,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일방적으로 시비를 걸고, 폭력까지 쓴 것은 고준호다. 그리고 증인은 얼마든지 있었다.
중년인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허허. 확실히 그런 것 같군요. 이거 실례했습니다.”
마치, 가면을 쓰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 전까지 분노의 기색을 내비치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
하지만, 유현은 놀라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그의 사과를 받아 줬다.
“뭐, 그럴 수도 있죠. 일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보다 우리 아가씨가 사상세계 클리어를 한 보상을 빨리 받아야 하는데, 여기 일 처리가 조금 늦는 것 같군요. 혹시 담당자가 휴가라도 냈습니까?”
“크흠. 이거 죄송합니다. 사실, 제가 바로 그 담당자입니다. 업무가 많이 밀려서 조금 늦었는데, 싸움이 났다고 해서 정신이 없었군요. 양해 바랍니다.”
“아, 그러셨구나. 꽤나 직급이 높아 보이시는데, 이거 제가 더 죄송하네요.”
“이럴 게 아니라 손님을 따로 모시고 싶은데, 잠시 괜찮겠습니까?”
“안될 건 없죠. 혜림 씨. 거기까지만 하시죠.”
유현이 가볍게 부르자 고준호를 억누르던 강혜림이 그를 풀어 줬다. 고준호는 곧바로 일어나서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협회에서 소란을 피운 탓에 곧바로 협회 소속 경비원들에게 끌려갔다.
“그럼, 가시죠.”
그 광경을 끝까지 지켜본 중년인이 앞장섰고, 유현과 강혜림이 그 뒤를 따랐다.
중년인을 따라 협회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강혜림을 향하는 시선은 어느덧 바뀌어 있었다.
모멸과 분노가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차지한 것은 경외심과 놀라움.
‘컬렉터로서 첫 데뷔는 화려하게 치렀군.’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지금부터였다.
‘그쪽을 뼛속까지 뜯어먹어 주지.’
중년인을 향한 유현의 두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