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18화
미궁 라비린토스.
초기에는 많은 컬렉터가 도전했지만, 결국에 실패를 거듭해 버려지고 만 곳이었다.
그 실패의 초석에는 항상 똑같은 존재가 있었다.
크레타의 왕, 미노스의 왕비가 포세이돈이 보낸 소와 정분이 나서 낳은 괴물 미노타우로스였다.
사람의 몸통에 소의 머리를 합친 이 괴물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매체에서 잘 다뤄지는 유명한 환상체였다.
원전에 의하면 아리아드네의 도움을 받은 테세우스에게 패배해야 했겠지만, 이곳은 사상세계.
이곳의 미노타우로스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미궁의 침입자들을 기다리며 주린 배를 감싸 쥐고 있었다.
‘어지간한 수준의 컬렉터로는 상대조차 힘들겠지.’
유명한 신화 속의 괴물은 그 명성에 걸맞게 두려울 정도로 강했다.
성령들도 그것을 알기 때문인지, 벌써 기대감이 어린 간접 메시지를 남발하기 시작했다.
[폐허에 피는 꽃이 잔뜩 기대감을 부풀립니다.]
[은의 마녀가 눈을 빛내며 시화에 열을 올립니다.]
[구름 위를 달리는 자가 어서 이야기를 보여 달라고 닦달합니다.]
이미, 첫 시화에서 기대감을 잔뜩 모은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현재 시청령의 숫자는 어느덧 80명을 넘은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조만간 서브미션 중 몇 개를 더 달성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이례적인 속도로군.’
텔러로서 내가 갖는 서재의 성장력은 비상식적인 수준이라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지금의 폭발적인 인기는 순간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이 좋다고, 그게 이후로도 쭉 좋아진다는 보장은 없어.’
지금 내 서재를 찾아오는 성령들은 나의 시화에 푹 빠져서 온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일부는 그러겠지만, 대다수는 아니었다.
지금의 인기는 첫 시화부터 한번 미친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 순간의 가속이 여기까지 이어진 것일 뿐.
계속 밀어주는 힘을 가하지 않으면 나아가는 이야기는 멈추고 만다.
‘즉 앞으로의 2, 3번 정도가 분기점이다.’
첫 시화에서 남들이 하지 않던 짓으로 시선을 모았다.
그 일차적인 목표를 이뤘으니, 이제 내가 할 일은 이곳에 모인 관객들에게 앞으로 내 서재의 매력을 어필하며 함께 끌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시청령의 숫자는 어느덧 90을 돌파해 100까지 도달.
눈앞에 서브미션을 클리어 했다는 알림 창과 함께 소량의 포인트가 들어왔다.
‘보러 올 성령은 다 온 건가?’
빠르게 치솟던 시청령들의 숫자는 110에 도달해서야 그 상승세가 팍 꺾였다.
이대로 더 기다려도 올 손님은 없겠고, 나는 지금이 시작해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갑시다. 오늘 메뉴는 소머리 탕이겠네요.”
“어…… 먹게요?”
“진짜로 먹겠습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가벼운 대화를 나누면서도, 나는 시청령들의 반응을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대부분은 소문난 맛집이 과연 정말로 맛집인가 확인하러 온 자들. 여기서 내가 제대로 된 시화를 보여 주지 못한다면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내 서재에서 떠날 것이었다.
반드시 붙잡아야 하는 잠재적인 고객들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이걸 지켜보는 건 성령들뿐만이 아니야.’
내 서재에 관심을 갖는 건 텔러도 마찬가지.
현재 내 서재를 확인하러 온 텔러는 10명이나 됐다.
저들의 의도는 뻔했다. 최근 갑자기 치고 올라오는 텔러의 서재가 어떤지 확인하러 온 것이겠지. 과연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지 말이다.
분석하고 평가하며 뜯어 갈 수 있으면 뜯어 간다.
저들의 의도는 뻔했다.
‘그래. 얼마든지 봐라.’
어차피 어중간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저들이 내게 경각심을 품게 되든지 말든지, 내가 오늘 이뤄야 할 일차적인 목표는 시청령들을 휘어잡는 것이었으니까.
“그럼, 시작하죠. 혜림 씨는 이걸 받으세요.”
“이건…….”
내가 강혜림에게 건넨 것은 커다란 실타래였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그녀는 곧바로 실타래를 받아들고는 입구 근처에 실을 풀었다.
다이달로스가 만든 이 라비린토스 미궁은 매우 복잡한 구조를 지녔다. 설계도가 없을 경우 한번 빠지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다는 소리까지 나왔으니, 말 다 했다.
하지만, 신화 속에서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 공주가 건네준 실타래를 통해 왔던 길을 되짚어서 미궁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원전이 그런 만큼 지금 실타래는 혹시 모를 탈출을 위한 것이었다.
“그럼, 무운을 빕니다.”
나는 그 말을 끝으로 [관조자의 방]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가만히 구경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강혜림에게는 그녀에게만 따로 원격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게끔 조치를 취했으니까.
계약을 맺은 컬렉터와 텔러만이 가능한 원거리 통신이었다.
“아아. 들리십니까?”
-네. 잘 들려요.
“잘 들리신다니, 다행이군요. 일단 이곳에는 미노타우로스를 제외한 환상체는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움직이시면 될 거 같습니다.”
-그냥, 막 움직여도 되는 건가요? 미궁인데 길을 잃지는 않을까요?
“그거 아십니까? 애초에 이 미궁은 미노타우로스를 가두고, 녀석에게 먹잇감을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에요. 안쪽에서 바깥으로 벗어나려면 복잡해지지만, 바깥에서 미궁의 중심을 향해 가는 것은 매우 쉽죠.”
그러니 길을 모르고 무작정 움직여도, 결국 이 라비린토스의 최종 도착지는 미노타우로스가 기거하는 공간이었다.
대체 어떠한 원리로 그렇게 흘러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신화시대 최고의 발명가 다이달로스가 만들어 낸 미궁이니 가능한 거겠지.
“혜림 씨는 그냥 거침없이 가시면 됩니다. 이런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당당하게.”
-네. 알겠습니다!
강혜림은 내 지시대로 움직였다.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턱을 살짝 들었다. 어둡고 칙칙한 미궁 따위는 자신의 앞길조차 막지 못한다는 기세로, 거침없이 미궁의 안쪽으로 향했다.
겁먹지 않고 시련을 향해 다가가는 그 모습이야말로, 성령들이 가장 바라는 영웅담의 이상적인 구도였다.
성령들은 덩달아 기뻐하며 포인트를 후원했다.
[선술집의 취객 100TP 후원!]
[이대로 끝까지 가즈아!]
자신의 흥을 주체하지 못하는 일부 성령들은 간접 메시지가 아닌 포인트를 소모하는 직접 메시지까지 던지고 있었다.
특히 처음 내 서재에 온 저 취객은 혜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자주 포인트를 후원해 주는 모습을 보였다. 제대로 호구 하나 잡았군.
‘그보다 슬슬 도착하는 건가?’
미궁 내에 감도는 불온한 기운이 조금씩이지만, 강해지고 있었다.
깔끔했던 입구 부근과 다르게 곳곳에는 파손된 부분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격렬하게 싸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당당하게 계속 걷던 강혜림은 순간이지만, 정면의 무언가를 보고 멈춰 섰다.
나는 그녀가 뭘 보고 멈췄는지, 빠르게 캐치했다.
-아…….
“쉿. 소리 내지 마세요.”
나는 재빨리 무언가 말하려는 강혜림의 입을 막았다. 내 판단은 옳았다.
만약 조금만 더 내 반응이 늦었더라면, 강혜림은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을 거다.
“시체로군요.”
그냥 시체가 아니었다. 무언가에 의해 뜯어 먹힌 시체였다. 그 근방에는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백골들이 굴러다니고 있었고, 곳곳에서 악취가 풍겼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혐오감과 구역질을 일으킬 수 있는 광경이었다.
강혜림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숨을 고르세요. 절대 성령들께 놀란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그녀는 지금 검후라는 인물을 연기해야 했다. 여기서 비명을 내질렀다가는 기껏 쌓아온 이미지에 장대한 타격을 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비명을 지르면 저 안쪽에서 기다리던 녀석이 이쪽으로 빠르게 접근할 위험도 있었다.
“천천히 심호흡하시고.”
-쓰읍. 후우.
“부패도를 보아하니, 들어 온 지 얼마 안 된 컬렉터 같군요. 아무래도 남들이 노리지 않는 사상세계를 역으로 노리려다 당한 거 같습니다.”
외면된 사상세계이기 때문에, 역으로 경쟁자가 없는 부분을 노리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하지만 보다시피 그 최후는 결국, 이 꼴이었다.
나름 자신감을 품고 들어왔겠지만, 실력이 부족한 컬렉터가 부리는 만용의 대가는 컸다.
-유, 유현 씨는…… 괜찮으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이런 광경을 보고 놀라기엔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봐 왔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시체는 내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나는 변명을 하듯 뒷말을 덧붙였다.
“텔러는 감성 자체가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르니까요.”
-끄응.
“어찌 됐든 소리를 지르시지 않은 건 칭찬해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기분은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심호흡하니까 좀 나아지기는 했어요.
“혜림 씨도 긴장하셔야 합니다. 방심하면 저렇게 될 테니까요.”
-……알고 있어요.
그 사이에 꽤 심력을 소모했는지, 강혜림의 목소리에는 살짝 힘이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패닉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고, 더욱 진지하게 임하려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멘탈이 좋아서 다행이네.’
강혜림의 강점은 단순히 특성만이 아니었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정신력도 일반적인 컬렉터들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역사적으로 봐도 대단한 사람들은 꼭 어디 하나가 엇나가 있었다. 그렇다면 선택받은 컬렉터 중에서 정점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들은 어떨까?
‘본인은 잘 모르지만, 그녀의 본질은 결국 평범한 것이 아니라는 거겠지.’
어찌 됐든 잘된 일이었다.
마음을 추스른 강혜림은 이전보다 더 빠른 발걸음으로 미궁의 중심으로 향했다. 미궁 자체는 마치, 어서 들어오라는 듯 그녀의 앞길을 막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좁은 복도가 끝나고 넓은 홀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가, 미궁의 중심…….
천장과 벽이 있던 통로와 다르게 중심은 아주 넓었다. 천장까지 높이가 30m는 되었고 중심의 뻥 뚫린 구멍을 통해 새하얀 빛이 기둥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그 빛의 중심에 거체 하나가 등을 보인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갈색 털로 이루어진 몸통과 머리에 솟은 거대한 뿔.
나는 곧바로 강혜림에게 경고를 날렸다.
“긴장하세요. 녀석입니다.”
미노타우로스.
이 미궁의 주인은 침입자의 존재를 눈치채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앉은키만 해도 강혜림보다 더 컸는데, 일어서기까지 하니 무슨 산 하나가 떡 하니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신장 약 4m. 갈색의 털 아래 숨겨진 육신은 강철 같은 근육으로 가득했다. 무기조차 없는 맨손임에도 존재감이 압도적이었다.
어지간한 컬렉터도 저 손아귀에 잡히는 순간, 걸레마냥 쥐어 짜일 것이었다.
하지만.
“이쪽도 준비를 많이 해 왔거든.”
스릉.
강혜림은 미노타우로스를 보자마자, 거침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조금 전 시체를 보고 겁을 먹은 일은 있지도 않았다는 듯, 그녀의 눈빛은 전의로 강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고려시대 소드마스터]의 특성의 효과 중 하나였다.
불필요한 흥분을 덜어 내고, 두려움을 잘라 내며, 정신을 가장 싸움에 최적화된 상태로 끌어올린다.
부워어어어어!!
미노타우로스의 괴성과 함께 강혜림이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그녀의 몸이 바닥에 납작 엎드리듯 훑으며 움직였다. 미노타우로스는 그대로 주먹을 들어 올려, 위에서 아래로 찍어 버리듯 내리쳤다.
쿠웅!
맨주먹으로 보일 수 없는 위력. 단단한 지면에 금이 가고 돌조각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하지만, 미노타우로스가 주먹을 내리친 그 자리에 강혜림은 없었다.
크워?
순간 놓친 목표. 미노타우로스가 당황하는 것도 잠시, 녀석은 양쪽 발목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격통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쿵!
양 발목의 힘줄이 잘린 녀석은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쓰러지듯 넘어졌다. 미노타우로스의 양다리 사이로 빠져나온 강혜림이 녀석의 아킬레스건을 벤 것이었다.
넘어지지 않게 두 팔로 몸을 지탱한 미노타우로스의 등 뒤로 강혜림이 달려들었다.
-오늘 메뉴는 소머리 탕!
본인의 흥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는 큰소리로 외치며 검을 휘둘렀다.
“아니, 진짜.”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한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았다.
아니, 그냥 해 본 소리라니까 그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