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아는 주인공들-9화 (9/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9화

서재의 후원자.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나는 등골을 타고 흐르는 전율에 몸을 잘게 떨었다.

후원이라는 것은 당연하게도 성령이 마음에 드는 텔러의 서재에 포인트를 지원해 주는 것을 뜻했다.

물론, 후원이라고 다 같은 후원이 아니었다. 성령에게도 급이 있었고, 그에 따라 후원받는 수준도 확연히 차이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태초와 함께 존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최상위 성령.

‘그런 성령의 후원이라니.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후원이라는 그 한 마디가 대체 얼마나 되는 가치를 지녔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사탄 정도 되는 성령이라면 직접적인 후원이 아닌 존재 자체만으로도 서재에 큰 영향을 줄 테니까.

‘갓 서재를 연 텔러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서재를 살리기 위해서 성령들과 연을 만들려고 발악을 했었지. 그렇게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3세대 중급 성령 하나만 잡아도, 감지덕지라고 할 정도였어.’

그런데, 이쪽은 1세대. 그것도 최상위였다.

이건 기회였다.

일생일대 다시는 찾아올 수 없는 역대급 기회.

솔직히 사탄이라는 이름이 걸리기는 했지만, 애초에 저 정도 되는 자를 선악의 잣대로 구분 짓는 것도 웃겼다. 지구에 알려진 신화는 그저 그의 일면만 보여 줄 뿐. 그의 모든 걸 알려 주지 않았으니까.

‘뭐 하는 거야, 강유현. 어서 손을 잡으라고.’

저 손만 잡으면, 너는 앞으로 인생 제대로 필 수 있어.

나의 마음이 시끄럽게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내 손은 내밀어진 사탄의 손을 잡으려 들지 않았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나의 이성은 완벽하게 지금이 적기라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나의 마음 한편 어딘가에서 그런 나를 막고 있었다.

‘정말로 이대로 괜찮은가?’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키듯.

나는 내게 되물었다.

그러자, 들뜬 마음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정말로?’

그럴 리가.

나는 결국 고민 끝에 쥐어짜 내듯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그럴 수 없을 것 같네요.”

내 거절에 사탄은 내밀었던 손을 거두며 의아해했다.

“제안을 거절한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딱히, 기분이 상했다는 투는 아니었다. 그는 이런 제안을 거절 받은 것으로 분노를 할 정도로 좀생이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진심으로 내가 이 제안을 거절한 것이 궁금하다는 눈치였다.

“사탄님의 뜻대로 후원자가 되신다면, 분명 저의 서재에 큰 도움이 되기는 하겠죠. 하지만, 그럴 경우에 저는 제 서재의 자유를 잃게 됩니다.”

“서재의 자유요?”

내가 뭘 말하려는지, 그도 눈치를 챘을 것이다.

든든한 후원자라는 것은 항상 긍정적인 영향만 몰고 오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사탄처럼 거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성령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회사에 있어 대주주의 발언권이 강하듯, 서재의 후원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계약을 맺는 순간, 그의 존재로 인해 나의 서재는 빠르게 커질 것이다. 하지만 그 성장의 원동력은 결국, 판데모니움 성령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쪽 성령들은…… 솔직히 말해서 몇몇을 제외하면 전부 다 껄끄러운 존재들밖에 없었다. 포악하고, 잔인하며, 또 제멋대로였다.

사탄의 눈치를 봐서라도 나의 서재에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겠지만, 그들의 존재 자체가 나의 서재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규정지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서재에 판데모니움 성령들이 가득하다면 그의 추종자 세력들만 서재에 들어오고 다른 세력들은 내 서재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야.’

특히 에덴의 성령들.

판데모니움과는 척을 지고 있는 곳이니, 어쩌면 나의 서재를 적대시할지도 몰랐다.

얻는 것만큼 잃는 것도 컸다.

“당신의 심정도 이해는 갑니다. 뭐, 빈말로 저희 성군 동료들의 성격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부분을 포함하더라도 당신에게 이득이 되는 건 변하지 않을 텐데요?”

“그 말도 맞습니다.”

그냥 작정하고 판데모니움 성령들의 비위만 맞춰도, 나는 거대한 서재를 가질 수 있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대성군이 뒤를 봐 주기 때문에 어지간한 텔러는 내게 시비조차 걸 수 없을 터였다.

‘그 제안은 확실히 매력적이야. 하지만.’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저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부족하다?”

“판데모니움의 성령님들은 확실히 대단합니다. 특히나 사탄님은 그중에서도 일곱 간부 중 하나. 저라도 당연히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죠. 하지만, 그걸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손을 잡는 순간, 저는 판데모니움이라는 제한된 환경의 이야기밖에 갖지 못합니다. 심지어 제 서재의 권한도 사탄님이 다수 쥐게 되겠죠.”

누군가에게 나의 서재가 휘둘리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아직 갖지 못한 서재였지만, 나는 앞으로 나의 서재에서 보여 줄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가능성을 믿었다.

내가 보여 줄 이야기는, 고작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됐다.

단순한 후원보다 더 중요한 것

그것은 이야기의 자유였다.

내가 나아가야 하는 길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나만의 것이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거절하는 겁니다. 현명하신 사탄님이시라면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속에 담아 둔 말을 끝내자, 막혔던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뒤늦게 저질렀다는 후회도 맴돌았다. 좋게 돌려서 말했지만, 대놓고 제안을 거절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하지만.

“푸흐흐. 흐하하하하하!!”

사탄은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오히려, 내가 당황할 정도로.

“설마, 판데모니움을 등에 업는 것보다도 더 큰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니! 이 무슨 광오한 말이란 말입니까!”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아아. 걱정하지 마시길. 저는 진심으로 당신을 칭찬하고 있는 거니까요. 그렇죠. 확실히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저는 후원자가 되는 것과 동시에 서재의 소유권을 가지게 되겠죠. 그렇게 되면 결국, 당신은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하게 됩니다. 순간의 이익에 눈이 먼 대가치고는 아주 크다고 볼 수 있죠.”

사탄이 직접 이 말을 한다는 것은 그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어쩌면, 노리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태도나 말투가 신사적이라 하더라도, 그는 무려 성경 속 ‘뱀’이었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죠.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길을 걷겠다니.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러지 않을 겁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바보 같은 짓을 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지만’ 하고 사탄이 말을 이었다.

“그런 바보이기에, 저의 시선을 끌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죠. 거절당한 것은 마음이 아프지만. 뭐, 싫다는 상대 강제로 하게 할 정도로 전 야만스럽지도 않거든요.”

“그러면, 포기하신 겁니까?”

“포기요? 흠, 글쎄요. 솔직한 심정으로는 더 욕심이 생겼습니다.”

사탄이 뱀처럼 교활하게 웃었다.

“당신을 강제로 취하고 싶을 정도로.”

“네?”

순간, 등골이 싸늘하게 식었다. 내가 몸을 움찔 떨자 사탄이 걱정하지 말라며 손을 저었다.

“물론 그런 짓은 비신사적이니, 하지 않습니다만. 그 정도로 당신이라는 존재가 매력적이라고 해 두죠. 그리고 당신이 앞으로 보여 줄 이야기도 기대가 되고요.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는데, 정말로 저의 후원이 필요 없나요?”

“……네. 그렇습니다. 적어도 이렇게 거래를 통해 후원을 받을 생각은 없어요.”

“거래를 통해 받을 생각이 없다?”

“저는 성령님들이 스스로 후원을 자처하길 원합니다. 무언가를 대가로 받는 것이 아닌, 자의로 말이죠.”

“큭큭큭. 스스로 후원하길 바란 다라. 엄청난 야망이군요. 다른 텔러들이 그런 말을 입에 담았다면 아무리 저라도 건방지다며 벌을 내렸을지도 모릅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꺼낸 말은 진심이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누구의 손에도 흔들리지 않는 오직 나만의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지금 당장의 미혹을 뿌리치는 것이 백번 옳았다.

‘다시 사는 인생. 후회 따윈 없기로 다짐했으니까.’

한다면, 최선을 다한다.

나는 이미 그 각오를 끝마쳤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아무것도 없이 넘기는 것도 제 체면이 서지 않죠. 내기는 내기고 당신은 이겼으니, 그에 따른 대가도 받아야 하는 법. 지금 당장은 못 하겠지만, 제 이름을 걸고 선물을 드리도록 하죠.”

“……주신다면야 감사히.”

이것마저 거절할 수는 없어서 나는 감사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꾸벅 숙였다.

사탄은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마음 같아서는 더 머물고 싶지만, 저쪽도 바보가 아닌 이상 슬슬 이상함을 눈치챘겠죠. 그러니,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만나서 정말 즐거웠습니다.”

“아, 네.”

저는 전혀 즐겁지 않았습니다만.

이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오는 걸 꾹 누를 수밖에 없었다. 반강제로 한 내기는 이겼다고 하지만, 선물 준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조만간 당신의 서재를 구경 가도록 하죠. 그럼.”

사탄은 그 말만 남기고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누가 뱀 아니랄까 봐 사라지는 연기마저 뱀이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 생겼다.

그가 완전히 떠났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나는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나도 이 자리를 빨리 떠야 했다. 당장에 내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은 걸 이상하게 여기고 나를 찾으러 올 텔러들이 많았으니까.

‘일단, 자리를 피하자.’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독서였다.

* * *

‘나쁘지 않네.’

나는 텔러들이 오가지 않는 이 공간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연회가 열리는 거대한 건물과 맞닿은 다른 건물이었다. 생긴 것은 거대한 박물관처럼 생겼는데, 실제로 그 내부도 박물관에 걸맞은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기록 보관실.’

텔러들이 보여 주고 수집한 이야기들을 모아서 보관하는 곳. 즉 이곳은 이야기의 창고나 마찬가지였다.

혼성계를 통틀어, 거의 모든 역사가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다.

과거의 이야기를 찾는 데는 여기만 한 곳이 없을 정도라, 누군가는 장난삼아 ‘작은 아카식 레코드’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제는 구시대의 산물로만 여겨져, 사실상 찾아오는 이가 거의 없는 곳이기도 했다.

‘넓기는 더럽게 넓네.’

기록 보관실이라는 이름답게 이곳은 천장과 바닥이 모두 다 보관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 보관함들이 쌓이고 쌓여서 이 공간 자체가 사실상 보관함으로 이루어진 미로에 가까울 정도였다.

원하는 자료를 찾고 싶어도 그 지표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은 데다가, 제네시스 시스템을 통해 접속할 수 있는 제네시스 넷 때문에 선호도가 바닥을 기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공간일수록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덕분에 빌려 온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독서를 시작한 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가져온 책들을 전부 다 읽은 나는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남은 시간이…… 대충 30분 정도인가?’

천체주식회사로 올 때는 우주 열차를 타고 왔지만, 갈 때는 반강제적인 차원 전송이었다. 제한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우리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게 됐다.

즉 지구로 복귀까지 30분이 남은 것이었다.

‘이미 책은 다 읽었고. 남은 시간 동안 가만히 있는 것도 좀 그러니, 구경이나 해 볼까.’

제네시스 네트워크에 밀린다고는 했지만, 이곳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야기를 빠짐없이 기록한 곳이었다. 어딘가에 내가 모르는 재미난 이야기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보다 더럽게 넓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안 날 정도로 넓었다.

하지만, 나를 가장 피곤하게 만드는 건 어디를 가도 풍경이 똑같다는 점이었다. 똑같은 크기와 모형의 보관함이 공간을 압박하듯 빽빽하게 들어차 있으니, 보기만 해도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왜 다른 텔러들이 질색하며 여기에 오지 않는지, 이유를 알 것 같네.’

자료를 쌓아 놓으면 뭘 하는가? 살펴보기 괴로울 정도로 정리가 안 돼 있는데.

그래도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둘러보기는 했는데, 이쯤 되면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음?”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맞은편 긴 복도 너머로, 누군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뭐지?’

눈을 가늘게 뜨고 누구인가 살피려 했지만, 눈부신 후광을 등에 업고 있어서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빛? 손전등이라도 들고 다니는 건가?

‘아니야. 저건…….’

나는 뒤늦게 그 빛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저 빛은 단순히 손전등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로서는 수준을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눈부시고 찬란한.

황금빛 책에서 흘러나오는 빛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