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11화
나는 어르신과 함께 명예의 전당 복도를 계속 걸었다. 안쪽으로 길게 이어진 좌우로는 명예의 전당에 전시된 이야기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스치듯 지나가는 이야기에는 저마다의 삶이 담겨 있었다.
거대 악을 쓰러뜨린 영웅의 이야기.
불합리에 맞서 싸워 세상을 바꾼 혁명가의 이야기.
모든 것을 다 잃고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거머쥔 몽상가의 이야기.
이곳에 모인 모든 이야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열기가 있었다.
“여기가 끝이라네.”
끝없이 이어질 거라 생각했던 복도는 끝을 맞이했다. 마지막 유리 벽 안쪽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전까지 전시관들이 강렬한 에너지로 가득 찼던 걸 생각하면 매우 공허하게 느껴졌다.
“이게 마지막입니까?”
“그래. 명예의 전당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지.”
나는 전시관 아래에 적힌 연도를 살폈다.
명예의 전당은 30년 전 것이 마지막이었다.
분명 초기에는 1년을 주기로 최소 2~3개씩 있었는데, 뒤로 올수록 점점 그 빈도가 줄어들더니 어느덧 명맥이 끊기고 만 것이었다.
무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저를 여기로 데려오신 이유가 뭡니까?”
“누군가는 이곳을 기억해 주길 바랐기 때문이네.”
한때는 찬란했던 이야기들은 이제 창고의 깊은 곳에 처박혀 알아 주는 이 하나 없이 전시되어 있었다. 어르신은 그것이 못내 안타깝다고 말씀하셨다.
“나라고 천년만년 계속 살 수 있는 건 아니지. 그리고 언젠가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때, 누구도 이곳을 알아 주지 못할 거라는 사실이 슬펐다네. 그래서 자네를 데려온 거야.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이 허름하고 낡은 공간을 유일하게 찾아온 손님이니까.”
“그렇군요.”
“보이나? 한때는 모든 텔러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명예의 전당이 지금은 그 대가 끊긴 게.”
나는 빈 전시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텔러들은 명예의 전당은 생각하지 않는다네. 그저 어떻게든 포인트를 더 벌겠다고, 항상 똑같은 이야기만 반복하고 있지. 시대가 바뀐 거야. 가슴을 뜨겁게 달구던 옛이야기도 결국, 지금 와서는 유치한 구시대의 산물이 된 거지. 이제는 이쪽의 일에서 물러난 나지만, 그럼에도 이건 견딜 수가 없어.”
‘물론’ 하고 어르신이 말을 이었다.
“이것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변화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하지만, 나는 믿는다네. 이 과거의 이야기는 아직 끊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언젠가 다시 이러한 이야기가 필요한 순간이 올 거라고.”
그래서 나를 데려왔고, 내게 이곳을 보여 준 것이었다.
나는 빈 유리 벽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만약 내가 죽은 이후로 최도윤이 계속 살아서 시련을 넘어섰다면, 녀석은 이 명예의 전당에 올랐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녀석은 선택받은 주인공이고, 모두를 놀라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었으니까. 계속 살아만 있다면 이 영광의 자리를 장식하는 것쯤이야 충분히 가능하겠지.
이곳은 주인공들을 위한 자리니까.
최도윤을 떠올리니, 자연스레 그때의 나와 최도윤을 비교하게 됐다. 그리고 그럴수록 과거의 나는 참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지.’
이곳은 영광된 이야기만 전시될 수 있는 명예로운 공간.
오직 선택받은 주인공만이 오를 수 있는 곳.
‘오기가 생겼어.’
나도 이렇게 되고 싶다.
나도 이곳에 서고 싶다.
그 강열한 욕망이 내 몸을 불꽃처럼 휘감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어르신을 향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리고 그의 눈동자에 담긴 묘한 기대감을 읽는 순간, 나는 실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처음 만난 거치고는, 내게 꽤나 많은 것을 보고 또 바라시는 것 같군.
“어르신.”
“왜 그러나?”
“제게 좋은 경험을 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이게 없다 하더라도 내가 가고자 하는 목표는 그대로였을 것이다.
다만 이번 기회를 통해 다시 한번 더 내가 뭘 바라는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되새길 수 있었다.
그래. 나는 이 명예의 전당과 같은 자리에 오르고 싶었던 것이다.
“흐음. 뭐, 내가 한 건 별로 없어 보이네만. 본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어르신은 아닌 척 말했지만, 눈은 웃고 있었다.
시간은 어느덧 1분조차 남지 않았다.
들어와서 전당의 발자취만 훑어봤을 뿐인데도, 10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제는 초 단위로 남아 카운트가 들어간 시간을 보며 나는 물었다.
“어르신의 성함이 어찌 되십니까?”
“여기까지 와서 그게 궁금했나?”
어르신은 나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으셨다. 늙은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아직도 동심을 품고 있는 천진난만한 미소였다.
“바로 알려 주는 것은 재미가 없지. 그래. 다음에 다시 이곳에 놀러 온다면 그때 알려 주도록 하지.”
그 말에 나도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찾아뵙죠.”
그 인사를 끝으로 시간이 다했음을 고했고.
나의 몸은 제네시스 시스템이라는 미증유의 힘에 의해 다른 곳으로 끌려가듯 사라졌다.
* * *
내가 도착하고 바로 발견한 것은 인적이 드문 공터에서 열심히 검을 휘두르는 강혜림의 뒷모습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래도 사람이 없는 도시의 외곽까지 빠져나온 것 같았다.
강혜림은 내가 도착한 줄도 모르고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검에 홀린 사람 같았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강혜림은 검을 그저 휘두르기만 했다. 누군가 어떻게 휘둘러야 하는지, 알려 주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검을 휘두를 때마다 그녀의 검로는 점점 날카롭고 정갈하게 가다듬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한눈에 보일 정도라 나는 속으로 감탄을 흘렸다.
‘괜히 나중에 검후라 불리는 게 아니지.’
그녀가 지닌 특성은 검을 다루는 자에게 있어서 가장 극상의 것. [고려시대 소드마스터]라는 이름은 확실히 누군가 장난으로 붙인 것 같지만, 저 특성에 거짓은 없었다.
실제로 정사에서 무신급 활약을 선보였던 척준경의 [이야기]가 담긴 특성이었으니까.
‘저 [고려시대 소드마스터]와 대등한 특성을 꼽자면 [사자의 심장]과 [역발산기개세] 정도인가?’
아무렴 강혜림은 거기에 더해서 검과 관련된 특성을 2개나 더 들고 있었다. 단순히 제자리에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혼자서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막대한 경험치가 쌓이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알기에 그녀에게 칼을 휘두르라고 시켰다.
‘일단, 시키는 대로 잘하고 있네.’
첫 만남 때를 생각하면 조금 낮게 잡았던 평가를 올려 줄 정도는 되겠군.
“어?”
검을 계속 휘두르던 강혜림은 뒤늦게 내가 온 것을 알아차렸는지, 날 보고 화들짝 놀랐다.
“어, 언제 오셨어요?”
“조금 전에요.”
“오셨으면 말씀하시지.”
“너무 집중하고 있어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헤, 헤헤. 그래요?”
강혜림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수줍게 웃었다. 조금 전 내가 한 말의 어디에 저런 반응을 보일 포인트가 있었는가 싶은 순간, 내 눈앞에 내게만 보이는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미션-시화실 정사원]
신입 사원으로서 할 일을 전부 끝내고 자신의 진로를 정한 당신. 하지만 이러한 모든 과정은 시작을 위한 초석이었을 뿐, 진짜 텔러로서의 삶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시화실 소속 사원으로서 앞으로 갈 길은 험난할 겁니다. 앞으로의 여정에 있어서 필요로 하는 것들을 모으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이룩하십시오.
목표: 서재를 개설하시오.
성공 시: 개인 서재 획득.
실패 시: 없음.
제한 시간: 없음.
새로운 미션은 개인 서재 개설이었다. 심지어 제한 시간도 없고 실패 시 페널티도 없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서재는 성령들을 불러 모으고 이야기를 보여 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서 안 만들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장기 미션]
새롭게 추가된 항목을 클릭해 보니, 서재 개설보다 훨씬 더 다양한 미션 리스트들이 주르륵 튀어나왔다. 나는 그중에서 가장 위에 있는 것부터 살폈다.
[장기 미션-대리 승진]
-필요 공적치 3,000
-필요 포인트(TP) 10,000
-해당 미션은 제한 시간이 없습니다.
‘승진을 위한 미션이라.’
여기서 필요한 것은 텔러로서 벌어들이는 공적치와 포인트였다.
‘공적치의 경우에는 서재에 새겨지는 추천의 숫자, 전용 구독 성령과 누적 관람 숫자를 종합한 거라고 했었지.’
그리고 포인트의 경우에는 성령들의 후원, 서재의 계약 컬렉터가 자신의 포인트로 물건 구매, 그 외 서재에서 따로 성령들에게 받는 수수료 등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해서, 주어진 커트라인을 넘으면 저절로 승진되는 케이스인가?’
말 그대로 능력 지상주의인 천체주식회사다운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완벽한 계급 사회지.’
텔러로서 기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서로를 하대하고 받드는 확실한 척도는 오직 직급. 나보다 늦게 태어난 텔러라도, 나보다 직급이 높다면 내게는 상급자가 된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대리를 다는 것까지는 시간만 있으면 가능했다. 공적치는 당연히 자연스레 쌓이기 마련이었고, 포인트도 계속 모으다 보면 기준치에 도달할 수 있을 테니까.
‘포인트를 소모할 일만 없다면 말이지.’
텔러는 살아가기 위해서 포인트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서재를 유지하는 데도 비용이 들었다. 만약에 벌어들이는 포인트가 소모되는 것보다 모자랄 경우에는…….
‘영원히 평사원에서 머물러야 한다.’
어디 그뿐일까? 생존을 위한 최소 포인트마저 벌지 못하면 목숨을 걱정해야 했다.
죽고 싶지 않다면, 그리고 남들에게 따라잡히고 짓밟히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든 주어진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끝없는 레이스.
성공하는 자들에게는 명예와 포상을.
실패하는 자들에게는 절망과 죽음을.
이것이 텔러들의 3대 조직 중 하나, 천체주식회사가 선보이는 방식이었다.
‘참 재미있는 곳이야.’
이렇게 해서 많은 텔러가 도태된다고 하더라도, 그 이상으로 텔러들이 유입되니 상관없다 이거였다. 사실상 직급이 낮은 텔러는 이 시스템을 무난하게 굴리기 위한 윤활제에 가까웠다.
언제든 쓰고 버릴 수 있는 그런 부품들.
‘마치, 과거의 나 같군.’
오직 최도윤이 돋보이기 위해서 존재했고, 그렇게 스러졌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상념을 지우고 주어진 미션에 집중했다.
그때, 강혜림이 호기심이 일었는지 내게 물었다.
“강유현 텔러님. 뭐 하세요?”
“서재를 개설합니다.”
“아. 서재 개설…… 네?!”
“뭘 놀라고 그러십니까?”
“서재 개설이라 하면, 텔러들이 가장 처음에 하는 일 아닌가요?”
“잘 알고 계시네요.”
“기초 교육에서 배웠거든요. 그런데, 왜 강유현 텔러님이?”
“당연히 제가 이제 막 일을 시작하는 텔러니까, 그러죠.”
“거짓말. 아무리 봐도 완전 능력 있는 베테랑 텔러처럼 보였는데요.”
강혜림은 그것이 믿기지 않는지, 불신의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내가 이런 거로 굳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개설의 과정 자체는 쉬웠다. 그저 제네시스 네트워크에 접속해서 서재를 개설하겠다고 신청만 하면 됐으니까.
다만.
‘서재의 이름도 정해야 한다. 이건가?’
작품에 제목이 있듯, 이야기를 보여 주기 위한 서재에도 이름이 필요했다. 나는 여기서 제목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 고민했다.
‘다른 텔러들의 것을 참고해 볼까?’
나는 서재 목록 버튼을 클릭해서 서재 리스트들을 확인했다.
[SSS급 이야기 컬렉터]
[나 혼자 무한 기연]
[전투력 999999999의 컬렉터]
[재벌가 첫째 아들은 컬렉터]
[컬렉터가 힘을 안 숨겨서 너무 강함]
[역대급 기연이 계속 생겨!]
[치트급 스킬로 컬렉터가 됐는데 펫이 생기고 또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돌겠네.’
온갖 기괴한 제목을 보는 순간, 나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서재의 이름은 성령들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인지라 과거 인간이었던 내게는 그 지식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처음 보게 된 건데,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뭐, 대충 이해는 한다만.’
자극적인 이름으로 성령들의 관심을 모으려는 건 알겠다. 일단, 성령이 유입돼야 뭘 하든지 할 테니까. 밋밋하고 평범한 서재 이름으로는 성령들의 관심을 확 사는 게 어렵겠지.
그런데, 모두가 다 이렇게 하면 병림픽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어떻게 하지?’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내 서재의 이름을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