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5화
계약이 끝나고 미션까지 성공하자 나는 그제야 주변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검후라고 불리기 전에는 좀 힘들게 살았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좀 심하기는 하네.’
처음에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내가 아는 검후는 모두의 선망을 받으며 카리스마 넘치던 컬렉터였다.
워낙 고고해서 어디 부잣집에서 귀하게 자랐을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났었는데.
‘이 허름하고 좁아터진 고시원에서, 늘어진 트레이닝복을 입고 컵라면을 후후 불면서 먹고 있었다니.’
이쯤 되면 어이없는 것을 넘어 허무할 지경이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 위에 떠다니는 책을 펼쳤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녀가 컬렉터로서 지닌 특성 부분만 확인했다.
이름: 강혜림
특성:[고려시대 소드마스터] [신검합일(身劍合一)](미각성) [창천검로(蒼天劍路)](미각성)
‘허…… 이런 미친.’
그녀가 지닌 특성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성만 보고 그녀가 확실히 검후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대단할 줄은 나도 몰랐다.
‘주인공급 특성이 무려 3개나 있어? 그중 하나는 심지어 척준경의 [이야기]잖아.’
컬렉터들은 제네시스 시스템에 편입되어 그 힘을 각성하는 순간 저마다 특성이 주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특성들은 당연하게도 급이 나뉘는데, 혼성계에서는 이것을 크게 4개로 나누었다.
주인공급, 주연급, 조연급, 그리고 엑스트라급.
성령들에게 있어서 하계의 인간들. 그러니까, 컬렉터들의 경우에는 텔러들이 보여 주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주연과 조연, 주인공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최고로 꼽히는 것은 주인공 특성이었다.
‘그런 주인공급 특성이 3개. 심지어 아직 2개는 채 각성하지 못한 상황이야. 그나마 가장 먼저 깨우친 특성이 이거라면.’
하물며 나머지 미각성 특성도 이름만 보면 검과 관련된 것이다. 만일, 이 3개가 전부 눈을 뜨게 된다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엄청난 결과를 만들게 될 것이었다.
이만한 특성을 지녔으니, 등장과 동시에 그렇게 빠르게 강해지고 대성할 수 있던 거였군.
‘그게 미래의 검후인가. 이거 참 놀랍네.’
이만한 특성을 지녔는데도 이렇게 사는 게 신기했다.
그냥, 어디 거대 클랜 같은 데 지원해서 나 척준경 이야기 가지고 있다고 한마디만 해도 너도나도 모셔갈 텐데.
‘그러고 보니, 정말로 이상하네. 왜 이만한 능력을 지녔는데,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
나는 여전히 어벙한 표정의 강혜림을 보며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혹시.’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혜림 씨.”
“네, 넵! 텔러님!”
그녀는 왕자님께 선택받은 공주라도 되는 양, 두 손을 모으고 내 말을 경청했다.
반짝거리는 그 부담스러운 시선에 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편하게 강유현이라 불러 주세요. 그리고 막 계약을 통해 알게 됐는데, 지금 자기 특성이 어떤 건지는 본인은 알고 계시죠?”
“제 특성이요?”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제 특성은 엄청 나쁜 거 아닌가요?”
“네?”
이 여자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내가 대답을 촉구하는 시선을 던지자, 그녀는 몸을 꾸물거리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이거 특성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고 기초 교육에서 배웠는데.”
“저와는 계약했으니까 괜찮습니다.”
내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강혜림이 쑥스럽게 말했다.
“특성 이름이 고려시대 소드마스터라니. 누가 봐도 장난스러운 이름이잖아요.”
“…….”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 여자 지금 진심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남들은 가지지 못해서 환장하는 주인공급 특성을 장난으로 치부하다니?
나도 모르게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는지, 그녀가 황급히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지, 진짜예요! 보세요. 고려라는 옛 나라의 단어와 판타지 세계의 소드마스터라는 단어가 함께라니. 누가 봐도 이상한 특성이 아닌가요? 장난 같잖아요. 장난.”
“아니, 그건…….”
나는 무슨 말을 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강혜림은 지금 자신의 특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정말로 모른다는 거였다.
“이거. 다른 사람한테 말한 적이 없다고 했죠?”
“네. 보통은 물어보는 사람이 없어서요. 컬렉터의 특성은 본인이 원치 않으면 그 정보를 은폐할 수 있는 법률이 있으니까.”
강혜림은 헤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고 싶어도 부끄럽잖아요. 고려시대 소드마스터라니. 대체, 누가 이런 걸 믿어요.”
“…….”
아…….
대충 상황은 이해했다.
저만한 특성을 지녔으면서 왜 이런 골방에 있는지. 왜 내가 아는 과거의 그녀와 다른지.
‘무지라는 건 참 무섭네.’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에게 눈부신 다이아몬드는 그저 예쁜 돌이었다. 누군가 알려 주기 전까지는, 그 가치에 관해서 명확히 알기 어렵다.
강혜림이 보여 주는 것은 그것과 같은 이치였다.
왜 그 검후가 이렇게 사는지에 관한 답이 이거였다니.
물론, 나로서는 이 상황이 반갑기만 했다.
자신의 특성을 몰랐다고? 몰라서 더 고마웠다. 덕분에 내가 채 갈 수 있었으니까.
내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품는 것이 그녀에게는 다르게 비쳤는지, 강혜림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 혹시, 실망하셨나요? 제 특성이 이상해서? 계, 계약은 무르지 말아 주세요! 저 진짜 이러다 고시원 돈도 못 내서 쫓겨날지도…….”
“아니요.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다른 생각할 게 있어서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좋으면 좋았지.”
“저, 정말요?”
“예. 정말로요.”
나는 걱정하는 그녀에게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아무래도 아직 자신의 능력에 관해서 자각이 부족한 탓인지, 자존감이 매우 바닥을 기고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지내다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될 게 분명했다.
‘아무튼, 미션은 이걸로 해결했어. 어차피 빠르고 늦고의 차이 없이 계약만 하면 된 거니까.’
그 대가로 사원으로 승진 했다는 메시지까지 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끝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이 내 뇌리에 강하게 맴돌았다.
그것을 증명하듯.
띠링!
시스템 창을 통해 또 다른 메시지가 전달됐다.
[미션-입사식]
당신은 훌륭하게 텔러로서 첫걸음을 뗐습니다. 정사원으로 승진한 당신은 앞으로 텔러로서 자신의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겁니다. 그런 당신을 위한 축하의 의미로 입사식이 곧 열리게 됩니다.
내용: 입사식에 참여하십시오. (해당 미션은 거절할 수 없습니다.)
성공 시: 행동 여부에 따라 보상이 달라집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시겠습니까?]
[Y/N]
[추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으면 5분 후 자동으로 이동합니다.]
‘왔군.’
미션 시작과 동시에 현장으로 투입을 하는 조직이라 하더라도, 한 번 정도는 본사로 부를 때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다. 아무래도 지금이 딱 그 타이밍인 모양이었다.
‘타이밍 한번 끝내주네.’
적어도 강혜림과의 상황은 당장 정리하고 싶었는데, 그럴 시간이 부족한 게 아쉬웠다.
“혜림 씨.”
“네. 강유현 텔러님.”
“저는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될 거 같습니다.”
“네?! 갑자기요? 얼마나 비우세요?”
“그건 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다만, 금방 돌아올 거 같지는 않네요. 그리고 지금 당장 출발해야 해서요.”
나는 잠시 생각한 후 말을 이었다.
“일단, 가벼운 조언 정도는 하고 가죠. 강혜림 씨. 장비는 뭘 씁니까?”
“저, 저는 방패를 쓰는데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방구석에 처박힌 방패 하나를 들어 올렸다. 방이 너무 어질러져 있었고, 정리가 안 돼 있어서 무슨 짐 더미인 줄 알았다. 설마 저게 지급된 장비였을 줄이야.
“무기 대신 받으신 겁니까?”
“예. 아무리 그래도 전투에 관련된 특성은 없는데, 이상하게 힘은 무식하게 세서요. 그래서 방패를 들고 전열에 서는 게 낫다고 생각했거든요.”
“컬렉터 막 각성했을 때, 기초 교육 및 훈련은 받았을 텐데요? 전투 관련 수업을 들을 때도 방패를 들진 않았을 거 아닙니까.”
“아. 그때는 창을 들었어요. 리치도 길어서 안정적이라고 교관님들이 추천하셔서.”
기가 막히게 검만큼은 다 피해 갔군.
하긴, 사람들이 검을 만병지왕이라 부르지만, 그건 잘못된 상식이었다. 검이 최고면 세상에 무기는 검밖에 없어야지, 도끼나 창, 활은 왜 있겠는가? 꼭 무알못들이나 그렇게 말하지.
어찌 됐든.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 알았으니, 어떤 조언을 해 줘야 하는지 감이 잡혔다.
“강혜림 씨. 잘 들으세요. 일단, 당장 이 방패를 기본으로 지급해 주는 검으로 교환하세요. 아직 교환 가능 기간 남아 있죠?”
“아, 네.”
“반드시 검으로 바꾸세요. 그리고 게이트 내부로 들어가지 않아도 좋으니까, 어디 넓은 데서라도 검을 쥐고 휘두르는 연습을 하세요.”
“네? 그거면 되나요?”
“그거면 됩니다. 아니, 굳이 제가 설명을 하지 않아도 본인이 알게 될 겁니다. 강혜림 씨가 지닌 그 [고려시대 소드마스터]라는 특성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더 설명을 이어 나가고 싶었지만, 시간이 얼마 없었다.
“꼭 시킨 대로 연습하세요.”
나는 마지막까지 그녀에게 강하게 당부하고 곧바로 [YES] 버튼을 눌렀다.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고, 나는 다른 곳에 서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우주의 풍경이 보였다. 휘황찬란한 별빛과 성운, 그리고 흐르는 은하수.
내가 도착한 곳은 우주 공간에 떠다니는 기차역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이미 먼저 도착해 있는 텔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새하얀 찹쌀떡들이 저렇게 뭉치니, 무슨 토끼 무리를 보는 것 같았다.
“다 모였겠지?”
그때 목소리가 들려오며 뼈로 된 사슴 머리 텔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좌중을 쓰윽 훑어보며 빠진 인원이 없는 것을 체크했다. 그러면서 은근히 내게 시선이 오래 머문 거 같았는데.
‘하긴. 당연한가?’
내 주위를 둘러보면 다른 녀석들은 아직 모습을 갖추지 못한 신생아에 가까웠다. 그중에서 오직 나만 멀쩡하게 사람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으니, 시선을 끌 수밖에.
나는 녀석의 머리 위를 살폈다. 당연하게도 저 텔러에게 책이 있었고, 그 책은 은빛을 띠고 있었다.
“흠. 다 모인 거 같군.”
빠아아앙!
뼈 사슴이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멀리서 기차 경적이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저 멀리서 우주 공간을 가로지르며 불빛 하나가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그것이 열차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우주 열차.’
이 혼성계의 여러 공간을 돌아다닐 수 있게 특수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열차였다.
생긴 것은 산업 혁명 직후 만들어진 열차를 닮았지만, 그것과 절대로 똑같이 취급받을 물건이 아니었다.
나를 포함한 텔러들은 열차가 정차하자 올라타 적당히 빈자리에 앉았다.
창가에 앉아 바깥 풍경을 살피는 사이 열차가 힘찬 경적을 울리며 다시 출발했다.
순식간에 역이 멀어지고, 광활한 우주의 풍경이 창밖을 물들였다.
‘천체주식회사라.’
그 광경을 보면서도 나는 이 열차가 향하는 종착점에만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혼성계 3대 텔러 조직 중 하나인 천체주식회사.
그리고 셋 중에서 가장 대중적이라고 알려진 조직이기도 해서, 나 또한 전생에서도 많이 주워들은 바는 있었다. 나름 알고 지내던 출납계 직원도 있었고.
그렇다 하더라도 본사에 직접 가본 적은 없었다.
그곳은 오직 출납계 직원만이 갈 수 있도록 허락된 금역(禁域)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과연 어떤 곳일지 궁금하네.’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 내가 해야 할 일은 끝나지 않았다.
와!
앞 좌석의 찹쌀떡들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창가에 앉아 있던 나는 그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도착했군.’
천체주식회사(SKY Corporation)
창밖의 우주 저편에서, 거대한 조직의 자태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