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8화
“정말 신기하단 말이죠. 텔러들에게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손을 썼는데, 대체 당신은 어떻게 거기서 저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요.”
눈앞의 존재. 그러니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저자를 일단 검은 남자라 부르겠다.
검은 남자는 내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놀란 것 같았다.
나는 여기서 더 잡아뗄까 했지만, 조금 전 느꼈던 감각을 깨닫고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직감했다.
‘여기서 더 잡아떼려고 했다가는, 위험하다.’
내 표정을 읽어 냈는지, 검은 남자의 시선이 바뀌었다. 그의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나를 향하는 그의 시선은 확실히 느껴졌다.
“호. 눈치가 빠르시군요.”
“……바라시는 게 뭡니까?”
“저는 그저 궁금해서 물었을 뿐입니다. 딱히 당신을 해코지할 생각은 없어요. 지금은 말이죠.”
지금은 말인가.
그렇다는 것은 내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태도가 바뀐다는 소리였다.
‘이거 큰일인데.’
이리 떼를 피해 도망친 곳이 설마 호랑이 굴이었을 줄이야.
“그래서 제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으실 겁니까? 어떻게 절 알아봤죠?”
검은 남자가 하는 말은 꽤나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대놓고 앞에 있는데 어떻게 알아봤냐고 물으면, 무슨 정신병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그가 무슨 의미로 저런 질문을 던지는지 알고 있었다.
‘당장에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데도, 상대가 누구인지 인지할 수가 없어.’
상대는 분명히 눈코입귀가 다 있는 ‘평범한’ 얼굴이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정확히 모습을 묘사하라면 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가 어떤 종족의 모습을 취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마주 보고 있음에도 이런 존재가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기 힘들 지경.
텔러들이 북적이던 그 연회장 속에서, 홀로 가만히 서 있었음에도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만 제외하고.
그래서 검은 남자가 내게 물은 것이다.
어떻게 자신을 알아봤냐고.
‘사실은 우연에 가깝긴 한데 믿어 주진 않겠지?’
내가 발견한 것은, 검은 남자가 아닌 그의 머리 위에 떠다니는 책이었다.
처음에 왜 허공에 책이 떠다니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그 책에 집중할수록 검은 남자의 모습이 흐릿하게나마 보이게 되었고, 저자가 적어도 초대받지 못한 자라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핑계를 대서 빠져나온 데까지는 성공했는데.’
이제는 역으로 저쪽에서 내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냥 적당한 상대라면 무시하듯 도망치면 되겠지만, 상대는 딱 봐도 범상치 않은 존재였다.
애초에.
‘책까지 검은색인 건 나도 처음 봤다고.’
남자의 머리 위에 떠다니는 검은 책.
내가 많은 책을 살핀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저게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것과 거리가 멀다는 건 알겠다. 애초에 동, 은, 금색의 책 말고도 다른 색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런데, 검은색이라는 소리는.’
눈앞의 남자는 일반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도, 텔러도, 다른 종족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높은, 생명체라는 범주를 초월한 다른 무언가.
‘성령(星靈)’
문득, 우주 열차에서 사스람도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번 입사식은 성령들의 초대식과 비슷한 시기에 거행된다고 했었지.’
그렇다는 것은 초대받은 성령들이 이 천체주식회사 어딘가에 있다는 소리였다. 눈앞의 검은 남자는, 거기서 빠져나와 몰래 이쪽으로 숨어든 성령이었고.
‘일단, 정체부터 확인하자.’
상황이 급해서 하지 못했던 책 읽기. 아무래도 지금 당장은 저 검은 책이 우선일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책이 펼쳐지지 않아?’
책을 가져오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책의 표지를 넘길 수가 없었다. 마치 쇠사슬로 책 자체가 밀봉이라도 돼 있는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시도해도 마찬가지.
나는 어렴풋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격의 차이…… 때문인가.’
격의 차이.
이 혼성계에서 수준이 낮은 자는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은 일은 할 수 없었다. 이야기가 자체적으로 갖는 미증유의 힘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책조차 함부로 읽을 수 없다 이건가. 설마, 책에 이런 한계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무엇보다 이 중요한 순간에 능력의 한계치가 드러나게 된 건 꽤나 타격이 컸다.
상대방의 정체를 알려고 해도 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상황이라니.
이렇게 되면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하는 거지? 일단, 죄송하다고 비는 게 우선인가?
“제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실 겁니까?”
검은 남자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점점 강해졌다. 끝까지 대답하지 않고 수틀리면 어떻게든 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었다.
“제…… 특기입니다.”
“특기?”
내 대답에 남자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안개가 걷히듯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은 한 발짝 물러났다는 뜻이지, 완전히 적의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자신의 뜻에 거슬렸다가는, 저 무시무시한 검은 안개는 이제 내 목숨을 옥죌 것이었다.
나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단지, 보였을 뿐입니다. 저는 눈썰미가 좋아서, 이상하게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볼 수 있거든요. 그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주변 반응을 봐서는 아무도 당신을 인지하지 못한 거 같아서 그걸 핑계로 접근했던 거죠.”
“흐음. 그냥 보였다라.”
딱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책을 통해 그냥 보인 건 맞으니까.
나는 초조하게 상대방의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그래도 솔직하게 말한 덕에 조금 전 같은 위기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호의인지 적의인지는 모르겠지만, 검은 남자는 내게 관심을 갖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쉽사리 믿기지 않는 말이군요.”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저는 일반적인 텔러와는 다른 모양인지라.”
“아. 그건 연회장의 반응을 봐서 알고 있습니다. 이제 막 사원으로 진급한 텔러 맞죠? 신기하군요. 그렇게 빠르게 모습을 갖춘 것은 저도 처음 들어 봅니다.”
아무래도 상대방은 텔러에 관해서도 기본 이상의 지식은 가지고 있는 게 확실해 보였다.
“……어찌 됐든 조금 전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말을 건 것에 관해서는 죄송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흐음. 그런가요.”
검은 남자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재미있는 것이 떠올랐다는 듯 박수를 짝 하고 쳤다.
“뭐,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데. 내기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내기요?”
갑자기 무슨 내기?
나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연회장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막상 고요한 복도에서 남자의 검은 책을 계속 보고 있자니 내 영혼까지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긴장된다.
“싫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거절한다면 제 소소한 유희를 망친 당신에게 그 대가를 물어야겠지만요.”
“……내기하죠.”
저렇게 무력으로 겁박을 주면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상대방은 성령이었다. 그 정체가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저 책만 보더라도 일반적인 성령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건 알겠다.
그보다 대체 정체가 뭐지? 보니까 본체가 아닌 분신. 즉 아바타가 분명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정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자. 그쪽도 승낙했으니, 긴말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내기는 간단합니다.”
검은 남자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키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그저 제가 누구인지 맞추기만 하시면 됩니다.”
“…….”
난데없이 자신을 맞추라고 하다니. 상당히 악취미였다.
“내기에는 그만한 대가가 있어야겠죠. 당신이 이 내기에서 승리한다면, 그에 걸맞은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만약, 제가 틀린다면?”
“틀리면…… 제 소소한 유희를 방해한 것에 관한 책임을 물어야겠죠.”
‘이런 젠장.’
사실상 상대는 내가 자신이 누구인지 맞추지 못할 것을 확신하고서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나는 이제 막 천체주식회사에 들어온 신입. 아직 여물지도 못한 내가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아맞힐 사전 지식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 내가 평범한 텔러라면 말이지.’
나는 미친 듯이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차분히 상황을 분석했다.
우선 상대방의 정체는 성령이다. 하지만 정확히 누구인지, 어떤 성령인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단서도 없었고.
‘아니. 단서는 있다.’
나는 연회장에서 읽었던 책들의 내용을 떠올렸다.
‘성령들의 초대식. 이번에 모인 성령들은 꽤나 이름 있는 성군(星群) 출신이 많다고 했었어.’
성군(星群)은 성령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조직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런 성군 중에서도 손꼽히는 거대한 조직을 대성군(大星群)이라 불렀다.
이번 성령 초청식에 공식적으로 초대를 받은 대성군은 총 5개.
‘에덴의 천상낙원(天上樂園), 아스가르드의 아이젠죌트너(eisensöldner), 헤르모폴리스의 태양정원(太陽庭園), 올림포스의 판테온(Pantheon), 그리고 판데모니엄(Pandemonium)까지.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왔지만, 일단 가장 큰 것들을 고르자면 이게 전부야.’
모든 이야기 중에서 가장 최상위를 차지하는 ‘신화’들의 주역들이 존재하는 곳.
그중에서 눈앞의 존재가 어디 출신인지 골라야 했다.
‘본체가 아닌 아바타의 책조차 펼치지 못할 정도로 격이 높다는 것은, 적어도 내가 떠올린 예시의 대성군에 소속된 성령이라는 말이 돼.’
예시를 좁히자 정체를 조금 더 추리하기 쉬워졌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긴장감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검은 남자를 분석하려면 할수록, 어둠 속에 가려졌던 그의 거대함을 조금씩 목도하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모르는 게 속 편했을지도 몰랐다.
‘가만히만 있어도 숨을 옥죄는 것 같은 이 불온한 기운. 불길하기 짝이 없는 빛깔을 띤 책. 바보가 아닌 이상 다섯 가지 예시 중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는 알겠네.’
판데모니움(Pandemonium).
상대는 만마전(万魔殿) 출신의 성령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곳에 소속된 성령 중에서 정확히 누구인지 알아맞히냐 인데.
기세만 놓고 본다면 최상위의 1세대 성령이 분명했다. 전생에서 1세대 성령의 기운을 느낀 적 있는데, 이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판데모니움에는 1세대 성령이 7명이나 있지. 결국, 좁힐 대로 좁혀도 선택지는 7개인가? 돌아 버리겠군.’
책의 정보를 더듬어 봐도 이곳 출신의 일곱 성령 중에서 누가 방문했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즉 당장 추리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가 한계.
수천수만이 넘는 성령 중에 예시를 7개까지 좁힌 것은 좋았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고작 7개가 아니라 아직 7개다.
나는 혹시라도 단서가 더 있는지 고민했다. 그런 내 시선이 문득 내게 쥐어진 검은 책으로 향했다.
‘잠깐만 이거…….’
이 검은 책. 표지가 새까매서 잘 몰랐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표지에 그려진 그림은 뱀이었다. 그것도 머리가 3개나 달린 뱀.
‘세 머리의 뱀이라고? 이거 설마…….’
나는 뇌리를 관통하는 한 존재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알았습니다. 당신의 정체.”
“흠? 그 말이 사실인가요?”
내 대답이 의외였던 걸까. 내기를 주장한 것 치고는 꽤나 반신반의한 반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내 목숨이 달린 내기였다.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그의 정체를 밝혔다.
“성령님은…… 판데모니움 소속의 사탄이 아니십니까?”
사탄.
사실 이것도 그의 본명은 아니었다. 이 사탄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적대자’를 뜻하는 거였으니까.
때로는 타락시키는 뱀.
때로는 태워 죽이는 붉은 용.
가장 찬란했던 빛에 가까웠던 자였으며, 결국에는 가장 어두운 곳까지 떨어진 자.
그 진짜 이름은…….
짝짝짝.
그 순간 귀를 울리는 박수 소리가 내 정신을 일깨웠다.
검은 남자, 아니 사탄의 아바타는 즐거움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손뼉을 쳤다.
“정답! 정답입니다! 설마하니, 정말로 제 정체에 관해서 간파해낼 줄이야. 이 내기는 당신의 승리입니다.”
나는 내기에서 승리했다는 기쁨보다도, 살았다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그는 아직도 즐거움의 여파가 가시지 않았는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놀랐습니다. 설마 정말로 맞추다니. 사실상 반 장난으로 한 행동이었거든요.”
“반 장난이요?”
“아무리 저라도 이런 곳에서 당신의 책임을 물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여기는 천체주식회사. 당신이 속한 텔러들의 본거지죠. 그리고 저는 이곳에 초대받은 손님으로 왔습니다. 오히려 이런 곳에 몰래 놀러 온 저를 당신들이 책임을 물어도 이상할 게 없죠.”
“…….”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세상 누가 그 사탄에게 책임을 묻는단 말인가.
아니. 그럴 존재가 있기는 했다. 그것도 가까이.
“제가 힘을 드러내는 순간, 그 귀찮은 빛의 파수꾼들이 절 쫓아오겠죠. 좋은 건수를 잡았다며 말이죠. 저는 적어도 그들이 즐거워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거든요.”
대성군 판데모니움의 오랜 숙적인 에덴. 그 에덴에서도 손꼽히는 자들만 모인 천상낙원.
그들도 이곳에 와 있는 이상 사탄이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내가 정말로 이 내기에서 패배했을 경우 어떤 방식으로든 내기에 합당한 벌을 내렸을 거라는 걸.
그걸 아니까, 이 회사의 힘을 믿는 것보다는 당장의 내기에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한 말은 확실히 지키는 성령이었으니까.’
종말에서, 나는 그것을 확실히 느꼈다.
어찌 됐든 내기는 나의 승리로 끝났다. 그게 천만다행이었다.
“흠. 장난으로 시작한 내기였지만 결국 졌군요. 아무리 그래도 약속은 약속. 승자에게는 그에 걸맞은 상품이 있어야겠죠.”
사탄의 아바타는 그렇게 말하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당신은 조만간 자신의 서재를 개설해 이야기를 보여 주겠죠? 그러니, 이렇게 하겠습니다. 제가 당신 서재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드리죠.”
그리고 그것은, 나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최고의 제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