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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22화 (22/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22화

“젠장! 두고 봐라!”

진풍은 틀에 박힌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떠났다.

나는 한동안 그가 사라진 자리를 노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 저런 녀석들이 꼬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빨랐다.

‘뭐. 그만큼 내가 보여 준 행보가 대단하다는 소리겠지.’

현재 나는 그 어떠한 부서에도 소속되지 않은 붕 뜬 존재였다.

첫걸음 미션의 시작과 동시에 모습을 개화했다는 소문이 퍼졌지만, 그렇다고 아직 이쪽을 데리고 갈 정도로 매력적인 먹잇감은 아니었을 터다.

하지만, 최근 2번에 걸친 시화를 통해서 나는 내 존재감을 뽐내게 됐다.

검을 쓰는 아름다운 여성 컬렉터 강혜림.

그런 강혜림과 독점 계약을 맺고서 시화를 선보이는 텔러 강유현.

단 2번의 시화로 최대 시청령이 100을 넘었고, 구독령도 세 자릿수에 도달한 무시무시한 신예.

소문이 퍼지는 순간,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부서들이 움직이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필연이었다.

‘내가 그만큼 엉덩이 무거운 상급자들도 욕심을 낼 정도로 탐스러웠다 이거지. 그렇다 쳐도 저런 자격 미달 녀석을 시켜서 나를 부르게 할 줄은 몰랐지만.’

진풍이라는 녀석은 아무리 봐도 한심한 구석밖에 없는 텔러였다.

경쟁을 가장 큰 원동력으로 삼는 천체주식회사에서 아직까지 제자리를 유지하며 남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 어떻게 보면 저런 녀석을 품고서 아직도 자리를 지키게 해 주는 부서의 힘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부서의 잡일을 담당하는 녀석이 저렇게 자만심이 골수까지 뻗어 있는 걸 보면 윗놈들이 어떤 성격인지 알 수 있지.’

거만하고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녀석들. 윗물이 혼탁한데, 아랫물이 맑을 수 있을까?

어지간하면 다른 텔러들과 반목하지 않고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려고 해도, 저쪽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나는 더 이상 예전처럼 한심하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누구보다도 성공하고 보다 큰 꿈을 품고, 끝없이 정진하며 나아가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다.

‘어차피 한 번은 저질러야 했던 일이었어.’

무작정 굽히기만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세상에는 피할 수 없는 싸움도 있다.

피를 흘리고 상처 입는 것이 무섭다고, 싸우기도 전에 꼬리를 마는 것은 더 이상 사양이었다.

필요하면 싸워야 하고, 싸운다면 전력을 다한다.

죽을 기세로, 그리고 죽일 기세로

지금은 말로 넘겼지만, 진풍의 성향을 생각하면 분명 악감정을 품고 나를 방해하려 들 것이다. 어쩌면 녀석이 소속된 ‘펜타그램’ 부서에서 내게 무슨 조취를 취할지도 모르지.

그러니 그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빠르게 내 서재를 키울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펜타그램 부서라…….’

진풍과는 관계없지만, 아니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내가 그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진풍이 거만한 것도 있고, 그의 언행이 매우 아니꼬운 탓도 있지만, 그가 속해 있는 부서 때문이었다.

‘종말의 추종자들.’

부서 펜타그램.

시화실에 존재하는 8개의 부서 중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는 저 부서는 지구가 종말에 처한 이후에 꽤나 시끄럽게 활동하던 놈 중 하나였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지구 대부분의 시화의 권한을 다른 곳에 빼앗겼음에도, 놈들은 보란 듯이 종말 속에서 시화를 선보였지.’

천체주식회사는 종말 전 지구의 시화 담당이었다.

하지만 지구가 종말을 맞이한 이후 천체주식회사는 지니고 있던 시화권을 잃고, 대부분을 다른 조직에 양도하게 된다.

그곳이 바로 엑소도스(Exodos)였다.

혼성계를 아우르는 3대 텔러 조직 중 하나였다.

천체주식회사(Sky Corporation).

엑소도스(exodos).

그리고 희극단패(喜劇團牌).

이 중에서 엑소도스는 내게 있어서 증오의 대상이었다.

천체주식회사가 시화의 질을 위해서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보여 주는 조직이라면 엑소도스는 오직 하나의 장르만 집요하게 파는 놈들이었다.

놈들이 바라는 것은 비극.

엑소도스라는 조직은 하계에 펼쳐지는 절망과 비탄을 찬미하는 곳이었다.

‘시련이라는 이름으로 펼쳐진 그 끔찍한 재앙과 학살마저도, 놈들에게는 자신들의 시화를 돋보이게 만들 장치에 지나지 않았지.’

어둡고. 잔인하고. 음습하고.

엑소도스 소속 텔러들이 보여 주는 이야기는 항상 그런 것들이다.

그런데, 펜타그램 부서는 그런 엑소도스 녀석들의 틈바구니에서 시화를 유지했다. 대부분 본사의 부서들이 철수한 것을 떠올리면 분명 펜타그램 부서는 엑소도스와 연결 고리가 있을 것이다.

‘빌어먹을 놈들.’

모든 텔러가 나쁜 놈들은 아니라지만, 엑소도스는 다르다.

놈들은 말 그대로 감정이 마모된 사이코패스이며 죽음을 뿌리는 씨앗이었다. 내가 반드시 없애야 할 적이었고, 당연히 엑소도스와 관련이 있는 펜타그램도 내게 적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진풍의 제안을 거절했다.

저런 역겨운 놈들과는 상종조차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마, 다른 부서에서도 내게 손을 뻗겠지. 어쩌면 내가 아닌 강혜림을 노리고 있을 수도 있어.’

그런 놈들까지 움직이는 순간, 나는 더 바빠지게 될 거다.

‘그러니 그 전에 텔러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다.’

아직까지 거대 서재를 운영하는 텔러들이 나를 건드리지는 않을 것이다. 관심을 갖거나 밑에 녀석들을 시켜서 나를 영입하려는 움직임은 취하겠지만, 소극적으로 행동할 게 분명하다.

체면을 따지는 그들은 모양이 빠지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내겐 아직 시간이 있어. 우선 1차적인 목표는 강혜림의 특성을 완전히 개화시키는 것.’

그것을 위한 구상은 이미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끝내 놨다.

다만, 해당 과정을 시작하려면 사전에 준비할 것들이 꽤나 많았다. 포인트도 더 벌어야 하고, 강혜림의 애매한 정신 상태도 다잡을 필요가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겠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강혜림이 있는 그녀의 고시원으로 이동했다.

“음. 으음. 얍.”

강혜림은 내가 도착한 줄도 모르고, 여전히 거울의 앞에서 이카로스의 날개를 이리저리 만지며 기묘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설마, 지금 자기가 생각하는 가장 매혹적인 자세를 취하는 건가?

계속 지켜보다가 그녀가 결국에 거울 속 자신에게 손 키스를 쪽 날리는 것까지 확인하는 순간,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후우. 추태는 거기까지 하시죠.”

“히익?! 어, 언제 오셨어요? 다 본 건 아니죠?”

“다? 다라고요? 설마, 제가 오기 전에는 그 부두술 같은 행동보다 더 심한 짓을 하셨던 건 아니겠죠?”

“부, 부두술 아닌 데요오…….”

소심하게 반박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골이 아파 왔다. 누구는 지금 미래의 일을 생각해서 머리를 쥐어 짜내며 고민을 하는데, 정작 컬렉터라는 인간이 이러다니.

그렇다고 또 막상 사상세계에 들어가면 기대했던 것 이상의 역할을 해 주니, 뭐라고 하기도 그렇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한심함을 억누르며 말했다.

“후우. 제발 적당히 하십쇼. 다른 사람들이 볼까 봐 겁납니다.”

“아, 그건 괜찮아요. 유현 씨니까 보여 줄 수 있으니까요.”

“저를 생각하면 더 안 보여 주시면 안 됩니까?”

이 아가씨가 큰일 날 소리를 자꾸 하네.

어쨌든,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었다.

“혜림 씨. 협회는 다녀왔습니까?”

“협회는 아직요. 그건 왜요?”

“슬슬 컬렉터로서 등급을 갱신할 필요가 있거든요. 언제까지 종9품으로 지내실 건 아니지 않습니까. 등급도 올라야 돈도 더 벌죠.”

강혜림은 이미 검기를 사용할 수 있는 단계까지 올랐다. 보스급 환상체인 미노타우로스를 혼자서 쓰러뜨렸고, 남들이 하지 못했던 사상세계를 2개나 클리어 했다.

사상세계를 클리어 한 자체적인 보상 말고도 국가에서 지급해 주는 보상금을 탈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물론, 그쪽에서 순순히 넘어가냐가 문제겠지만.’

이 아가씨 혼자 보냈다가 무슨 호구를 잡힐지 모르니, 나도 함께 움직여야 한다.

어차피 매니지먼트를 찾기 위해서는 한번 그 근방을 둘러볼 필요가 있으니, 겸사겸사다.

“이왕 정한 김에 바로 갑시다.”

“아, 네!”

* * *

나와 강혜림이 협회에 들어왔을 때부터 시선은 우리를 향했다. 아니, 정확히는 강혜림을 향했다.

“뭐지? 저런 컬렉터가 있었나?”

“흘리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기도를 보면 보통 컬렉터가 아닌 거 같은데.”

“무엇보다 엄청 예쁘다.”

강혜림의 모습은 사람들의 이목을 확 끌기에 충분했다. 그만큼 그녀는 매력적이었다. 대부분 사람은 그녀를 보고 누구인지,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입술을 꾹 다물고 정면만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일반인은 범접하기 힘든 검후의 모습 그 자체. 하지만 나는 안다. 자신을 향한 칭찬이 들릴 때마다 움찔거리는 그녀의 입꼬리를.

내가 사전에 주의를 주지 않았다면 이카로스의 날개까지 꺼내서 폼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허튼짓하지 말라고 눈빛으로 강하게 쏘아붙이고는, 그녀를 이끌고 협회의 카운터로 향했다.

“어,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안내 데스크를 맡은 여직원이 나와 강혜림을 맞이했다. 그녀의 시선은 강혜림을 향해 있었는데, 카리스마 넘치는 그녀의 모습에 잔뜩 얼어붙은 기색이었다. 압니다, 그 기분. 저도 전생에서 느꼈거든요.

“사상세계 클리어 보상을 받으러 왔습니다.”

“뭐? 사상세계?”

“잠깐만. 설마 최근에 2개 공략됐다고 했는데, 그 장본인이…….”

내 입에서 사상세계 이야기가 나오자, 주변에서 관심을 갖고 있던 다른 컬렉터들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조금 전까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왔다면, 지금은 경계와 질시 어린 시선으로 바뀌었다.

“미쳤군. 경계선을 넘어서 사상세계를 클리어 하다니.”

“명성이 눈이 멀기라도 한 건가? 쯧쯧. 저런 이기적인 마인드로는 오래 못 가지.”

이곳에 모인 자들은 사상세계를 클리어 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경계선’을 넘었다.

그 ‘경계선’이 모두가 적당히 해 먹자는 무언의 합의를 의미한다는 걸 생각하면.

‘강혜림은 그들이 지내 오는 틀을 깨부순 일종의 이단자나 다름없겠지.’

하지만, 나는 저들의 시선이나 의견은 관심도 없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주어진 현실만 사는 놈들이 뭘 알고 떠들겠는가?

안내원이 조심스레 물었다.

“다른 동료분들은 없으십니까?”

“없습니다. 그녀 혼자서 클리어 했으니까요.”

“뭐?!”

“말도 안 돼.”

혼자라는 말에 주변에서 당혹스러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안내원도 그걸 느꼈는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호, 혹시 컬렉터 등급은 어떻게 되십니까?”

“종9품입니다.”

“허!”

“종9품? 어이가 없군. 난 또 모습만 보면 정5품은 되는 줄 알았는데.”

내 입에서 나온 등급에 주변에서 탄식과 조소 어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혹시나 싶어서 강혜림을 살폈지만, 그녀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정말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이쪽을 험담하는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며 안내원에게 물었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사상세계를 클리어 했으니, 그 보상을 요구하는 건 등급에 관계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권리일 텐데요.”

“네. 그렇죠. 지금 담당자에게 연락을 취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못할 건 없죠.”

나와 강혜림은 근처 빈자리에 앉았다. 주위의 시선은 여전히 이쪽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나는 한껏 여유를 부렸고, 강혜림은 의자에 앉은 채로도 자세를 꼿꼿이 유지하며 가만히 있었다.

우리 둘이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자, 오히려 기가 차오르는 건 구경하는 무리였다.

‘흐음. 슬슬 이쯤 한 명 정도는 나설 법도 한데.’

나는 곁눈질로 주변 컬렉터들을 살피며 속으로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내가 방금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말이지.”

누군가 인파에서 나서더니, 나와 강혜림의 앞에 섰다. 어깨가 떡 벌어진 건장한 남성이었다.

“요즘은 사기꾼들이 멋대로 들어와서 설치게 되어 있나?”

이쪽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웃는 남자를 보며, 나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그래. 이런 녀석들이 없으면 섭섭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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