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
광군주 뮤레컨
암흑기사 둘을 처치하고 앞으로 나아가던 충렬. 그의 앞으로 일단의 병력들이 등장했다. 서로와의 거리는 500미터였다. 거리가 제법 멀었지만 먼저 움직이는 이는 없었다. 그저 자리에 멈춘 채로 서로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전투를 시작하기 전, 잠깐 동안 탐색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때, 시스템은 충렬에게 상대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떠도는 광군주 뮤레컨>
[설명: 움직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죽여서 스켈레톤으로 만드는 미친 군주다. 타협이라고는 발톱의 때만큼도 없다. 그에게 있는 것은 살육과 광기뿐이다.]
[병력: 암흑기사 (100), 해골 (500)]
녀석에 대한 설명만 본다면 이번에는 대화로 풀어나가기가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마침 뮤레컨의 주변에 도전자들의 묘비가 수두룩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아왔던 묘비와는 달랐다. 떠돌아다니는 녀석이었기 때문일까? 묘비들은 허공을 부유하며 광군주의 일정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아마 녀석은 모르고 있으리라. 자신의 주변에는 살해한 도전자의 숫자만큼 묘비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제법 멀리 있었지만 충렬은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암흑 투기를 양쪽 눈에 집중시키니 가까운 거리처럼 매우 잘 보였다.
-아니,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거는 너무했잖아.
-30명이서 흑기사 100마리를 어떻게 상대해.
-흑기사 100마리만 상대했냐? 난 거기에 해골 100마리 더했다.
-겨우 그 정도로 징징대다니. 해골 240마리 더 추가해라.
-ㅋㅋㅋ새끼들아 뒤지지 좀 마. 해골 숫자가 계속 늘어나잖아.
-그러는 너도 뒤짐.
-죽으면 해골로 다시 태어나나요?
-ㅇㅇ죽으면 육체 뺏겨서 광군주 수하가 됨.
묘비들의 숫자는 많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딱히 참고할만한 내용이 없었다. 대부분이 한탄하는 글뿐이었다. 그래도 자세히 살피니 그중에서 볼만한 글이 몇 개쯤은 존재했다. 바로 광군주에 대한 정보가 대충이나마 있었던 것이다.
-와, 광군주 암살하려고 했는데 맷집 장난 아니다.
-씨발. 필살 스킬 써도 잘 안 죽어.
-맷집이 중요한 게 아님. 광군주가 쓰는 스킬도 감당이 안 됨.
-이거 진짜 반박불가 리얼 진실이다. 도망가려고 거리를 벌렸더니…….
-벌렸더니?
-광범위 마법 스킬 오지게 사용함. 걍 도망 선택하면 사망.
-광군주 잡으면 인싸각인가요?
-응, 넌 그래도 아싸야.
그 외에도 몇몇 글에서는 광군주가 사용하는 스킬들에 대해서 자세히 쓰여 있었다. 그 모든 내용들을 읽어가며 충렬은 결론을 내렸다.
‘그냥 전쟁을 즐기는 미친 자식이군.’
놈이 마법 스킬을 사용할 때는, 적이 도망을 가거나 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였다. 그 외에는 오로지 물량으로 밀어붙여 싸우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굳이 놈과 힘들게 싸울 필요는 없지.’
충렬은 놈들의 병력을 단숨에 몰살시킬 생각이었다.
만약 녀석이 대화가 통하는 존재였다면 대화로 풀어나가 보려고 했다. 그러나 광군주에게 그럴 의사는 보이지 않았다.
마침 시스템이 알려왔다.
[광군주가 암흑기사들과 스켈레톤들을 돌진시키려 합니다.]
[곧 발생할 충돌에 대비하십시오.]
솔직히 말해서 녀석의 반응은 환영이었다. 굳이 싸우려고 하면 충렬도 좋았다. 좋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전투를 해서 이기면 충렬에게도 발생하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저 정도를 전멸시키면 카르마를 제법 많이 벌어가겠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로 인하여 발생할 수많은 시체와, 네크로 반지에 쌓일 스택을 상상하니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다.
‘아군이 될 생각이 없다면 철저하게 파괴시킨다.’
그리고 놈들의 파괴를 자신의 밑거름으로 사용할 것이었다.
놈이 이쪽을 향해 들이치려하자 충렬이 입을 열었다. 바로 명령을 내리기 위해서다. 누구에게 명령을 내릴지는 명확했다. 바로 아르타디아였다.
“브레스를 한 방 부탁드립니다.”
충렬의 말에 아르타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하지.”
동시에 그녀가 다크엘프에서 본 드래곤으로 모습을 변화시켰다.
***
거대한 본 드래곤으로 변한 아르타디아. 그녀가 공중에서 날갯짓을 하며 진군해 오는 광군주의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광군주는 괴상하게 생긴 탈것에 탑승하여 달려오고 있었고, 흑기사들은 전원이 죽음의 말을 몰아 접근해 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해골들은 열심히 뜀박질을 하며 그 뒤를 이어오고 있었다.
흑기사들과 함께 선두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광군주. 녀석은 아르타디아의 모습을 보더니 정신 나간 소리를 지껄였다.
[오오! 본 드래곤이라니! 반드시 사냥하여 가지고 말겠다! 너는 특별히 그 모습 그대로 부활시켜 주도록 하지!]
흥분이 뒤섞인 녀석의 말에 아르타디아가 감흥이 없다는 투로 말했다.
[시끄럽군.]
그리고 숨을 들이쉬었다. 뼈만 남은 드래곤이었지만 그녀가 들이쉰 숨은 갈비뼈 안쪽으로 잘 응축되어 갔다.
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그렇게 잠시 후. 모든 숨을 들이쉰 그녀가 응축된 공기를 한차례 회전시켰다. 그러자 공기가 시퍼렇게 변해가며 혹독한 추위를 머금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마나를 불어넣은 아르타디아. 그녀가 갈비뼈 안쪽에 모아놓았던 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용의 숨결이, 광군주와 그의 병력들을 향해 날아갔다. 그것은 서늘한 서리와 각종 우박이 뒤섞인 본 드래곤의 무지막지한 아이스 브레스였다.
콰라라라라라라라라!
[아르타디아가 적들을 향해 아이스 브레스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광군주의 반응이 이상했다. 녀석은 아이스 브레스가 전면에서 덮쳐옴에도 겁을 내지 않았다.
[크하하하! 고작 브레스 따위로는 나를 죽일 수 없을 것이다!]
드래곤의 브레스를 겁내지 않다니. 미쳐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물론 녀석이 미치기는 했어도 거짓으로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녀석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르타디아의 브레스로는 광군주를 처치할 수가 없었다.
[광군주가 토벽의 옹성을 소환합니다.]
[그의 앞으로 흙의 벽이 올라옵니다.]
시스템의 음성은 무척이나 간결했다. 그렇지만 땅에서부터 솟아 올라오는 토벽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엄청난 두께를 가진 흙의 벽이 하늘을 뚫을 듯이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아르타디아의 브레스는 거기에 막혔다. 토벽과 충돌한 그녀의 브레스는 큰 진동을 사방에 울렸다.
쿠웅!
하지만 흠집을 내는 것이 전부였다. 뚫을 수가 없었다. 그 광경에 충렬이 인상을 찌푸렸다.
‘마법은 도망가는 적에게 주로 쓴다면서.’
물론 강력한 적을 만났을 때도 쓴다고는 쓰여 있었다.
어쨌거나 한차례의 브레스를 막아낸 토벽은, 그녀의 브레스가 종료되자 함께 무너졌다. 그리고 무너지는 토벽의 먼지를 뚫고, 녀석과 암흑기사들이 탈것을 타고 열심히 달려오고 있었다.
‘어쩔 수 없나.’
이제부터 전면전을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녀석들의 돌진을 뒤에서 지켜보던 박해일이 검치호. 아니, 이제 백호가 된 녀석을 소환했다.
[박해일이 그의 탈것, 백호를 소환합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나섰다.
[녀석들의 숫자를 조금 줄여야겠다. 나에게 맡겨라.]
그 말을 남기고 박해일은 백호의 위에 올라탔다. 박해일이 올라타자 백호는 즉시 땅을 박찼다. 그가 향한 방향은 적들이 오는 방향이었다.
파밧!
달리는 백호 위에서 박해일은 흔들림 없이 자신의 활시위를 당겼다. 동시에 하늘을 향해 화살을 발사하며 말했다.
[레인 애로우.]
그러자 그의 화살이 순간 반짝 빛나며 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화살을 발사한 박해일은 즉시 이쪽을 향해 다시 되돌아왔다. 그가 이쪽으로 되돌아옴과 동시에, 구름은 광군주와 흑기사, 광군주의 해골들 위에서 화살의 비를 쏟았다.
엄청난 숫자의 화살들이 적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바람을 가르는 화살들의 비는 소름끼치도록 빨랐다.
쉬이이익!
쉬익!
쉬이이이이이익!
그 광경에 광군주가 당황했다. 브레스에도 당황하지 않던 그가 도대체 왜 당황한 것일까?
[자… 잠깐! 이런 귀찮은 짓을 왜 하는 것이냐!]
광군주는 박해일의 화살비를 막을 수 있는 스킬이 있었다. 그럼에도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당황하는 것은 간단했다. 스킬을 사용할지 말지 고민하던 것이었다.
[짜증나게 하는군. 이딴 화살을 막으려고 아껴두었던 마법이 아니건만!]
브레스 같은 큼지막한 공격이었다면 그는 기쁘게 막았을 터였다. 하지만 박해일의 화살비 공격은 조금 애매했던 것이다. 고작 화살들을 막자니 자신의 방어 스킬은 너무 뛰어났고, 막지 않자니 병력의 손실을 걱정해야 했다.
그러나 광군주의 고민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전쟁에 미쳐 있는 녀석은 결국 박해일의 화살을 막기로 했다.
[어쩔 수 없지. 매드맥스 실드!]
동시에 광군주와 그의 병력들 위로 돔 형태의 반투명한 붉은 보호막이 생겨났다.
[광군주가 광기의 힘을 최대로 사용하여 천장에 실드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광범위 보호 방어막은, 쏟아져 내리는 화살들의 비를 어렵지 않게 막아내었다. 화살들은 실드에 막혀 간단히 튕겨졌다.
퉁.
투둥.
투두두두둥.
퉁.퉁.퉁.퉁.퉁.퉁.
화살들의 비는 한참 동안 떨어져 내렸다. 그 시간은 대략 3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그리고 3분 뒤,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았다. 그때서야 광군주의 실드도 사라졌다. 녀석의 실드가 사라짐과 동시에 시스템이 알려왔다. 시스템이 알려오는 소식은 충렬에게 조금 기쁜 소식이었다.
[광군주가 보유한 힘이 많이 소모되었습니다.]
[그가 당분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가 보유한 마법의 효율이 일시적으로 대폭 하락합니다.]
그러나 시스템의 음성을 듣고 기뻐할 때는 아니었다. 광군주는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태였다. 그가 직접 움직이지는 못할지라도, 대신하여 움직이게 할 병사들은 있었다.
[기사들과 병사들이여! 가서 적들을 도륙하라!]
그렇게 녀석의 병사들과의 거리가 좁혀지기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
광군주는 더 이상 돌진해 오지 않았다. 그는 일정 거리까지 거리를 좁히자, 암흑기사들만들 먼저 돌진시켰다. 미친 듯이 달려오는 암흑기사들을 바라보며 데프론이 말했다.
[저와 저의 보병들을 나서게 해주십시오. 가서 적들을 섬멸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지금 당장에 들이치는 적들은 암흑기사 100마리였다. 데프론 또한 소환 스킬로 100마리의 보병을 소환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100 대 100이라는 대결이 펼쳐질 것이리라.
‘그러나 보병과 기병의 대결이다.’
그것도 그냥 기병이 아니었다. 전원 기사들로 이루어진 기병이었다.
같은 숫자라면 당연히 기병이 승리하게 될 것이리라. 보병들의 발걸음으로는 기병을 따라갈 수 없었고, 기병들은 말을 타고 달리며 보병들을 도륙할 것이었으니까. 기병은 그저 한 차례의 충돌로 보병들을 학살하고 유유히 자리를 떠나면 그만이었다. 그 행위를 반복한다면 데프론의 패배였다.
그러나 데프론은 자신이 있다는 말투로 말했다.
[결코 패배하지 않겠습니다. 군단병들과 함께 저 간악한 녀석들의 목을 단번에 베어버리고 바치겠습니다.]
솔직히 데프론을 보내서 충렬이 잃을 것은 없었다. 당한다고 해도 다시 소환하면 되었으니까. 문득 다른 네임드들을 함께 보낼까도 싶었다. 그렇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데프론이 그의 보병들과 나서서 암흑기사들을 물리치고자 합니다.]
[데프론이 온전히 그의 병력들로만 적들을 물리치는 데 성공한다면, 데프론의 숙련 등급이 한 단계 상승할 것입니다.]
[데프론을 출전시키겠습니까?]
무려 한 단계나 상승을 시켜주다니. 시스템의 물음에 충렬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여기서 한 단계의 숙련 등급이 상승한다면 데프론의 등급은 무려 8등급이나 되는 것이었다.
‘무조건 출전시켜야겠군.’
물론 승리를 장담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러니 저런 조건을 내걸어주는 것이리라.
‘그렇지만 여기서 겁을 낸다면 마스터의 명칭 따위는 개에게 던져주어야 할 터.’
충렬은 그런 겁쟁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데프론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침 시스템이 데프론에게 무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렇다면 이 기회를 가져가야 했다.
생각을 정한 충렬이 입을 열었다. 시스템에게 굳이 답할 필요는 없었다. 충렬은 데프론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시스템의 답을 대신했다.
“데프론. 가서 적들의 수급을 베어 와라.”
충렬이 결정을 내리자 시스템이 답했다.
[데프론의 전투에 당신을 포함한 다른 이들이 끼어들어선 안 됩니다.]
[혹시라도 간섭이 발생한다면 데프론의 숙련 등급 상승은 실패합니다.]
[주의하여 주십시오.]
당연히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 데프론의 성장을 막는 짓을 할 만큼 충렬은 멍청하지 않았다.
그렇게 언데드들끼리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100마리의 군단 보병들. 그리고 100마리의 암흑기사들의 전투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