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19화
조금 깨는 대사를 외친 것 치고는 강혜림의 움직임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표범처럼 날렵하고 구름처럼 부드러웠다.
무엇보다 그녀의 발걸음은 이전 코볼트 광산에서 봤을 때보다 더 빨라져 있었다.
‘거듭되는 전투를 통해, 특성의 힘을 더 개화했다. 이건가?’
아직 강혜림은 자신의 특성을 완전히 각성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미개방 특성이 2개나 더 남아 있는 상황. 강해질 여지는 충분했고, 그것에 의아함을 품을 필요는 없었다.
다만, 이러한 뒷사정을 모르는 성령들의 반응은 달랐다.
[대다수 성령이 믿을 수 없다며 눈을 크게 뜹니다.]
[일부 성령들이 혹시 힘을 숨긴 게 아니냐며 의혹을 품습니다.]
[선술집의 취객이 잔뜩 흥이 올라 어깨춤을 춥니다.]
그들은 강혜림이 설마 혼자서 이 정도의 실력을 보여 줄지는 생각도 못 했기에 놀람을 숨기지 않았다.
아무리 원전에 비해서 풍화되고 약해졌다 하더라도 상대는 미노타우로스였다. 이 미궁의 지배자이며 오랫동안 괴물로서 군림해 온 신화 속 환상체였다.
그런 미노타우로스가 강혜림을 상대로 속절없이 밀리고 있었다.
‘처음 서로 충돌했을 때, 강혜림의 대처가 좋았어.’
첫 일격에 녀석의 양 발목의 힘줄을 끊은 것이 컸다.
덕분에 미노타우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자세로 그녀를 상대해야만 했으니까.
‘내가 그렇게 하라고 미리 알려 준 대로 잘하고 있어.’
나는 종말에서 대형 몬스터들을 사냥한 경험을 바탕으로 강혜림에게 미리 조언했었다.
만일, 처음부터 힘줄을 끊어 놓지 못하고 승부를 벌였다면 강혜림이 불리했을 거다.
‘물론,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자신을 내리찍으려는 공격에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역으로 파고드는 건 누구라도 힘든 일이니까.’
사람에게는 본능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무언가 날아오면 눈을 질끈 감거나, 혹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리거나 넘어지면 지면에 손을 뻗거나 등등.
일종의 반사적인 행동인데, 실제로 많은 컬렉터가 이런 본능 때문에 실전에서 크게 다치고는 했다.
보통 이것을 억제하려면 몇 번이고 실전을 통해 이런 본능을 억눌러야 했다. 복서가 얼굴에 날아오는 주먹을 보고도 눈을 감지 않는 것처럼, 죽도록 연습하고 또 실전으로 경험을 쌓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런데, 강혜림은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것을 해냈다.
‘처음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는 소리지.’
첫 격돌 때, 강혜림은 미노타우로스가 공격을 가하는 것을 보고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달리는 속도에 박차를 가해 녀석의 다리 사이로 빠져나갔다.
조금만 망설여도, 그대로 머리 째로 으깨질 공격을 앞두고도, 그런 정신 나간 짓을 저지른 것이었다.
‘특성 덕분에 저런 건지, 아니면 저래서 특성을 얻은 건지 모르겠군.’
부워어어어어어!!
강혜림의 검광이 반뜩일 때마다 미노타우로스의 양팔에 생채기가 그어졌다. 붉은 피가 팔뚝을 타고 바닥에 흘렀고, 그럴 때마다 녀석은 구슬픈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두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영향이 너무 컸다. 하물며 강혜림은 힘보다는 속도로 승부를 보는 타입. 그녀는 정말 약이 오를 정도로 미노타우로스를 일방적으로 공격하면서도, 녀석의 반격을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
휘익!
서걱.
미노타우로스가 분노에 차 팔을 휘두르면, 그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피하며 역으로 반격을 가했다.
무리하게 공격을 날린 미노타우로스는 드러난 빈틈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럴 때마다 몸의 상처는 늘어만 갔다.
[100TP를 후원받았습니다.]
[21TP를 획득했습니다.]
[100TP를 후원받았습니다.]
[21TP를 획득했습니다.]
[100TP를 후원받았습니다.]
[21TP를 획득했습니다.]
첫 시화 때 바로 내 서재를 구독한 몇몇 구독령들은 이걸 기대했다는 듯 좋아서 날뛰고 있었다. 게다가 나의 시화가 볼 가치가 있는지 확인하러 온 성령들 또한 지금만큼은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지 못했다.
전투가 지속할수록 점점 들어오는 포인트.
그것을 확인하면서도 나는 강혜림의 전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야 했다.
강혜림은 빠르고 아름다웠다.
새하얀 무복을 입고 부드럽게 움직이는 그녀는 한 마리의 고고한 학처럼 보였다.
저 모습이야말로, 종말이 오기 전까지 세상을 뜨겁게 했던 검후의 진면목이었다.
부워어어어!!
미노타우로스가 더 이상은 참기 힘들었는지, 괴성을 내뱉었다. 녀석은 두 주먹을 강하게 쥐고 지면을 미친 듯이 두드렸다.
쿠웅! 쿵! 쿵!
주먹이 땅을 칠 때마다 지면에 잘게 떨렸다. 미노타우로스의 주먹에 닿은 지면은 깨지고, 분쇄되며 커다란 조각의 형태로 깨져 나갔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런 내 예상이 맞아떨어지듯.
미노타우로스는 양손에 각각 커다란 돌덩어리 하나씩을 쥐고 그대로 강혜림을 향해 집어 던진 것이었다.
후우웅!
어린아이 상반신만 한 바위 2개가 강혜림을 향해 날아왔다. 대기를 찢으며 날아오는 투척 공격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허를 찌르는 반격이었다. 막을 수도 없고, 맞는 순간 짓이겨져 죽을 것을 게 분명했다.
미노타우로스도 자신의 승기를 잡았다는 걸 아는지, 흉악한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생긴 것과 다르게 영악한 녀석이었다. 일부러 상대방의 방심을 유도하고, 중요한 순간에 반격을 꾀하다니.
하지만.
탓!
강혜림은 날아오는 바윗덩어리를 보면서도 겁먹지 않고, 그대로 지면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동시에 허공에서 몸을 틀며 회전하는 그녀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두 바윗덩어리를 부드럽게 흘리듯 피해 냈다.
쿠웅! 쿵!
뒤로 날아간 두 개의 바위가 홀의 벽 일부를 무너뜨렸지만, 강혜림은 오직 미노타우로스만 바라보고 있었다.
전투의 열기로 뜨겁게 타오르는 그녀의 눈빛은, 미노타우로스가 뭘 하더라도 전부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총명하게 빛났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인가, 분노에 찬 미노타우로스가 재차 분노에 찬 괴성을 내지르며 파편을 집어 던지려고 했지만.
-늦어.
그렇게 말하며 먼저 움직인 것은 강혜림이었다.
지면에 착지한 그녀가 자리를 박찼고, 그녀의 몸은 어느새 미노타우로스의 품 안쪽까지 들어와 있었다.
‘가능한가?’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파편을 던지지 못하도록 안쪽까지 들어온 건 좋았다. 하지만 결국, 미노타우로스의 손이 닿는 사정권 안쪽까지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 소머리 괴물도 그걸 알기에 손에 쥔 파편을 버리고, 주먹을 꽉 쥐는 중이었다. 이번에 확실히 끝내 버리겠다는 듯이 말이다.
‘선공권은 이쪽에 있지만, 여기서 일격에 끝내지 못하면 당하는 건 그녀야.’
미노타우로스는 이번 공격만 견디면 곧바로 반격을 가할 것이었다. 서로 간의 거리는 지척이었다. 지금까지 거리를 조절하며 싸우던 강혜림은 그 공격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 빈틈이 드러난 이 순간에, 그녀는 확실히 싸움을 끝내야 했다.
‘하지만, 당장 그녀의 수준으로는 미노타우로스에게 치명상을 가할 수 없을 텐데.’
내가 걱정하는 것이 이거였다.
코볼트 정도야 그냥 쓰러뜨렸겠지만, 미노타우로스는 그보다 더 강력한 보스급 환상체다. 피부가 질기고 두꺼워서 창칼도 제대로 박히지 않는 괴물을 어떻게 일격에 쓰러뜨린단 말인가?
‘그래서 치고 빠지는 방식으로 힘을 빼서 쓰러뜨리라고 한 거였는데. 무슨 방도라도 있는 건가?’
나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나설 준비를 하다가 그녀의 표정을 보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검을 휘두르는 강혜림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쓸데없는 자만심에 차 있지도, 그렇다고 이 공격이 먹히지 않을까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저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올곧은 시선으로 검을 휘두르는 것이었다.
“……그랬나.”
[관조자의 방]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작전과 다르게 그녀가 움직인 것은 만용도, 다급해서 잘못된 선택을 내린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확신.
그녀는 이길 수 있다는 미래를 봤기에 저런 선택을 내린 것이었다.
그야 그럴 것이.
강혜림의 검 끝에는 새하얀 기운이 일렁이며 맺혀 있었으니까.
“벌써 검기를!?”
검기(劍氣) 혹은 소드 오러(Sword Aura).
무기에 자신의 기를 담아 휘두르는, 일정 수준의 경지에 도달할 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나를 놀라게 만든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어지간한 컬렉터는 이러한 검기를 스스로 터득하지 않고, [이야기]를 통해 사용법을 배웠다. 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아서 어느 정도 수준에만 도달하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기도 했다.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하면…… 말이지.’
그 과정에 도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실패하고 또 노력했는가.
그 과정마저 힘들고 괴롭기에, 과실을 취하는 방법마저 편법으로 [검기 이야기]를 흡수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강혜림은 그런 [이야기]도 필요 없다는 듯, 자신의 힘만으로 검기를 뽑아냈다.
이건 나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재능이야.’
검기를 펼친 것은 아주 순간이었다. 물론, 그 검기의 예리함과 밀도는 그렇게 대단한 것이 못됐지만.
방심한 괴물의 머리를 꿰뚫기에는 충분했다.
푹!
칼끝이 미노타우로스의 턱을 뚫고 뒤통수까지 튀어나왔다.
붉게 충혈된 미노타우로스의 눈에 순식간에 빛이 사라졌다. 절대 쓰러질 것 같지 않았던 거체가 천천히 옆으로 기울더니, 큰 소리와 함께 지면에 엎어졌다.
강혜림은 그 시체의 위에 선 채, 여태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허공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빛, 그 중심에 서서 이 미궁의 왕좌를 찬탈한 자의 모습을.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괴물을 쓰러뜨리고, 자신의 한계마저 넘어 버린 영웅의 승리를.
과연, 누가 그 모습을 비웃고 또 폄하할 수 있을까?
순간이지만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띠리리링!
[모든 성령들이 강혜림이 보여 준 이야기에 환호합니다.]
막혀 있던 둑이 터지듯 말문을 잃던 성령들이 정신을 차리고는 폭발적인 성원을 보냈다.
순식간에 내 눈앞에 시스템의 알림 창으로 가득 뒤덮였고, 귓가에 포인트가 들어왔다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강혜림은 지친 숨을 고르면서 미소를 지었다.
막혀 있던 무언가를 뚫어 냈다는 듯, 자신의 성취를 달성한 것에 만족해하는 미소였다.
-유현…… 앗!
그녀는 나를 향해 기뻐서 손을 흔들려 하다가, 이내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도 성령들은 조금 전 승리에 열광하는 나머지, 그녀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후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관조자의 방]에 구비된 의자에 몸을 실었다.
강혜림이 마지막 던진 승부수는 나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나마 결과가 나아서 다행이지, 순간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내가 나설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군.’
나는 주먹을 쥐었다 펴며 조금 전 일을 떠올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굳이 성령들의 호응을 이끌어 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이건가.’
아직도 후원의 세례가 쏟아지고 있으니, 말 다 했다.
강혜림이 둔 승부수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벌써 소문이 퍼졌는지, 시청령의 숫자가 110명에서 치솟기 시작했다.
[현재 시청령: 142]
[현재 구독령: 92]
46이었던 구독령은 2배까지 늘었다. 오늘 내로 100명을 찍으면 서브미션을 하나 더 클리어할 수 있을 것이다.
첫 시화에 이은 연이은 대박 행진이었다.
‘자, 그러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노타우로스를 쓰러뜨린 것까지는 좋았지만, 아직 관문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유현 씨. 뭔가 이상해요. 환상체를 잡았는데 사상세계가 클리어 되지 않는데요?
화면 속 강혜림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내게 물었다.
보통 보스급 환상체를 쓰러뜨리면 사상세계가 바로 클리어 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이 라비린토스 사상세계가 다른 클리어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관조자의 방]에서 나와 강혜림 앞에 섰다. 그녀는 사상세계가 유지되는 것에 적지 않은 당황을 느낀 것 같았다.
[대다수 성령이 사상세계가 유지되는 것에 의아함을 품습니다.]
[선술집의 취객 100TP 후원!]
[뭐임? 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거임? 끝난 거 아녔음?]
모두가 의아해하는 이 순간이 바로, 내가 나설 차례였다.
“여러분. 아직 사상세계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네?”
[성령들이 당신의 말에 의아해합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다들 궁금해하실 겁니다. 보스급 환상체를 쓰러뜨렸는데, 왜 미궁이 그대로인지. 그리고 다들 머리가 좋으시니, 금방 눈치를 채셨겠죠. 이곳 라비린토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쓰러뜨렸다고 해서 클리어 되는 게 아니었다는 걸.”
즉, 처음부터 조건은 미노타우로스 처치 따위가 아니었다.
“그 해답을 제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여기서는 내가 나설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