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
충렬에게 접근한 고위 악령. 녀석은 충렬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충렬의 몸으로 들어갔다.
[고위 악령이 당신에게 빙의하기 위해 움직입니다.]
물론 고위 악령은 이제 끝이었다. 스스로 불구덩이에 들어간 불나방에 불과해졌기 때문이다.
[당신의 정신계 개척도가 100%입니다.]
[고위 악령이 당신의 정신계에 갇혀 버립니다.]
[당신은 그의 처우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고위 악령이 충렬의 정신계에 갇혀 버리자, 놈을 따라온 악령들이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고위 악령으로부터 공급되고 있던 ‘어둠의 광기’가 해제됩니다.]
[고위 악령의 명령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모든 악령들이 움직임을 멈춥니다.]
[악령들의 빙의가 해제됩니다.]
충렬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는 네임드들이 보였다. 그리고 방금까지 빙의되어 있던 악령들이 빙의된 몸을 빠져나와 멍하니 있었다.
‘일이 쉽게 풀리는군.’
설마 고위 악령을 붙잡으니 다른 악령들이 허수아비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어쨌거나 주변이 안정되어 가는 것을 살핀 충렬은 고위 악령과 대화부터 빠르게 끝내고 오기로 했다.
“시스템. 내 의식을 정신계로 진입시켜 줘.”
충렬의 말에 시스템이 승낙했다.
[알겠습니다.]
[당신의 의식이 내부로 이동됩니다.]
그렇게 충렬의 의식은 곧 이동되었다.
***
상상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는 공간인 정신계. 개척도가 100%에 달한 충렬의 정신계는 신이 오더라도 마음대로 날뛰지 못했다.
충렬은 자신의 정신계를 깨끗이 비웠다. 그저 평범한 나무 바닥에 간단한 테이블 하나와 의자 2개. 그것들만을 존재하게 했다.
충렬은 의자 하나에 앉았다. 테이블 건너편에는 움직이지 못하는 고위 악령이 강제로 앉혀 있었다. 녀석은 바들바들 떨며 압박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그렇지만 약간의 미동만 일으킬 수 있을 뿐.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저 작은 미동도 충렬이 더 압박하지 않았기에 행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것이지! 움직일 수가……!]
그런 악령의 모습에 충렬이 입을 열었다.
“이봐, 대화를 좀 하자고.”
충렬의 말에 악령이 악에 가득 찬 말을 내뱉었다. 녀석은 대화 자체가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거부했던 것이다.
[분명 항복하라는 말이겠지! 주민들을 노예로 팔려 가게 둘 수는 없다!]
노예로 팔려 가다니. 녀석은 무언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충렬은 녀석을 설득하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녀석은 자신이 악령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시끄럽고. 네 스스로가 언데드인 것은 알고 있나?”
소울 크리스탈에서 보았던 기억들을 종합하여 꺼낸 이야기였다. 그리고 설마 했는데 그 추측은 정확했다. 충렬의 말에 발악하려던 고위 악령의 움직임이 멈추어졌다.
[뭐라고? 내가 언데드라고?]
그러더니 녀석은 자신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물론 믿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이 간악한 주술사 놈! 나에게 환상을 걸었구나! 내가 언데드일리가 없다!]
뭐, 믿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부터 몸소 언데드라는 것을 체험하게 해주면 되었으니까.
“그래? 그럼 신성력에 닿아도 아무렇지도 않겠군.”
충렬은 이곳에서 신성력마저 사용할 수 있었다. 그의 정신계였으니 사용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어쨌거나 충렬의 말에 악령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더러운 주술을 사용하는 네 놈이 어떻게 신성력을 사용한다는 것이지? 아무리 환상이라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난 사용할 수 있어.”
[진실한 사제님들께서 사용하는 신성력을 더럽히지 마라! 그 신성한 힘에 닿는다는 것만으로도 거짓된 힘들은 모두 떨어져 나가 버리니까!]
아마 그가 있던 곳의 사제들은 제법 신망을 받는 듯했다. 그들의 기억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 믿음이 엄청나다는 것도 확인했다.
“그렇다면 신성력을 사용해 주지.”
이제부터 고위 악령의 눈을 뜨이게 할 때가 되었다.
***
고문은 취향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성녀 실비아가 예전에 사용하던 신성력의 힘을 떠올린 충렬. 그는 그 힘을 그대로 만들어 양손에 올렸다. 새하얀 순백의 신성력이 충렬의 양손에서 자태를 뽐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고위 악령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어, 어떻게 주술을 부리는 네가 감히 신성력을……!]
하지만 녀석의 놀람은 곧 비명으로 바뀌어야 했다. 양손에 신성력을 가득 머금은 충렬의 손이, 고위 악령을 가볍게 쓰다듬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신성력에 닿은 고위 악령의 몸이 불에 구운 고기처럼 타버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치이이익.
얼마나 고통이 심했는지, 녀석의 비명은 고막을 울릴 정도였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녀석이 고통을 느끼자 충렬은 곧장 양손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예전에 아르타디아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악령을 회복시켜 주었다.
“복원.”
분명 멀쩡히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켜 주었음에도, 고위 악령은 힘에 부친 듯했다.
[크으윽… 크으…….]
그런 녀석에게 충렬이 말했다.
“이제 대화할 마음이 생겼나?”
만약 녀석이 또다시 발악을 한다면 충렬은 신성찜질을 녀석에게 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신성력을 맛본 녀석은 의외로 곧장 정신을 차렸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고위 악령에게 닿은 신성력이 그의 이성을 억누르고 있던 원념을 일정 부분 소모시켰습니다.]
[고위 악령의 정신이 잠시나마 올바르게 돌아옵니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이성은 그저 원념에 먹힌 것일 뿐이었다. 신성력에 닿으니, 비로소 고위 악령은 제대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설마 했는데… 내가 정말 언데드가 되었던 것인가…….]
충렬의 물음에 대한 동문서답이었다. 그렇지만 악령의 반응을 보니 대화를 할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이제부터 녀석을 구슬려 수하로 부릴 때였다.
***
한번 대화의 장을 만들자, 녀석과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소울 크리스탈에서 보았던 내용대로, 고위 악령은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풀어내었다.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고위 악령은 이곳에서 죽은 기사였다.
[설마 이렇게 되어버렸을 줄이야.]
고위 악령은 드디어 자신의 처지를 완벽히 이해하였다. 그리고 사과를 했다. 막무가내로 공격을 시도한 것을 말이다.
[미안하게 되었군.]
동시에 충렬에게 부탁을 했다.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악령은 미련을 벗어던지고자 했다.
[아이들의 시체를 불태워 다오.]
“불태워 달라는 말인가?”
[그래. 아무래도 우리가 보관하고 있던 아이들의 시체가 원인이겠지. 우리들이 원념에 집어삼켜진 이유가 분명하다. 만약 아이들의 시체가 사라진다면 목적을 잃은 우리들은 더 이상 언데드로 남지 않고 사라질 것이다.]
악령으로 유지되는 원동력. 그것은 바로 아이들의 시체 때문이었다. 지켜야 한다는 강박감이 결국 그들을 언데드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충렬은 고개를 저었다.
‘녀석의 부탁대로 아이들의 시체를 사라지게 한다면, 악령들을 수하로 부릴 수 없다.’
녀석의 말투를 본다면 분명 그렇게 하는 순간 악령들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답은 단순했다.
“이봐, 살아 있는 아이들을 보고 싶지 않나?”
충렬의 말에 고위 악령이 피식 웃었다.
[농담이 지나치군. 질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죽은 이를 살릴 정도라면 성녀가 와도 힘들다. 죽은 아이들의 숫자가 많아.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해야 살릴 수 있는 정도지. 그냥 우리들을 승천시켜 다오.]
하지만 충렬은 죽은 이들을 살릴 수 있었다. 마렉의 부활 스킬이 있었으니까.
“아이들을 살려주겠어. 대신 나와 계약서 하나를 작성하지.”
물론 실제로 눈에 보이는 계약서는 아니었다. 그냥 가벼운 네크로맨서의 계약이었다.
***
물릴 수 없는 네크로맨서의 계약. 그것을 본 고위 악령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죽은 자들을 부리는 네크로맨서였을 줄이야. 나는 아이들이 언데드로 살아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언데드가 아닌 상태로 멀쩡히 살려주겠다고?]
녀석의 말에 충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체만 멀쩡히 있다면 말이지.”
[시체는 분명히 멀쩡히 있을 것이다.]
만약 시체가 썩어서 없어졌다면 시도해 볼 기회가 없었을 터였다. 그렇지만 충렬은 마렉의 부활 스킬을 믿었다. 광범위 부활 스킬이 되면서, 최근에 죽지 않아도 그의 스킬은 죽은 자를 부활시킬 수가 있었으니까.
“자, 그러면 계약을 하지.”
충렬이 내민 계약 조건은 단순했다.
[계약 대상: 고위 악령]
[계약 내용: 네크로맨서 이충렬은 고위 악령이 지정한 아이들을 언데드가 아닌, 멀쩡한 상태로 빠른 시일 내에 되살린다. 고위 악령과 그 무리들은 이후에 충렬의 충실한 수족이 된다. 현재 계약하는 고위 악령 외에도, 다른 고위 악령들이 승낙하면 계약의 내용은 다 함께 적용된다. 계약을 어긴 존재는 소멸된다.]
계약의 내용을 파악한 고위 악령은 충렬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들을 멀쩡히 살려 삶을 누릴 수 있게 해준다면, 나와 동료들은 기꺼이 그대의 병사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인 즉, 계약을 하겠다는 소리였다.
고위 악령의 의지를 들은 시스템이 충렬에게 물어보았다.
[계약을 이대로 진행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충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시스템이 알려왔다.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제 서로의 계약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하여 움직이십시오.]
시스템의 말이 끝남과 함께 고위 악령이 말했다.
[나의 동료들이 원념에 가득 차 있다고는 하나, 내가 가서 설득한다면 말이 통할 것이다. 내가 설득할 수 있게 보내다오.]
이미 계약을 한 마당이었다. 녀석이 도망갈 일은 없었다. 충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부탁하지. 시스템, 나와 고위 악령이 정신계 밖으로 나가겠다.”
충렬의 말에 시스템이 응답했다.
[알겠습니다.]
[고위 악령과 당신이 정신계에서 벗어납니다.]
동시에 충렬의 의식이 밖으로 이동되었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제 죽은 아이들만 되살린다면 악령들을 모조리 가질 수 있었다. 고위 악령이 동료들을 설득할 때까지만 기다리면 되었다.
***
풀어준 고위 악령이 동료들을 설득시키기까지 걸린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더 이상 악령들은 적대적이지 않았다. 대신 경계는 하고 있었다. 어느새 충렬은 무리들과 함께 요새의 안으로 진입했다. 요새의 안쪽까지 들어오자 고위 악령 하나가 충렬과 마렉을 안내했다.
[저 안이다.]
하지만 안내를 하는 악령은 직접 계약한 악령뿐. 나머지 고위 악령 둘은 뒤늦게 계약을 하기는 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어쨌거나 고위 악령이 창고 같은 건물을 가리켰다. 충렬과 마렉은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들어갔다.