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10화
황금빛 책을 직접 보는 것은 사실상 처음이었다.
강혜림과는 조금 달랐다. 그녀의 책은 내뿜는 빛이 금빛이었지, 책의 표지는 동색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저 책은 달랐다.
표지도, 내뿜는 빛도.
마치, 태양이 내뿜는 광휘마냥 눈부셨다.
책의 주인과 나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책의 후광 때문에 잘 보이지 않던 그 모습도 점차 뚜렷해졌다. 나는 책 주인의 모습을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용인(龍人)이라니.’
황금 책의 주인은 초로의 용인이었다.
그도 나를 발견하고는 눈꼬리를 꿈틀였다.
“음? 이거 묘한 일이로군. 이런 곳에 손님이 찾아올 줄이야.”
그는 복장부터 다른 텔러들과 달랐다. 펑퍼짐한 백색 의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 위에는 뿔을 가리는 모자를 썼다. 그 모자의 틈새로 새하얀 갈기 같은 머리카락이 흘러나와 등허리까지 내려왔고, 턱 아래로도 긴 수염이 자라나 있었다.
혼성계에서 용인은 어지간해서는 보기 힘든 종족이었다. 그들은 용의 피를 이었기에 매우 강하고, 고등하며 인구도 적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텔러는 그런 용인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텔러가 취한 모습이 그 텔러의 자질을 전부 다 설명하는 건 아니었지만.
‘저렇게 눈부시게 빛나는 책은 처음 봐.’
책이 내뿜는 빛은 책주(冊主)가 지닌 이야기의 가치였다.
그런데, 저 책은 그냥 금빛이 아닌 찬란한 금빛이었다. 같은 색깔의 빛도 세기에 따라 수준이 갈린다는 걸 고려하면, 사실상 금빛 중에서도 최상급 정도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게다가 크기도 엄청나게 커.’
용인의 책은 거대했다. 나름 오래 살아왔다고 말하는 텔러들의 책은 백과사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두껍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더 위대한 책은 계속 두꺼워지는 게 아니라 더 커진다는 것을.
이쯤 되면 저걸 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옛 성현들이 사용했다는 거대한 경전도 저것보다는 작지 않을까?
저 책을 보는 순간, 나는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저 책을 읽을 수 없다.’
사탄의 아바타 때와 똑같다. 격의 차이. 나는 저 책을 보는 순간, 그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네는 대체 누구인가? 이곳은 누가 잘 찾아오지 않는 곳인데.”
용인이 던진 질문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곧바로 대답했다.
“전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 사원입니다.”
“허. 신입 사원이라고?”
용인은 내 모습을 보고 믿기지 않는지, 눈동자를 굴리며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쓰윽 훑어봤다. 이제는 익숙한 반응이라 나는 그러려니 했다.
“허허, 이거 참. 내가 실례를 저질렀군. 설마, 소문의 당사자를 직접 만나게 될 줄 몰랐거든.”
설마, 저자도 나에 관해서 알고 있는 건가?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제는 익숙해져야죠.”
“당당한 모습이 보기 좋군. 만약, 아무것도 모른 채 만났다면 중견급 텔러라고 착각을 할 뻔했어. 그런데, 자네는 여기에 어인 일인가? 이곳은 이제 누가 잘 찾아오지 않는 곳일 텐데.”
“입사식이 열리는 연회장이 워낙 혼잡하다 보니, 조금 적적한 곳을 찾다가 이곳까지 오게 됐습니다.”
막상 말해 놓고 이거 조금 실례되는 말 아닌가 싶었지만, 상대방의 반응을 보니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크하하하! 그래. 여기가 아주 조용한 곳이기는 하지. 너무 조용해서 문제지만.”
“그래도 뭐, 기록실이라는 이름이 있어서 궁금하던 차에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혹시, 뭐 볼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뭐. 볼 거는 많지. 하지만, 조금 신기하군. 요즘 젊은 텔러들은 제네시스 네트워크를 사용하고 있을 텐데.”
그 말이 맞았다.
보관함이 가득한 이곳에 비하면 편의성이 압도적으로 좋았으니까. 심지어 이곳에 있는 자료는 전부 제네시스 네트워크에도 있을 테니, 굳이 이곳을 찾아올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제가 아직 신입이다 보니, 제네시스 넷을 잘 활용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그쪽이라고 모든 정보를 다 확인할 수 있는 건 아니라서요.”
제네시스 넷이 지닌 편리함은 인정했지만, 그 그림자 아래에는 여러 제약이 숨겨져 있었다.
이제 막 사원을 단 나 같은 텔러는 제대로 된 정보에 접근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이쪽도 등급제가 적용되고, 더 좋은 정보를 얻으려면 직급이 높아야 했다.
“그래도 뭐, 여길 호기심으로 찾아온 건 사실이지만요.”
“자네는 참 솔직하군그래.”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내 대답에 나를 향하는 용인의 시선이 이채를 띠었다. 처음부터 신기한 녀석을 봤다는 시선이었다면, 이번에는 조금 더 자세히 보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다시 봤다는 눈빛이었다.
이렇게 질문만 받는 것도 그래서 나는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어르신은…… 여기에 어쩐 일이십니까?”
용인은 어르신이라는 호칭이 의외인지 눈을 크게 떴다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어쩐 일이긴. 여기가 내 근무처니, 이곳에 있지 않겠는가.”
“여기서 근무를 하십니까?”
기록을 관리하는 곳은 회계실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회계실 소속인 건가?
그런 내 시선의 뜻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이곳은 이제 어떤 실(室)도 관리를 포기한 곳이라서 말이지. 그래서 노부가 자처해서 관리를 맡겠다고 한 걸세. 뭐, 예전에는 한창 날리기는 했지만. 이제는 은퇴한 몸이거든. 그래도 일은 해야 하니, 이런 곳을 관리하는 것일세.”
‘은퇴라니.’
저 정도 책을 지닌 존재가 은퇴라고? 내가 보기엔 당장에 현역으로 뛰어도 충분할 거 같은데.
그리고 무엇보다 저 책의 밝기와 세기를 보면, 이 용인은 분명 범상치 않은 과거를 지녔음이 틀림없었다.
‘저 정도라면 최소 부장급은 되는 거 아닌가? 부장급을 아직 만나 본 적이 없어서 함부로 판단하지는 못하겠지만, 느낌만 보면 천체주식회사 내에서 순위권에 들 것 같단 말이지.’
그런 자가 이런 외진 곳에 박혀서 혼자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고? 분명히 뭔가가 있다.
어쩌면, 회사 내의 정치에 밀려서 이곳까지 좌천됐을지도 모르지. 천체주식회사는 다른 2개의 조직과 다르게 경쟁을 심하게 부추기는 쪽이니까.
“그래. 그보다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데, 조금 걸으며 대화라도 나누지 않겠나?”
그의 제안에 나는 곁눈질로 남은 시간을 살짝 확인했다. 아직 15분 이상 남아 있었고,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똑같이 생긴 이곳을 걷다 보니,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게 차라리 더 낫기도 했고.
“그보다 자네. 이번 입사식에 참여한 신입 사원이면, 그 자리에 없어도 괜찮은 건가?”
“참석은 강제였지만, 참석 이후에 거기서 계속 머무를지, 중간에 빠져나와도 될지는 자유거든요.”
“……그렇다고 보통 도망을 치나?”
“주변에서 저를 붙잡고 워낙 귀찮게 굴더라고요. 그래서 튀었습니다.”
“크하하하하!! 귀찮게라니! 그거참 반박할 수 없는 말이군!”
대화를 나누면서 느끼는 건, 이 어르신은 은근히 호쾌한 성격이라는 점이었다. 웃음소리나 말투부터 그랬는데, 무엇보다 격식이 없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저 정도 책을 지닌 자라면 자신의 높은 직위에 자만심을 품을 법도 한데, 그는 오늘 처음 만난 신입 사원인 나에게 확연히 보일 정도로 친근하게 대하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나도 조금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제안은 모두 거절했나?”
“네. 일단은 제가 능력이 부족하거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핑계로 빠져나왔습니다. 그 자리에 계속 있으면 더 귀찮게 굴 게 뻔해서.”
“하긴. 그렇다고 자네 입장에서 선배 되는 자들의 제안을 딱 잘라서 거절하기는 곤혹스러웠겠지.”
“잘 아시네요.”
“나도 소싯적에는 그랬거든. 이거, 우리 둘의 공통점을 찾은 거 같군. 그보다 제안을 다 거절했다면, 자네는 아직 시화실 소속인가?”
“네 맞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시화실 소속일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시화실의 다른 부서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텔러들의 책을 통해 얻은 정보에 의하면, 부서마다 다르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부서는 회사의 작은 축소판이었다.
그곳에 들어가는 순간 나는 막내가 되고, 당연히 같은 부서 소속 선배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뭐, 그만큼 장점도 있기는 하지만.’
하지만, 그 얻는 장점에 비해 단점이 지독하게 컸다.
“흐음.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굳이 힘든 길을 걸어가겠다니. 자네는 두렵지 않나?”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나와 어르신은 걷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서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래도 제게는 목표가 있어서요.”
내게는 목표이자 꿈이 있었다.
높이 올라가는 것. 그리고 남들이 우러러보는 위대한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을 위해서는 어디에 구애되지 않고 어디에서 묶이지 않으며, 오직 앞만 보고 달려야만 했다.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어르신은 허허로이 웃으셨다.
“그런가? 자네에게도 ‘갈망’이라는 게 있었군.”
“갈망?”
“그래. 우리 텔러들은 생물학적으로 탄생하는 것이 아닌, 만들어진 존재들이라네. 당연히 태어날 때부터 어느 정도 능력은 지니고 있지만, 자신이 뭘 해야 할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는 공허함을 지니고 있지.”
전생에서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정보에 나는 눈을 빛내며 어르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우리가 뭘 해야 할지, 시스템이 길을 인도하네. 혹은 직급이 높은 선배 텔러가 알려 주기도 하지. 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됐네. 자신의 스스로 원하는 게 아닌, 누군가가 시켜서 걷는 길이지 않은가.”
“그렇죠.”
“대다수의 텔러들이 그렇다네. 하지만 간혹, 아주 가끔가다 자네와 같은 텔러들이 나타나지. 누구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마음속에 뚜렷한 길을 지닌 텔러들이. 그리고 그런 텔러들은 하나같이 강렬한 갈망을 지니고 있다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는 전생에 인간이었고, 그 갈망을 지닌 텔러와 굳이 비교하면 다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르신이 말하는 텔러는 분명 날 뜻하고 있었다.
어르신은 잠시 시간을 확인하시더니, 이런 하고 혀를 찼다.
“슬슬 연회장의 입사식이 끝날 무렵이군. 자네도 떠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
“네. 이제 10분 정도.”
“흠. 오랜만에 찾아온 이 골방의 손님이 갈망을 지닌 재능 있는 신입이라.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 따라오게. 내 자네에게 재미난 것을 보여 주지.”
어르신은 그렇게 말하며 걷는 속도를 더욱 올렸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기록 보관실의 가장 깊은 곳이었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조금 독특한 보관함을 발견했다.
“저건……?”
모든 보관함은 같은 규격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눈앞의 저것만큼은 다른 것과 달랐다.
철제 보관함이 아닌, 목제로 이루어진 그것은 오히려 더 낡아빠진 것이었다. 그리고 해당 보관함에는 [명예의 전당]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저게 대체 뭡니까?”
“이제는 잊혀 버린 과거의 산물이지. 자, 따라오게.”
어르신이 낡은 보관함을 열었다. 열린 보관함은 순식간에 좌우로 갈라지며, 안쪽의 깊은 공간을 만들 듯 펼쳐졌다. 공간이 확장되고, 두 사람이 들어가기에 충분한 입구가 생겼다.
공간 안에 새로운 공간이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융단이, 그리고 양 벽에는 투명한 유리로 이루어진 전시관이 있었다.
와아아아아!!
전시관 안쪽에서 사람들의 함성이 들렸다. 유리 벽 안쪽에서는 눈부신 성검을 손에 쥐고서 백성들의 칭송을 받는 용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실제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해서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저건……?”
“성검전설. 아주 먼 과거, 이 명예의 전당에 최초로 오른 이야기라네. 그리고 이곳에 있는 것은 성검전설 뿐만이 아니지.”
긴 복도의 좌우로 나열된 것은, 끝이 없을 정도로 펼쳐진 이야기들.
나는 그제야 이 명예의 전당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은 과거 천체주식회사가 건립된 이래로, 혼성계에 가장 큰 영향과 호응을 이끌어 낸 이야기들이 보관된 곳이라네.”
이곳이야말로, 시화실 소속 텔러에게 있어서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